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 도시국가 스파르타는 주변 국가를 공포에 떨게 만들 정도로 체계적이고 강력한 국가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저출생’이라는 고질적 부작용이 동반될 수밖에 없는 치명적 사회구조가 문제로 드러났다. 스파르타의 과도한 교육비와 사회양극화는 시민계급의 안정을 위협했다. 머리로 습득한 냉철한 지식은 몸과 가슴으로 체득한 문화를 이길 수 없다. 정책으로 환심을 사서는 저출생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부모가 아이를 낳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아이를 행복하게 키우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아이가 잘 성장해 기꺼이 부모가 되기를 꿈꾸는 문화 말이다. 오늘날 ‘저출생’이란 용어에 매몰되지 않고, 가시적 성과에 집착하지 않는, 현명한 정책이 필요한 이유다.
레오니다스의 부인 고르고는 죽은 선왕인 형의 딸로 조카가 된다. 조카인 부인과 어린 아들을 두고 전장에 나가는 길에도 감상적인 이별 인사는 없다. 나약함은 스파르타 전사에게 사치이므로. [워너브라더스]
교육비 부담에 등골 휜 스파르타인
기원전 371년 레욱트라 전투에서 스파르타가 이웃 국가 테베에 대패해 시골의 작은 마을로 격하된 지도 어언 2000년이 흘렀다. 고대 스파르타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 못지않은 배타적인 순혈주의를 고수하며 시민계급을 독점하려 했다. 영화 ‘300’의 주무대인 테르모필레 전투(BC 380) 이후 외세가 물밀듯이 들어오자 국가의 기강은 흔들렸다. 그동안 겨우 유지했던 시민권을 가진 성인 남성 스파르탄(Spartiate)의 인구는 급감해 국가의 존립을 위협했다. 초저출생 위험신호가 곳곳에서 감지됐지만 엘리트주의에 빠진 스파르타의 수뇌부는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고 파멸을 자초했다.오늘날에도 혹독한 스파르타 교육은 엄격하고 효과적인 교육법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스파르타는 인도의 카스트제도와는 비교도 안 될 무자비한 피라미드형 계급제도를 유지했다. 노예의 수는 시민보다 20배나 많았다. 계급을 독점하기 위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막강한 냉혈 군인이 절실했고, 스파르타인은 걸음마만 떼면 싸우는 법을 배워야 했다. 전 시민이 군인이던 스파르타에서 이상적 인재상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 군인이었다. 스파르타의 교육은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모든 행위를 가르치고 배우는 데 국한된 것이 아니라 최적의 인간병기를 양성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스파르타는 일종의 거대한 군사훈련소였다. 신체검사를 통과하지 못한 갓난아기는 그대로 버려졌다. 7세가 되면 무조건 부모의 품을 떠나 ‘아고게’라고 불리는 군사 기숙학교에 입교해야 했다. 국가가 아고게를 운영하고 통제했지만 졸업까지 들어가는 모든 교육비는 부모가 감당했다. 영화에서 스파르타군은 쇼트팬츠에 망토만 입어 근육질 몸매가 그대로 드러난다. 이 상태로 황동 투구부터 갑옷, 창, 검, 방패 등 약 32kg에 달하는 중무장 무구를 착용했다. 병사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두른 모든 장비도 국가가 아닌 개인이 각자 조달해야 했다. 여러모로 스파르탄 시민은 등골이 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는 지형이 험하고 평지가 적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신을 섬긴다고 해도 통일국가로 거듭나기 어려운 지형이다. 작은 언덕 단위로 ‘폴리스’라 불리는 각기 다른 도시국가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 도시국가인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246km정도 떨어져 있지만 상반된 도시문화를 갖고 있다. 척박한 자연환경으로 상공업에 주력한 아테네는 왕정으로 시작했지만 여러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개방적 민주사회를 이뤘다.
일찍이 스파르타는 토지와 주택을 공동 분배했다. 초창기 스파르탄의 사유재산은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들은 공동 식사 비용과 교육비를 제하면 사치를 하고 싶어도 검소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 [워너브라더스]
고대 그리스 땅을 여행한 관광객 가운데 고대도시 중 제일 실망스러운 곳으로 스파르타를 꼽는다. 만약 레오니다스 동상과 스파르타 박물관이 없었으면 현재 스파르타는 그냥 한적한 시골 마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검소함이 국민의 의무였기에 도시 어디에도 화려한 신전이나 극장도 없는 것일 터. 그것은 한때 도시를 번영케 했으나 한순간에 도시의 영화를 파괴한 원인이기도 했다.
