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호

반도체 주고 받아낸 건 바이든 ‘생큐’ 달랑 세 번

美에 통화스와프 요구하라

  • 강태수 KAIST 경영대학 초빙교수

    입력2022-04-06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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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환관리 문제에 시달려온 한국

    • 반도체 공급난 빠진 미국

    • 통화스와프는 무한 신뢰 징표

    2021년 5월 21일 ‘한미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에서 한국은 반도체 공급망 안정화를 위해 미국과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뉴시스]

    2021년 5월 21일 ‘한미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에서 한국은 반도체 공급망 안정화를 위해 미국과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뉴시스]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은 지금의 한국에 가장 적합한 말이 아닐까 싶다. 통화 문제만 보자면 현재 한국은 경제적 위기 상황이다. 지난해 12월 한미 간 통화스와프 연장이 무산됐다. 하필 이런 시점에 국제금융시장 불확실성이 최고조로 치닫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전 세계 실물·금융시장이 패닉 상태다. 통화스와프라는 보호막이 사라진 상황에서 경제적 충격을 한국 시장이 맨몸으로 받게 된 셈이다.

    계약 만료는 재계약의 기회다. 특히 지금의 한국은 미국에 꼭 필요한 계약 조건을 쥐고 있다. 바로 반도체다. 미국이 경제안보 차원에서 한국과 ‘반도체 동맹’을 원하고 있다. 이를 이용해 한국은 미국과 상시 통화스와프이라는 국제금융동맹을 노려볼 수 있다.

    미국과 통화스와프는 필수

    2002년 1월~2012년 8월 원달러 환율을 나타낸 그래프. [한국은행]

    2002년 1월~2012년 8월 원달러 환율을 나타낸 그래프. [한국은행]

    통화스와프는 이종 통화(화폐)를 미리 정한 환율로 맞바꾸는 것이다. 외환위기가 터지면 원화를 담보로 맡기고 달러화를 쓸 수 있다. 사전에 정해 놓은 한도 내에서 급할 때 빌려 쓸 수도 있다. 외환위기 대비용 ‘마이너스 통장’이다. 그만큼 외환관리의 안정성이 커진다.

    이 같은 장치가 필요한 이유는 비(非)기축통화는 국제금융시장이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국제 금융시장에서는 ‘태생적 원죄(原罪·original sin)’라고 한다. 미국, 중국, 유로존을 뺀 대부분의 국가는 죄다 원죄의 덫에 걸려 있다. 

    우리나라도 원죄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2008년 9월의 사례만 봐도 이는 명약관화하다. 당시 세계 금융위기로 달러가 급속도로 유출됐다. 일각에서는 2차 외환위기의 근처까지 온 것 아니냐는 진단조차 나왔다. 2007년 초부터 2008년 8월까지 유입된 외화(842억 달러) 가운데 83%(696억 달러)가 불과 넉 달(2008.9~12) 만에 빠져나갔다.



    이 결과 외환보유액이 2008년 9월 2600억 달러에서 12월 말 2000억 달러로 줄었다. 4개월 새 600억 달러 감소했다. 시장은 ‘속도’에 경악했다. 2000억 달러의 외환보유액이 마지노선이라며 전전긍긍했다. 이렇다 보니 ‘2000억 달러’를 두고도 외환 당국이 한 푼도 쓰지 못했다. 불과 수개월 전까지 외환보유액(2600억 달러)이 너무 많다는 촌평이 나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황당한 상황이었다.

    위기 상황을 단숨에 진정시킨 계기는 한미 통화스와프였다. 2008년 10월 30일 한국은행은 미국 연준과 통화스와프 계약을 발표했다. 통화스와프 체결 뉴스에 금융시장 불안이 곧바로 해소됐다. 이날 하루 환율이 전날 대비 177원(12.4%) 하락했다.

