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호

“얘들아, 나를 치고 올라오란 말야”

리듬체조 ‘2인자’ 김윤희의 ‘금빛 마무리’

  •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22@naver.com

    입력2014-11-20 14: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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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월 1일 제주 제일고등학교에서 열린 전국체전 리듬체조 결선에서 마지막 곤봉 연기를 마친 직후 김윤희는 정든 매트 위에 얼굴을 묻었다. 인생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던 리듬체조의 마지막 무대에서 그는 ‘선배’ 신수지, ‘후배’ 손연재를 떠올렸다. 김윤희는 혼잣말로 이렇게 되뇌었다. ‘김윤희! 이젠 다 끝났어. 이젠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아도 돼. 넌 충분히 잘했어. 수고했다….’
    “얘들아, 나를 치고 올라오란 말야”
    동갑내기지만 ‘선배’로 불린 신수지와 초특급 스타로 성장한 손연재 사이에서 김윤희(23)는 그리 주목받는 선수가 아니었다. 화려한 이름표를 내세운 선후배 틈에서 그는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해내며 9년 동안 가슴에서 태극 마크를 떼지 않았다.

    가끔은 자신이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사람이 아닌가, 또는 리듬체조가 아닌 다른 종목을 했더라면 신수지와 손연재를 피해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실을 되돌릴 수는 없는 법. 그는 치열한 경쟁 체제에서 생존해나가는 법을 알았고, ‘넘사벽’ 손연재 대신 신수지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리듬체조에서 맏언니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2010년 광저우아시아경기대회에서 신수지, 손연재, 이경화와 함께 단체전 4위를, 2014년 인천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손연재, 이다애, 이나경과 팀을 이뤄 한국 리듬체조 사상 처음으로 은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뤘다.

    김윤희는 11월 초 제주에서 열린 전국체전 금메달을 끝으로 17년 선수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오른 무릎 수술, 발목 인대 파열, 왼 무릎 부상 등 온몸이 상처투성이지만, 마지막까지 도전을 멈추지 않았고, 스승과 후배들이 지켜보는 무대에서 뜨거운 박수를 받으며 연기를 선보였다. 그러곤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올라 파란만장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이제는 운동선수가 아닌 평범한 사람이라고 애써 강조하는 김윤희를 만났다. 섭섭함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홀가분해 보였고, “후회도 미련도 없다”는 말로 2인자로서의 선수 생활을 정리했다. 걸그룹 멤버를 능가하는 멋진 외모의 소유자 김윤희와의 대화는 즐거웠다.



    “가만히 있어도 ‘악’소리가 난다”

    ▼ 은퇴했다는 실감이 나나.

    “선수 생활하며 수차례 상상해본 장면이었다. 마지막 무대를 금메달로 장식해 의미가 더 컸다. 선후배, 선생님들이 모두 격하게 축하해주셨는데, 개인적으론 후회 없는 선수 생활이라 아쉬움이 전혀 없다. 그러나 나를 능가할 만한 후배가 나오지 않아 한국 리듬체조의 미래가 살짝 걱정된다. 후배들도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아직은 부족한 면이 많다. 국내 대회가 열리면 우승권 후보가 누구인지 궁금해야 하는 게 당연한데, 지금은 대회를 치르지 않아도 1, 2, 3위가 누구인지 다 안다. 만약 나의 마지막 무대에서 나 대신 후배가 금메달을 차지했더라면 더할 나위 없이 기뻤을 것이다. 진심이다. 그래서 마지막 날 후배 (이)다애에게 이런 얘길 했다. ‘다애야, 내가 금메달 따는 걸 당연시하면 안 된다. 네가 날 치고 올라와야 우리 리듬체조가 발전하는 거야’라고.”

    만약 손연재와 김윤희가 이번 전국체전에 같이 출전했다면 결과가 어땠을까.

    “내가 은메달이었을 거다. 연재가 부상도 있고 미리 잡혀 있던 행사가 많아 체력적으로 부담이 돼 전국체전 출전을 포기했다. 나와 후배들은 비교가 가능하지만, 연재와 나의 비교는 성립되지 않는다. 워낙 실력 차이가 크고, 연재의 영역과 내 영역은 클래스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선상에서 서로를 볼 수 없다. 이것은 솔직히 인정해야 하는 부분이다. 아시안게임 직후 연재가 체전에 출전하지 못할 거라고 말해서 내가 ‘네 덕분에 금메달 따겠다’고 했더니 연재가 ‘언니가 밥 한번 사요’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금메달인데 그까짓 밥을 못 사겠나. 더한 것도 살 수 있다고 말했다(웃음).”

