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호

사돈이던 삼성·LG 창업주가 등 돌린 사연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㉗]

환갑의 호암은 왜 전자사업에 뛰어 들었나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2-04-02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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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製 분해 뒤 사진 찍어 설계도 그리며…

    • TV를 마분지로 포장해 팔던 시절

    • 시계 수리공을 비디오 기술자로 쓰다

    • 사업가의 세계에서는 가족보다 시장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오른쪽)와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주가 1983년 11월 서울 중구 태평로 삼성본관 호암 집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오른쪽)와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주가 1983년 11월 서울 중구 태평로 삼성본관 호암 집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삼성전자에서 종합기술원장, 전략기획실 신사업팀장, 최고기술책임자(CTO)를 역임한 임형규 전 사장은 반도체 기술 개발의 산 증인이다. 그가 삼성전자에 들어가 반도체 개발에 참여하게 된 초기 상황을 듣다 보면 당시 모습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의 말이다.

    “서울대 공대 4학년이던 1975년 가을 학과 게시판에 ‘한국 반도체’라는 회사에서 두 명을 선발해 한국과학원(1981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와 통합돼 현재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된다)과 산학 연계로 취업과 석사 공부, 병역특례까지 제공한다는 공고문이 붙었습니다.

    경기 부천에 있는 공장 견학을 시켜준다고 해서 가봤는데 외관도 깨끗하고 구내식당  음식도 깔끔했습니다. 앞으로 반도체가 유망할 것이고 삼성에서 최근 이 회사를 인수해 인력을 육성하려 한다는 설명도 있었습니다. 조건이 워낙 좋다 보니 경쟁률이 매우 높았는데 다행히 합격해 이듬해 1월  한국반도체 입사와 한국과학원 석사과정 진학을 동시에 하게 됩니다.

    이 대목에서 제가 짚고 싶은 것은 당시 힌국과학원은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설립 3년째를 맞고 있었는데 미국에서 첨단기술을 공부하고 돌아온 30대, 40대가 교수로 초빙돼 최첨단 산업기술을 가르치는 특별한 대학원이었다는 점입니다. 최고의 교수진과 실험 시설로 장차 한국 산업기술을 끌고 갈 엘리트 양성을 위해 국가가 나선 거였지요. 또 당시 유일하게 병역특례 혜택을 주는 대학원이었으니 박정희 정부가 얼마나 과학기술 인재 양성에 에너지를 집중하고 있는지를 자연스레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입학생 전원이 국비 혹은 기업 장학생이었고 기숙사 생활을 했습니다.”

    당시는 유신 반대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이라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감도 컸지만 그는 한국과학원에서 열성적으로 후진들을 양성하던 교수들 덕분에 애국심이 생겼다고 했다.



    “반도체를 가르치시던 김충기 교수님은 한국 반도체 역사에서 잊어서는 안 될 인물입니다. 미국 첨단 반도체 회사 페어차일드사에서 이미지 센서 반도체를 연구 개발하다가 정부의 과학기술자 초빙으로 30대 후반 젊은 나이에 귀국했는데 첨단 반도체 개발 이론과 실무에 밝았고 명쾌한 강의로 유명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연구 개발자들의 자세에서부터 나라 사랑하는 마음까지 심어주어 저를 비롯한 젊은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학생들은 김 교수로부터 반도체 설계, 공정 지식을 빠르게 습득했고  실험실에 수입된 장비를 설치하고 반도체 클린룸 건설 현장 경험까지 했습니다.”

    리버스 엔지니어링(Reverse Engineering)

    임 전 사장이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했을 때 이미 회사 이름이 삼성반도체㈜로 바뀌어 있었다고 했다.