    2020년 1~6월 원달러 환율을 나타낸 그래프. [한국은행]

    2020년 1~6월 원달러 환율을 나타낸 그래프. [한국은행]

    2020년 3월도 주목해야 할 변곡점이다. 코로나19 확산으로 2020년 3월초 국제주가가 폭락(Eurostoxx50 –26.1%, S&P –26.0%, HSCEI –18.4%)했다. 이 여파로 원/달러 환율이 폭등했다. 그때도 환율을 하루 새 안정시킨 건 통화스와프 체결(6개월 기한 600억 달러) 뉴스였다. 원/달러 환율이 3월 11일 1191원에서 19일 1285원까지 치솟다가 20일 1245원으로 떨어졌다.

    ‘느긋’한 한국은행

    한시적 통화스와프 상설 통화스와프으로 바뀌면 외환관리의 안정성은 더 커진다. 미국 주도의 국제금융동맹인 통화스와프는 크게 1군 동맹인 ‘상설스와프라인’(△캐나다 △영국 △유로존 △일본 △스위스) 5개국과 2군 동맹인 ‘한시적 스와프라인’(△한국 △호주 △브라질 △덴마크 △멕시코 △뉴질랜드 △노르웨이 △싱가포르 △스웨덴) 9개국으로 나뉜다.

    2020년 3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유행 직후 유럽·일본·한국·스위스·영국의 스와프레이트 추이를 나타낸 그래프. 가장 아래가 한국. [국제결제은행]

    2020년 3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유행 직후 유럽·일본·한국·스위스·영국의 스와프레이트 추이를 나타낸 그래프. 가장 아래가 한국. [국제결제은행]

    2020년 3월 국제금융시장 위기는 1군 동맹의 진가를 보여주었다. 유럽·일본·스위스·영국의 스와프레이트 하락 폭이 2군 동맹인 한국(-300bp)에 비해 현저히 작고(30% 수준) 회복도 빨랐다. 이들 국가는 모두 미국과 1군 상설통화동맹이다. ‘스와프레이트’는 달러화 조달 비용이다. 통화교환 시장에서 달러화가 부족하면 스와프레이트의 값이 작아진다.

    금융 당국은 현재 상설 통화스와프의 필요성을 인지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2월 16일 통화스와프 중단 직후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느긋한’ 입장을 보였다. 이 총재는 같은 날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위기가 또 발생한다면, 그런 상황에서 스와프가 필요하다면 그때 다시 협의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혔다. 마치 한국은행이 다시 통화스와프를 요구하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이하 연준)가 기다렸다는 듯 응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릇된 낙관론이다. 두 가지 측면에서 봐야 한다.

    첫째는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처한 여건이다. 2008년 글로벌 위기 때와 상황이 사뭇 다르다. 2008년 한미 간 통화스와프는 오롯이 연준 결정에 달려 있었다. 연준과 협의만 한다면 언제든 통화스와프를 할 수 있었던 것. 미국 의회는 이후 외국과의 통화스와프를 연준이 단독 체결하는 일에 문제를 제기했다. 대표적 예가 2010년 12월 1일 통과된 도드-프랭크 금융개혁법안. 이 법안에 따라 연준은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체결한 외국 중앙은행과의 통화스와프 내역을 의무적으로 공시하게 됐다. 미국 하원은 향후 외국 중앙은행과 통화스와프 계약 체결 시 연준 이사 5인 이상 찬성과 재무장관 서면 동의를 요구했다. 이후 연준은 외국 중앙은행과 통화스와프를 맺을 때 행정부와 의회를 상당히 의식하게 됐다.

    둘째, 통화스와프는 미국의 국익을 지키는 수단이다. 타인에게 공연히 베푸는 선심이나 적선이 아니다.

    2020년 3월 19일 한미 통화스와프도 마찬가지다. 당시 국제경제 상황을 살펴보자.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국제금융시장에 달러화 부족 현상이 일어났다. 연준은 달러화 부족 사태가 미칠 부작용을 염려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 세계 무역신용장(은행이 수입업자를 대신해 물품 대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의 보증 문서) 80% 이상이 달러화로 결제된다. 미국 상품을 수입하는 국가가 달러화 부족으로 미국 기업에 대금을 지급하지 못하면 낭패다.

