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가치, 헌법 정신 수호자 돼달라
국무회의 중심 국정 운영이 헌법 정신
4차 산업혁명 고속도로 깔라
이종찬 전 국정원장. [홍태식 객원기자]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20대 대통령에 당선했습니다. 예상했습니까.
“검찰총장 할 때까지 나는 윤 총장이 정치를 하리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저뿐 아니라 본인도 정치할 생각이 없었을 겁니다. 총장 임기를 마치면 명검사(名檢事)가 되겠거니 생각했죠. 그런데 어느 순간 ‘국민이 윤 총장을 원하는구나’ 생각하게 됐어요.”
그때가 언제입니까.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윤 총장을 징계한다, 직무에서 배제한다고 하던 때요. 어느 날 검찰청사 앞에 윤 총장을 응원하기 위해 전국에서 보내온 화환이 300개가 넘게 길가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국민이 윤 총장을 원하는구나’ 느꼈죠.”
‘국민이 尹 총장을 원하는구나’
윤 당선인은 지난해 3월 4일 검찰총장직에서 물러나 국민의 부름에 화답했다. 총장에서 물러난 이후 각계 인사들을 만나며 정치참여에 대한 조언을 구할 때 만난 이 가운데 하나가 이 전 원장이다.윤 당선인이 총장 그만두고 집에 왔을 때 뭐라고 조언해 줬습니까.
“새벽 2시가 다 되도록 여러 얘기를 나눴어요. 어려서부터 줄곧 봐와서 품성이나 능력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날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눠보니 ‘윤 총장은 대한민국의 근간인 헌법 가치를 확실하게 체득한 공직자구나’하는 확신을 갖게 됐어요.”
어떤 점에서 헌법적 가치를 체득한 공직자라고 느꼈나요.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민주주의는 인민민주주의나 사회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여야 한다면서 민주주의 앞에 ‘자유’를 붙여야 한다고 힘주어 얘기하더라고요.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바탕에 두고 탄생했습니다. 그런데 그 같은 가치와 정신이 흔들리는 모습이 현 정부 들어 여기저기서 나타나지 않았나요. 헌법 가치가 흔들리는 상황을 윤 총장이 나서서 바로잡았으면 하는 바람이 컸죠. 20대 대선은 대한민국 국체를 보존하느냐, 그러지 않느냐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의미가 담긴 선거였다고 해석하고 싶어요.”
윤 당선인이 인수위원장으로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를 임명했습니다.
“아주 잘된 인사예요. (단일화 때) 서로 믿자고 한 약속을 지켰잖아요. 위원장에 임명한 것은 정부 인수에 대한 권한과 책임을 같이 준 것이죠. 정부 운영도 그렇게 잘 해주길 바라요.”
이 전 원장은 역대 대통령의 실패가 ‘청와대’ 중심 국정 운영에서 비롯됐다고 강조했다.
“실패한 역대 대통령의 공통점은 국무위원인 장관에게 일을 확실하게 맡기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비대해진 청와대가 인사와 정책을 좌지우지하면 장관이 제대로 일할 수 있겠어요. 비서는 대통령이 ‘결정’을 잘하도록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게 임무예요. 그런데 청와대가 부처 인사에도 개입하고, 정책도 이래라저래라 하면 나랏일이 어떻게 되겠어요. 정책이 잘못됐을 때 청와대 비서가 책임을 집니까. 국회에서 검증도 안 받은 청와대 비서들이 개입하도록 놔둬선 안 돼요. 장관에게 권한을 확실하게 위임하고 일이 잘못됐을 때는 책임까지 지도록 해야죠.”
이 전 원장은 “국무회의가 활성화되도록 하려면 ‘회의록’을 남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회는 회의 내용을 모두 속기록으로 남겨, 누가 무슨 발언을 했는지 국민 누구나 알게 합니다. 그런데 지금 국무회의는 각 부처에서 보고만 할 뿐 토론이 없어요. 회의록도 남기지 않고요. 국가 중요 정책을 논의하는 국무위원들이 치열하게 토론해 국민과 국가를 위해 어떤 정책을 선택했는지, 누가 어떤 근거를 제시하며 어떻게 주장했는지 기록을 남겨야죠. 부처별로 돌아가면서 업무 현황만 보고하는 국무회의는 회의가 아니라 보고회죠. 대통령은 국무위원들이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도록 회의를 주재하는 사람이에요. 국무위원들이 논의한 내용을 존중한다면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소리가 나올 수 없겠죠.”
요즘 국무회의 어전회의만도 못하다
이 전 원장은 선진국에서 ‘키친 캐비닛’ 이란 말이 나온 이유를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나랏일을 하다 보면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도 많겠지요. 그런 때는 국무회의를 소집할 시간이 없으니, 해당 부처 장관 몇몇이 대통령 관저로 찾아가서 아침밥을 함께 먹으면서 논의하고, 의사결정을 해서 나랏일을 빠르게 처리해야 할 때도 있겠지요. 거기서 유래한 말이 ‘키친 캐비닛’이에요. 급한 일을 먼저 처리하고 나중에 국무회의에 보고해서 추인을 받는 것이죠. 그렇게 역동적으로 나랏일이 처리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는 “국무위원들이 대통령 말씀을 받아 적는 요즘 국무회의는 조선시대 어전회의만도 못하다”고 안타까워했다.
“사극을 보면 임금 앞에서 신하들이 ‘전하 아니되옵니다’라면서 자신의 소신을 펴지 않던가요. 때로는 목숨을 걸고 충언이 담긴 상소를 올리기도 하고요. 나랏일을 하는 분들이라면 그 정도 기개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충언이 많아야 대통령이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회의 때 ‘예스맨’만 있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권한과 책임을 과감하게 위임하지 않으니 모든 책임이 대통령에게 돌아오는 겁니다.”
이 전 원장은 이 대목에서 박정희 대통령 시절 일화를 들려줬다.
“박정희 대통령은 ‘장관 인사는 내가 합니다. 실·국장 인사는 장관이 책임지고 하시오’라고 얘기했어요. 그렇게 장관에게 인사권을 과감하게 위임하면 장관이 실·국장 인사 때 일 잘하는 능력 있는 사람을 뽑기 위해 노력해요. 실적을 내야 하니까요. 그런데 청와대에서 국장, 과장까지 인사에 개입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일을 잘해서 성과 낼 생각은 안 하고 일이 왜 잘 안됐는지 책임 면할 궁리만 하겠죠.”
윤 당선인은 ‘청와대 대통령’ 시대를 마감하고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집무실만 청와대에서 광화문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이 전 원장 바람처럼 국정 운영의 중심을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로 옮길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이 전 원장은 “윤 당선인과 안철수 인수위원장이 힘을 모아 한국 경제의 미래를 활짝 열어줄 4차 산업혁명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깔아주기를 소망한다”고 덧붙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를 깔아 산업화 기반을 다졌어요. 김대중 대통령은 정보 고속도로를 깔아 IT 강국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윤석열 당선인과 벤처기업가 출신 안철수 인수위원장이 손잡고 4차 산업혁명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깔아주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공한 대통령으로 기억되길 소망합니다.”
구자홍 기자
jhk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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