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일상의 평안함을 망가뜨리는 고통이다. 본능은 달콤함을 좇게 마련이다.
쓰디쓴 전쟁의 대척점엔 ‘평화’라는 달콤함이 있다. 평화가 주는 아늑함은 감각을 마비시키고 현실을 외면하게 한다. 언제나 존재할 것처럼, 반드시 그래야만 되는 것처럼 평화는 맹신된다. 직면(直面)을 배제한 외면은 재앙을 낳는다. 지금도 그렇고 과거에도 그랬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불변의 진리다.
영화 ‘뮌헨: 전쟁의 문턱에서’ 포스터. [넷플릭스]
올해 초부터 푸틴의 침공 의도를 감지한 서방국가들은 여러 차례 협상 테이블로 러시아를 초대했다. 2월 13일 러시아 국방장관과 회담을 마친 영국의 벤 윌러스 국방장관은 “뮌헨협정 분위기가 감돈다” 밝히며 일촉즉발의 불안감을 드러냈다. 돌고 도는 것이 역사라고 했던가. 뮌헨협정은 반복되는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줄곧 회자된다. 뮌헨협정을 다룬 영화 ‘뮌헨: 전쟁의 문턱에서’는 지난해 제작돼 올해 1월 21일 넷플릭스에 공개됐다. 마치 우크라이나 사태를 예상했던 것처럼.
영국 외교 최악 ‘흑역사’ 뮌헨협정
영화 ‘뮌헨: 전쟁의 문턱에서’ 주인공 파울과 휴는 영국과 독일의 조약 체결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넷플릭스]
감독 크리스티안 슈뵈초브(44)는 독특한 색감의 영상으로 소설이 가진 농밀한 깊이에 맛을 더했다. 슈뵈초브 감독은 영상의 명도를 조절하고 채도를 낮춰 색감을 차가운 톤으로 유지했다. 이로써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극대화했다. 앞으로 벌어질 일련의 비극을 암시하려는 듯.
배역 캐스팅에서도 같은 의도를 느낄 수 있다. 히틀러는 부리부리한 눈에 인중에만 돋는 투스 브러시, 일명 ‘칫솔 수염’을 길렀다. 처음에는 당시 유행하던, 양쪽 끝이 위로 올라간 카이저수염을 고수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 참전 무렵 안전과 위생상의 문제로 투스 브러시 형태로 바꿨다. 어찌 보면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지만 개성을 부각하는 신의 한 수가 됐다. 특징이 뚜렷해 히틀러로 변장하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았고, 손쉽게 대역을 구할 수 있었다. 영화에서 히틀러 역을 맡은 영국 배우 로버트 바서스트(65)는 나이, 키, 눈빛 등 모든 것이 히틀러와 다르다. 눈매와 인상은 오히려 히틀러의 오른팔 요제프 괴벨스를 연상케 한다는 지적도 있다. 감독은 두 주인공 휴와 파울에 관객을 집중시키려는 의도로 히틀러뿐 아니라 베니토 무솔리니, 네빌 체임벌린 모두 실제 인물과 닮은 배우를 캐스팅하지 않았다.
84년 전 역사를 다룬 작품임에도 조국이냐 인류냐, 전쟁이냐 평화냐의 기로에서 관객의 손에는 식은땀이 흐른다. 히틀러의 교묘한 술책에 그대로 속아 넘어가 ‘영국 외교의 대표적 흑역사’로 남은 뮌헨협정서의 이면을 다시금 곱씹어볼 수 있다.
