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봉투 명단? 당내 경쟁자에겐 호재
민주당 강세 지역 공천 경쟁률 벌써 4대 1
李 장악력 취약한 호남 파고드는 ‘올드보이들’
수도권 범친문 현역의원에 친명계 도전장
2010년 발간된 이 책은 무한 경쟁 사회를 향한 평범한 다수의 발칙한 외침을 담았다. ‘1등’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이들이 ‘1등 지상주의’에 맞서 싸운 노하우가 담겨 있다. 인기는 많지만 정작 선거에서는 1등을 거의 하지 못한 고(故) 노회찬 전 진보신당 대표, ‘비인간화된 1등과 싸우는 것’을 소설가의 책무라고 여긴다는 공지영 작가가 필진으로 참여해 화제를 모았다.
경쟁 체제에서는 승자, 특히 다수가 참여한 경쟁일수록 ‘1등’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된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의 대표적 경쟁 무대는 ‘선거’다. 경쟁이 치열하기로 유명한 올림픽도 금·은·동메달을 3명의 선수에게 수여하지만 선거만큼은 철저하게 1등만 기억되는 승자독식 사회다.
선수층이 두텁고 실력이 월등한 대한민국 ‘양궁’ 국가대표 선발전이 올림픽 금메달 따기보다 어렵다고 하는 것처럼 특정 정당 지지세가 강한 지역의 경우 오랫동안 공천=당선으로 인식돼 왔다. 국민의힘은 영남, 더불어민주당은 호남이 그렇다. 이들 지역은 공천장을 따내기 위한 예선전이 더 치열했고, 경쟁 과열로 잡음도 가장 많았다.
내년 총선 출마 가능성이 거론되는 민주당 호남 출신 올드보이들. 박지원 전 국정원장,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왼쪽부터). [동아DB]
본선보다 치열한 예선전, 공천
공천장 역시 당내 경쟁에서 1등한 후보만이 거머쥘 수 있다.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떨어진 선수가 다시 올림픽에 도전하려면 4년을 기다려야 하듯, 낙천한 이들도 다음 총선까지 4년을 기다려야 한다.공천이든 본선이든 선거는 기본적으로 상대평가로 이뤄진다. 경쟁 상대에 비해 비교우위를 갖고 있는 후보가 승리한다. 그러나 근본적인 차별이 존재한다. 특히 현역과 신인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 ‘할 수 있는 것’에 큰 차이가 있다.
내년 총선은 아직 10개월도 더 남았지만 ‘의정활동 보고’를 이유로 지역구 현역의원 얼굴과 이름이 큼지막하게 적힌 플래카드가 유동 인구가 많은 거리마다 내걸려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사전 선거운동으로 의심할 수 있는 행위다. 그에 비해 예비 후보들은 총선 120일 앞이 돼야 선관위에 예비후보로 등록하고 선거운동에 나설 수 있다. 그전에 명함 한 장 잘못 돌렸다가는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
그렇다고 총선 환경과 여건이 늘 현역에게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설화(舌禍)와 각종 의혹에 휩싸일 경우 오히려 ‘낙천 대상자’에 오를 수 있다. 최근 불거진 ‘민주당 돈 봉투 의혹’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돈 봉투를 받은 것으로 확인된 의원의 경우 가장 먼저 낙천자 명단에 오를 가능성이 있다. ‘돈 봉투 리스트’가 곧 ‘낙천자 리스트’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명단의 진위는 앞으로 검찰 수사를 통해 밝혀질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돈 봉투 국회의원 명단’에 오른 현역의원 지역구는 대부분 민주당 강세 지역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돈 봉투를 받지 않았는데도 명단에 이름이 올라간 의원이 있다면 억울함을 호소할 법한 일이다. 그럼에도 어느 누구도 ‘나는 돈 봉투를 받지 않았다’고 적극 해명에 나서지 않고 있다. 불필요한 논란에 휩싸일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해당 지역구 출마를 준비 중인 예비 정치인들은 ‘돈 봉투 리스트’의 진상이 하루빨리 공개되기를 바라고 있다. 민주당 후보로 수도권 출마를 준비 중인 한 인사는 “대선과 지방선거, 두 번의 전국 선거 패배에는 현역의원 책임이 가장 크다”며 “이번 돈 봉투 사건을 계기로 인적 쇄신을 대대적으로 단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년 총선은 윤석열 정부 하반기 국정 운영을 좌우할 중요한 선거다. 대선 승리로 여당이 된 국민의힘은 지방선거까지 승리하며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운영에 대한 책임을 맡았다. 하지만 여소야대 상황이라는 한계로 인해 주요 정책이 입법으로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내년 총선에 여당인 국민의힘이 승리할 경우 윤석열 정부는 임기 말까지 안정적 국정 운영이 가능해진다. 반대로 야당이 승리할 경우 조기 레임덕에 빠져들 가능성도 있다.
