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나라 일본도 열심히 일하는데…
회사가 썩었다, 모두가 나를 속였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 이듬해인 1994년 그룹 시무식에서 연설하는 이건희 회장. [삼성전자 제공]
“이건희 회장이 30시간 이상 주무시지 않았기 때문에 ‘틀림없이 비행기에서 주무실 것이니 수행팀장은 행운’이라는 농담까지 돌았다. 그런데 웬걸, 이 회장이 자리에 앉자마자 가방에서 문서 두 개를 꺼내더니 ‘읽어보고 이유와 대책을 분석 보고하라’고 하는 것 아닌가. ‘후쿠다 보고서’와 ‘기보 보고서’였다.”
다음은 손 전 원장과의 일문일답.
- 후쿠다 보고서는 삼성전자의 디자인 전략 부재를 지적한 것으로 안다. 기보 보고서는 뭐였나.
“기보 고문도 13년간 삼성전자에서 고문으로 일해 온 일본인이었다. 오디오 설계 기술을 가르쳤다. 그가 쓴 보고서 내용은 한마디로 삼성 직원들이 정리정돈을 못 한다는 거였다. 예를 들어 일본 연구 개발자들은 부품, 측정기 같은 도구들을 쓰고 나면 다음 사람이 금방 찾아 쓸 수 있게 원래 위치로 다시 가져다 놓는다거나 연구 데이터도 잘 정리해 나중에 잘 활용하도록 하는데 삼성 직원들은 그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삼성에 몸담은 13년 동안 그렇게 강조했는데 지금까지 안 되고 있으니 회장이 직접 나서야 할 때라는 내용이었다.”
‘삼성 60년사’ 및 당시 기록에서 추린 후쿠다 및 기보 보고서의 주요 내용은 당시 삼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대기업의 그즈음 모습을 생각해 보게 한다.
‘5 Why’
2010년 5월 17일 삼성나노시티 화성캠퍼스에서 열린 ‘반도체 16라인 기공식’에 참석한 이건희 회장. 이날 삼성전자는 26조 원 규모를 투자해 성장동력을 강화하겠다는 전략을 발표했다. [삼성전자 제공]
- 비행기에서 보고서를 읽고 어떤 의견을 냈나.
“당시 수행원이 6명이었다. 회장 뒷좌석에 앉아 토론이 시작됐다. 회장은 전혀 잠을 자지 않고 답을 기다렸다. 우리들은 ‘책임의식과 주인의식이 없어서 그렇다’ ‘룰에 대한 개념이 없고 처벌이 약해서 그렇다’ 등 한두 시간마다 답을 내 말씀드렸는데 회장은 만족하지 않은 듯 ‘다시‘ ‘다시’를 반복했다.
결국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해 주재원들과 저녁을 먹고 난 뒤까지 토론이 이어졌다. 하지만 계속 ‘아니다’라는 답만 들어야 했다. 회장은 마치 끝장을 보겠다는 심산인 것처럼 느껴졌다.
자정 넘어서까지 이런 상황이 이어지자 보다 못한 홍라희 여사가 ‘사람들도 피곤하니, 이제 답을 알려드리세요. 그래야 내일 또 일을 할 수 있죠’라고 하자 그제야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선문답 같은 말을 하며 ‘잘 생각해 보라’고 했다.”
신경영 초기 비서실 국제금융팀장, 인사팀장을 지내며 이 회장 통역을 맡기도 했던 황영기 전 삼성증권 사장(현 한미협회장)도 당시 수행팀원으로 전 일정을 함께했다. 그의 기억은 좀 더 구체적이다.
“이유와 대책을 묻는 회장께 ‘교육이 잘못돼서 그렇습니다. 기본 질서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매사 얼렁뚱땅하는 문화가 옛날부터 몸에 배어와서 그렇습니다. 매출 달성에 급급해서, 양 위주로 ‘물량 떼기’ 하느라 그렇습니다’ 등등 각자가 머리에서 짜낸 의견들을 말씀드리니 회장은 ‘그래, 그렇다 치자. 근데 왜 그리 됐노?’ 다시 반복해 되물었다.
그러면 우리들은 다시 ‘어려서부터 가정교육이나 이런 것들부터 문제가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군대 가서 요령 피우는 거를 배우는 것도 이유인 것 같습니다’라고 또 나름대로 생각을 말했다. 그러면 회장은 다시 ‘그럼 우리 사회는 와 그래 됐노?’ 이런 식으로 질문이 계속됐다. 우리는 더는 답을 할 수 없었다. 그때 생겨난 말이 바로 회장의 ‘5 Why’다. 즉 문제가 생기면 적어도 다섯 번 ‘왜’를 물어야 한다는 거였다.”
생전의 이 회장이 보고를 받을 때 적어도 다섯 번 ‘왜냐’고 물었다는 것은 삼성맨들 사이에서 유명한 이야기다. 보통 사람들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에 어린아이 같은 질문을 던져 본질에 접근하는 것을 즐기며 탐구했다는 것이다.
현명관 전 비서실장 말이다.