    “주된 생산품은 손목시계용 칩이었고 당시 전자제품에 광범위하게  쓰이던 범용 트랜지스터를 자체 개발해 막 생산에 착수한 상태였습니다. 저는 흑백TV에 쓰는 ‘소리 증폭기(Sound Amplifier)’ 개발을 맡았는데 자체 기술이 없다 보니 일본 제품을 모두 분해한 뒤 사진을 찍어 설계도를 그리고 부품을 만들어 역으로 조립하는 ‘리버스 엔지니어링(Reverse Engineering)’ 방식을 썼습니다. 회로 설계부터 제작 공정까지 모두 혼자 해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착수 10개월 만에 정상 작동하는 칩을 얻었는데 우리나라 최초로 자체개발한 집적회로여서 한동안 삼성전자 역시박물관에 전시되던 기억이 납니다.

    다음으로 맡은 프로젝트가 회사 주력 생산품 중 하나였던 CMOS통신용 칩이었는데 수율이 제로여서 생산이 중단된 상태인데 원인을 찾으라는 거였습니다. 결론은 수입한 원자재 마스크 자체의 불량이라는 매우 기초적인 문제였는데 기술 수준이 척박하다보니 아무도 몰랐습니다. 우리 수준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를  보여주는 사고였지요. 이후 수입되는 마스크나 웨이퍼는 적절한 검사 규정을 만드는 것으로 프로젝트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이후 반도체 제조와 관련한 검사 설비 도입 검증, 새로운 소자 및 공정기술 개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는데 당시는 스티브 잡스가 애플 PC를 막 내놓던 시기여서 새롭게 태동해 급속하게 성장하던 분야가 CPU, Memory 칩 제품 개발이었습니다.

    인텔의 4bit MPU인 80시리즈가 나오고 4K SRAM, 16K DRAM이 출현하고 있었는데 미국 출장 중에 구매한 4K SRAM을 앞서 언급한 ‘리버스 엔지니어링’ 방식으로 설계하고 필요한 공정개발에 착수했는데 사내에서는 뚜렷한 고객도 없는 메모리 기술개발을 뭐 때문에 하느냐는 우려가 많았습니다.

    저는 곧 해외 유학길에 오르게 되면서 후속 개발은 후배들이 맡았는데 미국 유학 후에도 이 프로젝트의 불확실한 미래가 한참 동안 맘에 걸린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학을 떠난 후 1년 반이 지난 1983년 초 호암 이병철 회장이 메모리 반도체 진출을 선언해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물론 이러한 큰 전환을 예측하고 했던 프로젝트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메모리 기술을 예습한  셈이 돼 자긍심을 가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반도체 이전에 알아야 할 전자산업 진출史

    삼성전자 내 부서로 흡수된 반도체 사업부는 이후 다시 간판을 바꾸게 된다. 1982년 10월 삼성이 ‘한국전자통신’을 흡수하면서 ‘삼성반도체통신’이 된 것. ‘이번에야말로 진짜 반도체를 만들겠다’는 호암의 결심이 서고 나서였다.

    이후 반도체 사업은 6년 뒤 이건희 회장이 취임한 직후인 1988년 11월 삼성전자로 다시 흡수됐고 삼성전자는 가전, 정보통신, 반도체 등 3개 사업 부문을 거느리는 거인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 다름 아닌 삼성의 전자산업 진출과 관련된 내용이다. 알려졌다시피 삼성의 뿌리는 일제강점기이던 1938년 3월 1일 대구에서 설립된 삼성상회다. 창업주 호암은 6·25전쟁 이후 삼성물산, 제일제당, 제일모직을 세웠고 한국흥업은행(현 우리은행), 안국화재(현 삼성화재)를 인수했다.

    호암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전자산업이라는 전인미답의 길을 택했을 때 호암의 나이는 환갑을 앞두고 있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970년 한국 남자들의 평균 수명은 58.7세였다. 대한민국 최고 갑부로서 이미 이룩한 부(富)를 누리고 살아도 충분한 때에 호암은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반도체 사업도 마찬가지였다. 호암의 목적은 돈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의 생애는 기업가 정신의 결정판이 아닐 수 없다.

