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호

개정 상법의 덫 ‘의결권 제한’…해외 자본만 신난다

외국계 사모펀드, 대기업에 이사 한 명씩 앉힐 수 있어

  • 박세준 기자 sejoonkr@donga.com

    입력2021-02-08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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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액주주 권리 위한 최대주주 의결권 제한

    • 감사위원 한 자리는 해외 투자자가 좌지우지

    • 단 한 명의 이사라도 영향력은 지대해

    • 시가총액 작은 지주회사 공격 대상 될 가능성 커

    2020년 12월 9일 국회 본회의에서 상법개정안이 통과됐다. [동아DB]

    2020년 12월 9일 국회 본회의에서 상법개정안이 통과됐다. [동아DB]

    한국 대기업에 아킬레스건이 생겼다. 기업의 지분 3%만 확보해도 기업 경영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지난해 12월 29일부터 시행된 개정 상법 때문이다. 법 개정으로 감사위원 이사 선임 규정이 바뀌었다. 감사위원 이사 선임 표결에서 3% 이상 지분을 보유한 주주는 모두 동일하게 3%의 영향력만 행사할 수 있다. 소액주주들이 합종연횡을 한다면 최대주주가 전혀 원하지 않던 인물도 이사 자리에 앉힐 수 있다는 의미다. 재계는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바뀐 법 때문에 경영권 방어, 지주회사 전환 등이 어려워질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개정 상법이 과거와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감사위원 분리선임 규정 개정과 다중대표소송제의 추가다. 감사위원 분리선임 규정은 감사위원을 다른 이사와 분리해서 선임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중대표소송제는 모회사 주주가 자회사 이사의 불법행위를 두고 대표 소송할 수 있는 제도다. 

    이 중 재계는 감사위원 분리선임 규정이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지적한다. 감사위원은 주식회사에서 감사를 담당하는 위원이다. 이사 중에 선임되며 최소 3명 이상이 감사위원회를 결성해 활동한다. 자산총액 2조 원이 넘는 회사라면 반드시 감사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 감사위원은 기업의 업무와 회계에 대한 감독권을 갖는다. 이사회의 핵심 직책이라 볼 수 있다.

    소액주주 권리 지키겠다고 상법 고쳤지만

    새 감사위원 분리선임 규정에 따르면 최소 3명의 감사위원 이사 중 1명의 자리는 분리해서 선출한다. 이사 중에 감사위원을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위원이 될 이사를 뽑는 방식이다. 이때 지분 3% 이상을 보유한 주주라면 각각 3%씩만 의결권을 갖게 된다. 감사위원 이사 선출이 3% 이상 지분을 가진 주주들의 평등선거가 되는 셈이다. 소액주주가 힘을 합친다면 최대주주가 원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이사로 앉힐 수 있다. 

    법 개정 이전에도 감사위원 선임에서 최대주주 및 최대주주 특수관계인의 의결권은 총 3%로 제한돼 있었다. 이 규정만으로는 최대주주의 영향력을 줄이기 어려웠다. 기업은 주주총회를 거쳐 이사를 선임한다. 주주총회에서는 많은 지분을 보유한 주주가 의결권을 더 많이 행사할 수 있다. 최대주주가 원하지 않는 이사가 선임될 가능성이 낮으니 감사위원 중에서도 최대주주와 맞서는 사람이 생기긴 어려웠다. 



    이번 상법 개정으로 소액주주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게 됐다는 의견도 있다. 최남곤 유안타증권 애널리스트는 “과거 기업의 인수합병, 기업분할, 지주회사 전환 등 각 주주의 이해가 엇갈리는 결정을 지배주주(최대주주)가 선임한 이사들이 주도했다. 당연히 누려야 할 일반 주주의 이익은 보호받지 못했다. 새 상법이 이 같은 병폐를 없앨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재계를 중심으로 외국계 사모펀드가 이 제도를 악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예를 들어 한 기업의 지분을 다량 확보한 사모펀드가 다수의 독립 법인을 설립한 다음 이를 3% 단위로 쪼개 흩뿌리는 방식이다. 이를 일명 ‘쪼개기’라 한다. 지분을 확보한 최대주주가 사모펀드라 해도 이 방법을 이용하면 의결권 제한을 피할 수 있다. 감사위원 이사 선출 과정에서 사모펀드가 원하는 결과를 낼 가능성이 크다.

