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호

‘임영웅 덕질’부터 포레스텔라까지…오팔(OPAL)세대의 열정

[사바나] ‘알바’해 13만 원 티켓 구입… ‘중년 덕질’ 시대

  • 장윤서 고려대 경제학과 4학년

    chang_ys@naver.com

    입력2020-07-14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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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영웅 생일 축하 위해 홍대 앞에 모인 중년 팬덤

    • 자녀 성인되자 느낀 허탈감, 포레스텔라 보며 풀어

    • BTS 공연 티켓팅하며 자녀세대 문화 이해

    • 팬 카페서 할인 정보 공유·특가 티켓 구매

    *사바나 초원처럼 탁 트인 2030 놀이터. 밀레니얼 플레이풀 플랫폼. 이 기사는 20대의 눈으로 본 ‘중년의 덕질 문화’입니다.


    서울 마포구 홍대 인근 한 카페에서 열린 가수 임영웅 생일 이벤트. [장윤서 제공]

    서울 마포구 홍대 인근 한 카페에서 열린 가수 임영웅 생일 이벤트. [장윤서 제공]

    6월 14일 오후 서울 마포구 홍익대 인근 한 카페에 사람들이 모였다. 가수 임영웅의 생일을 축하하는 이벤트가 열린 곳이었다. 일정 금액 이상의 음료를 구매하면 그의 얼굴이 그려진 컵홀더와 부채를 받을 수 있었다. 카페를 찾은 팬들은 전시된 사진과 기념품을 촬영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눴다. 한 팬은 대전에서 올라와 시간이 없다면서 또 다른 카페로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팬 이벤트 같지만, 카페를 가득 채운 팬의 대부분이 중년이라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카페 대표 임성환 씨는 “예전에도 팬 이벤트를 많이 진행했지만 40대 이상 고객들이 방문한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이 카페에만 4일간 1000여 명의 팬이 방문했다. 이들은 기념품을 받기 위해 비교적 높은 가격인 1만 원대의 음료를 구매했다. 중년들의 열성적인 팬 활동이 소비를 이끌었다.

    ‘오팔 세대’의 열정

    50~60대의 취미생활과 소비가 주목받고 있다. 통계청 장래인구추계에 따르면 기대 수명이 계속 늘어나 올해 83.2세에 달할 전망이다. 기대 수명이 늘어난 만큼 중·장년층이 정신적, 신체적으로 젊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들은 ‘액티브 시니어’ 혹은 ‘오팔(OPAL)세대’로 불린다. 오팔은 활기찬 인생을 살아가는 신노년층(Old People with Active Lives)의 약자다. 베이비부머를 대표하는 ‘58년생 개띠’ 또래를 의미하기도 한다. 활동 범위 역시 팬클럽 활동부터 문화·예술, 스포츠까지 다양하다.

    6일 11일 서울의 한 스크린골프장에서 만난 세 명의 여성도 ‘액티브 시니어’였다. 서로 자세를 교정해주는 모습이 프로선수와 다를 바 없었다. 자못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스크린 위로 ‘라벤다’ ‘로즈마리’ ‘자스민’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세 여성의 닉네임이다. 



    로즈마리로 불리는 주부 김현일(67) 씨는 골프 외에도 사진을 찍는다. 1월에는 아이슬란드와 모스크바로 출사(밖으로 나가 촬영하는 것)를 나섰다. 오로라가 선명하게 찍힌 사진을 보여주며 “운이 좋았다”고 했다. 김씨의 스마트폰에는 전문가 수준의 사진이 아이슬란드, 러시아, 백두산 등 장소별로 수백 장씩 저장돼 있다. “노후를 잘 보내기 위해 사진을 시작했다”는 그는 평생교육원에서 만난 동호인들과 매주 전국을 다닌다. 지난주만 해도 남해에 다녀온 참이었다.

    모터사이클, 스노보드와 같이 레저 스포츠를 즐기는 중년들도 있다. 자영업을 하는 안정훈(59) 씨는 주말이면 모터사이클 로고가 크게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메탈 팔찌를 착용한다. ‘레이서’라는 닉네임으로 모터사이클 동호회에서 활동하는 그는 “바이크를 타는 동안은 현실을 잊을 수 있다”고 했다. 

    박용현(55) 씨는 겨울마다 스노보드를 탄다. 매년 겨울 시즌권을 구매해 일주일에 두 번씩 스키장을 찾는다. 박씨는 “스노보드의 매력은 속도감”이라면서도 “요즘에는 나이를 생각해 무리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중년들이 취미생활에 빠지게 된 이유는 다양하다. 안씨와 박씨는 “스트레스 해소가 목적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이중 박씨는 소방관으로 일한다. 사고 현장을 다니고 교대 근무를 하면서 받는 스트레스가 크다고 했다. 그는 “퇴근하고 집에 오면 지쳐서 자고 싶지만, 그러면 오히려 하루가 축 처진다. 피곤해도 나와서 운동하고 밤에 푹 자는 게 좋다”고 했다.

