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호

윤영관 前장관 “한반도, 美中 대리전 戰場 될 수도”

  •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입력2020-07-25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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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 동맹국 규합해 中 단절… ‘디커플링’ 시작

    • ‘核 공포 균형’ 미·중…한반도에서 갈등 표출 가능성

    • 北 연락사무소 폭파는 대내·대남·대미용

    • 美는 종전선언, 北은 비핵화 정의 합의해야

    • 韓, ‘先비핵화-後보상’ 美 여론주도층 생각 바꿔야

    • 500년간 ‘대국 충돌’ 16차례, 평화적 해결 25%뿐

    • 한미동맹 기반 위에 中과 우호 ‘전략적 틀’ 유지

    • 美, 북·미연락사무소 개설 등 선제 조치 필요성

    • 주권 국가로서 결기 보인 싱가포르 외교 배워야

    • 존 볼턴 등 네오콘, 장관 시절 설득하는 데 애먹어

    [박해윤 기자]

    [박해윤 기자]

    6월 4일 대북전단 살포를 문제 삼아 연일 ‘말 폭탄’을 쏟아내던 북한이 ‘침묵 모드’를 이어가고 있다. 6월 16일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고 비무장지대 일대에 대남확성기를 재설치하는 등 긴장 수위를 높이던 북한은 돌연 대남 군사행동 계획을 보류했다. 한국 정부를 비난하던 북한 매체들도 하나같이 대남 비방을 중단했다. 북한의 최근 ‘액션’은 한국을 움직여 미국의 대북제재 해제를 이끌어내는 살계경후(殺鷄儆猴·닭을 죽여 원숭이에게 경고한다) 전략일까. 

    윤영관 서울대 명예교수(전 외교통상부 장관)는 “연락사무소 폭파는 경제제재로 인한 내부 결집 목적과 남북 경협에 나서라는 대남용, 대북제재를 해제하라는 대미용 등 다목적”이라며 “남북관계는 한미·한일·한중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만큼 연결 고리 부분을 면밀히 관찰하면서 입체적이고 총체적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교수는 노무현 정부 초대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낸 외교·안보 전문가로 노무현 정부의 ‘평화번영정책’ 틀을 만든 인물로 꼽힌다. 7월 9일 늦은 오후 서울 충정로 ‘신동아’ 인터뷰룸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 북한은 최근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고 대남확성기를 재설치하는 등 긴장 수위를 높이고는 침묵하고 있다. 

    “연락사무소 폭파는 대내용, 대남용, 대미용 등 다목적이었다고 본다. 북한은 국제사회의 대북 경제제재로 어려워진 데다가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국경을 봉쇄하면서 이중으로 제재가 가해진 격이 됐다. 그러니 정권에 충성하는 계층만 산다는 평양에서도 식량난이 생길 정도로 사정이 나빠졌다. 이런 상황에서 외부를 때려서 주민들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려는 내부 결집에 목적이 있었다고 본다. 두 번째는 대남용이다. 남쪽을 향해서는 남북한 경협을 본격 추진하라는 사인이다. 개성공단을 재개하고 금강산관광사업을 추진하라는 일종의 압박성 메시지를 전달한 건데, 사실 이 문제는 한국 처지에선 받기 어렵다. 북한이 이를 알면서도 압박하는 것은 한국을 ‘국제 제재 연대’로부터 떼어내려는 의도가 있다고 본다. 한미 간 ‘거리’가 생기도록 하는 의도다. 끝으로 미국에는 북한이 요구해온 제재 해제 쪽으로 입장을 바꾸라는 신호였다. 그러면 미국과 협상을 하겠다는 메시지도 담겨 있다. (연락사무소 폭파는) 미국만을 타깃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하노이 회담’ 실패가 주는 교훈

    지난해 2월 28일 베트남 하노이 메트로폴호텔 회담장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회담하고 있다. [AP=뉴시스]