    필자가 삼성의 반도체 진출 과정을 소개하기에 앞서 삼성이 전자산업 자체를 시작하게 된 배경을 언급하려는 이유는 그것이 뿌리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호암에게 전자산업 진출은 1단계 소비재 산업을 졸업하고 2단계인 산업화로 진입하는 일생일대의 결단이었다. ‘호암자전’에는 당시 고민의 일단이 이렇게 드러나 있다.

    “전후(戰後) 일본 경제 부흥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면 설탕이나 섬유 등 경공업에서 출발해 차츰 제약, 기계, 제철 등으로 산업 개편의 기틀이 잡혀갔다. 그나마 낡은 구식 설비였는데 한국동란을 계기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1960년대 후반의 전자 산업을 보면 구미를 추적한 일본에서는 그 개화기를 맞고 있었고 대만은 바야흐로 그 도입을 서두르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손을 댄 기업이 있었으나 외제 부품을 도입해 조립하는 초보적 단계였고 뚜렷한 장기적 비전이 없는 실정이었다.

    품질도 조악했고 가격도 엄청나게 비쌌다. 흑백텔레비전 값도 웬만한 봉급생활자들로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비싼 수준이었다. 기술혁신과 대량생산에 의한 전자제품 대중화는 요원했다.”

    호암의 말대로 1970년대 초 한국의 전자산업은 라디오 산업이 주류였던 후진국 중에서도 후진국 수준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삼성을 비롯해 한국의 기업들이 대거 전자 사업에 진출하게 된 것은 박정희 정부가 나침반 역할을 한 덕분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0년대 중후반 대한민국을 살릴 미래 먹거리 산업으로 전자산업 진흥책을 본격화하면서 각종 세제혜택과 행정 지원을 해주고 대기업에 전자산업 참여를 권유했다. 한국 재벌의 성장사가 단지 스스로 잘 나서 지금처럼 일어선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빚진 바가 많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키는 대목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후술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TV 부품 하나 만들 수 있는 게 없었다”

    호암은 전자산업이야말로 기술, 노동력, 부가가치, 내수와 수출 등 여러모로 한국에 필요한 사업이라는 감(感)을 가졌다. 그의 벤치마킹 대상은 앞서 호암자전에도 언급돼 있지만 일본이었다. 그 시절에도 세계 전자산업은 우주개발과 군사기술 분야에서의 절대적 우위를 바탕으로 미국이 주도했다. 그런데 일본이 과감하게 진출하면서 불과 10여년 만에 미국과 겨루는 기술 수준을 이루고 있었다. 일본이 하는데 우리가 못하랴, 호암은 오기가 발동했다.

    삼성은 삼성물산에 개발부를 설치하고 전자회사 설립 작업에 들어갔다. 아무리 미래 산업에 대한 감이 오고 정부가 지원해준다고 해도 지금까지 하지 않던 새로운 사업에 진출하는 것은 마음만 먹는다고 쉽게 되는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사람이 없었다.

    호암의 장남 고(故) 이맹희 씨의 책 ‘묻어둔 이야기’에는 당시 삼성전자 설립 초기 상황이 잘 기록돼 있다. 그의 회고다.

    “아버지 결정대로 일단 전자 산업을 시작하기로 했지만 진행과정은 퍽 막막했다. 당시에는 반도체(IC)가 아니라 진공관을 사용하는 텔레비전을 만들 때였는데 진공관은커녕 TV 부품 하나 우리 손으로 만들 수 있는 게 없었다. 심지어 조립을 마친 TV를 포장할 스티로폼조차 없어서 마분지로 상자를 만들어 내보냈을 정도였다.

    대한민국 산업계 전체가 전자 산업을 해본 적이 없으니 어디서 사람을 구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우선 삼성 계열사에 있는 전자 관련 직종에 근무하는 사람들을 전부 불러 모았지만 그 역시 어거지로 했던 일이었다.”

