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호

‘좌파 꼴통’ 확인한 1895년 독일 사민당 오류가 한국 민주당에 주는 교훈

[최병천, 겹눈으로 보다] 한국 진보정치 현대화 열쇠 찾기③

  • 최병천 ‘좋은 불평등’ 저자·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

    입력2023-06-08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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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 진보 反기업·反자본 정서의 기원

    • 세대효과가 빚은 ‘정념 체계’의 연장

    • 홍세화·진중권·유시민·박노자 공통점

    • 민노당 노선 1기 박근혜, 2기 문재인

    • 민주당 부동산정책이 패착인 이유

    2021년 1월 18일 서울의 한 사무소에서 공인중개사가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을 통해 부동산정책에 대해 언급하는 장면을 보고 있다. [뉴스1]

    2021년 1월 18일 서울의 한 사무소에서 공인중개사가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을 통해 부동산정책에 대해 언급하는 장면을 보고 있다. [뉴스1]

    20세기적 맥락에서 진보의 중심 이념은 사회주의였다. 20세기 사회주의는 크게 2가지 흐름이었다. 하나는 소련식 공산주의였다. 다른 하나는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사민주의)였다.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이 분기점이었다. 결정적으로는, 의회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가 달랐다.

    1917년 러시아혁명을 주도한 블라디미르 레닌은 혁명 직후 제헌의회 선거를 실시한다. 제헌의회는 러시아 진보세력의 오랜 합의였다. 선거 결과, 레닌이 속한 볼세비키당이 3등을 한다. 기껏 혁명을 통해 국가권력과 공권력을 장악했는데, 막상 선거를 했더니 3등을 하게 됐다. 선택은 두 가지였다. 선거 결과를 존중하고 국가권력을 반납하든지, 국가권력을 위해 선거 결과를 무효화하든지.

    레닌이 속한 볼셰비키들은 후자를 선택했다. 민주주의보다 국가권력 장악을 상위 가치로 선택했다. 민주주의보다 자본주의 타도를 상위 가치로 선택한 것이다. 이와 달리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은 러시아혁명에 비판적이었다. ‘민주주의’가 중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유로운 선거에 의해 작동되는 의회주의와 다당제가 중요하다고 봤다.

    레닌이 죽고 이오시프 스탈린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 소련식 공산주의는 유럽 사민주의 모델과 상이한 정치-경제 체제를 갖게 된다. 소련식 공산주의 체제는 ①상품-시장-화폐 폐지 ②사적 소유 부정 ③국유화 ④계획경제 ⑤정치적으로는 폭력혁명과 노동자계급의 일당 독재를 추구한다. 반면 유럽식 사민주의 체제는 ①상품-시장-화폐 긍정 ②사적 소유 존중 ③혼합경제 활용 ④전면적 계획경제 반대 ⑤정치적으로는 자유선거, 의회주의, 다당제를 중시한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1980년 광주 이후’ 한국 진보세력이 수용한 사회주의 이념의 성격이다. 1980년대 학생운동은 ‘소련식 공산주의’ 모델을 받아들였다. 학생운동의 양대 흐름이던 NL(민족해방파)과 PD(민중민주파) 모두 그랬다. NL은 북한식 모델을, PD는 소련식 모델을 지향했다.



    1980년대 韓 진보가 수용한 사회주의

    사회학의 ‘세대효과’ 개념에 의하면, 사람에게는 20대 시절에 형성된 세계관이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경향이 있다. 20대 때 나훈아, 남진, 김광석, 서태지의 노래를 좋아했다면 죽을 때까지 나훈아, 남진, 김광석, 서태지의 노래를 좋아하는 식이다.

    세계관에서도 세대효과가 작용한다. 20대 시절에 NL이나 PD였다면 이 역시 평생 지속되는 경향을 보인다. 앞서 언급했듯 한국 진보세력은 1980년대 소련식 공산주의 이론을 수용했다. ①상품-시장-화폐에 대한 부정적 태도 ②사적 소유 부정 ③국유화 ④계획경제 ⑤정치적으로는 폭력혁명과 노동자계급의 일당독재론을 공부했다.