    지금이 통화스와프 요구 적기

    또한 미국 투자자가 한국 주식을 판 자금을 본국으로 가져가고 싶은데 한국 달러 사정이 어려우면 돈을 빼 갈 길이 막막해진다. 상대국에 달러가 부족하면 결국 미국 기업과 가계가 피해를 보는 것이다. 당시 연준이 발 빠르게 움직인 ‘진짜’ 이유는 미국 기업과 가계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통화스와프 체결 대상은 한국 포함 9개 중앙은행(멕시코·호주·덴마크·싱가포르·뉴질랜드·스웨덴·노르웨이·브라질)이었다.

    이때처럼 한미통화 스와프가 미국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통화스와프 재협상은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

    다행히도 지금이 한미 통화스와프 상설화를 요구할 적기다. 미국이 한국에 ‘반도체 동맹 맺기’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동맹의 대가로 통화스와프 동맹을 받아 와야 한다. 한미 간 통화스와프 상설화는 동맹외교의 또 다른 린치핀(linchpin·핵심 부품)이다. 미국 국익에도 중요하다. 이 점을 조 바이든 행정부에 강조할 필요가 있다. 통화스와프 동맹은 한미 간 안보동맹 측면에 의의가 크기 때문이다.

    반도체 없으면 미국 車산업 올스톱

    일단 미국의 반도체 문제부터 살펴보자. “미국 산업정책에서 반도체가 최우선 순위”라는 지나 레이몬도 미국 상무장관의 발언에서도 알 수 있듯 반도체 공급 문제는 미국의 경제뿐만 아니라 국가안보에도 매우 중요하다. 미국 산업정책의 핵심은 공급망(특히 반도체) 안정화를 통한 국가안보(National Security) 강화로 요약된다. 미국 외교·안보 전략이 글로벌 공급망 동맹 강화에 치중하는 이유다.

    미국 반도체 생산량은 최근 30년간 줄곧 감소했다. 1990년까지만 해도 미국은 반도체 생산 1등 국가였다. 전 세계 반도체의 37%가 미국산이었다. 2020년에는 이 비율이 12%로 크게 줄었다. 한국, 대만, 중국 등 신흥 반도체 제조국이 빠르게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 결과 산업 경쟁력뿐만 아니라 국가 안보 역량까지 위협받는 처지에 놓였다.

    미국 상무부가 지난해 11월 반도체 제조 및 수요 기업 150곳을 설문한 결과 미국 자동차와 의료기기 업계의 반도체 재고량이 평균 5일치 미만인 것으로 밝혀졌다. 코로나19 재확산 등으로 전 세계 반도체 공장이 멈추면 미국의 자동차와 의료기기 공장도 멈춰야 한다.

    따라서 반도체 수급 문제 해결이 미국의 최우선 과제로 부각됐다. 한국은 미국 반도체 동맹의 핵심 축이 될 것으로 보인다. 2021년 5월 21일 ‘한미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에서 한국은 반도체 공급망 안정화를 위해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미국은 그 이상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해 9월 미국 상무부는 한국 반도체 기업에 공급망 정보 제출을 ‘요청’했다. 워싱턴은 ‘자발적 제출’로 표현했지만 미제출 시 국방물자생산법(DPA)을 근거로 제출을 강제하게 된다. 세컨더리 보이콧(미국 애국법 제133조)의 논리와 똑같다. 미국 정부는 테러국가를 규제할 때 외국 금융기관들이 자발적으로 협조하는 모양새를 갖추지만 실상은 강제 조치다.

    그간 미국은 부품·원자재를 조달할 때 특정 국가(특히 중국) 의존도가 높았다. 최근 미·중 갈등이 본격화하며 원자재 조달이 어려워졌다. 2021년 2월 24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긴급 대응 방안 마련을 지시한 배경이다. 핵심 4개 품목(반도체·배터리·희토류·의약품)의 조달 소스, 제조 역량, 공급망 위험 요인 및 취약성 등에 대해 ‘100일 동안’ 조사 후 구체적 실천 방안을 마련하라는 명령이다.

