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호

‘내’가 찾은 ‘나’의 길…어찌 여유롭지 않으리

늦가을 창덕궁 순례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입력2014-11-20 1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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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신의 일에 자부심과 능력을 가진 사람의 여유를 보았고 그런 사람과 함께 걷는 소박한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들을 보았다.
    • 남겨둔 풍경이 눈에 밟혀 자꾸만 뒤를 돌아본 기억, 몇 년 사이 처음이다.
    ‘내’가 찾은 ‘나’의 길…어찌 여유롭지 않으리

    창덕궁 후원.

    “그래서, 형이? 형이 가서 강의를 들었어?”

    “…응.”

    “번역하신 양반이 어려워했겠는데? 현직 교수인 경제학 박사가 와서 강의를 들으니.”

    “그렇다고, 궁금한 걸 어쩌겠어. 잘 모르면 가서 들어야지.”

    두 달 전쯤, 어느 상가(喪家)에서 들은 얘기다. 조문하러 가보면, 으레 유족의 친우나 선후배가 뒤섞여 앉기 마련인데, 그날 혼자서 갔던 나는, 어느 대학교의 사회학과 교수로 있는 상주의 선후배들, 그러니까 나와는 인맥으로나 학맥으로나 직선으로 연결되는 부분이 없는 문상객들과 어울려 앉게 됐다. 몇 마디 얘기를 나누다보니, 그래도 점선으로는 이렇게 얽히고 저렇게 설킨 사람들이었다.



    그중 한 분은, 내가 출강하는 학교에서 자주 뵌 일이 있는, 노동경제학을 가르치는 신정완 교수였다. 경제학이 원래 그런지, 아니면 신 교수의 학문적 넓이와 깊이가 그런지, 과문하여 모르겠지만, 그는 학술 전문 출판사를 운영하는 후배와 니체에서 하이데거를 거쳐 니클라스 루만의 책 이야기로, 다시 거기서 잠시 쉬기 위해 온 상주와 옛날이야기 하다가, 새로 온 문상객과 근황을 주고받다가, 다시 루만 얘기로 넘어가서는, 번역자도 고생했겠지만 원래 루만 책이 너무 어려워서 하는 수 없이 강의를 들으러 갈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로 다시 돌아왔다.

    나는, 하이데거와 루만과 고인의 병세와 방금 도착한 문필가의 근작 등에 대해 한두 마디 할 수 있는 말을 더하다가, 쉰이 넘은 현직 교수가 수강을 하러, 그것도 어엿한 대학의 강의실이 아니라, 민간의 인문학 공부 모임에 일부러 가서, 루만 번역자의 강의를 들었다는 얘기에, 그 흔한 표현대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듣기로는, 예전에, 그야말로 대학이 학문의 전당이요 상아탑이던 시절 서울대 철학과의 박홍규 교수가 자택에서 라틴어로 서양 고전을 강독 교습하면 같은 학과의 제자는 물론 영문과의 김우창 같은 착실한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했고, 또 훗날 바로 그 김우창 교수가 강의를 하면, 학부나 대학원생을 위한 교습임에도 타 학교의 교수들까지 와서 청강을 했더라는 풍경이 있었으나, 요즘은 그런 진경산수가 마르고 닳아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신정완 교수는 루만을 이해하기 위해 그 번역자인 정성훈 선생의 강의를 듣기 위해 학교 밖으로 출타했던 것이다. 이런 풍경은, 귀하다.

    ‘내’가 찾은 ‘나’의 길…어찌 여유롭지 않으리

    필자 일행이 창덕궁에서 문화해설사 박광일 씨의 설명을 듣는다.

    문화해설사 박광일 씨의 해박한 현장수업

    이런 얘기를 왜 하는가 하면, 지금 그와 흡사한, 그런 학문적 정열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로서는 하지 않던 일을 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사연인즉, 이러하다. 10월 하순 탄탄한 벤처 회사를 경영하는 이승종 네무스텍 대표가 연락을 해왔다, 문화해설사의 안내를 들으면서 창경궁을 둘러보는 행사가 있는데 참여할 거냐고. 그의 친절에 대한 답례로 그렇게 하겠다고는 답했으나 11월이 되면서는 조금 망설였다.

