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호

남편에게 배란일 알리지 말고 리비도 따르라

[난임전문의 조정현의 생식이야기]

  • 난임전문의 조정현

    입력2022-04-13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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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트레스가 심하면 배란일이 바뀔 수 있다. [Gettyimage]

    스트레스가 심하면 배란일이 바뀔 수 있다. [Gettyimage]

    “이상하게 그날마다 야근 아니면 출장을 가게 되더라고요. 그렇지 않으면 집안에 일이 생겨서 분위기가 안 나고요. 평소에도 파김치가 된 채 퇴근해 침대에 눕자마자 기절한 듯이 잠들기가 일쑤고….”

    “난임 전문병원에 다니기가 너무 힘들어요. 시술 한 번 하려면 병원에 7~8번은 가야 하는데 그때마다 휴가를 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죠. 난임인 직원들이 병원에 다녀올 때는 점심시간을 1시간만 더 사용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회사 인근 병원에 다닐 수 있거든요.”

    난임에 이르는 원인은 많고 많다. 생식 욕망이 거세된 듯 사는 요즘 젊은이의 생활을 들여다보면 이해되는 부분도 없지 않다. 이들에겐 친구와의 추억과 우정 쌓기보다는 학업 성취, 연애보다 일자리 찾기, 결혼보다는 안정적 경제 기반 마련, 출산보다는 내 집 마련이 시급하다. 뭐든 빨리 이뤄내야 한다는 성취 중독에 빠져 남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고군분투하듯 살아가고 있다. 이 같은 생활 패턴과 문화 속에서는 리비도(성욕)가 생기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비단 팍팍한 현실 때문만은 아니다. 젊은이들의 생식 욕망이 사그라든 또 다른 이유는 ‘넘쳐남’에 있다. 먹을거리부터 각종 놀이문화에 이르기까지 즐길 게 차고 넘친다. 리모콘을 들고 손가락만 움직이면 거실에 걸린 대형 스크린으로 언제든 영화를 골라가며 볼 수 있는 세상이다. 사랑하는 연인과 극장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 암표를 구하던 시대의 젊은이들과 같을 리가 없다. 영화 취향이 다르면 각자의 전자기기(스마트폰 등)를 이용해서 각자 볼 수도 있다.

    도통 외로울 겨를이 없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설령 혼자라도 외롭지 않다는 이들이 많다. 부르면 대답하고, 물으면 답해 주는 인공지능 음성인식 서비스 덕에 혼자 살아도 동거인이 있는 것 같다고 한다. 젊은 부부들은 신혼인데도 서로 다른 공간에서 각자의 일상을 보내는 것이 대수롭지 않다고 말한다. 좁은 공간에서 지지고 볶으며 살던 아날로그 세대 부부들은 궁금해진다. 부부가 각자의 공간에서 교감 없이 지내면 계획 임신을 어떻게 준비할까. 배란일을 계산해 딱 그때만 만난다는 부부가 적지 않다.



    본능에 충실하자

    난임 전문의로 35년 이상 진료하면서 ‘임신’에 대해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을 알게 됐다. 정자, 난자, 배아를 비롯해 자궁 상태도 중요하지만 임신의 성패는 사랑과 운명이 결정한다는 것이다. 남녀 모두 임신에 연연하지 않고 리비도의 좌표대로 본능에 충실하며 사랑하는 행위를 열심히 하면 임신 확률이 높아진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러다 보면 자궁 내로 진입한 정자가 뜻밖에 배란이 된 난자와 극적으로 수정하게 되는 것이다. 교과서처럼 그날(배란일)만 따져서도 안 된다.

    그래서 필자는 자연임신을 시도하려는 여성에게 “남편에게 배란일을 되도록 알리지 말고 행사를 도모하라”고 귀띔한다. 하고 싶고 잘하는 것도 멍석을 깔아놓으면 못하는 법이다. 남성에게 성욕은 충동적이거나 즉흥적일 때 훨씬 더 짜릿하지, 달력 숫자에 동그라미 그려져 있는 걸 보면 사그라들 수 있다. 강박관념 앞에서 사내의 심벌은 죽을 수밖에 없다. 사랑을 갈구하는데 시험 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계획 임신을 원하는 아내의 다이어리에 표시된 하트 모양이 남성에게는 기다려지는 이벤트가 아니라 마치 ‘임신 수능’ 시험 날처럼 여겨질 수 있다.