    한국 진보세력은 반(反)기업 정서와 반(反)자본 정서를 갖고 있다. 그 역사적 기원은 1917년 러시아혁명이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한국 진보세력 중에서 ‘소련식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세대효과를 통해 1980년대의 ‘정념 체계’는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한국 진보세력은 이념적 혁신을 꾀하게 된다. 당시 인문사회 출판 시장의 베스트셀러는 홍세화, 진중권, 유시민, 박노자의 책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사회주의와 다른 ‘유럽식 복지국가 모델’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진보세력이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이론을 수용한 것은 진일보였다.

    2000년 1월 민주노동당이 창당됐다. 주요 구성원은 1980년대 학생운동의 주류를 이룬 NL과 PD 정파에 속했다. 그런데 내부에서 정책을 주도한 그룹은 사민주의와 유럽식 복지국가에 우호적이었다. 2002년 대선에서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는 “부유세,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전면에 내걸었다.

    이후 20년간 한국 정치는 유럽식 복지국가 방향으로 이동해왔다. 박근혜 정부는 ‘민주노동당 노선의 1기 정부’였다. 기초연금, 무상보육, 반값 등록금, 복지 증세를 추진했다. 문재인 정부는 ‘민주노동당 노선의 2기 정부’였다. 소득주도성장론, 최저임금 1만 원, 비정규직의 비정규직화, 주 52시간 근무제, 보유세 대폭 인상, 탈(脫)원전 정책 등을 추진했다.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 기간, 공공부문 사회복지비 지출 증가율은 경제성장률을 크게 상회했다. 더 길게 보면, 1997년 김대중 정부 이후부터 최근 문재인 정부까지 일관된 흐름이다.(*[표-1] 참조)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공부문 사회복지비 지출 비율을 보면,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기 전이던 1995년에는 3.0%였다. 문재인 정부 임기가 끝난 2022년에는 14.8%가 됐다. 27년간 공공부문 사회복지 지출은 경제성장률과 비교할 때 약 4.9배 규모로 늘었다.

    보통선거권 쟁취한 유럽 사회주의운동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역사적 기원이 다르다. 자유주의 혁명의 상징적 사건은 1688년 영국의 명예혁명이다. 이후 1776년 미국혁명, 1789년 프랑스혁명이 자유주의 혁명을 전파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자유주의 혁명의 핵심은 ‘왕권에 대한 견제’였다. 자유주의 혁명은 의회주의를 확립한다. 왕과 귀족의 타협 체제를 만들어낸다. 왕도, 귀족도 모두 지배계급에 속한다. 민주주의는 성격이 다르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인민의 자기 통치’다. 역사적으로 민주주의의 핵심은 보통선거권이었다. 민주주의는 속성상 피지배계급의 정치적 통제권 강화를 의미한다.

    보통선거권이 가장 먼저 확산된 곳은 영국이다. 영국의 보통선거권 도입 과정은 시차를 두고 유럽의 다른 나라에도 전파된다. 초기에는 자본가 계급과 상공인들에게 선거권이 부여된다. 이후에는 산업노동자 계급에게 부여된다. 이후에는 농촌 지역의 농민들 그리고 여성에게도 부여된다. 유럽사(史)에서 제1차 선거법 개정이 이뤄지는 1832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인 1920년대에 이르는 기간이 ‘선거권 확대’ 시기였다.(*[표-2] 참조)

    보통선거권 확대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정치세력은 사회주의자였다. 사회주의 이념 자체가 ‘피지배계급에 의한 자기 통치’를 꿈꿨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사회주의 이념이 가장 강한 곳은 독일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독일은 인구 규모가 크고 이념이 발달한 유럽의 중심 국가였다. 일례로 유럽 철학사를 대표하는 이마누엘 칸트, 게오르크 헤겔,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니체가 모두 독일 출신이다.