1932년 영국 옥스퍼드대의 독일 유학생 파울 하르트만(야너스 니뵈너)은 영국인 휴 레가트(조지 매카이)와 둘도 없는 친구로서 늘 붙어 다닌다. 당시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패전 후유증으로 패배주의에 빠져 있다. 혈기왕성한 파울은 암울한 조국의 한 줄기 빛으로 떠오른 히틀러(로버트 바서스트)에 매료당한다. 휴는 자극적 언사로 타국을 도발하는 히틀러가 탐탁지 않아 이따금 나치즘을 맹렬하게 비판한다. 휴의 비판 수위가 점점 높아지자 파울은 폭발해 버린다. 냉랭해진 두 친구는 감정의 골을 메우지 못하고 졸업과 동시에 연락을 끊어버린다. 그렇게 6년이라는 시간이 흐른다. 휴는 영국 외교부 소속으로 총리 체임벌린(제레미 아이언스)의 신뢰를 한 몸에 받으며 안정된 삶을 살아간다. 파울 역시 촉망받는 엘리트 독일 외교관으로 거듭난다.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惡을 키우다
당시 국제사회는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혼탁했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맺어진 베르사유 강화조약으로 독일은 해외 식민지는 물론이고 알자스-로렌 지역을 제외한 국토의 10%를 포기해야 했다. 평화를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부과된 천문학적 배상금은 독일 경제를 파탄에 이르게 했다. 극도의 인플레이션에 독일 국민은 수레에 돈을 싣고 장을 보러 다녀야 했다. 경제가 무너지니 사회는 마비되고 정치는 불안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베르사유조약의 각종 제재가 독일의 발목을 잡았다. 독일 국민의 좌절과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 틈을 노리고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 일명 ‘나치당’이 혜성처럼 등장한다. 뮌헨의 작은 술집에서 소소히 정치적 논쟁을 벌이던 작은 정당은 ‘아돌프 히틀러’라는 선동가를 만나 9년 만에 1928년 총선에서 2.6%의 지지율을 얻는다. 세력을 야금야금 늘려간 나치당은 세계경제 대공황으로 불안한 국민 심리를 교묘히 파고든다. 1932년 총선에서 원내 제1당이 된다. 영화 초반 학생 시절 파울이 히틀러에게 무한 신뢰를 보내던 때도 이 시기다. 이 여세를 몰아 1933년 1월 히틀러는 총리에 취임하며 정권을 쟁취한다.1936년 히틀러는 베르사유조약(1919)과 로카르노조약(1925)에서 비무장평화 지역으로 보장받은 독일 서쪽 국경 지역 라일란트에 군대를 주둔시키며 조약을 파기한다. 1938년 3월에는 오스트리아에 폭동이 일어나 주민 대다수가 독일의 진압군 파병을 원한다는 날조된 소문을 퍼뜨린다. 시시각각 조여드는 독일군의 위협에 오스트리아 총리는 간절히 영국과 프랑스에 파병을 요청한다. 전쟁을 두려워한 영국과 프랑스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한다. 결국 독일 군대는 오스트리아에 무혈입성하고 오스트리아는 독일에 병합된다. 히틀러는 일찍이 선전선동의 파괴력을 간파한다. 민족적 우수성으로 다져진 순수 독일인의 강력한 국가를 약속하며 국민을 현혹했다. 국민에게 ‘충성은 오로지 복종뿐’이라고 주입해 국민 의식을 무력화했다. 독일 국민은 반(反)유대주의조차 여과 없이 받아들이며 히틀러를 성심으로 지지했다. 그렇다고 모든 독일 지성의 싹을 자르지는 못했다. 파울은 옛 연인 레나(엔지 모힌드라)가 시위 중에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나치 돌격대에 붙잡혀 고문 끝에 식물인간이 되자 히틀러의 실체를 보게 된다. 파울은 히틀러와 나치의 야욕에 제동을 걸기 위해 반(反)나치 군부 세력과 연합한다.
힘의 논리 앞에 부질없는 약소국 목소리
체임벌린이 흔든 평화선언문은 채 1년도 되지 않아 의미를 잃게 된다. 외면으로 얻은 평화는 그만큼 부질없다. [넷플릭스]
영화는 체임벌린을 대변하지는 않지만 그도 나름의 확고한 사명감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체임벌린은 자존심이나 의전보다는 국민의 실리가 우선인 인물이다. 유력 정치인 가문에서 태어난 체임벌린은 “전쟁에 휘말리면 승자와 패자 모두 파멸한다”는 교훈을 아버지와 형의 전례로 뼈저리게 학습했다. 혹자는 체임벌린 총리가 뮌헨조약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것으로 착각하기도 하는데, 실제 수상자는 1925년 외무장관을 지낸 그의 형 오스틴 체임벌린이다. 형의 치적 로카르노 평화조약(유럽 국가들이 1925년 12월 1일 영국 런던에서 체결한 안전보장조약)을 휴지 조각으로 만든 히틀러에게 체임벌린은 오히려 협상을 제안한다. 삼고초려 노력에도 히틀러는 연락조차 없다. 체임벌린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에게 중재를 부탁하는 굴욕을 감내하며 겨우 회담을 성사시킨다. 체임벌린의 머릿속은 오로지 전쟁을 막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자존심이 망가지는 것은 관여치 않았다.