    임신을 기다리는 여성 입장에서는 ‘배란일’ 계산에 목을 매게 되지만 사실 배란일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생리주기가 28일인 여성의 배란이 생리로부터 14일째라는 공식은 교과서식 계산에 불과하다. 직장 일에 지치고 시달리면 스트레스 때문에 배란이 규칙에서 어긋날 수 있다. 몸과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예사롭게 틀어질 수 있는 것이 배란이다.

    따라서 임신 성공에 얽매이지 말고 리비도에 의해 부부관계를 해야 한다. 임신은 ‘비 온 뒤에 핀 무지개’와 같다. 대기 중 수증기에 의해 태양광선이 굴절, 반사, 분산되어 무지개가 나타나는 것처럼 여러 조건(타이밍, 건강한 난자와 정자, 자궁 환경 등)이 맞아야 임신이 된다. 이 같은 조건은 계획하고 계산한다고 해서 갖출 수 있는 게 아니다.

    요즘은 열 쌍 중에 일곱 쌍이 맞벌이 부부라고 한다.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도 고된 업무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긴장과 스트레스야말로 인간의 생식 욕구를 사라지게 만드는 주범이다. 필자를 찾는 여성 대부분이 직장에 다닌다. 그들은 늘 시간과 싸운다. 난임 치료가 시작되면 한 번의 시술(시험관아기시술)을 위해 여러 차례 병원을 방문해야 하는데, 난임 휴가 3~4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또 상사 눈치 보며 밀린 일을 몰아치듯 해내느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터.

    스트레스는 난임을 유발하는 크나큰 이유 중 하나다. 연일 긴장한 탓에 스트레스호르몬 수치가 높은 상태로 유지되면 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으로 이어지는 스트레스호르몬 축의 항진에 의해 혈압이 올라간다. 그러면 중요 장기인 뇌, 심장, 골 근육계에 많은 혈류가 가지만 생식기에는 혈류가 크게 감소하게 된다. 즉 뇌하수체–난소–자궁으로 이어지는 생식호르몬 축의 기능이 약해져 배란장애, 월경불순, 월경량 감소 같은 증상이 나타난다. 남성도 예외가 아니다. 스트레스로 인해 시상하부–뇌하수체–고환에 이르는 생식호르몬 기능이 약해진다. 또한 고환에 혈류가 감소함에 따라 정자 생성 기능이 저하되고, 운동하는 정자 수가 줄고, 항산화 작용이 약해져 정자 DNA 손상을 초래할 수 있다.

    국가출산육아책임제 검토할 때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난임 치료를 받은 여성 임금노동자 10명 중 4명은 난임 시술 과정에서 퇴사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난임 치료 휴가가 있지만 주변에 알리기 싫어 사용하지 않는 직장인이 많다. 2018년 근로기준법상 도입된 ‘법정휴가’로 유급 난임 휴가를 쓸 수 있지만 고작 3일이다. 앞으로 7일로 확대된다고 해도 치료 기간이 명확하지 않고 길어질 가능성이 있어 ‘있으나 마나 하다’고 하소연한다. 1000만 원이 넘는 치료비를 자비 부담해야 하는 것도 문제지만, 병원에 마음 편하게 다니기 어려운 여건 또한 임신 포기를 부추긴다. 그래서인지 난임 치료를 위한 휴가 기간을 연간 최장 90일까지 확대하자는 어느 국회의원의 개정안 발의 소식이 여간 반가울 수가 없다.

    어떻게 하면 이 땅에 젊은이들이 사랑 타령을 하게 만들고, 그러다가 덜컥 애가 들어섰다고 하소연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 정부의 노력에 큰 변화가 필요하다. 출산 이후 누릴 수 있는 혜택(육아휴직, 교육비 지원 등)도 중요하지만 임신을 하게끔 만드는 제도적 기반부터 닦아줘야 한다. 우선 난임 휴직을 떳떳하게 할 수 있는 분위기, 난임 치료를 위해 일과 중 외출이 허락될 정도로 유연한 문화 등이 사회 전반에 자리 잡아야 한다. 정부는 임신, 육아, 교육 등 생활 전반에 각종 혜택을 주는 국가출산육아책임제를 검토해 봐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20대 대통령 당선자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조정현
    ● 연세대 의대 졸업
    ● 영동제일병원 부원장. 미즈메디 강남 원장. 강남차병원 산부인과 교수
    ● 現 사랑아이여성의원 원장
    ● 前 대한산부인과의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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