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호

[윤채근 SF] 차원이동자(The Mover) 12-3

안암동에서 피맛골까지

  • 윤채근 단국대 교수

    .

    입력2020-09-07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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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탁월한 이야기꾼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SF 소설 ‘차원 이동자(The Mover)’를 연재한다. 과거와 현재, 지구와 우주를 넘나드는 ‘차원 이동자’ 이야기로, 상상력의 새로운 지평을 선보이는 이 소설 지난 회는 신동아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편집자 주>

    1

    “여름방학 때 학생회 농활 참가할 거니?” 

    마주 앉은 지훈을 향해 속삭인 성혜선이 우울한 표정으로 어두운 카페 밖 풍경을 응시했다. 지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혜선이 다시 물었다. 

    “오늘처럼 거리 투쟁에 계속 참여할 거고?”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삼킨 지훈이 몸을 약간 구부리며 대답했다. 

    “가투도 계속할 생각이야.” 



    식어버린 블랙커피를 한 모금 마신 혜선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운동권이 되겠다는 거잖아? 우린 자주 만날 수 없을 테고.” 

    머리카락을 몇 차례 쓸어 넘긴 지훈이 혜선의 오뚝한 코와 투명하고 깊은 갈색 눈동자를 오래 바라봤다. 얼음만 남은 빈 주스 잔을 흔들어대던 그가 조용히 말했다. 

    “내가 너희 대학 자주 갈게.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서도 계속 만날 수 있고.” 

    길게 한숨을 내쉰 혜선이 코발트빛 감도는 검고 긴 머리를 뒤로 넘기며 말했다. 

    “우린 이제 막 시작했어. 네 진짜 감정이 알고 싶어.” 

    “졸업하자마자 얘기했잖아? 난 고등학교 내내 널 좋아해 왔어.” 

    “말뿐이잖아. 넌 이번 학기 동안…, 아무튼 어떤 것도 희생하지 않았어. 남는 시간에 날 만나 쉬려는 거잖아?” 

    두 손을 테이블에 얹은 지훈이 목청을 약간 높여 대답했다. 

    “우린 신입생이야. 적어도 1년은 대학 생활에 집중해야 돼!” 

    지훈의 각진 턱과 진한 눈썹 아래 자리 잡은 날카로운 눈매를 바라보던 혜선이 쓸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난 여대생이야. 너희 학교는 남녀공학이고.” 

    “날 의심하는 거니?” 

    “유치해. 그런 말이 아니야.” 

    “그런 뜻으로 들리는데?” 

    “유치하다니까. 네가 남자대학 다니고 내가 남녀공학 다닌다고 생각해 봐.” 

    “그게 뭐가? 그렇다 해도 난 상관없었을 거야. 다를 게 뭐가 있지?” 

    “…….” 

    “말해 봐. 무슨 차이가 있냐고?” 

    “외로움의 질량!” 

    “질량? 인간은 누구나 외로워. 실존은 근원적으로 불안한 거야. 혜선아. 너 똑똑한 애잖아? 유치한 건 너야.” 

    대답 대신 커피 잔을 오래 내려다보던 혜선이 힘겹게 속삭였다. 

    “네가 날 사랑한다면…,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말이야. 너도 뭔가 포기해야 해. 오늘 우리가 만난 여기도 너희 학교 앞이잖아? 우리 학교 쪽에서 만난 적 있어? 만나는 시간과 장소, 다 네 위주였어. 남녀공학과 여대가 무슨 차이냐고? 넌 캠퍼스에서 매번 선택이란 걸 하는 거잖아? 주변에 수많은 여학생을 빼고 나를 만나는 선택 말이야. 그럼 넌 주체가 되는 거고. 난 선택권이 없어. 선택 없이 널 기다리기만 해. 그건 다른 거야.” 

    “난 다른 여학생에 관심 없어.” 

    “그 얘기 아니야! 외로움의 불균형을 말하는 거야! 물론 여대로 진학한 내 책임도 있겠지. 하지만 넌 그런 나를 선택하는 거야. 선택엔 책임이 따라.” 

    “너도 남녀공학에 진학한 날 선택한 거 아니었어?” 

    “그렇지 않아. 난 선택 아직 안 했어.” 

    “안 했어? 그럼 왜…, 왜 만나는 거지? 지금껏 우린 뭐였던 거지?” 

    “넌 날 몰라. 아니, 넌 여자를 몰라.” 

    “난 내가 널 다 모른다는 걸 알아. 누가 타인을 다 알겠어? 서로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 그게 삶이야.” 

    “내 말이 그 말이야. 난 널 조금씩 알아가는 거야. 그러니까 아직 선택하지 않은 거고. 마찬가지로 너도 선택하지 않은 거야. 선택하지 않으면 책임도 없으니까. 네가 이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2

    안암동 로터리에서 종로에 이르도록 버스 안의 둘은 말이 없었다. 시내 중심가에서 낮부터 벌어진 격렬한 시위는 어느덧 진정 국면이었고, 대로변을 이동하는 전경만 간헐적으로 눈에 띄었다. 옆자리에 앉은 혜선을 바라보며 지훈이 물었다. 