    좋은 책이 너무 많아서, 그런 책들을 통독하고 나서 혼자 자유롭게 살펴보면 될 일을 굳이 문화해설사의 도움을 얻어야 할까, 하는 오랜 습관이 먼저 작동했다. 이 점이 내가 그럭저럭 글을 쓰고 살게 된 이유다. 자료에 대한 욕심, 큰 서점이나 헌책방에 가면 신간으로 시작해서 전문 서적까지 두세 시간은 금세 보내버리는 고질병, 한번 들어가면 서가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돌고돌고 도는 도서관 산책, 특정한 키워드가 입력되면 그 단어가 지시하는 수만 갈래 길로 방황하는 인터넷 서핑 중독. 하여간 그런 버릇 때문에 내게 필요한 자료와 지식은 내가 살펴서 확보한다고 살아왔으니, 창덕궁? 그마저 내가 몇 권 정도 훑어본 후 그중 한두 권을 탐독해 한가할 때 나 혼자 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언젠가 경복궁 일대를 살펴보는데, 문화해설사를 따라다니는 관광객과 동선이 겹친 일이 있었다. 그래서 소형 스피커를 이용해 설명하는 그 해설사의 즉석 강의를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아, 그런데, 이렇게 참담할 수가. 그의 팩트는 부정확했고 해석은 엉터리였다. 대원군과 근정전 중창에 관한 이야기는, 차라리 내가 마이크를 빼앗아 대신 들려주고 싶었다. 왕조 문화에 대한 쉼 없는 찬사, 구한말의 고종과 대원군과 명성왕후에 대한 조잡한 사극 수준의 인물평, 참여자를 통제하기 위해 던지는 너저분한 농담들.

    그런 이유로 누군가의 설명을 들으면서 어딘가를 살펴보는 것에 거부감이 있었는데, 나는 지금, 더없이 훌륭한 해설을 들으면서 창덕궁 일원을 걷는 중이다. 오랫동안 문화 해설을 전업으로 해온 박광일 씨를 나는 졸졸 따라간다. 우리 일행도, 심지어 동반한 아이들도, 박광일 씨의 반경 10m 이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절정이 지났다지만 그래도 주말의 고궁 단풍을 보러온 수많은 사람과 중국인 관광객으로 자칫 어수선해지기 쉬웠지만, 세 시간 가까이 박광일 씨의 여유 있는 안내가 나를 포함한 참가자의 고궁 공부를 확실하게 다져주었다.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했고 이른바 ‘엄혹했던 시절’ 마땅히 뜨거워야 했던 학문을 닦으며 답사를 다녔기에 조선 왕조에 대한 그의 견해는 확실히 중심이 잡혀 있었다. 왕조 문화의 겉모습을 호들갑스럽게 나열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창덕궁에 대한 정확한 사실, 조선 왕실 문화와 일상에 대한 풍부한 에피소드, 임진왜란 이후 망국에 이르는 조선 역사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 그 어떤 질문에도 자상한 응답이 가능한 폭넓은 지식을 그는 가졌다. 게다가 푸근한 외모에 적절한 농담까지. 이런 고궁에 오면, 누구라도 하는 농담이 있다.

    자부심 가진 사람의 여유

    “아, 오랜만에 고향에 오니 좋네.”

    왕 흉내라도 한번 내보는 것이다. 그러면, 박광일 씨는 웃으며 농을 건넨다.

    “예에,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숫자는 다르지만 ‘경국대전’을 참조하면 140명 이상은 늘 상주했죠.”

    “…예?”

    “내시 숫자가 그렇다는….”

    “아, 난 또. 아니, 그게 아니라 이렇게 어도를 걸으니 옛날 생각이….”

    “아하! 그러면 가마꾼? 왜냐하면 임금께서는 늘 가마를 타고 어도를 지나가셨으니.”