    ▼ 김윤희가 은퇴해도 손연재가 있어서 한국 리듬체조가 그래도 버틸 수 있지 않나.

    “연재가 언제까지 활동할지 모르지만, 후배들과 연재의 실력 차이가 엄청나다. 연재 정도는 못해도 연재에게 자극을 주고 견제할 만한 선수가 나와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인다. 그래서 걱정이다. 더욱이 단체전 경기에선 연재만 잘한다고 좋은 성적을 낼 수 없다.”

    ▼ 리듬체조를 시작한 지 어느새 17년이 됐다고 들었다. 하지만 1991년생 선수가 은퇴하는 걸 보면 리듬체조의 선수 수명은 정말 짧은 것 같다.

    “더 하고 싶어도 몸이 말을 안 듣는다. 체전을 앞두고서도 어깨에 무리가 온 나머지 리본을 제대로 못 그릴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가만히 있어도 통증을 느끼는데 그걸 참고 4종목(볼, 후프, 리본, 곤봉) 연기를 다 소화했다. 겉으론 멀쩡해 보이겠지만, 속은 ‘할머니’나 다름없다.”

    ▼ 선수 생활하면서 부상으로 쓰러진 게 한두 번이 아니라고 들었다.

    “원래 오른쪽 무릎 수술을 했는데 왼쪽도 안 좋아 내일 병원 가서 MRI를 찍어야 한다. 왼쪽 무릎도 100% 수술 받아야 할 것 같다. 1년 전부터 수술을 권유받았지만 아시안게임 때문에 미루고 미루다 이 지경에 이르렀다. 운동을 심하게 한 후에 앉았다 일어나면 무릎이 제대로 펴지질 않는다. 무릎이 굳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발목도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만큼 통증이 심하다. 리듬체조 선수로 사는 17년 동안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기분이다. 여기저기 ‘악’ 소리만 난다. 가만히 있어도.”

    “아, 이게 뭐라고 그렇게 달려왔나”

    “얘들아, 나를 치고 올라오란 말야”
    ▼ 리듬체조 선수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은퇴 수순을 밟는 게 보통인데, 처음으로 실업팀에 입단해 월급을 받는 선수가 됐다. 은퇴 후에는 어떻게 되는 건가.

    “12월까지는 인천시청 소속이라 월급이 나온다. 1월 1일부터는 ‘백수’다. 앞으로 리듬체조 코치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할 계획이다. 부모님이 딸내미 뒷바라지 하느라 기둥뿌리 몇 개는 뽑았다. 평범한 집안에서 리듬체조 선수를 시킨다는 건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었을 텐데, 지금까지 아낌없이 투자했다. 이젠 내가 벌어서 부모님 뒷바라지를 해드리고 싶다. 그러려면 빚부터 갚아나가야 한다. 나 때문에 부모님이 빚을 많이 지셨다.”

    ▼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러시아 전지훈련을 자비로 다녀오기도 했다. 꽤 오래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이래저래 부담이 컸겠다.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좋은 성적을 내려고 러시아 전훈을 실행에 옮겼다. 지난해 12월에 갔다가 올해 10월에 완전히 돌아왔으니 약 10개월 동안 러시아와 한국을 오간 셈이다. 단체전에서 메달권에 들어가려면 연재 혼자 힘으론 역부족이다. 후배들에게 기대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고, 결국은 내가 해줘야 하는데 그걸 해내지 못할 경우 팀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자비로 러시아로 떠난 것이다.”

    ▼ 손연재 선수와 인터뷰할 때 들은 말로는 러시아 전지훈련 비용이 상당하던데….

    “한국에서 1000만 원 정도 갖고 가도 두 달 지나면 흔적조차 없었다. 훈련비, 병원치료비, 숙박비, 교통비 등 들어가는 돈이 한두 푼이 아니었다. 러시아에선 훈련 중 부상을 많이 당했다. 보험 적용이 안 돼 병원비로만 수백만 원씩 들어갔다. 돈도 돈이지만, 다른 선수들과 생활하는 게 버거웠다. 기숙사를 이용하다보니 방 하나에 2층 침대 두세 개가 있는 데서 지내야만 했다. 나보다 한참 어린 애들이 새벽 두세 시까지 잠을 안 자고 떠들었다. 내일 중요한 국제대회가 있다고 해도 수다를 그칠 줄 몰랐다. 하도 열 받아서 머리 위 침대를 발로 차기도 하고, 러시아 말로 욕을 한 적도 있었다. 욕을 하면 그제야 조금 잠잠해지곤 했다. 그들과의 생활이 제일 힘들었다. 먹는 것도 입에 맞지 않아 마트에서 초콜릿과 빵만 사다 먹었다. 살은 살대로 찌고 생활은 적응 안 되고….