    지난해 2월 28일 베트남 하노이 메트로폴호텔 회담장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회담하고 있다. [AP=뉴시스]

    - 그동안 북핵 문제 해결과 관련해 6자회담과 북·미 정상회담 등 여러 회담이 있었고, 북한 역시 20여 년간 비핵화를 입에 담았지만 제대로 실천하지 않았다. 격화되는 미·중 갈등 속에서 북한의 비핵화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 

    “대단히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다. 그 질문에 답하는 한 가지 방법은 ‘하노이 회담’(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제2차 북·미 정상회담)으로 돌아가 생각하자는 거다. 하노이 회담 당시 북한은 영변 비핵화를 할 테니 2016년 이후 단행된 핵심 대북제재 5개(2270호·2321호·2371호·2375호·2397호)의 해제를 요구했다. 실질적으로 북한에 대한 제재 대부분을 해제해 달라는 것이었다.” 



    - 유엔의 대북제재 2371호는 석탄·철광석 등 주요 광물 수출 금지, 2375호는 섬유·의류 수출 금지 등의 내용이 담긴 만큼 북한으로서는 제재 해제가 시급했지만 미국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렇다. 영변 비핵화는 분명 긍정적 제안이었다. 북핵문제 해결에서 상징적 의미가 있고, 미국의 전문가들도 중요 핵시설로 인정한다. 다만 그 대가로 북한이 ‘값’을 너무 높게 불렀다는 게 문제였다. 북한 전체의 비핵화가 목표인 미국이 영변만 받고 대부분의 제재를 해제해 주면 나머지 지역에서 비핵화를 압박할 ‘레버지리(지렛대)’가 사라지는 거래였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받기 힘든 제안이었다. 북한은 조금 더 현실적인 요구를 했어야 했다. 또한 북·미 간에 더욱 불신을 초래한 사안이 비핵화 정의와 일정이었다. 북한은 ‘싱가포르 회담’(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1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비핵화 원칙에는 합의했지만, 미국은 북한이 말하는 비핵화가 무엇인지(정의), 그리고 언제까지 어떤 방식으로 비핵화를 할지(비핵화 로드맵)가 합의되지 않으니 북한의 진정성을 의심했다. 북한이 미국에 해줘야 하는 것은 비핵화의 정의와 타임 테이블에 대한 합의다.” 

    그의 말처럼 북·미는 ‘비핵화’라는 새 집을 짓는 데는 동의했지만, 북한은 미국이 제재 해제에 성의를 보이라는 태도이고, 미국은 북한이 비핵화에 진정한 의지가 있는지 의심한다. 북한이 비핵화의 정의나 대강의 일정에도 합의하지 않는다면서 말이다.

    유용하고 실용적인 북핵 접근법


    - 그럼 미국은 무엇을 해야 하나. 

    “미국이 당시 협상장을 박차고 나갈 일은 아니었다. 북한의 요구에 무리가 있어도 ‘우리가 받아줄 수 있는 것은 이거다’라며 의미 있는 타협안을 제시했어야 했다. 일종의 ‘스몰딜(작은 합의)’을 만들었어야 했다. 미국의 북핵 접근법은 북한의 선(先)비핵화-후(後)보상이지만, 북한은 트럼프 정권이 바뀌어 약속을 안 지키면 어떻게 하느냐는 불신이 깔려 있다. 따라서 미국과 북한 모두 유용하고 실용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 

    -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은 일축했지만,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3차 북·미 정상회담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만약 3차 회담이 열리면 북·미가 요구하는 비핵화와 보상을 병행하는 타협안이 나올 수 있을까.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부장관 겸 대북정책특별대표는 이미 2019년 1월 스탠퍼드대 강연에서 비핵화와 제재 해제를 동시병행적으로 할 수 있다고 했다. 미국이 그런 입장에 충실하고 북한이 협력한다면 북·미 간 ‘스몰딜’이 가능할 것이고, 이부터 시작해서 점차 신뢰 관계를 구축하면서 최종적으로 비핵화와 제재 해제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은 종전선언, 북·미연락사무소 개설 같은 조치를 비핵화에 대한 보상 차원이 아니라 선제적으로 취해서 북·미 간 정치적 신뢰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 

    - 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종국에는 남북이 모두 핵을 보유하는 상황도 상정해 볼 수 있겠다. 