    사모펀드 분신술에 경영권 뺏길 위험 커

    SK그룹은 2004년 해외 사모펀드 소버린으로부터 경영권 공격을 받았다. [뉴스1]

    SK그룹은 2004년 해외 사모펀드 소버린으로부터 경영권 공격을 받았다. [뉴스1]

    실제로 유사 사례가 있었다. 2004년 외국계 펀드인 소버린은 SK의 지분 14.99%를 기습 매입해 최대주주에 오른 뒤 이사회 진입을 시도했다. 소버린이 최대주주였으니 이사 선출에 미치는 영향력이 컸다. 소버린은 자사 측 이사를 감사위원으로 만들려고도 했다. 당시에도 최대주주의 의결권은 3%로 제한됐다. 소버린은 5개의 법인에 각각 3%의 지분을 부여한 뒤 감사 위원 선출에 나섰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지분만큼의 의결권 제한을 일부 해결할 수 있었다. SK는 소버린이 원하는 이사가 감사위원으로 선임되는 것을 막기 위해 원천봉쇄책을 썼다. 회사 지분이 수십%에 달하는 법인들을 설득해 아예 소버린 측이 이사가 선임되지 않도록 막았다. 

    소버린이 SK를 공격했을 때, 감사위원 분리선임 규정이 있었다면 소버린이 원하는 외부 인물 중 한 명은 이사회에 앉았을 공산이 크다. 이번 상법 개정으로 아무리 지분을 많이 갖고 있는 법인이라도 감사위원 의사 선출에 대한 의결권은 3%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바뀐 상법 체제 아래에서 SK가 소버린 측 이사 선임을 막으려면 지분 3%를 가진 주주 모두를 일일이 설득해야 한다. 반면 소버린은 다른 주주를 설득할 필요가 없다. 쪼개기로 자신의 분신을 만들 수 있으니 지분 확보에만 집중하면 된다. 

    감사위원 분리선임 규정 때문에 다른 대기업도 경영권을 위협받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2020년 12월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의 분석에 따르면 감사위원 분리선임제 도입으로 외국계 사모펀드가 국내 시가총액 1~30위 기업 중 23개 기업 이사회에 감사위원을 앉힐 수 있다. 여기에는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SK텔레콤, LG화학, 포스코, 네이버, 롯데케미칼 등이 포함된다. 

    일각에서는 ‘최대주주가 원치 않는 이사가 단 한 명 생기는 것뿐이니 경영권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생각은 다르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12월 16일 서울 여의도 전경련 콘퍼런스센터에서 열린 ‘공정경제 3법에 대한 긴급 좌담회에 참석해 이와 같이 발언했다. 

    “감사위원은 이사로서 기업의 중대한 의사결정과 사업전략 수립에 참여한다. 외부 투기 세력을 대변하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감사위원에 선임되면 기술 유출은 물론 기업 경영과 관련한 중대한 결정이 왜곡될 수 있다.”

    지주회사 전환한 기업 더 위험할지도

    해외 자본이 지주회사를 노릴 공산도 커졌다. 주요 사업(핵심) 자회사에 비해 지주회사가 경영권 공격에 취약하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지주회사 체계를 갖춘 상장 지주회사 중 80%(64개사)가 핵심 자회사에 비해 시가총액이 적은 상황. 한국상장회사협의회(이하 상장협) 관계자는 “일반 회사가 지주회사로 전환할 때 주요 사업 자회사와 지주회사가 2대 1 또는 3대 1 규모로 분할된다. 지주회사 규모가 작아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해외 자본이 핵심 자회사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시가총액이 상대적으로 적은 지주회사를 노릴 가능성도 있다. 지주회사의 지분 3%만 가지고 있어도 감사위원 이사 선출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시가총액 4조7641억 원 규모 오리온의 감사위원 이사 선출에 참가하려면 지분 3%를 확보해야 한다. 필요 자금은 약 1429억 원이다. 한편 오리온의 지주회사인 오리온홀딩스의 시가총액은 8175억 원에 불과하다. 245억 원이면 경영권 공격이 가능하다. 상장협 관계자는 “지주회사에 대한 경영권 공격은 일반 회사에 대한 경영권 공격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지주회사는 그룹 전체의 의사결정을 담당한다. 해외 자본에 경영권 공격을 받으면 각 자회사의 경영에도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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