    처음에는 김지희 코치(전 대표팀)에게 울면서 전화한 적이 많았다. ‘코치님, 저 여기서 죽을 것 같아요. 더 못 있겠어요. 저 돌아가면 안 될까요?’라고 말씀 드리면 매번 ‘조금만 더 참아라. 아시안게임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까 이왕 참은 거, 좀만 더 참아’라고 달랬다. 어휴,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간들을 어떻게 견뎠나 싶다. 전국체전 끝나자마자 러시아에 있는 현지 코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은퇴했다는 소식을 알렸더니 나더러 2016년 올림픽까지 뛰자고 제안하더라. ‘노 생큐’라고 했다.”

    ▼ 러시아 현지 선수들로부터 ‘왕따’ 당한 적도 있나.

    “연재도 러시아 생활 초반에는 선수들과 어울리지 못했다더라. 텃세나 왕따라기보다는, 애들이 동양 선수를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들 관심사에 우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다 코치로부터 칭찬받고 실력을 인정받는 것 같으면 그제야 우리를 제대로 쳐다본다. 실력을 통해 사람의 수준을 판단하려는 그들만의 스타일인 것 같다. 그 벽이 허물어진 후부터는 금세 친해졌다. 의사소통이 자유롭지 못하다보니 휴대전화로 번역기를 돌려 대화를 나누기도 했는데, 그렇게 해서는 서로를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상한 뜻으로 전달돼 오해를 받거나 내가 오해한 적도 있다.”

    인천아시아경기대회 리듬체조에는 김윤희(23·인천시청), 손연재(20·연세대), 이다애(20·세종대), 이나경(17·세종고)으로 구성된 대표팀이 출전했다. 단체전에서 한국은 총점 164.046점을 받아 은메달을 획득했다. 김윤희는 첫 볼 종목에서 던진 볼을 잡지 못하는 큰 실수를 범해 15.166점을 받았다. 원래 16점대를 목표로 했지만 부진했다. 이어 두 번째 후프 종목에서도 연달아 실수했다. 또다시 마무리 던지기 동작에서 후프를 놓친 것이다. 15.083점을 받으면서 김윤희는 회한의 눈물을 쏟았다. 그러나 김윤희는 세 번째 리본 종목에서 큰 실수 없이 마무리하며 16.183점을 획득했다. 마지막 곤봉 종목에서는 16.416점이라는 최고점을 끌어내며 투혼을 발휘했다. 막판 뒷심으로 고득점을 획득해 은메달 획득에 큰 기여를 한 것이다.

    ▼ 어려운 과정을 극복한 후 인천아시아경기대회를 맞았고,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손연재를 포함해 후배들과 함께 대표팀의 마지막 순간을 시상대에서 맞이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더라. ‘아, 이게 뭐라고, 이 은메달이 뭐라고, 그 고생을 하면서 지금까지 달려왔나’ 싶었다. 만약 내가 볼, 후프에서 실수하고 리본과 곤봉에서 그 실수를 만회하지 못했더라면 여론의 뭇매를 맞았을지 모른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한 덕분에 동생들에게 면목이 섰다. 무엇보다 딸이 아시안게임에서 메달 따는 걸 보고 싶어 했던 부모님에게 효도한 기분이 들었다. 은메달을 돈으로 환산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투자한 만큼의 결과를 얻어낸 것 같아 나 또한 충분히 행복했고 만족했다.”

    큰 키에서 나온 힘 있는 연기

    김윤희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리듬체조를 시작했다. 6학년 때 전국대회 6관왕을 휩쓸었고 최연소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발탁되며 리듬체조의 샛별로 자리매김했다. 하루 10시간 훈련은 기본이었다고 한다. 12시간을 꼬박 연습에만 매달린 적도 있었다. 중학교 때 잠시 주춤거리던 김윤희는 고등학교 입학 후 전국체전 동메달을 시작으로 2007~2009년 전국체전 메달을 모두 휩쓸었다. 세종대 진학 후에는 대학-일반부 1위를 독차지했다. 170㎝의 큰 키와 기다란 팔다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 있는 연기는 손연재와는 또 다른 매력을 풍겼다. 하지만 이런 그도 심각한 고민에 빠진 적이 있다. 국내 대회에서 날아다니던 그가 국제 무대에선 이상하게 점수를 내지 못했다.