    “그때는 우리에게 어떤 이득이 있고, 어떤 비용을 치러야 할지 따져야 한다. 한국으로서는 치러야 할 비용이 크다. 국제사회의 압박, 경제제재도 감수해야 할지 모르고, 한미동맹이나 신뢰관계가 대단히 악화되는 측면도 있을 수 있다. 미국은 확장억제를 통해 북한이 공격적인 행동을 하면 우리가 대응해 처벌해 주겠다고 했는데 한국이 못 믿겠다는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 최근 존 볼턴 전 미국 백악관 국가안전보좌관의 회고록(The Room Where It Happened: A White House Memoir)에 따르면, 비건 대북 특별대표가 스탠퍼드대 강연에서 “북한이 요구하는 ‘행동 대 행동(action for action)’을 따를 준비가 돼 있다는 점을 강하게 시사한 발언은 나의 우려를 증폭하게 했다”고 썼다. 미국 내에서도 북핵 접근법이 엇갈리는 거 같다. 

    “나도 읽어봤지만 회고록의 진실성을 어디까지 믿느냐는 문제인 거 같다. 몇 가지 분명한 것은 볼턴 전 보좌관이 2018년 이후 북·미협상 실패에 상당히 기여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회고록 도처에서 북·미협상을 바라보는 부정적 시각이 드러났고,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미협상에 관한 부정적 어드바이스(조언)를 한 사실도 상세하게 나와 있다. 개인적으로 2003년 외교통상부 장관을 할 때 볼턴 전 보좌관을 두 번 만난 적이 있다.”

    “내가 만나 본 존 볼턴은…”


    - 어떤 사람인가. 

    “네오콘(neocons·공화당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신보수주의자)에 속하는 사람인데, 네오콘의 특징은 모든 것을 선악(善惡) 관점에서 본다. 이들은 악을 퇴치하기 위해 미국의 우월한 군사력을 활용해야 한다고 믿는다. 과거 2차 북핵위기(2002년 10월 3일 방북한 제임스 켈리 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HEU) 개발 의혹을 제기하자 북한이 이를 시인하면서 촉발된 북핵위기)를 해결할 때 이 사람들(네오콘)을 설득하는 게 굉장히 어려웠다. 나는 그들에게 ‘상대 국가가 선하지 않다고 대화 자체를 끊어버리는 건 문제가 있다’고 했다.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불렀지만 군축협상에 적극 임했던 레이건 전 대통령 사례도 들려줬다. 네오콘 시대가 지났어도 이들 중 일부는 미국 행정부에 남아 영향력을 행사하는 걸로 안다.” 

    - 2차 북핵위기 이후 6자회담이 열렸고, 2005년 9·19합의(북한의 모든 핵무기 파기, 핵확산금지조약 복귀)도 나왔다. 

    “당시 우리의 핵심 외교 목표는 미국의 네오콘들, 즉 당시 딕 체니 부통령, 럼스펠드 국방장관 등의 생각을 바꿔 진정한 대북 협상에 나서도록 하는 것이었다. 6자회담 틀이 만들어졌지만 네오콘들은 협상보다는 북한을 제외한 다른 4개국(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이 미국과 연합해 북한을 압박하면 비핵화로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3년이라는 시간을 허송세월했다.” 