    당시만 해도 삼성그룹 안에서 기계를 만져본 거의 유일한 직군은 방송국 카메라맨이었다고 한다. 다시 이맹희 씨의 말이다.

    “내 기억엔 동양방송에서 온 사람들이 제일 많았던 것 같다. 그중에는 방송국에서 카메라를 만지다가 온 사람도 있고 녹화 기계를 만지다가 느닷없이 발령을 받아 온 사람들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엉터리 같은 일이었지만 당시로서는 제일 정확한 인원 수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훗날 삼성이 국내 처음으로 비디오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에는 시계 수리공들을 불러 모아 시작했다. 시계 수리공이라면 그래도 정밀 기계를 만지는 사람들이니 비디오도 만질 수 있을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다시 그들을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시절이었으니 TV 만드는 일에 방송국 기술자들을 불렀던 것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에 따른 거였다.”

    느닷없이 전자산업 한답시고 뛰어든 회사

    사람을 구하는 일도 이렇게 황당하게 시작됐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시 이맹희 씨의 말이다.

    “어쨌든 사람들을 모으고 기업은 설립했는데 이번엔 당장 할 일이 없다는 묘한 상황에 부딪혔다. 그동안 대외적으로는 미국으로 뛰어가고 일본으로 기술 전수를 위해서 뛰어다녔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우리는 몰라도 너무 몰랐다. 선진국 대형 전자 회사들과 합작만 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줄 알았다. (…) 결국 일본의 산요와 NEC, 미국의 코닝 글라스와 합작을 하게 되었다. NEC에서는 진공관 기술을 전해주기로 했고 제일 중요한 부품인 브라운관은 미국의 코닝 글라스와 합작 생산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합작이 그리 쉽게 이루어지진 않았다. 미국의 코닝 글라스를 찾아가니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제니스나 세탁기 등으로 유명한 월풀도 마찬가지였다. 삼성은 그들과 합작을 할 만한 기술이나 여건이 전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연구원만 2만여 명을 두고 운영하던 기업들이었고 삼성은 느닷없이 전자산업을 시작한답시고 방송국에서 사람을 데려다 TV를 만들려고 생각하던 회사였다. (…) 산요는 1년 남짓 손잡고 일하다가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이우에 사장이 죽은 후 거리가 생겨서 곧 헤어졌다. 산요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은 것은 별로 없고 다만 산요가 인건비 싼 한국에서 스피커, 트랜스포머를 비롯해서 모두 4가지의 제품을 만들어 가지고 간 정도였다.”

    그의 증언에서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새로운 사업에 대한 예측이 마치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듯 맞아 떨어진 게 아니라 대단히 어렵고 힘든 선택이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이를테면 결과적으로 몇 년 뒤 사라지고 만 진공관에 대해 최고 기술력을 자랑하고 있던 일본 선진기업조차 향후 수십 년간 진공관 시대가 이어지리라는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던 것이다. 다시 이맹희 씨의 말이다.

    “그때는 지금과 같은 IC시대가 도래하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곧 닥쳐올 IC에 대해서 아무도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진공관의 크기가 점점 더 작아지고 수상기 한 대마다 필요한 진공관의 숫자가 점차 줄어들 것이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NEC측도 마찬가지였다. 회사 관계자들은 ‘현재 진공관은 앞으로 수십 년간 발전을 하면서 영원히 이용될 것입니다. 지금 진공관 공장이 그리 많질 않은데 현재 한국의 여건이 진공관 생산에 퍽 좋습니다. 아마 앞으로 아시아권에서는 유일하게 한국에서 진공관을 만들어서 수출하게 될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컬러텔레비전 진공관은 언젠가 3개로 줄어들 것이고 그 상태는 영원히 갈 것이며 이미 팔린 제품의 진공관이 파손되면 새로운 것이 필요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삼성에서 진공관 생산 공장을 세우면 앞으로 상당 기간 많은 이득을 볼 것이라고도 했다.”