    ▼ 리듬체조 팬들에게 김윤희는 ‘국내용’이란 인식이 있다. 국제대회에서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아시아경기대회에 집중했을 거란 생각도 해본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때 4위에 그치면서 깊은 슬럼프에 빠졌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구나 싶었다. 연습도 하기 싫었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다 오른쪽 무릎 수술을 받았고, 재활을 하면서 조금씩 심경에 변화가 일었다. 재활한 게 아까워서라도 이대로 선수 생활을 끝내면 안 되겠다 싶었다. 어쩌면 국내용이란 비난이 듣기 싫어 어려운 형편에 자비로 러시아 전지훈련을 감행했는지 모른다. 아시안게임에서 메달을 따면 적어도 국내용이란 소리를 더는 듣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 2012년 2월 오른 무릎 수술을 받고선 곧장 대표팀 선발전을 치르느라 수술받은 부위의 실밥이 터졌다는데 사실인가.

    “수술한 지 얼마 안 돼 대표팀 선발전이 열렸다. 1차는 협회에서 배려해줘 그냥 지나칠 수 있었지만 2차는 무조건 뛰어야만 했다. 어쩔 수 없이 완쾌되지 않은 몸 상태로 연습에 들어갔고, 연골을 꿰맨 실이 터지는 바람에 무릎에 물이 차서 퉁퉁 붓고 굽혀지지 않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결국 후배들에게 밀려 대표팀 탈락 위기에 내몰렸다가 협회에서 그동안의 성적을 점수에 포함시키면서 후보군에 올랐고, 마침내 태극 마크를 계속 달 수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후배들에게 밀려나는 기분을 맛봤다. 상당히 자존심이 상했다. 원래 지는 걸 싫어하는 편인데 후배들이 나보다 앞선 상황이 용납되지 않았다. 그 후 전국체전까지 악착같이 몸을 만들어서 결국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고 U-대회, 세계선수권대회 선발전에서 보란 듯이 다시 치고 올라가 이전 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연재에만 쏠린 관심 아쉬워”

    ▼ 리듬체조를 하면서 선배 신수지, 후배 손연재와 줄곧 경쟁 체제를 형성했다. 김윤희에게 손연재는 어떤 후배인가.

    “내가 (신)수지 선배와 (이)경화 언니는 이겨봤는데 (손)연재는 이기지 못했다. 그래서 연재를 이겨보고 은퇴하는 게 소원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다 지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연재가 볼을 놓쳤고, 그 볼이 밖으로 굴러갔다. 그때 우리 두 사람의 순위에서 내가 이겼다. 연재는 내가 목표로 삼을 수 있는 선수가 아니었다. 연재는 나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이었지만, 그런 대상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한테는 행운이었다.”

    ▼ 2012년 런던올림픽 5위, 2014년 인천아시아경기대회 개인전 금메달을 획득한 손연재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광고 모델로 나서며 경제적으로도 큰 도움이 됐을 거다. 같은 선수로서, 또 선배로서 부러운 점이 있었을 텐데….

    “당연히 부럽다. 부모님이 빚을 내 리듬체조를 가르쳤고, 지금까지 그 빚 속에 있지만, 연재는 부와 명예를 쌓았다. 전국체전에 연재가 출전하고 안 하고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연재가 나오는 해에는 많은 언론사 취재진이 몰려든다. 반면 연재가 출전하지 않는 대회는 썰렁함 그 자체다. 나보다 후배들이 더 서운해한다. ‘손연재가 아니면 리듬체조 선수도 아니냐’고 속상함을 토로한 적도 있다. 이런 부분은 분명 문제가 있다. 리듬체조 전체가 다 같이 발전해야 하는데 한쪽에만 심하게 쏠리는 현상은 다른 선수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연재 책임은 절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비인기 종목의 설움을 딛고 연재가 대중의 인기를 받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할 부분이다. 질투와 시기만 하지 말고 연재와 함께 리듬체조가 발전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어른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고민하면 좋겠다.”

    ▼ 손연재가 부러운 적도 있었겠지만, 안타깝고 안쓰러운 적은 없었나.

    “워낙 유명인이라 함부로 밖에 돌아다닐 수 없는 것은 마음 아팠다. 연재도 이 점에 대해선 많이 힘들어한다. 친구, 선후배들과 어울려 맛있는 것 먹으러 다니고, 사람들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를 느끼고 싶어 하지만, 연재 옆에 있다보면 그것이 불가능한 것인 줄 알게 된다. 하지만 연재는 그런 불편함을 감내하는 대신 생기는 것이 많지 않나(웃음). 내가 연재라면 충분히 감수할 것이다.”

