2020년 8월호

대제국 페르시아 굴복시킨 그리스 ‘삼단노선’의 비밀

[해전의 승부수 군함②] 많은 노잡이, 무거운 배 가속도에 적함 전멸

  • 정재민 방위사업청 통합사업관리팀장,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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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2020-07-31 10: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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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라미스해전 승부 가른 아테네의 무거운 배

    • 당대 최고의 기술력이 구현된 ‘삼단노선’

    • 적함의 노 파괴하는 ‘디에크플루스’ 전술

    • 인류 최초의 배는 ‘가죽배’거나 ‘마상이(dugout)’

    현대 그리스 해군이 제작한 복제 삼단노선 올림피아스 호. [미국연방정부 홈페이지]

    현대 그리스 해군이 제작한 복제 삼단노선 올림피아스 호. [미국연방정부 홈페이지]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군에 치욕스럽게 패배한 다리우스왕은 자신의 아들에게 이를 설욕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다리우스왕을 이은 크세르크세스왕은 수려한 용모와 명석한 두뇌를 보유한 30대의 젊은 대왕이었다. ‘대왕’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그가 다스린 페르시아 영토는 오늘날 이란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파키스탄, 서쪽으로는 서아시아, 남쪽으로는 이집트, 북쪽으로는 마케도니아까지 뻗어 있어서 그 면적이 지금의 미국에 필적했다. 인구도 2000만 명 정도로 당시 세계 인구의 5분의 1에 달했다.

    바다를 처벌한 페르시아의 대왕

    크세르크세스 대왕의 스케일을 보여주는 몇 가지 일화가 있다. 하나는 그가 “페르시아의 국경을 오직 제우스의 것인 하늘에만 맞닿도록 하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가 페르시아 대군을 이끌고 오늘날 터키에 있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널 때 폭풍우가 몰아쳐 배들을 연결해 만든 부교가 훼손되자 폭풍우를 일으킨 바다에 채찍을 300대 가하고 족쇄를 채운(족쇄를 바닷물에 빠뜨렸다) 후 불에 달군 쇠로 바닷물을 지진 것이다. 

    크세르크세스는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그리스를 치기로 했고 이에 따라 사상 최대의 원정군이 꾸려졌다. 페르시아를 중심으로 아시리아, 파르티아, 아라비아, 인도, 리비아, 에티오피아, 페니키아, 이집트의 군이 모였다. 헤로도토스는 트라키아에서 열린 열병식 때 참가한 보병이 170만 명이었다고 기록한다(역사학자들은 20만 명으로 추산한다). 해군의 규모도 엄청났다. 함선이 1300여 척, 화물선이 3000여 척이었다. 

    페르시아군은 그리스반도 북쪽에서부터 육상과 해상 양방향으로 남쪽으로 밀고 내려왔다. ‘영화 300’에 나오듯 테르모필라이 협곡에서 스파르타 정예군을 비롯한 8000명의 그리스 연합군이 막아섰다가 전멸했다. 페르시아군의 압도적 군사력에 전의를 상실한 상당수의 그리스 국가는 페르시아군에 투항하고 합세했다. 그 결과 페르시아군의 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군의 최종 병력 수가 528만 명이라고 기록했다(사학자들은 36만 명으로 추산한다). 

    이에 반해 아테네의 인구 전체가 15만 명 정도였으니 누가 봐도 아테네는 승산이 없었다. 델포이의 무녀는 “전차를 몰고 달려오는 사나운 군신의 발아래 아테네가 짓밟히고 불탈 것”이라고 하면서도 “제우스께서는 ‘나무 성채’가 난공불락의 요새로 변하게 해 너희를 구원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페르시아군의 재침공을 대비해 3년 전부터 해군을 건설해 온 테미스토클레스는 ‘나무 성채’가 해군 함선을 의미한다고 봤다. 그는 아테네 주민들을 함선에 태우고 세 곳으로 나누어 피신시켰다. 그중 10여만 명이 피신한 곳이 아테네 남쪽 살라미스섬이었다. 아테네인들은 살라미스섬에서 페르시아군에 의해 불타는 아테네를 지켜보면서 치욕의 눈물을 흘렸다. 