“한마디로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겠다는 집념과 노력이 대단했다. 어느 날 임원회의에서 ‘물은 왜 차가운가’라는 질문이 날아왔다. ‘얼음이 생겨서 그렇습니다’ ‘얼음은 왜 찬가?’ ‘0도 이하에서 얼기 때문입니다’ ‘왜 0도 이하에서 얼음이 되는가’ 이런 식이었다. 회장은 한번 관심을 가지면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얻을 때까지 집요하게 파고들어 갔다. 반도체는 물론 자동차에서부터 전기오븐까지 디자인과 기술을 세세하게 알고 있었다. 그를 모시는 사람들도 당연히 그런 열성을 보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회사가 썩었다, 모두가 나를 속였다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한 다음 날, 이 회장은 유럽 주재원들을 앞에 놓고 이야기를 쏟아냈다. 소니 녹음기를 켜놓고 “그동안 내가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밑에까지 전파가 안 됐다. 무조건 내 말을 녹음해서 각 사업장 말단까지 들려줘라”라며 이렇게 말했다.“그동안 LA와 도쿄에서 회의를 한 것은 우리 가전제품이 세계시장에서 얼마나 천대받고 국제 경쟁력이 뒤졌나 하는 것을 직접 보여주어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인 고문들이 쓴 보고서를 읽고, 나 자신부터 얼마나 뭘 모르고 있었나를 깨달았다. 나는 평생 낙관적이고 긍정적으로 살아왔다. 웬만한 실수나 수십, 수백억 원의 손해에도 까딱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화가 몹시 치밀어 오른다. 5년 전에 여러분들 나한테 뭐라고 그랬나? 실무를 모르는 소리한다, 부잣집에서 자랐으니 월급쟁이 고충을 알겠나. 그러면서 내 말을 밑으로 전달도 안 했다. 그럼 그렇게 말했던 사람들은 현실을 알았나. 각 계열사 사장들, 비서실장, 비서실 팀장들은 모두 나를 속였다. 집안에 ‘병균’이 들어왔는데 5년간, 10년간 속여왔다. 소위 ‘측근’들이 이 정도라면 나머지 사람들은 어느 정도이겠는가.”
이 회장이 일본인 고문들이 쓴 보고서를 읽고 이렇게까지 화를 낸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삼성전자가 이병철 선대 회장 시절부터 일본인 기술자들로부터 많은 기술을 습득해 성장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선대 회장 때는 경영 전반에 대한 조언을 해주는 정도였지만 이건희 회장 때는 경험과 기술을 가진 전문가들을 영입해 구체적 조언을 들었다고 한다. 조용상 전 삼성재팬 대표이사 말이다.
“이 회장은 정말 그들을 극진히 대접했다. 당신 스스로를 낮추고 예의와 성의를 다하는 모습에 감동한 일본인 고문들은 삼성에 조언과 정보를 주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직원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소홀히 듣고 잘 받아들이지 않는 분위기였다. 회장은 이런 모습이 포착될 때 불같이 화를 내곤 했다.”
신필렬 전 삼성라이온즈 사장은 1972년 삼성물산에 입사해 비서실 재무팀에서 일을 시작했다. 1976년부터 이병철 선대 회장의 비서팀장을 맡았다. 그의 말이다.
“삼성에 영입된 일본인 고문들은 조금이라도 삼성에 기여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내고 일본에서 신제품이 나오면 재빠르게 조사해서 리포트로 써내기도 했지만 당시 삼성전자에서 그걸 눈여겨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건희 회장은 부회장 시절부터 ‘(명색이) 고문인데 불러갖고 이야기도 듣고 자꾸 상의해야 할 것 아닌가?’ 하면서 답답해했다. 그러다 회장에 취임해 경영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고문들을 중시하는 분위기’를 만들려고 애썼다. 회장이 되자마자 제일 먼저 삼성전자 내 꽤 파워가 있는 부장 목을 친 게 대표적이었다. 회장이 부회장이던 시절 그 부장에게 일본인 전문가들을 소개하면서 ‘배울 게 많을 것이니 이분을 통해 사람도 뽑고 하라’고 했는데 한귀로 듣고 흘려버린 거다.
회장은 당신이 부회장으로 힘이 없을 때여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는지 잠자코 있다가 회장이 되자마자 부장을 불러 ‘내가 옛날에 일본인들을 몇 명 소개해 줬는지, 그분들로부터 배운 게 뭔지 이야기해 보라’고 한 거다. 담당 부장이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니 그 즉시 날려버렸다.”
이 회장은 ‘일본인 고문 활용’을 아예 인사 항목에까지 집어넣어 명문화했다고 한다. 홍성일 전 비서실 감사팀장 말이다.