    독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1878년 사회주의자 탄압법을 제정한다. 비스마르크가 물러난 이후, 1890년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폐지된다. 사회주의 활동이 합법화된다. ‘민주화 국면’이 열린 것이다. 이후 선거에서 독일 사회민주당(사민당)은 공장 지대에서 몰표를 받는다. 그러나 농업 지대에서는 저조한 득표를 한다. 독일 사민당은 원내 2당의 지위를 갖게 된다.

    민주화 확대될수록 ‘딜레마’ 빠지다

    보통선거권이 확산될수록 사회주의 정치세력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이론과 실천, 장기 목표와 단기 목표가 서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자신의 저술에서는 장기 분석과 단기 분석이 섞여 있었다. 어떤 대목은 수백 년의 사회경제적 패턴을 분석한 것이다. 다른 어떤 대목은 당장의 경제 상황 분석이었다. 딜레마적 상황의 사례 3가지를 살펴보자.

    첫째, 정치활동과 국가 소멸론의 딜레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정치와 정당의 역할에 적극적이었다. 그런데 마르크스 이론에 따르면, 국가는 장기적으로 소멸한다. 논리적으로 보면, ‘소멸해야 하는’ 국가권력을 잡기 위해 노력하는 꼴이다. 국가권력을 잡으면 국가 소멸을 위해 일해야 하는가? 국가 역할을 강화하기 위해 일해야 하는가?

    둘째, 정치활동과 자본주의 자동붕괴론의 딜레마다. 마르크스 이론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붕괴한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가? 어차피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붕괴할 텐데, 정치권력을 잡은 이후에 딱히 더 실천할 것이 없게 된다. 이를 당시에는 ‘혁명적 대기주의’라고 표현했다. 혁명을 대기하면 된다는 논리다.

    셋째, 농민에 대한 정치적·사회경제적 태도의 딜레마다. 이 지점은 실천적으로도 매우 중요했다. 당시 인구에서 최대 비중을 차지하는 이들은 농민층이었다. 농민에게 표를 받기 위해서는 농업정책이 필요했다. 그런데 마르크스 이론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농민은 ‘소멸하는’ 존재였다. 농민 표를 받기 위해 농업보호 정책을 써야 하는가? 마르크스 이론에 따라 농민들에게 ‘당신들은 소멸하는 존재입니다’라고 알려야 하는가? 딜레마 상황이었다.

    실제로 독일 사민당에서는 1890년 선거 이후 농업정책을 둘러싼 논쟁이 일어났다. 현실주의자들은 농민 표를 받기 위해 농업정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칙주의자들은 농업정책은 마르크스주의 원칙을 폐기하는 ‘기회주의’라고 공격했다.

    1895년 브레슬라우 지역에서 독일 사민당의 당대회가 열렸다. 핵심 안건은 농업정책의 채택 여부였다. 독일 사민당은 농업정책 자체를 채택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농업정책의 채택은 ‘기회주의’라고 본 것이다. 당내 좌파들은 농업정책을 둘러싼 논쟁을 ‘기회주의 논쟁’이라고 불렀다. 당내 좌파들의 승리였다. 독일 사민당이 당대회를 통해 ‘좌파 꼴통 정당’임을 확인한 꼴이다.

    황당무계한 일의 반복

    많은 사람은 2022년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최대 패인으로 부동산 정책을 꼽는다. 문재인 정부는 종합부동산세, 재산세, 거래세, 양도소득세를 몽땅 올렸다. 거래세도 올리고 보유세도 올렸다. 청년들에게는 강력한 부동산 대출 규제를 했다. ‘임대차 3법’(계약갱신청구제·전월세상한제·전월세신고제)을 통해 일시적인 가격 상승이 일어났다. 민주당의 원칙주의자들은 종부세와 양도세 완화 정책을 표만 쫓는 ‘기회주의’라고 공격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1895년 독일 사민당의 브레슬라우 당대회 결정은 황당무계한 수준이다. 문재인 정부 기간 민주당이 펼친 부동산정책의 수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국 진보정치의 현대화가 필요한 이유다.

    *한국 진보정치 현대화 열쇠 찾기④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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