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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에세이

그를 조금 더 닮을 수 있다면

  • 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 겸 의료원장

그를 조금 더 닮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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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닥터 씰’ 같은 사람이 돼라”

내가 네팔을 생각할 때 언제나 떠올리는 의사가 한 명 있다. 나에게 깊은 감명을 준 의사인 설대위 박사다. 설대위(薛大偉)라는 외과의사는 한국인이 아니다. 1954년부터 1990년까지 무려 36년간 전주 예수병원에서 의료선교사로 활약한 미국인 의사 데이비드 존 실(David John Seel)의 한국 이름이 설대위다. Seel을 음차해서 설씨를 택했고 David를 음차해서 대위라는 한국 이름을 붙인 것이다.

설대위는 외과 수술로 명성을 날리던 미국 남부 뉴올리언스의 튜레인 의과대학을 수석 졸업하고 외과 의사의 길로 들어섰다. 당시 튜레인 의과대학은 외과 분야에서는 미국에서도 톱클래스에 속했다. 교수직을 제의받았던 미래가 촉망되는 젊은 의사였지만, 그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 땅을 찾아와 평생을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으로 헌신하다가 미국으로 돌아갔다.

설대위는 당시 한국의 의술 수준으로는 도저히 살릴 수 없는 환자들을 극적으로 회생시키는 드라마를 연출했다. 이런 신기(神技)와 헌신 탓에 전국에서 환자가 구름처럼 몰려왔다. 병원 복도와 계단까지 줄을 섰으며, 병원 주변 여관에는 대기 환자가 넘쳐났다. 그는 연일 계속되는 수술로 과로한 탓에 폐결핵에 걸리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종양 진찰실을 개설했고, 국내에서 처음으로 암 등록 사업을 펼쳤다. 대한두경부학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지냈으며, 최신 방사선 암 치료법도 소개했다.



나는 설대위 박사를 어릴 때부터 자주 만났다. 아버지가 전주 예수병원의 제1호 한국인 내과 전공의였고, 전문의가 된 이후에도 한동안 예수병원에서 근무했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때에 설대위 박사의 사택에서 놀던 기억이 생생하고, 내가 의대에 합격했을 때 누구보다 기뻐하던 모습도 잊을 수가 없다.

아버지는 자신도 의사였지만 나와 단둘이 있을 때면 어릴 때부터 “너는 커서 의사가 되어서 꼭 ‘닥터 씰’ 같은 사람이 돼라”라고 권면했다. 아버지는 평생을 살면서 설대위 박사 같은 완벽한 인간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의사로서 완벽한 실력과 헌신성을, 병원장으로서 경영적 수완과 사회적 리더십을, 신앙인으로서 겸손한 인격과 온화한 성품을 지녔고, 바이올린 연주를 비롯해 다방면에 뛰어나니 이보다 완벽한 인격체가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특권 누리는 이들의 자세

돌이켜보면 내가 외과의사가 된 것도, 어릴 적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게 된 것도, 그리고 내가 병원을 시작하면서 이주노동자 문제에 열성을 쏟은 것도, 네팔에 의료봉사를 가는 것도, 어쩌면 설대위라는 위대한 인간을 따라 배우려는 어릴 적부터의 갈망이 작동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정년퇴임을 하고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집에 ‘설대위’라는 한글 문패를 달고 한국인으로 살았다 한다. 미국에서 모금활동을 통해 돈을 모아 20억 원 상당의 최신형 암 치료기를 예수병원에 보내주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모아놓은 재산이 없어 노년에도 응급실 당직 의사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고 한다. 말년에는 치매를 앓았는데, 미국 병원 중환자실에서 한국말로 뭔가를 계속 말해 미국 의료진을 당황하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설대위 박사는 2004년 7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를 조금 더 닮을 수 있다면
이왕준

1964년생

서울대 의대 졸업, 인하대 석사, 서울대 박사(의학사)

‘청년의사’ 발행인, (사)한국의료수출협회 이사장, (사)한국이주민건강협회 희망의 친구들 부회장

인천사랑병원, 명지병원 이사장


설대위 박사와 같은 숭고한 삶을 살아간다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헌신과 숭고한 삶의 모습은 이제 세계 10위권의 무역대국으로 성장한 한국이 오늘날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 이 나라에서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은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생각해보게 하는 귀감이 된다. 존경하는 실 선생님, 보고 싶습니다. 선생님을 조금이라도 더 닮기 위해 노력해보겠습니다.

신동아 201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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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준 │명지병원 이사장 겸 의료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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