“회장은 화를 내는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일본인 고문 이야기만 나오면 ‘귀하게 모셔왔는데 썩힌다’고 역정을 냈다. 당시만 해도 일본인 입장에서 한국 회사 기술 고문으로 가는 건 일본 내에서 역적 소리를 듣는 거라며 그렇게 어렵게 오신 분들을 뒷방 늙은이 취급한다는 거였다. 그분들을 진정한 동료로 만들어서 일이 끝나면 인사동 같은 데 모시고 가 소주도 한잔 사드리고 해야 머릿속에 있는 ‘진짜’가 튀어나와 우리 재산이 된다고도 했다. 결국 어느 날, 더는 말로 안 되겠다고 느끼셨는지 감사 항목에 ‘고문 활용도’라는 항목을 새로 만들어 인사 평가에까지 반영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건희 회장의 일본관은 특별했다. 이 회장은 일본인들에게 조선을 지배한 식민의 기억이 선명하던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초등학교와 대학교를 일본에서 다녔다. 한국인이 ‘조센진’으로 통하던 그 시절, 게다가 감수성이 가장 예민하던 그 시절에 그가 얼마나 차별대우를 받았을지는 능히 짐작이 된다.
그는 반일 감정을 갖는 대신 일본을 알려고 노력했고 일본의 장점을 배워 마침내 일본을 이기겠다고 결심했다. 기술로 일본을 이기는 극일(克日)만이 최고의 복수라고 생각했던 거다. 그 생각은 결국 세계 최고 전자회사 소니를 이김으로써 실현됐다. 식민지 역사가 반세기가 넘어가는 지금도 일본과 잘 지내자고 말하면 ‘토착왜구’ 소리를 듣는 작금의 상황을 고인의 삶과 겹쳐보면 한숨만 절로 나온다.
후쿠다 및 기보 보고서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이 회장은 그날 밤 호텔 방에서 한 편의 비디오를 보고 다시 절망에 빠진다. ‘후쿠다 보고서’에 이어 프랑크푸르트 선언의 ‘제2의 방아쇠’가 된 이른바 ‘세탁기 사건’이다.
당시 삼성은 사내방송(SBC)을 통해 내부 문제를 고발하는 일종의 사내 몰래카메라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었는데 이 회장이 본 비디오는 도쿄 하네다 공항에서 전해진 것이었다.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해 호텔 방에서 열어본 테이프에는 삼성전자 세탁기 조립 과정을 촬영한 20여 분 분량 영상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이게 어쩐 일인가. 생산 라인 직원들이 세탁기 뚜껑 여닫이 부분이 맞지 않자 즉석에서 칼로 2㎜를 깎아 조립하는 것 아닌가.
이튿날 아침, 이 회장은 격앙된 어조로 이렇게 말한다.
“오늘 아침 세탁기 불량을 담은 테이프를 보았다. 회사가 썩었다. 완전히 썩었다. 엉터리 불량품을 쌓아놓고 손해를 보고 있는데 왜 만들어야 하나. 마켓 셰어 5, 6% 줄어드는 게 겁나는가? 뭐가 겁나서 내 말이 안 먹혀 들어가나, 가슴이 터진다.
불량은 죄악이다. 완전히 라인을 스톱시켜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하는데 왜 안 되는가.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공장을 세워라. 세탁기는 국내 판매가 다여서 재고가 쌓여 있다. 왜 양만 생각하고 만들어재끼나. 덤핑한 불량품 산 사람들 절대 삼성 거 안 산다는 거 아닌가. 팔면 팔수록 이미지 나빠지고 장사는 더 안 되는데 그런 단순한 계산이 안 되나? 내가 소학교 6학년 때부터 전자제품 사고 쓰고 돌리고 만진 사람이다. 나만큼 일본 기술자 경영자 판매자 얘기 들어본 사람 있나? 삼성에서 전자에 대해 나만큼 아는 사람 있나. 그런데 왜 내 말을 안 듣나. 해도 너무한 것 아닌가. 이런 식이면 내 다 치워 나갈라 한다.”
이 회장은 불량품을 팔면서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무책임하고 비도덕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불량 세탁기 조립 라인 모습은 해당 공장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단순히 불량을 줄이자거나 품질을 높이자는 정도로 말해서는 고쳐질 성질의 상황이 아니었다는 판단이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황영기의 말이다.
“사출 기술이 부족했던 국내에서 그런 일은 삼성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루하루 물건을 납품하는 것에만 치중하던 시대였다. 그게 우리 제조업의 전반적인 현주소였다. 하지만 이 회장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세탁기 뚜껑을 칼로 깎는 짓은 야만적이며 그런 일을 버젓이 하면서 일본인 고문들을 배척하고 있다는 생각에 결국 폭발한 거다.”
이 회장은 곧바로 서울에 있는 이학수 비서실 차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사장들과 임원들을 전부 프랑크푸르트로 모이게 하라. 이제부터 내가 직접 나선다.”
갑작스러운 불호령을 받은 핵심 경영진 200여 명이 허겁지겁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윤종용 삼성전자 사장, 비서실 김순택 경영관리팀장, 현명관 삼성물산 건설부문 사장을 비롯해 큰형 이맹희의 장남이자 장조카 이재현 제일제당 상무(당시 33세), 작은형이자 고인이 된 둘째 형 이창희의 장남 이재관 새한미디어 사장(당시 30세), 아들 이재용 현 삼성전자 부회장(당시 25세) 등이 속속 독일 프랑크푸르트 외곽에 있는 그라벤브루흐 소재 캠핀스키 팔켄슈타인 호텔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