    결과적으로 이 예측은 정확하게(?) 빗나갔다. 향후 역사가 증언하고 있다시피 진공관은 그 후 불과 3년 만에 완전히 사라졌다. 당시 삼성도 NEC의 예측을 받아들여 진공관 생산 기계를 수입했다가 낭패를 보았다. 일본에서 중고 기계를 수입하는 것이 금지돼 있어 정부 요로에 ‘기름(필자 주-뇌물을 의미하는 듯)’을 치면서까지 NEC가 사용하던 진공관 생산 기계를 수입, 설치했지만 곧 쓸모없는 기계가 돼버렸다고 이맹희 씨는 씁쓸해했다.

    삼성산요전기의 탄생

    1972년 삼성산요전기 사업장 전경. [삼성전자 제공]

    1972년 삼성산요전기 사업장 전경. [삼성전자 제공]

    1969년 5월 일본 산요전기로 떠나는 기술연수생 결단식 모습. 아래 왼쪽은 산요전기 오사카 공장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르는 연수생들. 오른쪽은 일본에서의 연수 모습. [삼성전자 제공]

    1969년 5월 일본 산요전기로 떠나는 기술연수생 결단식 모습. 아래 왼쪽은 산요전기 오사카 공장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르는 연수생들. 오른쪽은 일본에서의 연수 모습. [삼성전자 제공]

    나중에 반도체 사업을 할 때도 그랬지만 대한민국 기업인들은 기술 없는 나라의 설움을 톡톡히 겪었다.

    삼성은 1969년 3월 일본 산요전기와 기본 합작 계약을 체결하는데 불리한 조건이 많았다. 산요가 경영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수출권, 수입원자재 공급권, 상품권, 내수 상품 등록권 등을 모두 갖고 삼성전자는 국내 판매권만 갖는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어떻든 그렇게 해서 출발한 회사가 ‘삼성산요전기’다. 이 회사는 1969년 4월 일본에서 창립 발기인 대회를 열고 본격 출범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다른 복병을 만난다. 다름 아닌 국내 기업들의 반발이었다. 기존 업체들은 삼성전자가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는 게 아니라 기존 다른 업체처럼 단지 부품을 조립하는 회사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인가해줘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폈다. 하지만 이면에는 강한 경계와 경쟁 심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결국 삼성전자는 생산품 전량을 국내에는 팔지 않고 수출만 한다는 조건으로 회사 설립 인가를 받게 된다. 다음은 호암자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전자산업의 장래 전망에 관한 견해를 ‘중앙일보’에 발표하고 본격적인 준비에 착수했다. 업계는 시끄러워졌다. 삼성이 진출하면 한국의 전자업계는 다 망한다고 기존 메이커는 물론, 심지어 국회의원까지 동원해 새로 시작하는 전자산업의 저지 운동을 맹렬히 전개했다.

    정부 관료들의 움직임도 지지부진해서 부득이 대통령에게 내가 직접 전자산업의 장래성을 설명하며 국가적 사업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국 전자산업 전반에 관한 개방 지시가 내려져 1969년 1월 13일 삼성전자공업의 설립을 보게 되었다.”

    삼성의 전자산업 진출과 관련해 ‘묻어둔 이야기’에는 호암이 사돈 회사였던 LG 창업주인 구인회 회장과 불화를 빚던 일이 언급되고 있다. 사업가의 세계에서는 가족 이전에 자신의 시장을 지키는 일이 우선일 수밖에 없음을 새삼 느낄 수 있는 재미있는 에피소드여서 소개하고 싶다.