상황이 이러하니 영국에 동맹국 체코슬로바키아의 안위가 중요할 리 없었다. 이처럼 국제사회에서 강대국은 세계평화를 운운하며 약소국을 위하는 척하다가도 자국의 이익이 위협받으면 내팽개친다. 당시 체코 대표단은 뮌헨협정 장소에 함께 있었다. 영국 정부는 그들에게 협정 조인식에 참여할 권한도 주지 않고 옆방에서 대기만 하게 했다. ‘뮌헨: 전쟁의 문턱에서’는 영국 영화다. 영화에서도 이 부분은 부각되지 않는다.
외면이 더 큰 재앙 불러온다
파울과 휴의 노력은 평화에 눈이 멀어버린 체임벌린에 의해 허사가 되고 만다. [넷플릭스]
파울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마지막 남은 희망은 우리뿐”이라며 휴에게 체임벌린과의 비밀 만남을 간청한다. 천신만고 끝에 파울은 체임벌린을 만난다. 파울은 “히틀러의 위장 계략에 말려들면 시간만 벌어다주는 꼴이 된다”며 조약 체결에 극구 반대한다. 마음이 이미 콩밭에 가 있는 체임벌린은 히틀러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파울의 경고를 귀담아듣지 않는다. 낙담한 파울은 마지막 수단으로 히틀러 암살을 시도하려 하지만 결국 모두 허사가 된다.
작가 해리스는 두 주인공을 설정할 때 영국 역사학자 앨프리드 레슬리 로즈(1903~1997)와 독일 외교관 아담 폰 트로트 주 솔츠(1909~1944)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다. 휴와 파울처럼 앨프리드와 아담도 옥스퍼드에서 만나 진한 우정을 나눴고, 아담은 영화 ‘작전명 발키리’(2009)로 알려진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1944년 히틀러 암살 시도 사건에 연루돼 35세 나이에 형장의 이슬이 된다.
개선장군처럼 영국에 돌아온 체임벌린은 히틀러에게서 받은 평화선언문을 흔들며 영국인을 안심시킨다. 전쟁의 공포로 떨던 영국민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평화를 만끽한다. 단 한 사람, 윈스턴 처칠만이 핏대를 세우며 현실을 직시할 것을 주장했다. 이땐 정치인뿐 아니라 일반 국민도 처칠을 야유하고 비난한다. 1년도 되지 않아 히틀러는 선전포고도 없이 폴란드를 침공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체임벌린은 평화의 수호자에서 ‘역적’으로 손가락질받고 처칠은 탁월한 안목의 소유자로 추앙받는다. 이 시기 영국은 영화 ‘윈스턴 처칠의 폭풍전야’(2002)와 ‘다키스트 아워’(2018)에 잘 나타난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체임벌린은 실각한다. 밤낮으로 독일의 영국 공습이 빗발치던 1940년 11월 쓸쓸히 사망한다.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1500만 명의 유례없는 사망자를 내고 막대한 재산 피해를 보았다. 이를 경험한 이들은 다시 이와 같은 ‘끔찍함’을 피하려 현실을 외면하다 제2차 세계대전을 맞이했다. 사망자는 제1차 세계대전보다 7배가 늘어났다. 평화에 집착하다 보니 의심의 끈을 놓치고 만 것. ‘뮌헨: 전쟁의 문턱에서’는 평화를 빙자한 야욕의 발톱은 절대 한 번에 드러나지 않는다는 역사의 진리를 다시금 깨우치게 만든다.
황승경
● 1976년 서울 출생
● 이탈리아 레피체국립음악원 디플럼,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성균관대 공연예술학 박사
● 국제오페라단 단장
● 前 이탈리아 노베 방송국 리포터, 월간 ‘영카페’ 편집장
● 저서 : ‘3S 보컬트레이닝’ ‘무한한 상상과 놀이의 변주’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