    - 11월 미국 대선 전 북·미 대화 재개나 낮은 단계의 합의 가능성에 대해선 어떻게 보나.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우리가 외교 총력전을 펼쳐야 한다. 미국 정책결정자나 여론 주도그룹의 인식을 바꿔 회담장에 나오도록 하는 거다. 로버트 갈루치 전 미 국무부 북핵특사 등 북한과 협상해 본 미국 관리들은 북한에 선(先)비핵화 또는 선(先)핵물질 신고 후, 후(後)제재 해제를 요구하는 것은 ‘논 스타터(non-starter·성공 가능성이 전혀 없는 제안)’라고 한다. 문제는 갈루치 전 특사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미국 정·관계에서는 소수라는 점이다. 선비핵화-후보상을 말하는 미국 조야(朝野)의 다수 생각을 좀 더 유연하게 바꾸는 데 총력전을 펼쳐야 한다.” 

    -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하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7월 8일 북한이 연락사무소를 폭파한 데 대해 정부 대처가 미온적이었고, 대북정책을 진영논리에 갇혀 이념편향적으로 짜고 있다고 비판했다. 

    “문 정부는 입체적으로 외교에 접근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남북관계는 그거 하나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한미·한일·한중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한중관계는 한미·한일·남북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서로 연결돼 있다. 그 연결 고리 부분을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 한일관계에서 액션을 취할 때 우리가 얻는 이득이 한미, 한중관계에서 초래되는 손해보다 크면 액션은 의미가 있다. 반대로 이득이 손해보다 적다면 해서는 안 된다. 비용 대비 이익을 면밀하게 계산해야 한다. 연결 고리를 고려하면서 입체적이고 총체적으로 보는 시도가 필요하다.” 

    - 한국 외교에서 미·중 갈등은 변수에서 상수가 된 느낌이다. 중국 통신업체 화웨이 제재에 이어 홍콩 국가보안법 발효 등으로 갈등이 격화하고 있다. ‘입체적 외교 관점’에서 격화되는 미·중 갈등은 어떻게 봐야 하나. 

    “미·중 갈등에는 대선 전술 차원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중국 때리기’ 측면이 있다. 특히 코로나19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유권자의 불만을 다른 데로 돌리려는 의도도 있어 보인다. 다만 나는 미·중 갈등을 좀 더 근본적 차원에서 본다.”

    중국의 세력권 강화, 미국의 초당적 협력


    - 근본적 차원? 

    “역사적으로 미·중 간 파워의 구조적 변화가 왔다. 1979년 중국은 개혁개방을 하면서 연평균 10%가량의 고속성장을 계속했다. 경제력의 성장은 군사·안보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욕구를 발동시킨다. 그동안 중국은 덩샤오핑의 도광양회(韜光養晦) 전략을 후배 정치인들이 따랐지만, 2008년 미국발(發) 경제위기 발생 이후 중국은 공세외교를 펼치면서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해상 실크로드 경제벨트) 등 자신의 세력권 강화에 나섰다. 미국은 1979년 미·중 수교를 할 때만 해도 중국을 포용하면 제도와 가치와 관행이 서구화로 수렴될 거라고 봤다. 그러나 중국은 정반대로 권위주의로 향했고 불공정한 무역 관행 등으로 미국에 부당한 피해를 끼친다는 인식이 커졌다. 중국의 불공정 경제 시스템, 예를 들어 국가가 깊숙이 개입해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지적재산권을 존중하지 않고, 중국에 투자한 서방 기업들에 기술이전을 강요하는 것 등이 불공정하다고 본 거다. 그렇다 보니 대중 압박 정책에서 공화·민주당은 초당적으로 협력한다.” 

    앞서 미국 상원은 7월 2일 중국의 홍콩 국가보안법 시행에 관여한 중국 관리 및 이들과 거래하는 은행·기업에 대한 제재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법안이 초당적 지지 속에 하원에서 가결된 지 하루 만에 일사천리로 매듭을 지은 것이다. 로이터 통신은 “공화당과 민주당이 초당적으로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 드문 사례”라고 평가했다. 