    미국 안보 위해 반도체 동맹 절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해 12월 16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외환관리 방안을 설명하고 있다. [뉴스1]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해 12월 16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외환관리 방안을 설명하고 있다. [뉴스1]

    지시 4개월 만인 2021년 6월 백악관은 100일간의 조사를 마치고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의 서두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격언으로 시작한다. “말굽에 편자를 고정하는 못이 없으면 말을 잃게 되고, 말을 잃으면 전쟁에서 지고, 결국 나라를 잃게 된다.” 못 하나가 부족하면 나라도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감을 보여준다. 보고서 결론부에는 미국을 짓누르는 절박한 심경이 투영돼 있다. “공급망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문제가 발생하면 곧바로 미국 국가 안보, 일자리 등에 영향을 미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미국은 반도체 수급 문제 해결의 단초를 외부, 즉 동맹 강화에서 찾고 있다. 미국·영국·호주 3자간 안보동맹 오커스(AUKUS), 미국·캐나다·뉴질랜드·호주·영국 등 영어권 기밀 정보 공유 동맹 파이브아이즈(Five eyes), 미국 주도 4개국 안보협의체 쿼드(Quad)는 모두 대(對)중국 포위망 강화 포석이다. 특히 2021년 3월 3일 백악관은 ‘국가안보전략 잠정 지침(National Security Guidance)’을 발표했다. 이 지침에서 미국은 “동맹국 없이 홀로 국가 안보를 튼튼히 다질 수 없다”고 토로한다. 반도체칩 등 기술 공급망 문제도 동맹국과 연대해 접근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한미 통화스와프는 그 자체가 양국 간 무한 신뢰의 징표다. 외환위기가 발생하면 공동 대응한다는 상호 연대 의지를 국제사회에 확인시키는 것이다. 국제금융 시장에서 한국의 국가 신인도를 높이는 핵심 징표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은 중국과 통화스와프(최대 4000억 위안)를 맺고 있다. 정작 혈맹인 미국과는 통화스와프 라인이 없다. 한국이 위안화 통화스와프를 사용하면 한미동맹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국이 외환위기를 맞고 이를 극복하고자 위안화 통화스와프를 사용하면 그만큼 중국에 더 의지하는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한중 통화스와프는 빛 좋은 개살구

    한중 통화스와프가 외환위기와 관련해 모든 경우 즉효약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한국과 중국의 외환위기가 동시에 일어나면 한중 통화스와프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한중 관계가 한미 관계보다 더 가까워진다고 가정해 보자. 미국의 압박으로 한국과 중국 양국에 외환위기가 일어난다면 이를 해결할 방안이 없다.

    언제까지 환율 불안에 떨어야 하나. 한국은 중국을 포함한 8개 국가와 통화스와프 협정을 체결한 상태다. △캐나다(상설 계약) △스위스(100억 프랑) △인도네시아(115조 루피아) △호주(120억 호주달러) △아랍에미리트연합(UAE·200억 디르함) △말레이시아(150억 링깃) △터키(175억 리라)다. 이들 8개 국가의 화폐 중 달러화 맞교환이 가능한 경우는 없다. 결국 급할 때 필요한 건 미국의 달러다. 

    한미 통화스와프 체결을 한국은행에만 맡길 일은 아니다. 연준도 미국 의회 눈치를 보는 입장이다. 정부가 경제·외교·안보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특수한 조건을 걸어 원하는 바를 얻는 게 외교 아닌가. 한미 상호방위조약도 미국이 바라던 게 아니었다.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초강수로 밀어붙인 결과다. 반도체 동맹을 맺으면서도 통화스와프를 요구하지 못하고 멈칫거리니 답답할 노릇이다. 미국에 생명줄인 반도체를 주고 우리가 받아낸 건 고작 바이든 대통령의 ‘생큐’ 세 번이다. 뭔가 허전하다. 잘못 설계된 거래다. 동맹의 징표로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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