    육상에서 대패한 그리스 연합군은 해상에서의 승리가 절실했다. 그런데 해전을 어디서 치를 것인지를 두고 의견이 첨예하게 나뉘었다. 스파르타와 코린토는 살라미스섬보다 더 서쪽으로 후퇴해 코린토 해협에서 해전을 치르자고 주장했다. 이것은 사실상 살라미스섬을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되면 페르시아군이 살라미스섬에 있는 아테네인을 도륙할 것이 뻔했다. 이에 테미스토클레스는 살라미스 해협에서 결전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수적으로 열세인 그리스 함대가 열린 바다에서 페르시아 함대와 맞붙어서는 승산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승부수

    지휘관들은 격렬한 논쟁과 분열에 빠져들었다. 헤로도토스가 이때의 상황을 “살라미스를 놓고 논쟁의 마상 창시합(기병 두 명이 창을 들고 대결하는 무술)을 벌였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이때 여우처럼 꾀가 많은 테미스토클레스는 두 가지 승부수를 띄웠다. 첫째는 한창 지휘관들이 격론을 벌이던 와중에 자신의 심복 하인인 시킨노스를 은밀히 페르시아 진영으로 보낸 것이다. 시킨노스는 페르시아 장수에게 그리스 지휘관들 사이에 이견이 생겼고 다수의 뜻에 따라 그리스 함대가 후방으로 퇴각하려고 준비하고 있으므로 재빨리 기습하면 전멸할 수 있다는 말을 흘렸다(사실 격론을 벌이던 시점까지는 시킨노스의 말에 거짓말은 없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페르시아 함대가 당장 공격을 시작하도록 만들고 그로 인해 그리스 함대가 살라미스 해협에 주둔한 현재 상태 그대로 해전을 벌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둘째는 테미스토클레스가 다른 그리스 지휘관들에게 그리스 함대가 코린토 해협으로 물러서서 살라미스를 포기한다면 지금 당장 그리스 연합 해군에서 아테네의 함선들만 빼내 아테네인들을 태우고 이탈리아 남부에 가서 정착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것이다. 그리스 함대 300여 척 중에서 아테네 함선이 200여 척이었기 때문에 아테네의 함선이 빠지면 그리스 함대 전체가 와해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스파르타나 코린토를 비롯한 다른 도시국가들은 테미스토클레스의 말을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침 시킨노스의 말을 믿은 페르시아 함대가 즉시 공격을 준비하는 기미가 보인다는 첩보가 회의장 안에 전해졌다. 

    바로 다음 날 결전의 날이 찾아왔다. 전투가 시작되자 좁은 해협에 밀려들어서 전후좌우로 촘촘하게 밀집해 있던 페르시아 함대는 서로 뒤엉키고 말았다. 마침 강풍이 불어 좁은 수로가 격랑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자 가벼운 페르시아 함선들이 요동치고 선상에 서 있던 페르시아 궁수들이 활을 쏘지 못하고 쓰러져 뒹굴었다. 이 상황에서 그리스 함선들은 ‘디에크플루스’ 전술을 구사했다. 두 배 사이를 빠른 속력으로 파고들면서 적함의 노를 파괴해 버리는 전술이었다. 이 경우 노가 부러질 뿐만 아니라 노잡이들도 잡고 있던 노 때문에 내장이 파열돼 죽게 된다.

    결전의 날

    살라미스 해전도. [충무공이순신 홈페이지]

    살라미스 해전도. [충무공이순신 홈페이지]

    7시간 동안 진행된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 함대는 겨우 46척을 잃은 반면, 페르시아 함대는 200여 척이 침몰하고 병사 4만 명이 수장당했다. 이날의 참상을 가장 잘 기록해 놓은 이는 그리스 시인 아이스코로스였다. 그것은 그리스인의 시각이 아니라 크세르크세스왕이 모친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이었다. 

    “바다 위에는 부서진 아군 선박의 잔해와 시체들이 둥둥 떠 있었고,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우리 수군들 때문에 아수라장이 됐다. 그리스 군인들은 마치 어부들이 참치를 잡을 때처럼 아군 수군들을 두들겨 팼다. 새벽에 일어난 이 혼란은 하루 종일 계속되다가 비명과 신음 속에 날이 저물어 겨우 잠잠해졌다. 나는 이날의 참상을 차마 그대로 옮길 수 없다.” 

    살라미스 해전 이후 아테네는 지중해와 에게해 전역의 패권을 장악하고 해양 강국으로 우뚝 섰다. 그러곤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화려한 문명을 꽃피우게 된다. 훗날 헤겔은 ‘역사 철학’에서 살라미스 해전을 이렇게 평가했다. “한편에는 한 명의 군주 아래 결집된 동방의 전제 체제가 있었고, 반대편에는 규모는 작지만 자유로운 개성이 넘치는 독립국가들이 전투 대형으로 맞섰다. 역사상 정신의 힘이 물질의 양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이 그토록 명백하게 드러난 적은 없었다.”

