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호

[윤채근 SF] 차원이동자(The Mover) 11-2

바벨탑 신화의 진실

  • 윤채근 단국대 교수

    .

    입력2020-08-03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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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탁월한 이야기꾼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SF 소설 ‘차원 이동자(The Mover)’를 연재한다. 과거와 현재, 지구와 우주를 넘나드는 ‘차원 이동자’ 이야기로, 상상력의 새로운 지평을 선보이는 이 소설 지난 회는 신동아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편집자 주>

    1

    시인이기도 한 닥터Q는 특히 신화에 대해 말할 때 유난히 흥분했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도 등 거의 모든 고대 문명은 신들의 전쟁과 인류 멸망에 대한 신화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 원형을 찾아 연대기적으로 소급해 올라가다 보면 수메르의 대홍수 신화와 만나게 되죠. 후대의 성경에 나타나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고개를 갸웃한 예림이 물었다. 

    “그럼 수메르 신화가 역사적 사실을 기록했단 말씀이세요?” 

    그때 민서가 끼어들었다. 

    “아니에요, 교수님. 역사적 사실을 우화처럼 윤색한 거예요. 핵심은 선과 악, 밝음과 어둠을 대표하는 두 종류의 신들이 전쟁을 벌였다는 것, 그리고 인류가 그런 신들의 전쟁에 개입하거나 특정 신들에게 도전한 결과 멸망당했다는 것, 이 두 가지 플롯인 거죠.” 



    와인 여러 잔을 비운 닥터Q가 볼이 발그레 물든 채 말했다. 

    “정확합니다! 신석기 혁명을 통과한 인류는 폭발적으로 문명화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청동기나 철기라 부르는 후대 문명이 출현하기 이전에 이미 놀라운 수준의 초고대 문명이 형성돼 있었죠. 신화로만 남은 아틀란티스 문명도 그중 하나였겠죠? 어쨌든 대홍수 이후, 그러니까 기원전 4000년경 재건된 수메르 문명이 그 후계자였을 겁니다.” 

    머리를 앞으로 내민 예림이 나지막한 소리로 닥터Q에게 물었다. 

    “그럼 대홍수는 왜 일어났나요?”

    2

    수메르 사람들은 대홍수가 인류의 오만이 불러온 참극이라고 믿었다. 문명이 느닷없이 붕괴한 원인을 신들의 분노에서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들은 신들의 영역을 넘보던 조상이 금지된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넘어서는 안 될 선을 침범했을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바벨탑 신화가 그렇게 탄생했다. 

    신들이 강림해 오는 곳으로 여겨지던 대기권을 향해 쌓아올린 바벨탑은 결코 인류의 오만에서 비롯된 건축물은 아니었다. 그건 자신들의 고등 지성을 인류에게 이식해 찬란한 문명을 이루도록 도와준 신들에게 경배하는 장소였다. 신들이 분노할 이유가 없었다. 바벨탑 붕괴와 대홍수는 신들 사이의 전쟁이 초래한 비극으로 인류와 전혀 무관한 사건이었다. 

    지구에 지적 생명체를 처음 파종한 건 이 행성에 처음 들른 초기 이동자들이었다. 그들은 인류가 싹트고 번성하는 장관을 바라보며 만족했고, 곧 다른 행성으로 떠나버렸다. 문제는 그 뒤에 지구로 되돌아온 그들 중 일부였다. 두더지로 변화한 그들은 인류를 급격히 진화시켜 초고대 문명을 건설하게 만든 뒤 자멸하도록 이끌었다. 

    진화의 계단을 훨씬 건너뛰어 감당하기 어려운 고등 기술을 갖게 된 인류는 마침내 파국을 향해 내달렸다. 그들은 각 지역의 문명권으로 쪼개져 치열하게 경쟁하다 서로를 공격했으며, 행성을 파괴할 양자무기까지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지각판을 뒤흔들 정도로 참혹했던 이 전쟁을 끝낸 건 추격자들이었다. 

    태양계에 비정상적 차원 증식이 발생했음을 탐지한 추격자들은 지구에 도착해 사태를 수습했다. 후세 인류에게 신들의 전쟁으로 기억될 두 진영 간의 대충돌을 거쳐 두더지들을 몰아낸 추격자들은 지구를 원래의 진화 단계로 되돌려놓기 위해 과격한 수단을 사용했다. 기형적으로 발달한 기술력을 제어하기 위해 과학 시설들을 파괴했고, 신들을 영접하던 바벨탑을 부쉈으며, 대홍수를 일으켜 지난 역사의 흔적마저 지워버렸다.

    3

    “수메르 문명의 등장을 끝으로 차원 증식은 둔화됐고 시공간이 안정됐죠. 그렇습니다! 수메르 문명의 출현 역시 지구 역사의 원본이란 관점에서 보면 차원 증식 현상이었던 것이죠. 바로 분기점 말입니다!” 

    말을 마친 닥터Q가 종업원을 불러 와인 한 병을 더 주문했다. 핸드백에서 사탕을 꺼내 입에 문 예림이 민서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추격자들이 왜 수메르 문명은 남겨뒀나요?” 

    시끌벅적 떠들며 거리를 지나가는 대학생 무리를 바라보던 민서가 대답했다. 

    “수메르의 문명 수준이 지구의 차원 임계점까지는 위협하지 않아서였을 거예요. 고등 과학기술은 대부분 이미 파괴됐고, 과거 초고대 문명에 대한 기억조차 신화로만 남게 됐으니까요.” 

    새 와인을 잔에 따르던 닥터Q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인류사에 기이한 문명 퇴보 현상이 나타난다는 건 잘 아시죠? 즉 수메르 문명과 그 영향을 받은 고대 문명이 그 이후에 등장한 문명보다 어떤 면에선 더 선진적입니다! 초고대 문명이 남긴 흔적들, 그러니까 이집트 아비도스 사원 벽화와 남미 콜롬비아의 고대 시누 문명 세공품들은 최첨단 비행선을 묘사하고 있죠. 인도와 중근동 고대 신화엔 신기한 우주 무기도 자주 등장하지 않습니까? 구약 성경 에스겔서가 묘사한 비행체도 그렇고.” 

    사탕을 입안에서 굴리며 예림이 다시 물었다. 

    “그건 알겠어요. 그런데 대홍수 이후 두더지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4

    두더지들은 지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게릴라처럼 차원 곳곳으로 은밀하게 흩어진 그들은 노골적인 대규모 차원 증식이나 대멸종 작전을 포기하고 파상적인 국지전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들은 숙주에 육화돼 지구 멸망의 시나리오를 반복해 실행하는 한편, 소규모 차원 증식도 집요하게 시도했다.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추격자들 역시 활발하게 육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윤채근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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