국민의힘이 정권교체 완성을 위해 내년 총선 승리를 위한 전략 마련에 고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야당도 손 놓고 있지는 않고 있다. 만약 민주당이 내년 총선에서 패배해 의회 권력까지 내줄 경우 전국 선거 3연패 수렁에 빠져 수권 정당 지위를 잃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든 야든 저마다의 이유로 정치적 사활을 걸고 내년 총선에 총력전을 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민주당 자체 경쟁률 4:1
총선을 불과 11개월 앞두고 돌발 변수로 떠오른 ‘돈 봉투 리스트’는 내년 총선에 어떤 변화를 불러일으킬까. 돈 봉투 의혹이 제기된 것만으로도 도덕성에 흠집이 났다는 점에서 민주당에 악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돈 봉투 리스트를 공천 물갈이, 인적 혁신 계기로 삼아 면모를 일신한다면 오히려 악재를 호재로 바꿀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민주당은 현재 대선과 지방선거의 잇단 패배로 내년 총선 출마 예정자들로 넘쳐나고 있다.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청와대에서 근무한 인사들, 내각에서 일한 고위 관료, 그리고 공기업 임원을 지냈거나 자치단체장을 지낸 이들도 많다. 지난해 대선과 지방선거 패배로 실직한 이들 상당수가 내년 총선 예비후보자로 거론되는 것이다.
여기에 MZ세대 정치 참여 바람을 타고 출마를 준비하는 3040 청년들이 있고, 운동권 86세대의 한계를 지적하며 그들을 대체하기 위한 학계·법조계·재계 출신 ‘전문가 86세대’들도 내년 총선에 나설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수도권과 호남 등 현역의원이 포진한 민주당 강세 지역의 경우 이미 자체 경쟁률이 4대 1을 넘어섰다는 얘기가 나온다.
민주당 텃밭 호남의 경우 ‘올드보이들’까지 내년 총선을 겨냥한 몸풀기에 들어갔다. 선거법 재판과 대장동 기소 등 각종 사법 리스크에 노출돼 있는 이재명 대표 리더십이 약화돼 호남에 대한 이 대표 장악력이 약화한 틈새를 파고들고 있는 것이다.
대선 이후 민주당에 복당한 박지원 전 국정원장은 과거 자신의 지역구였던 전남 목포 또는 고향인 전남 해남군·완도군·진도군 출마를 저울질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노무현 정부 때 법무부 장관을 지낸 천정배 전 의원은 양향자 의원의 탈당으로 무주공산이 된 광주 서구을 출마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은 과거 자신의 지역구였던 전북 전주병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수도권 ‘범친문 대 친명’ 맞대결
민주당 텃밭 호남에서 ‘올드보이’들이 복귀를 준비하고 있다면, 수도권 민주당 강세 지역에서는 ‘범친문 대 친명’ 간 맞대결이 예고돼 있다. 2020년 총선 때 친문 지지를 등에 업고 원내에 진출한 범친문 진영 현역의원에 친명계 인사들이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처럼회’ 소속 양이원영 의원은 친이낙연계 양기대 의원 지역구인 경기 광명을에, 문재인 정부 초기 대통령국민소통수석비서관을 지낸 윤영찬 의원 지역구인 성남 중원을에는 지난해 8·30 전당대회 때 이재명 캠프 대변인을 지낸 현근택 민주연구원 부원장이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내년 총선이 여야 정국 주도권을 두고 벌이는 패권 다툼이라면, 정당 공천은 당내 세력 교체를 위한 세 대결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다.
신동아 6월호 표지.
구자홍 기자
jhk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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