    박광일 씨는 어느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여행이 공부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면서 결국은 여행도 공부가 돼버렸다. 여행을 가면 책도 읽고 현장에 있는 선생님 말씀도 들어야 한다. 학교 현장체험학습도 여러 번 가다보니 운이 나쁘면 장소가 반복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친구들과 갈 때는 장난이라도 좀 치련만 부모와 함께 가면 영락없이 감시를 받아야 한다. (…) 대학교 때 답사 준비에 한창 빠져 열심히 공부할 때 어느 절에 가서 선배에게 설명을 부탁했다. 그때 돌아온 대답은 ‘참 좋잖아. 너도 느껴봐’였다. 한 수 가르침을 기대한 나로서는 조금 실망스러운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답사 고수의 대답이다.”

    다시 보니, 예전의 그의 얼굴은 알 수 없지만, 지금 그의 얼굴은 어느덧 고수의 반열에 오른 듯 여유 있어 보였다. 우리 일행이 너무도 진지하게 경청하자, 참가비도 내지 않은 사람이 대여섯 명이나 줄줄이 따라다녔는데, 그는 그 사람들의 궁금증까지도 찬찬히 답해줬다. 더불어 우리 일행도 고궁에 드리워지는 햇살을 받아 온순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창덕궁의 역사와 기품과 의미에 대해서는, 몇 줄 더할 수 없을 만큼, 내가 아는 바가 적지만, 11월 8일 토요일 오전, 나는 자기 일에 자부심과 능력을 가진 사람의 여유를 보았고 또 그런 사람과 함께 걷는 소박한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들을 보았다.

    김수근의 ‘공간’에서 김창일의 갤러리로

    친절한 선생, 박광일 씨와의 창덕궁 산책은 오전으로 끝이 났다. 오후에는, 꽤 오랫동안 ‘비원’이라고 불러온, 창덕궁 후원을 찾기로 했는데, 그 권역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인원만 들어갈 수 있으며 따라서 당연히 문화재청에 소속된 해설사의 인솔을 따라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박광일 씨와 아쉽게 헤어진 후, 저마다의 취향대로 점심을 먹고, 다시 돈화문 앞에 모이기로 했고, 그래서 나는 바로 옆의 ‘공간’으로 걸어갔다. 언제고 한번은 찾아야지 했으나 늘 차를 몰고 율곡로를 지나가기 바빠서 힐끗 훔쳐볼 따름이었는데, 한 시간 남짓 소요하기에 너무도 적절하여, 나는 북촌의 그 맛있다는 칼국수를 들이마시다시피 하고는 공간으로 걸어갔다.

    공간은, 한국의 건축적 모더니티, 그 직수입과 변주와 창조의 굴곡진 드라마를 자기 이름으로 써온 김수근의 건축 세계를 집약해 보여주는 곳이자 그의 수많은 걸작과 문제작을 배태한 곳이다.

    공간이, 창덕궁 바로 옆에 있고, 또 공간 옆에 한국 경제의 상징인 대기업 현대의 거대한 건물이 개발주의의 상징처럼 서 있다는 것 자체가 상징적이다. 이 건물, 공간이 그러하듯이, 김수근의 건축은 자칫 박제가 될 뻔했던 전통과 개발 일변도로 직진해온 성장주의 사이에 버티고 있다. 초기작인 국립부여박물관의 왜색 논쟁이 말해주다시피, 김수근이 생각한 신생 독립국의 건축 방향은 박제화한 전통 형식이 아니라 새로운 조형성 안에 담기는 오랜 정신적 가치의 변주였다.

    ‘내’가 찾은 ‘나’의 길…어찌 여유롭지 않으리
    그것이 때로는 형식의 이식과 과장(남산 자유센터)으로 나타나거나 입체 도시에 대한 과도한 욕망(세운상가)으로 드러났지만, 그것마저 김수근과 개발도상국이 함께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던 도시건축의 수업료이었거니와 그 밖에 아르코미술관, 마산 양덕성당, 경동교회, 불광동성당 등의 탁월한 조형성은 당대의 건축계가 도달할 수 있었던 가장 높은 정점이었다. 율곡로의 한복판, 거대한 현대 사옥과 고색창연한 창경궁 사이에 버티고 있는 공간은 그러한 김수근 건축의 유전자라고 할 수 있다.