    신수지와의 다툼

    ▼ 2011년 경기 고양시에서 열린 전국체전 리듬체조 일반부 경기에서 심판 판정과 관련해 해프닝이 있었다. 총점에서 신수지를 제치고 금메달을 획득했는데, 신수지가 자신의 SNS에 채점 과정에서 발표가 평소보다 늦어졌고 전광판 점수와 공식 기록지에 표기된 점수가 다르다며 심판 매수설을 제기했다. 그로 인해 한동안 파장이 상당했다.

    “그때 욕을 하도 많이 먹어서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를 정도였다. 그 일을 통해 새삼 사람들의 이중 잣대를 생각하게 됐다. 대중이 나에 대해, 수지 언니에 대해 언제부터 그렇게 관심이 많았던가. 아니, 나란 사람을 알기는 했던가. 정정당당하게 얻은 결과를 놓고 심판 매수설 운운하는 사람들에게 조금 서운했다. 하지만 언니 처지도 이해는 된다. 발표 과정이 매끄럽지 못했기 때문에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나. 이미 물은 엎질러졌는데. 당시에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잘 안 섰다. 힘들었던 순간이 기억난다.”

    사건이 커지자 신수지는 소속사를 통해 ‘전국체전이 끝난 직후 혼란스럽고 실망스러워 미니홈피를 통해 일부 과격한 표현을 사용하는 등 감정적으로 경솔하게 행동한 점을 깊이 반성하고 있다. 제 글로 인해 더 큰 잡음이 발생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고 공식으로 사과했다. 대한체조협회 또한 “점수를 다시 검수한 결과 조작은 없었던 것으로 결론났다”면서 “앞으로 대회 운영상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시스템 개선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히면서 사태는 일단락됐다. 하지만 이로 인해 상처를 받은 선수들의 마음까지 깨끗해진 것은 아닐 테다.

    ▼ 김윤희 하면 ‘2인자’ ‘넘버 2’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대학에서는 신수지, 대표팀에선 손연재와 비교해 그런 말이 나온 것 같은데….

    “부정은 안 하겠다. 그래서 좀전에 말하지 않았나. 은퇴하기 전 연재를 단 한 종목에서라도 이겨보고 싶었다고. 연재의 실수로 한 종목에서 앞서간 적은 있지만, 그렇다고 내가 연재보다 뛰어난 선수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2인자이든 넘버 2이든 난 그런 시선에 고정되지 않았다. 그걸 벗어나고 싶었다.”

    ▼ 다시 태어나 운동선수를 한다면 리듬체조를 택할 건가.

    “리듬체조는 지겨울 만큼 해봤으니까 새로운 스포츠에 도전해보고 싶다.”

    “얘들아, 나를 치고 올라오란 말야”

    김윤희는 9년 동안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축구선수와 사귀다 차였다, 하하”

    ▼ 리듬체조 선수들은 태릉선수촌에서도 인기가 많다. 외모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연재 외모는 따라갈 수가 없다(웃음). 선수촌에서 생활하면 다른 종목 선수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느낀다.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지금은 적응돼 불편함조차 느끼지 못한다.”

    ▼ 다른 종목 선수들로부터 ‘대시’를 받은 적 있었나.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정확한 숫자는 기억나지 않지만, 몇 번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타 종목 선수들과 사귀어본 적은 있다. 축구선수와 배구선수였다. 배구선수는 아주 짧게 만났고, 축구선수는 한 5개월가량 교제했는데 내가 차였다. 왜 차였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운동선수와의 교제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편안함이 있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서인지 무슨 얘기를 해도 대화가 된다.”

    ▼ ‘한국 리듬체조 국가대표 김윤희’란 타이틀을 벗었다. 지도자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겠지만, 17년간 리듬체조 선수로서 희로애락을 겪었다. 소감을 얘기해달라.

    “부모님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경제적으로 지원해주지 않았다면, 리듬체조 국가대표 김윤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여러 가지 사건·사고도 있었고, 좋은 일, 기쁜 일도 많았다. 겪을 만큼 겪었고, 버틸 만큼 버텨서 여기까지 왔다. 아주 홀가분하다. 제주에서 전국체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며 머리에 바르는 젤과 왁스 등 헤어스타일링 제품을 모두 버리고 왔다. 더는 진한 화장과 한 치의 흐트러짐을 허용하지 않는 머리 스타일을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걸 버리고 오면서 체조선수 김윤희도 떠났다. 내가 경험한 모든 것을 정리해 후배를 양성하는 데 쏟으려 한다. 선수로서는 넘버 2였지만, 지도자로선 1인자가 될 수 있도록 열심히 공부할 것이다. 많든 적든 날 응원해준 팬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엄마, 아빠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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