    - 미·중 갈등 핵심을 무역보다는 이념과 정치체제, 즉 냉전(冷戰)의 특성에서 찾는 이들도 있다. 

    “미·중 갈등이 결국 신냉전으로 심화되느냐는 이념적 요소가 얼마나 담겨있느냐에 달려있다. 중국은 힘이 커질수록, 중국식 권위주의적 정치체제·경제발전 모델이 서방 민주주의 모델보다 우월하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체제·이념경쟁 요소는 과거 냉전과 유사한 측면이 있어 ‘냉전 1.5버전’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미·중 간 상호 관계가 두터워 과거 냉전 상황과는 다르다는 시각도 있다. 현재는 미국이 동맹국을 규합해 중국과의 경제관계를 차단하려는 ‘디커플링(결별)’이 시작됐다고 본다.” 

    - 완전 결별할까. 

    “디커플링이 얼마나 심도 있게 진행될지는 미지수다. 우선 전략적으로 중요한 산업 분야. 하이테크 기술 분야에서 디커플링이 많이 일어나고 다른 분야는 서서히 진행될 거 같다.” 

    - 군사적 충돌로 이어질 가능성에 대해선 어떻게 보나. 

    “역사는 상승 대국과 기존 대국 간 긴장관계가 형성됐을 때 정치 지도자들이 제대로 해결하면 평화가, 잘못 다루면 전쟁이 온다고 말한다. 20세기 초 상승 국가인 독일과 기존 패권국가인 영국의 긴장관계에서 지도자들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거 아닌가.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그레이엄 앨리슨 하버드대 교수는 과거 500년간 상승 대국과 기존 대국이 대결한 16개 사례를 연구한 결과 평화적으로 해결한 사례는 네 차례뿐이었다고 주장했다. 평화적 해결은 25%에 불과했다.” 

    - 대만, 홍콩, 북한 등이 미·중 충돌의 도화선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럴 수 있다. 다만 충돌을 피하기 위해선 몇 가지 필수조건, 예를 들어 국제정치의 판을 읽으며 타협을 이끌어낼 수 있는 정치 리더십이나 영국이 20세기 들어 미국에 패권을 이전할 때처럼 두 나라 간 제도나 가치, 관행에서 수렴현상이 일어난다면 전쟁은 피할 수 있다. 미·중 정치 지도자나 현재 상황을 보면 이 두 가지는 해당하지 않는 듯하다. 다만 두 나라는 핵 보유국이다. 냉전시대 ‘공포의 균형’이 평화를 유도한 것처럼 미·중은 직접 충돌 가능성보다는 제3의 지역에서 대리전 양상으로 갈등이 표출될 수 있다. 그 가능성이 있는 지역 중 하나가 한반도다.”

    투키디데스의 함정, 빌헬름 2세의 오판

    6월 16일(현지시간) 인도 아마다바드에서 중국 반대 시위에 참여한 시위대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사진을 불태우고 있다. 인도군은 중국과의 국경지대인 히말라야 고지대에서 중국군과의 충돌로 고위 장교를 포함해 20명이 숨졌다고 밝혔다.  [AP=뉴시스]

    6월 16일(현지시간) 인도 아마다바드에서 중국 반대 시위에 참여한 시위대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사진을 불태우고 있다. 인도군은 중국과의 국경지대인 히말라야 고지대에서 중국군과의 충돌로 고위 장교를 포함해 20명이 숨졌다고 밝혔다. [AP=뉴시스]

    윤 교수가 말한 앨리슨 하버드대 교수는 부상하는 신흥 세력이 기존 지배 세력을 위협한 16번의 역사적 사례를 분석했다. 그 결과 16번 중 12번은 전쟁이 일어났다. 앨리슨 교수는 신흥 세력과 지배 세력 간 충돌 위험이 큰 상황을 ‘투키디데스의 함정(Thucydides’s trap)’이라고 정의했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도시국가 아테네가 부상하면서 스파르타와 격돌한 펠로폰네소스전쟁을 통해 “전쟁이 필연적이었던 것은 아테네의 부상과 그에 따라 스파르타에 스며든 두려움 때문”으로 분석했다. 