    그리스 해군이 페르시아 해군을 이긴 비결

    작은 그리스의 함대가 어떻게 두 배 이상 규모가 큰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한 것일까.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역시 테미스토클레스였다.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직관력과 통찰력, 지혜와 추진력을 보유한 특출한 인물이었다(스포츠에 비유하자면 미국 농구팀 시카코 불스의 마이클 조던이나 스페인 축구팀 바르셀로나의 리오넬 메시 같은 역할을 했다). 아테네 해군을 미리 조직한 것도 그였고, 최후의 결전을 벌일 장소로 살라미스 해협을 택한 것도 그였으며, 자신의 심복인 시킨노스를 은밀히 페르시아 진영으로 보내 페르시아 함대를 좁디좁은 살라미스 해협으로 유인한 것도 그였다. 

    여기서부터 당시 사용된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군함에 초점을 맞춰보자.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그리스 함선들은 무거웠던 반면 페르시아의 함선들은 가벼웠다. 그리스의 배는 급조된 탓에 좋은 목재를 사용하지 못했고 그래서 배에 물이 잘 스며들었다. 배를 충분히 말리지도 못했다. 반면 페르시아군은 배를 뭍으로 건져 올려 충분히 말렸다. 배가 가벼우면 빠르다. 그러나 가벼운 배는 단점도 있었다. 무거운 배와 충돌하면 밀리거나 부서진다. 또 강풍이 불면 쉽게 요동친다. 가벼운 배의 약점은 무거운 배의 강점이 된다. 살라미스 해전 때 강풍이 부는 바람에 가벼운 페르시아 함대가 힘을 쓰지 못하고 무너진 반면, 묵직한 그리스 함선은 페르시아 함선의 현측을 들이받는 방식의 공격을 적극 활용할 수 있었다. 

    그리스의 주력 함선은 삼단노선이었다. 삼단노선은 배의 한쪽 면에 붙은 노가 삼단으로 배열된 배를 말한다. 삼단노선의 장점을 이해하려면 그 이전 배의 발전사를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류 최초의 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가죽배라는 설과 ‘마상이(dugout)’라는 설이 있다. 가죽배는 나무로 만든 틀에다 가방처럼 가죽을 씌워 그 안에 사람이 타는 구조다. 마상이는 통나무의 속을 긁어내 그 안에 사람이 들어가는 구조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기원전 3400년경의 가죽배 진흙 모형, 네덜란드에서 기원전 6300년경의 마상이가 발견됐다.

    당대 최고의 기술력이 구현된 ‘삼단노선’

    기원전 3000~4000년경에는 노를 사용하는 배가 출현했다. 그러다 쇠로 된 작은 노걸이가 생겨났다. 노를 배에 걸게 됨으로써 노잡이들이 팔의 힘이 아니라 다리의 힘으로 노를 저을 수 있어 힘이 덜 들 뿐만 아니라 여러 명이 동시에 하나의 노를 저을 수 있게 됐다. 이후 노잡이들이 앉는 자리를 중첩적으로 배치해 이른바 이단노선, 삼단노선이 나오고 심지어 훗날에는 16단, 30단, 40단 노선까지 나오게 된다. 

    아테네의 삼단노선은 당대 최고의 기술력이 구현된 작품이었다. 그리스 함대가 디에크플루스 전술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도 속력이 빠른 삼단노선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의 삼단노선은 길이 39m, 폭 5.5m였다. 한 척당 200명이 탔는데 그중 170명이 노잡이였고 나머지 30명은 함장, 선수에서 망을 보는 망꾼, 선미에서 키를 조종하는 키잡이, 노를 젓는 데 박자를 넣어주는 노잡이장, 박자에 맞추어 파이프를 부는 파이퍼, 수병, 궁수 등이었다. 

    이들은 대개 하층민이었다. 마라톤 전투를 승리로 이끈 중장보병이 각종 무기와 장비를 살 수 있는 부유층, 중산층이었던 것과 대조된다.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로 인해 해군을 구성하던 하층민의 목소리가 커지고 정치적 대표성까지 요구하게 됐다. 그 중심에는 역시 테미스토클레스가 있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해군을 더욱 증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존의 아테네 보수층은 그가 하층민들을 등에 업고 독재적 참주가 될 것을 두려워했다. 결국 테미스토클레스는 기원전 471년 그리스에서 추방된다. 그가 망명한 곳은 놀랍게도 페르시아였다. 크세르크세스왕의 아들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그에게 명장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었다. 그러나 10년 뒤 아르타크세르크세스왕이 아테네와의 전쟁에 출전할 것을 명령하자 독배를 마시고 자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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