    김수근은 이 사옥을 7년이나 부수고 다시 짓기를 거듭했다. 이른바 인간 척도(humam scale)의 관점 및 주변 경관과의 공존을 추구한 김수근은 224㎝밖에 되지 않는 낮은 천장에 크고 작은 방들과 비좁은 복도를 잇대었다. 붉은 벽돌이 실핏줄처럼 펼쳐지면서 비좁은 계단과 다양한 용도와 크기의 사무 공간이 생성됐다가 줄었다가 다시 생성됐다.

    특히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은, 바깥에서 보면 5층도 채 안 되어 보이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10층 이상의 복잡하면서도 경이로운 동선과 시선이 펼쳐진다는, 그 공간 지하의, 소극장 공간사랑이다. 요즘의 예술 지형으로 말하자면, 당시의 공간사랑은, 오늘날의 대학로와 인사동과 홍대 앞을 다 합친 것만큼이나 중요한 문화 아지트였다. 클래식, 무용, 연극, 승무, 사물놀이, 굿, 전시, 아방가르드 퍼포먼스 등이 앞다퉈 펼쳐졌다.

    ‘문화 기획 1세대’ 선구자로 올해 8월 작고한 공간사랑의 기획 총책임자 강준혁의 회고에 따르면 “공간사랑 소극장에서는 모든 금지가 완전히 금지됐다”고 한다. 강석희, 백병동, 이만방 같은 당대 클래식 작곡가들의 날카로운 상상력이 펼쳐지는가 하면, 공옥진, 이애주, 심우성 같은 예술가들의 격렬한 몸짓이 벌어졌고, 김중만의 사진 강의와 전시가 열렸는가 하면, 황병기와 홍신자가 충격의 퍼포먼스를 펼치곤 했다. 논두렁에서 꽹과리를 배우고 삼남의 장터를 돌아다니며 장구를 치던 소년 김덕수가 김용배, 최종실, 이광수 등과 함께 이 공간의 지하를 풍물로 꽉 채웠을 때 심우성은 그들의 음악을 사물놀이라고 불렀다.

    의미를 살려 기억하건대, 이 소극장 공간사랑은, 전남 보성 출신의 한창기가 문자로 펼쳐냈던 ‘뿌리깊은나무’와 더불어, ‘한국적인 것에 대한 고뇌’의 결정판이었다. 이 수사(修辭)에는 두 가지 난제가 얽혀 있다. 이 난제를 의식하지 못한 채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느니 ‘한류 열풍’이니 하는 말을 하는 사람은 무지하거나 사기꾼이다. 탈근대와 탈식민이 그것이다.

    탈근대와 탈식민의 공간

    우리는 근대라는 문제를 다 풀기도 전에 탈근대라는 문제까지 덤으로 안았다.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주체와 문화적 자율의 기반, 즉 시민성이라는 기초를 닦기도 전에 근대라는 거대한 개발과 갈등과 전통적 삶의 전면적 해체라는 문제를 풀어야 했으니 이것만 해도 이중 과제다. 근대를 이룩하면서 동시에 근대를 넘어서야 했던 신생 독립국에 가난과 독재라는 이중 굴레는 무거운 것이었다. 그래도 그것을 견뎌내고 또 이겨냈다. 여기에 탈식민의 문제까지 또 부과됐다. 구한말의 대혼돈 이후 일본의 식민 통치를 겪어야 했고 이후의 현대사도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막강한 압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일본적인 것과 미국적인 것이 한 세기 넘게 우리 삶의 명줄을 꽉 쥐고 있어서 모두가 ‘꺼삐딴 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가난과 독재와 식민성으로부터 해방되는 길? 쉽지 않은 길, 인류사에 참고할 만한 사례도 드문 길, 그 길을 가는 와중에 한창기의 ‘뿌리깊은나무’가 있었고 김수근의 소극장 공간사랑이 있었다. 물론 엄밀히 말해 이 흔적들이, 당시의 지식인운동, 예술운동, 민중운동의 파란과는 일정하게 거리를 뒀지만, 그럼에도 이 두 거점으로 펼쳐진 문필과 예술은 신생 독립국의 교양시민, 즉 높은 교육열과 예민한 감수성과 근대적 식민성에 감각적 환멸을 가진 중산층 엘리트를 충격과 매혹으로 사로잡았다.