피의 성인식
테르모필레 해협에 내린 페르시아군은 끝이 안 보일 정도의 대군이었다. [워너브라더스]
체인을 둘둘 말고 나온 흑인으로 분한 크세르크세스 황제는 사실 백인 아리안족이었다. 페르시아인은 그리스인과 별반 다르지 않은 피부색을 가졌다. [워너브라더스]
모든 것이 평화로운 날, 검은 피부를 가진 페르시아의 전령(피터 멘사)이 스파르타를 찾는다. 다짜고짜 레오니다스 왕을 찾아온 그는 페르시아의 왕에게 스파르타의 물과 흙을 바치라고 거만하게 말한다. 고작 물과 흙이면 타협할 만도 한데 자존감으로 똘똘 뭉친 스파르탄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생명의 원천인 물과 흙은 한 국가의 정체성이기 때문. 레오니다스 왕은 분노에 이글거리는 눈으로 사신을 발로 차 우물에 빠뜨리며 외친다. “여기는 스파르타다!”
개인의 자유 박탈한 스파르타
스파르타 군인은 오른손으로는 2m 정도의 창, 왼손으로는 방패를 든다. 철저하게 대형으로 움직이며 대장의 작전에 맞춰 전진하고 대형을 바꿔 적을 교란한다. [워너브라더스]
영화에서 레오니다스 왕은 신탁의 반대에도 대를 이을 자손이 있는 정예부대원 300명을 이끌고 ‘뜨거운 문’이라는 의미인 테르모필레 협곡으로 향한다. 가는 도중 다른 도시국가에서 급조한 그리스 연합군을 만나 힘을 합치지만 100만 명의 페르시아 대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만 레오니다스는 많은 군사가 좁은 협곡(영화에서는 실제 협곡보다 훨씬 좁게 과장해 묘사한다)을 통과할 수 없으므로 아무리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와도 협곡에서는 승산이 있다고 믿었다. 전면전으로 가는 통로를 협곡에서 차단해 버리면 대규모 전쟁물자 수송이 원활치 않은 페르시아는 퇴각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초반에는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싸우는 스파르타의 기세에 눌려 페르시아군이 번번이 협곡을 뚫지 못한다. 이때 보상에 눈이 먼 그리스인 에피알테스(앤드루 티어난)가 협곡을 우회할 수 있는 샛길을 알려준다. 이런 연유로 에피알테스는 그리스어로 ‘악몽’이라는 의미로 전해온다. 오늘을 넘기기 힘들다는 것을 직감한 레오니다스는 후일을 도모할 자산으로 그리스 연합군을 후방으로 보낸다. 스파르타 군인 300명만이 협곡에서 결사 항전을 벌이며 영화는 비장하게 끝난다.
역사적 사실을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잭 스나이더 감독은 에피알테스를 척추장애인으로 묘사하고 문명국에 살던 페르시아인을 퇴폐적이고 미개하게 왜곡하는 것도 모자라 아예 괴물로 표현한다. 영화 ‘300’의 원작은 1965년 영국 영화 ‘300 스파르탄’에 영감을 받은 프랭크 밀러가 각색한 만화(그래픽 노블)책이다. 밀러는 만화 작화에도 뛰어나지만 스토리 작가이기도 하다. 다만 밀러는 역사적 고증보다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아이러니’라는 메시지에 집중했다. 스파르타는 자유와 평화를 부르짖지만 과격한 전체주의 국가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 또 민주적 절차를 중시하지만 비합리적 예언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스나이더 감독은 데뷔작인 좀비 호러영화 ‘새벽의 저주’로 제작비의 5배에 달하는 흥행 수익을 올리고 차기작으로 영화 ‘300’을 선택했다. 그는 CF감독 출신답게 짧은 시간에 이미지를 노출해 대중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기는 데 일가견이 있다. 스나이퍼 감독의 안티일지라도 그의 빼어난 영상미에는 모두 ‘엄지 척’을 표할 정도다. ‘300’에서는 인물을 뺀 배경을 3D로 신비주의 회화처럼 구현했고 롱테이크와 슬로모션으로 격동적이고 치열한 전투 장면을 실감 나게 편집했다.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가 테르모필레 협곡에 뼈를 묻은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전투에서는 절대 후퇴하지 않는다’는 법에 복종해야 했기 때문이다. 벌떼처럼 쏟아지는 페르시아의 화살을 보고 ‘덕분에 시원한 그늘 아래에서 싸울 수 있겠다’고 말했다는 레오니다스의 이야기는 호방한 유머가 아니라 개인은 없고 전체만 강조한 집단최면의 증거가 아닐까.
테르모필레 전투 1년 후에 벌어진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스파르타는 대승을 거두고 페르시아군을 그리스 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낸다. 그러나 전쟁으로 철저하게 닫혔던 문호가 개방되자 스파르타인들은 그동안 금기시됐던 신세계를 발견하고 분열한다. 이후 사회 양극화, 과도한 교육비 같은 갈등 요인이 저출생 문화로 고착됐고 스파르타는 쇠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황승경
● 1976년 서울 출생
● 이탈리아 레피체국립음악원 디플럼,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성균관대 공연예술학 박사
● 국제오페라단 단장
● 前 이탈리아 노베 방송국 리포터, 월간 ‘영카페’ 편집장
● 저서 : ‘3S 보컬트레이닝’ ‘무한한 상상과 놀이의 변주’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