     1974년 삼성산요전기에서 삼성전기로 사명을 바꾼 뒤의 생산라인. [삼성전자 제공]

    1974년 삼성산요전기에서 삼성전기로 사명을 바꾼 뒤의 생산라인. [삼성전자 제공]

    1968년 봄의 이병철과 구인회

    “삼성이 전자 산업에 뛰어든 과정에서 꼭 한번 밝히고 지나가야 할 것이 럭키 금성(현 LG)과의 관계이다. 이런저런 말들이 많지만 전자 산업을 삼성에서 시작하기로 하면서 아버지와 금성사의 구인회 회장이 이야기를 나누었던 장소에 내가 있었다.

    원래 동업은 힘들다고 하지만 아버지와 구 회장은 비교적 무난하게 지내온 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던 탓도 있었지만 그동안 별로 서로의 사업 영역을 침해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도 두 분이 화목하게 지낼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마찰 없이 잘 지내던 두 집안이 경쟁심을 보인 건 동양방송을 같이 하면서였지만 외부적으로는 그리 쉽게 드러나질 않았다. 누이동생 숙희와 매제 자학이가 결혼을 함으로써 양 집안이 사돈지간이 되었고 그런 관계가 발전해서 방송국을 같이 하기로 했던 것이다. 방송국을 하면서 은연중에 서로가 경계를 하던 시절에 전자산업 문제가 터져 나왔다. 삼성이 전자사업을 하는 것을 금성사 쪽에서 그토록 싫어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68년 봄의 일이다. (…) 아버지와 구 회장님, 내가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다가 아버지가 전자 산업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구 사장, 우리도 앞으로 전자 산업을 하려고 하네.’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지만 아버지는 별다른 생각 없이 지나가는 투로 이야기를 던졌는데 반응은 예상치 못하게 터져 나왔다. 구 회장은 벌컥 화를 내면서 ‘남으니까 하려고 하지’라고 느닷없이 쏘아붙였다. 즉, 이익이 보이니까 사돈이 하고 있는 사업에 끼어들려고 하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나와 아버지로서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반응이었다. 아직 전자 산업을 시작한 것도 아닌 시기에 설마 불만이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화를 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때까지는 퍽 친하게 지내셨던 두 분은 이 일로 아주 서먹서먹해졌다. 나는 그 후로도 아버지가 그토록 난감해하고 곤란해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구 회장이 화를 내자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저 민망해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일로 두 분 사이는 아주 멀어졌다. 그 후 매제 자학이는 삼성의 일을 하고 있다가 금성사로 돌아갔다. (…) 부산의 지방 신문과 중앙일보 사이에 이를 두고 공방전을 벌인 것도 이 직후의 일이다. 부산의 K신문은 금성사에서 인수해 운영하던 것인데 그 신문에서 ‘전자 산업 업계의 주장’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서 삼성의 전자 산업 진출은 부당하다는 기사를 연속해서 내보냈다. 중앙일보의 부사장을 맡고 있던 나는 K신문이 너덧 번 그런 기사를 내보낼 때마다, 그렇지 않다는 요지의 기사를 중앙일보를 통해 싣도록 했다.

    비록 기사를 싣는 빈도는 중앙일보 쪽이 적다고 하더라도 K신문은 지방지요, 중앙일보는 중앙지라서 중앙일보의 영향력이 훨씬 더 컸다.

    결국 6개월 정도 신문지상을 통해서 공격하던 금성사가 포기함으로써 나도 중앙일보에 금성사에 대한 공격적인 기사의 게재를 중지하라고 했다.

    그런 일 외에도 제품이 생산, 출고된 이후에는 대리점들 사이에 주먹다짐까지 있었지만 이젠 그런 일은 다 흘러간 그야말로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후발업체가 생김으로써 금성사에도 자극이 되었고 두 회사 모두 그를 통해 오늘날 대외적으로 수출을 할 정도로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예나 지금이나 국내 시장을 두고 옹졸한 다툼을 하는 것은 나는 늘 헛되다고 믿고 있다. 그야말로 자그마한 국내 시장이 아니라 무한한 해외 시장으로 나갈 임무가 양사에 동시에 지워져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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