    그것을 기억하면서, 또 그 난제를 우리가 다 풀지 못했으며 따라서 지금도 그러한 문제를 지금의 당대적 숙제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공간이라는 문제적 장소로 가보았다. 내가 거듭 이런 생각을 한 것은, 김수근의 공간이 김창일의 아라리오 갤러리로 변했기 때문이다. 종로구 율곡로 83번지는 이제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로 바뀌었다.

    ‘내’가 찾은 ‘나’의 길…어찌 여유롭지 않으리

    창덕궁 후원의 늦가을은 고즈넉하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스물일곱 살 때 주식 투자로 큰돈을 벌기 시작한 김창일은 어머니 소유의 천안버스터미널 안에 있는 큼직한 매점을 임차료를 내는 조건으로 넘겨받아 대대적으로 보수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업가로 나섰다. 매점은 곧 백화점이 되고 체인 극장이 되고 훗날에는 1989년 신부동으로 이전한 천안고속터미널 안으로 재집결해 복합쇼핑문화시티로 확장된다.

    그러는 한편 30여 년 동안 3700여 점의 방대한 미술품을 수집한 컬렉터로 활동하면서 지금 김창일이라는 이름은 세계 최고 수준의 영향력 있는 컬렉터로 꼽힌다. 이러한 노력은 2014년 서울과 제주에 모두 다섯 곳의 미술관 개관으로 1차 귀결됐다. 바로 그 다섯 개의 미술관 중 하나가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다. 김수근의 공간 사옥을 현금 150억 원에 매입한 후 9개월에 걸쳐 리모델링했다.

    해답을 내면 문제가 도출되는 세상

    그 작업이 순탄치는 않았다. 건축가와 예술가에게 성소와 같은 곳이었으므로 일부 사람들이 경매 위기에 처한 공간 사옥을 문화재로 등록하고 공공기관이 매입해 건축박물관으로 전환할 것을 정부에 요청하면서 올해 2월 27일 등록문화재 586호로 지정됐다. 규정에 따르면 건립 50년 넘은 건물에 한해 등록문화재로 선정될 수 있는데, 공간의 특수한 가치는 그 제한을 뛰어넘은 것이다.

    이러한 등록 과정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 나름대로 의식한 김창일은 소유권을 확보했음에도 공간의 기본적인 조형성과 김수근의 작업실을 훼손하지 않고 리모델링했다. 백남준, 앤디 워홀, 바바라 크루거, 신디 셔먼 같은 현대미술의 이단아들이 그들의 작품 이상으로 복잡하고 모호한 구역들에 배치되었다.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는 곳에는 자기 자신을 오브제로 삼는 영국 미술가 마크 퀸의 ‘셀프’가 있다. 작가 자신의 두상에 자신의 피 4.5L를 채운 문제작이다. 작품의 물성이 지닌 특수함 때문에 항상 영하 23~24℃로 맞춰진 채 전시되며 혹시라도 전원이 차단되는 비상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이 작품 전용의 냉동고까지 있다. 그리고 건축계와 예술계에 약속한 대로, 김수근의 내밀한 개인 공간이었던 5층도 남겨두었다.

    김수근의 제자 장세양이 스승을 계승하되 스승을 뛰어넘고자 했던 바로 옆 유리 건물의 넓은 창가에 앉아서 생각해보니, 이 리모델링은, 숙제를 다 풀지는 못했지만(실은 우리 모두가 함께 풀어가야 할 숙제다), 이 장소와 건물이 품은, 다 풀지 못한 숙제가 무엇인지는 인식하는 듯하다. 해답을 제출하고 나면 또다시 문제가 도출되는 곳, 끊임없는 질문과 대답으로 이어지는 장소라는 점, 그 풀이 과정이 곧 흔적이 되어 적층된 의미로 형성된다는 것 말이다.

    ‘내’가 찾은 ‘나’의 길…어찌 여유롭지 않으리

    후원의 부챗살 골짜기마다 소박하면서도 거룩한 공간이 잇대어 서 있다.