    서울 공연은 ‘올출’, 부산 공연은 KTX로

    안정훈(59) 씨와 그의 할리 데이비슨. [장윤서 제공]

    안정훈(59) 씨와 그의 할리 데이비슨. [장윤서 제공]

    ‘덕질’이나 취미생활에 나서는 것은 공허함을 풀기 위한 목적이 컸다. 크로스오버 그룹 포레스텔라의 팬인 박성조(53) 씨는 “자녀를 키우는 동안 내 생활이 없었다”고 했다. 아들을 학원에 데려다주고, 또 데려오는 것이 일상의 전부였다. 자녀가 성인이 되고 대학에 가자 허탈감을 느낀 그는 음악에서 새로운 즐거움을 찾았다. 지금은 서울에서 하는 공연은 ‘올출(한 번도 빠지지 않고 출석한다는 말)’한다. KTX를 타고 부산까지 원정할 정도로 활동적이다. 박씨는 첫 팬 미팅에서 좋아하는 가수와 악수했을 때를 떠올리며 “너무 떨려 소녀로 돌아간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건강관리를 위해 취미활동을 시작한 중년도 많았다. 고등학교 교사 박태윤(60) 씨는 지난해 심장판막 수술을 받은 후 의사의 권유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평일에는 집부터 학교까지 8㎞ 거리를 자전거로 출‧퇴근한다. 주말에는 춘천, 여주까지 100㎞ 이상도 달린다. 쉽게 숨이 차오르던 과거에는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박씨는 “자전거를 탄 후 심폐기능이 향상된 걸 느낀다”고 말했다. 주부 정옥자(48) 씨는 배드민턴을 하며 88치수에서 66치수가 됐을 정도로 다이어트 효과를 봤다고 했다. 

    취미생활은 가족관계의 윤활유 역할도 한다. 주부 박해정(57) 씨는 “골프를 시작한 후 신혼으로 돌아간 것 같다”고 말했다. 나이가 들며 부부간 관계가 소원해졌는데, 남편과 같은 취미를 즐기며 함께 하는 시간이 늘고 대화도 많아졌다. 

    박성조 씨 역시 취미생활 덕분에 자녀와 관계가 두터워졌다. 이전에는 20대인 딸이 공연이나 뮤지컬에 돈 쓰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팬 활동을 시작한 이후에는 함께 공연을 보러 다닌다. 박씨는 “딸이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후 대화할 기회가 적었다”면서 “주말에 공연을 핑계로 딸과 데이트를 한다”고 밝혔다. 부모님의 권유로 골프를 치기 시작한 대학생 김예진(25) 씨는 “아빠와 둘이 연습장도 가면서 많이 가까워진 것 같다”고 말했다. 

    방탄소년단(BTS)의 팬인 김영미(53) 씨는 서울 공연 티켓을 구하기 위해 두 딸과 PC방을 찾았다. 비록 티켓팅에는 실패했지만 젊은 세대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작년에는 딸과 딸의 친구들과 함께 BTS 공연을 관람했다. 같은 관심사를 갖고 있으니 자녀는 물론 그 친구들과도 스스럼없이 대화한다고 했다.

    “취미가 또 다른 취미 낳는다”

    스노보드를 즐기는 박용현(55) 씨. [장윤서 제공]

    스노보드를 즐기는 박용현(55) 씨. [장윤서 제공]

    박용현 씨는 취미생활을 갖는 데 주저하는 중년들에게 “주변에서부터 시작하라”고 조언했다. 어릴 적에 해본 경험이 있거나 하고 싶었던 취미부터 시작하라는 것이다. 스노보드 이전에 볼링, 산악자전거, 낚시 등 다양한 취미를 경험해본 그는 “이것저것 해보면서 자신한테 맞는 취미를 찾는 것이 좋다”고 덧붙였다. 

    박해정 씨는 “취미가 또 다른 취미를 낳는다”고 말했다. 박씨는 골프를 하며 만난 사람들의 권유로 최근 사진을 시작했다. 그는 취미생활을 하며 인간관계는 물론 관심사도 확장됐다고 했다. 박씨와 함께 골프를 즐기는 정옥자 씨는 골프로 시작해 게임에 빠졌다. 게임을 하다 보니 기존의 모바일 골프 게임은 실제 골프의 규칙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정씨는 직접 게임을 만들기 위해 국비 지원이 되는 게임 프로그래밍 수업을 알아보고 있다. 

    물론 금전적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 장비구매, 시설이용, 모임회비 등 지출이 적지 않다. 박성조 씨는 회별 13만 원을 넘나드는 공연 티켓은 중년에게도 부담스럽다고 했다. “생활비를 내 취미에 쓰는 것은 미안한 일”이라는 그는 베이비시터로 일해 번 돈을 취미생활에 쓰고 있다. 박해정 씨도 같은 이유로 스크린골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원래 다니던 곳인 데다가 손님들과도 말이 통하니 일이 즐겁다고 느낀다. 

    아르바이트가 아니더라도 비용을 줄이는 방법이 있다. 박용현 씨는 중고거래를 추천했다. “스노보드만 해도 좋은 제품을 구매하려면 300만 원 넘게 써야 한다”며 “인터넷 중고장터에서 같은 제품을 3분의 1 가격에 살 수 있다”고 말했다. 박태윤 씨는 유튜브 동영상을 보고 자전거를 직접 수리한다. 부품 값보다 수리비가 더 많이 들기 때문이다. 

    공연 등 문화생활을 취미로 하고 싶다면 할인 정보를 알아두는 것이 좋다. 박성조 씨는 “소셜커머스에 가끔 특가로 공연 티켓이 올라온다”며 “공연장에서 좋은 좌석만 고집하는 게 아니라면 경제적인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박씨는 팬 카페에서 회원들과 할인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하며 저렴한 가격에 뮤지컬 티켓을 산다. 

    중년들이 취미생활을 즐기는 모습은 때로는 20대보다 열정적이었다. 취재를 마칠 무렵 박씨는 20대인 기자와 대화하며 “젊은 에너지를 얻었다”고 말했다. 젊다는 건 무엇일까. 100세 시대를 맞이하는 지금, 젊음은 더 이상 나이에서 오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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