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동아 만평 ‘안마봉’은 과거 ‘신동아’와 ‘동아일보’에 실린 만평(동아로 보는 ‘카툰 100년’)에서 영감을 얻어 같은 그림체로 오늘날의 세태를 풍자한 만평입니다.
ⓒ정승혜
그동안 바이든 행정부와 반(反)러시아 동맹으로 똘똘 뭉쳤던 유럽연합(EU)은 ‘럭비공’ 당선인의 행보가 우려스럽다. 그만큼 트럼프 후보 당선에 대비해 EU는 발 빠르게 대(對)러시아 제재 강화를 논의해 왔다. 대표적 제재는 러시아 중앙은행 자산 동결 조치. 주요 7개국(G7)이 보유한 러시아 자산은 3000억 달러(약 417조 원)로, 자산 대부분은 유럽에 있는 만큼 EU의 제재는 러시아에 치명적이다. 현재 6개월마다 동결 조치를 갱신해야 하는 요건을 36개월로 완화하는 게 뼈대다.
여기에 전쟁 물자나 수출금지품목을 확대하거나 러시아의 에너지 수출입을 제한하는 방안도 논의하고 있다. 액화천연가스(LNG) 등 러시아로부터 에너지 수입을 더욱 제한하거나, 러시아산 석유 수입에 타격을 주기 위해 특정 유조선을 제재 목록에 포함하는 방법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EU의 이러한 논의 배경에는 평소 러시아에 유화적이면서 우크라이나 지원에 비판적인 트럼프 당선인이 강경한 대러 정책을 바꿀 수 있다는 우려가 자리한다. 트럼프 당선인이 미국의 대러 제재를 뒤집을 경우 유럽은 더 강력한 제재를 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국제정치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
-신동아 1932년 9월호-
1932년
교육계의 두얼굴(二面相)
‘신동아’ 1932년 9월호는 서울시내의 상반되는 두 학교(대동학원, 근혜학교) 상황을 만평으로 날카롭게 비판했다. 강원도 화전민 집안에서 태어난 서암 고창한(1873~1943)은 서울과 강원도 횡성을 오가는 보부상으로 자수성가한 기업가였다. 그는 1920년 마흔여섯에 어렵사리 얻은 아들 교육을 위해 경성으로 이사했는데, 일제는 조선 내 교육기관 설립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당시 경성 시내 소학교는 5개뿐이었다. 3·1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의 소학교 취학률은 고작 1.7%였다(이민규, ‘조선교육사’).
참담한 조선 교육의 현실을 목도한 고창한은 서울 가회동 집의 3분의 2 이상을 철거해 직접 기둥을 박아 20여 교실이 있는 2층 목조 교실을 지어 대동학원을 세운다. 학원 설립인가가 나오자마자 전 재산을 헌납해 보성심상소학교, 대동상업학교(현 대동세무고), 대동전수학교를 세웠다. 그의 헌신 덕분에 수천 명의 학생은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다. ‘종근당’ 창업주인 고 이종근 회장은 1987년 고촌학원을 세워 대동세무고를 인수했다.
반면 1932년 8월 2일 서울 수송동 양현여학교 입구가 모두 차단돼 140여 명의 여학생이 등교를 못 했다. 갈 곳을 잃은 여학생 80여 명이 울면서 거리를 헤매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개교 10여 년 된 양현여학교 설립자 신알베스트 여사는 운영난으로 학교 임차료를 낼 형편이 못 되자, 급한 대로 인근 학교인 근화여학교(현 덕성여대 전신, 1938년 무궁화를 의미하는 교명을 ‘덕성’으로 개명) 설립자인 김미리사 여사에게 월세 40원을 1년간 빌려왔다. 원금이 상환되지 않자 근화여학교는 경성지방법원에 명도신청을 하고 8월 2일 교사를 차압하면서 학생들은 배울 기회를 박탈당한다. 당시 ‘신동아’ 만평은 ‘누구는 교육을 받지 못하는 남의 자식들을 위해 사재를 털어 학교를 짓는데, 누구는 1년치 월세 몇백 원 때문에 남의 학교 학생들을 거리로 내 몬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1932년 8월 6일자 ‘동아일보’는 널빤지로 차단된 양현여학교 사태를 보도하기도 했다.
1932년 8월 6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양현여학교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