    부채처럼 맞물려 접혀 펼쳐지다

    오전에는 쌀쌀했는데, 칼국수를 먹고 또 커피를 마셨더니, 몸이 따스해졌다. 밖으로 나와 다시 돈화문으로 가는데, 찬바람도 잦아들고 마침 햇살도 온기를 더했다. 토요일 오후라서 관광객이 더 불었는데도 기분이 산뜻해졌다. 궂은일을 도맡아 말끔하게 처리하는 네무스텍 이승종 대표가 창경궁 후원 관람 티켓을 사전에 다 확보해놓았기 때문에, 그것을 믿고 천천히 걸어도 되는 여유까지 더해진 까닭이다.

    이윽고 시간이 되어, 낙선재에서 담장을 따라 걸어 올라가니 후원으로 진입하는 언덕이 나왔다. 전문 해설사가 창덕궁 후원의 역사적 가치를 짧게 설명하고 주의 사항은 길게 설명했다. 제한된 인원이 제한된 시간에 제한된 곳으로만 걸어가야 하는 이유를, 그 사람은 정확하게, 그러나 다소 사무적으로 설명했다. 그래서 순례자들은 일순 긴장했다. 행여나 자기가 발이라도 헛디뎌서 귀한 문화유산을 망가뜨리게 되지 않을까, 벌써부터 염려하는 표정이었다. 아마도 그 효과를 위해 해설사는 흡사 민방위 훈련 교관처럼 말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내 긴장은 풀렸다. 참가자들은 모두 안전수칙을 잘 지켰고, 떠들지도 않았고, 경로를 이탈하지도 않았다. 해설사는 유순한 참가자들을 친절하게 이끌면서 꿈결과도 같은 길들을 보여줬다.

    북원, 비원, 내원, 상림원, 금원 등으로도 불리는 후원은 숲의 세계였다. 기품과 황홀함이 뒤섞인 숲이 있고, 그 안에 인공의 누각과 정자와 연못이 들어섰다. 왕과 왕실의 휴식처이자 왕자들이 학문을 연마하던 곳, 국왕이 논밭을 갈고 왕비가 누에를 치면서 백성의 근심을 나누고 눈빛 형형한 선비들을 등용하기 위해 과거 시험을 치르기도 했던 곳, 규장각을 세우고 왕실도서관을 마련해 격쟁을 벌였던 곳, 후원은 또 하나의 통치 세계였다. 부용지, 애련지, 반도지, 옥류천으로 이어지는 연못을 따라 펼쳐지는 부용정, 주합루, 애련정, 연경당, 관람정은 각각이 하나의 세계를 이루되 전체적으로 상서롭고 조화로운 세계를 또한 구축한다. 부채처럼, 후원의 영역은 맞물려 접혀서 각자의 의미와 소박한 경관을 갖되, 서로 이어져서 거룩하고 장대한 공간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경복궁의 장엄함, 덕수궁의 고즈넉함에 익숙했던 내 눈은 창덕궁과 특히 그 후원에 의해 일순간 복잡하고 미묘하며 다채롭고 변화무쌍하며 소박한가 하면 동시에 창대한 공간의 주제와 변주에 매혹당했다.

    아, 이런 세계가 가능한 것이구나! 경탄이 마음속에 머물지 않고 입 밖으로 거침없이 터져 나왔다. 나뿐 아니라 참가자 모두 한걸음 디디며 경탄하고 또 한걸음 디디며 교성을 냈다. 큰 산에 올라서 얏호! 하고 외치는 그런 호들갑이 아니라, 마치 연인의 애틋한 사랑처럼, 주합루를 올려다보며 으으으 경탄하고, 짙은 단풍에 또 아흐흐 교성을 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공간이 접힌 부챗살의 골짜기마다 이어졌다.

    나는 초등학생처럼, 다짐했다. 이번에는 가을을 봤다. 또 오리라. 겨울의 후원이 다를 것이며 봄의 후원이 다를 것이다. 눈이 오면 좋을 것이고 꽃이 피면 더 좋을 것이다. 후원의 사계를 놓치지 않으리라, 그런 다짐을 하면서 나는 자꾸 뒤를 돌아다봤다. 어딘가를 다니면서, 남겨둔 풍경이 눈에 밟혀서 자꾸만 뒤를 돌아본 기억, 몇 년 사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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