    - 구한말과 달리 한국의 국력은 세계 10위권으로 성장했지만 여전히 미·중 사이에서 원치 않는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양국 가운데에서 ‘전략적 모호성’ 등으로 대처할 수 있겠지만 오래가지는 못할 거 같은데. 

    “어렵지만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국제정치도 타이밍이다. 정치는 살아있는 생물인 만큼 아무리 좋은 전략이라고 해도 엉뚱한 시점에 시행하면 재앙을 초래한다. 또한 한국만 미·중 사이에 끼어 있는 게 아니라 세계 수십 개 나라가 같은 처지다. 유럽이나 아시아, 중남미 국가들도 같은 고민을 한다. 다른 나라가 어떻게 처신하는지 봐가면서 현명한 전략과 전술로 응해야 한다. 타이밍을 잘못 맞춰서 만약 섣불리 한 국가를 선택한다면 선택받지 못한 국가로부터 겪는 피해는 각오해야 한다. 미·중 양국이 적당한 타협을 할 수도 있는데, 어느 한쪽만 택했다면 우리 입지는 아주 곤란해질 수도 있다. 현재 우리는 한미동맹 기반 위에서 중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한다는 전략적 틀이 있다. 아직은 그 틀을 폐기할 타이밍이 아니다. 물론 그 틀을 폐기하고 하나를 선택할 순간이 올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다.” 

    - 중국은 최근 인도군과의 분쟁, 남중국해에 대한 주변국과의 충돌 등을 보면 무척 거칠어 보인다. 

    “중국인의 심리 속에는 150년간 중국이 서구 제국주의의 침탈을 받으면서 수모를 겪었으니 그걸 만회해야겠다는 생각이 잠재된 듯하다. 시진핑 주석도 이런 심리를 활용하면서 국내 지지 기반을 강화하는 측면이 있는 거 같다. 사실 국력이 상승하는 나라는 조심해야 하고, 주변국을 안심시키는 전략이 필요하다. 1871년 독일의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을 이뤘지만 20여 년간 ‘로키(low-key)’ 전략을 폈다. 독일의 주변 국가들이 독일을 두려워해서 서로 뭉치지 않게 신중한 외교를 펼친 거다. 그러나 1890년 등극한 젊은 왕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를 해고하고 국력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겠다며 공세적 외교로 나섰다가 결국 주변 국가들(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포위를 당하지 않았나.” 

    -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싱가포르는 한국보다 국력도 약한 도시국가이지만 외교는 잘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1994년 3월 싱가포르 법원은 마이클 페이라는 당시 10대 미국 학생에게 태형 6대, 징역 4월, 벌금 2200달러를 선고했다. 길가에 주차한 승용차 여러 대에 스프레이 페인트를 뿌리고 도로표지판을 훔친 혐의였다. 클린턴 당시 대통령까지 나서 선처를 호소하고 태형 집행 시 싱가포르가 받을 불이익을 암시하는 친서를 보냈다. 그러나 싱가포르는 태형 6대에서 4대로 줄여 법을 집행했다. 작은 나라가 외국의 압력으로 주권 사항을 포기하면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남중국해 문제로 중국이 지지를 요청했을 때도 싱가포르는 거절했다.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에서 공해상 자유항행의 원칙이 중요하다는 입장이었다. 끝까지 주권을 지키려는 강한 의지가 있었다. 

    우리도 주권이나 민주주의, 인권이라는 가치 문제와 정경분리 원칙 등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역대 정부의 외교를 보면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당장 큰 문제가 생길까 사안을 덮거나 양보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게 계속 반복돼 스스로 외교적 입지를 약화시킨 측면도 있다. 때로는 결기를 보여줘야 한다. 국가 힘의 문제가 아니라 원칙과 의지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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