    “종로 피맛골에서 한잔 할래?” 

    스산한 거리 풍경만 바라보던 혜선이 잠시 망설이다 나지막이 대답했다. 

    “벌써 아홉 시 넘었어. 아빠 통금이 열 시야.” 

    혜선의 손을 살며시 쥔 지훈이 덧붙였다. 

    “넌 성인이야. 밤에 내가 어떻게 사는지 안 궁금하니?”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혜선이 지훈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궁금해. 늘 궁금했어.” 

    “그럼 내리자. 야간 가투 참가한 선배와 동기들이 여기서 모이기로 했거든.”


    3

    고등어 굽는 냄새 진동하는 허름한 술집 안은 담배 연기로 자욱했다. 테이블 두 개를 붙이고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람들은 새로 등장한 혜선을 진기한 이국 식물처럼 감상했다. 지훈의 남자 선배 한 명이 말했다. 

    “지훈이 녀석, 학교로 회군하는 무리에 꼈던 게 이 학생…, 아, 이름이 뭐였더라? 아 혜선 씨 때문이었던 거야?” 

    지훈이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두통 때문에. 그리고 남은 유인물도 서클실로 옮겨야 했고.” 

    이번엔 여자 선배가 불숙 끼어들었다. 

    “혜선 씨? 나 85니까 말 놔도 되지? 실은 나도 혜선이야, 박혜선! 이대 과학교육과라고? 수학 잘했겠네? 난 수학은 꼴통! 암기 과목으로 대학 왔어. 근데 집이 어디지?” 

    혜선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청운동이요.” 

    입으로 담배를 가져가며 박혜선이 다시 물었다. 

    “오…, 부촌이네. 아버님이 뭐 관료신가? 여기도 관료 자식들 많은데.” 

    “외교관이세요.” 

    “그럼 부자 맞네! 너 보아하니 프락치는 아니고…, 세상에 대해 고민 같은 건 해봤니?” 

    박혜선이 내뿜는 담배 연기에 잔기침을 한 혜선이 모기만 한 소리로 대답했다. 

    “지훈이한테 ‘자본론’ 빌려 읽었어요.” 

    큰 소리로 ‘브라바’를 외친 박혜선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리쳤다. 

    “자, 주목! 얘가 자본론 읽었단다. 알다시피 그게 수학이거든! 뭐 궁금한 거 있음 다 물어보자.” 

    지훈의 남자 동기 한명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물었다. 

    “나도 87인데…, 너 대단하다야. 자본론 읽었다고? 자본 자들만 읽는다는? 너 그럼 지훈이랑?” 

    박혜선이 날린 주먹에 뒤로 고꾸라진 지훈의 동기는 테이블 구석으로 옮겨져 잠들어버렸다. 박혜선이 혜선 옆자리로 옮겨 앉으며 속삭였다. 

    “대신 사과할게. 신입들 갈수록 질이 떨어져. 그럼, 얘기해 봐. 자본론이 무슨 얘기 같아?” 

    한참 망설이던 혜선이 막걸리 한 모금을 삼키고 대답했다. 

    “공정성에 대한 책 같아요.” 

    “공정? 어떤 공정?” 

    “누구도 손해 보지 않는 인간관계요.” 

    “손해 보지 않는다라…, 그게 가능할까?” 

    “물론 가능하진 않겠지만. 가급적 줄일 순 있을 거예요.” 

    “뭘?” 

    “불평등이요.” 

    “불평등…, 불평등이라. 너 꽤 재밌다? 루소 책도 읽어봤어?” 

    “네. ‘인간불평등기원론’ 읽어봤어요.” 

    “음. 그럼 너 말이야…, 넌 지훈이랑 평등하니?” 

    갑자기 숨을 멈춘 혜선이 박혜선의 눈동자를 오래 바라봤다. 박혜선이 다시 천천히 물었다. 

    “너와 지훈이가 평등하냐고 물었어.” 

    혜선은 말없이 막걸리 잔을 비웠다. 그런 그녀를 쳐다보던 박혜선이 다시 막걸리를 따라주자 혜선이 다시 비웠다. 그렇게 다섯 잔을 연거푸 비운 뒤 혜선이 대답했다. 

    “우린 평등하지 않아요. 사랑도 노동이에요. 가치가 다르게 평가돼요.” 

    혜선을 지긋이 바라보던 박혜선이 미소 지으며 혼잣말로 속삭였다. 

    “미치겠다. 얘를 어떡하니?”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 그녀가 혜선의 귀에 대고 다시 속삭였다. 

    “너 오늘 집에 들어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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