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호

卒記

‘원순씨’로 불린 정치인 박원순의 죽음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20-07-10 11: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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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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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변호사, 시민운동가, 행정가, 그리고 정치인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이 향년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2011년 10월부터 서울 시정을 책임졌던 그의 ‘역대 최장수 서울시장’ 기록도 마무리됐다. 

    경찰은 박 시장이 7월 10일 오전 0시 1분 서울 성북구 북악산 성곽길 인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고 밝혔다. 종로구 가회동 서울시장 공관을 나간 모습이 폐쇄회로(CC)TV에 찍힌 지 약 14시간 만이다. 그의 빈소는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고, 장례식은 서울시민장으로 5일 동안 치러진다. 발인은 13일이다.

    인권변호사 출신의 시민운동가

    1956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난 박 시장은 1975년 서울대 재학 시절 유신 체제에 맞서 학생운동을 하다 구속, 제적됐다.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대구지방검찰청 검사가 됐으나 6개월 만에 사표를 내고 변호사 생활에 뛰어들었다. 

    그의 이름이 알려진 건 1985년 경기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피해자인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 변호인단에 참여하면서부터다. 이후 박 시장은 ‘구로동맹파업’ ‘고(故) 박종철군 고문치사’ 등 굵직한 시국사건 변론을 맡았고, 1988년 결성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창립 회원으로 활동했다. 

    인권변호사로 명성을 얻은 박 시장은 이후 한국 시민운동의 산파로 나섰다. 1994년 그가 주도해 만든 참여연대는 재벌개혁을 위한 소액주주 운동, 부패 정치인 낙천낙선 운동 등을 진행하며 자본 및 권력 감시 분야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시민단체로 성장했다. 



    2000년대 이후 박 시장이 힘을 쏟은 건 기부와 나눔이라는 새로운 어젠다를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는 일이었다. 이를 목표로 ‘아름다운 재단’과 ‘아름다운 가게’를 설립해 2009년까지 상임이사를 맡았다. 동시에 2006년 시민 아이디어를 기초로 정책 대안을 제시하는 ‘희망제작소’를 세우는 등 사회 개혁 운동도 계속했다. 

    인생의 여러 과정을 통해 ‘변호사’ ‘사무처장’ ‘이사’ 등 여러 직함을 얻게 된 박 시장이 가장 좋아한 호칭은 ‘원순씨’였다. 그는 어떤 모임에서든 자신이 ‘원순씨’로 불리며 수평적 네트워크의 한 구성원이 되길 바랐다.

    역대 최장수 서울시장

    시민 사회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기획력과 왕성한 활동력 덕에 대중적 명성을 얻은 박 시장이 정치에 뛰어든 건 2011년 10월,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중도 사퇴로 서울시장 재보궐선거가 치러졌을 때다. 안철수 당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양보’가 화제가 됐던 이 선거에서 당선한 그는 이후 2014년, 2018년 선거까지 모두 승리해 사상 최초의 ‘3선 서울시장’ 기록을 세웠다. 

    박 시장은 종종 “조선 시대 서울시장 격인 한성판윤부터 따져 봐도 저보다 오래 서울시장을 한 사람은 없다” “9년째 서울시장을 하다 보니 ‘저 분은 직업이 서울시장인가’ 생각하는 분도 있는 것 같다” 같은 농담을 던지곤 했다. 7월 6일 진행한 세 번째 임기 2주년 기자간담회에서 자신이 보냈던 ‘시장의 시간’을 “도시 가장자리로 밀려났던 많은 시민들의 삶과 꿈을 회복시키는 시간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박 시장이 아끼는 별명은 ‘원또’였다고 한다. ‘원순씨가 또 해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인생의 여러 과정에서 도전과 혁신을 거듭했던 그는, 많은 이가 마지막 도전으로 여겼던 차기 대선에 나서기 전 스스로 삶을 마무리하게 됐다. 

    한편, 7월 8일 서울시 직원이 박 시장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경찰에 고소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 시장이 사망하면서 이 사건은 ‘공소권 없음’으로 처리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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