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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8월 7일에만 항복했어도 분할 피할 수 있었다

김학준이 다시 쓴 현대사 결정적 장면① 한반도 분단 75년… 왜, 어떤 과정을 거쳐 분단됐나

  • 김학준 단국대 석좌교수

일본이 8월 7일에만 항복했어도 분할 피할 수 있었다

  • 8월 15일로 우리 겨레는 분단 75주년을 맞이했다. 오늘날 남과 북을 통튼 7600만 겨레가 겪는 고통과 비극의 뿌리는 바로 이 분단이다. 

    분단이 있었기에 이산가족이 발생했고 전쟁이 뒤따랐으며 37개월을 끈 이 전쟁으로 국토는 유린되고 수많은 동포가 목숨을 잃거나 부상했고 다시 한 차례 큰 규모의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무엇보다 남과 북 사이에 적대감이 높아져 오늘날까지도 해소되지 않은 채 대결을 유지하고 있다. 

    최근에 와서는 ‘제2의 한국전’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마저 조성되고 있다. 그러면 이 분단은 도대체 어떤 배경에서 이뤄진 것일까.

논점1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내세우는 것은 숙명론으로 비난받아야 할까.

1919년 3·1운동. [국가기록원 제공]

1919년 3·1운동. [국가기록원 제공]

한반도의 분단은 지정학적 위치를 떠나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새삼 말할 필요 없이, 한반도는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 사이에 놓여 있어서 두 세력의 전략적 이해가 충돌하는 경우 어느 한 세력이 독점적으로 장악하거나 두 세력이 타협해 분할함으로써 한 부분만이라도 갖고자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게르만 세력과 슬라브 세력 사이에 놓여 있어서 두 세력의 전략적 이해가 충돌하거나 일치된 경우 두 세력에 의해 분할되기도 했고 국가 자체가 소멸하기도 했던 폴란드에 비유되곤 했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이 사실에 주목해 반도사관(半島史觀)을 정립했다. 조선은 반도가 주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따라서 일제의 식민지가 됐다고 해도 운명으로 받아들인 채 살아야 한다는 뜻을 명시적이건 묵시적이건 주입시킴으로써 조선=한국인의 기를 꺾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로 조선=한국인들 가운데 여기에 기울어졌던 사람들은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해 우리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는 일종의 민족허무주의에 빠졌던 것이 사실이다. 

이 반도사관에 적극적으로 도전한 국내의 대표적 국사학자가 이기백 교수였다. 그는 반도가 주는 지정학적 제약을 인정하면서도, 우리 민족의 우수한 두뇌와 진취적 기상은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반드시 그 제약을 벗어날 뿐만 아니라 뛰어넘어 세계사의 진운을 선도하게 될 것임을 역설했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는 그 역설이 억지가 아니었음을 보여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립을 얻은 수많은 나라 가운데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성취한 나라는 대한민국 하나뿐이라는 현실이 그것을 웅변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은 허허벌판 위에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을 일으켜 세웠으며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찾는다는 것은 쓰레기 속에서 장미꽃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한 영국 기자의 비웃음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대한민국을 ‘민주화의 공고화(鞏固化) 단계’로 진입시킨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대한민국이 절반을 차지한 채 또 다른 절반을 차지한 이른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치하고 있는 땅인 한반도’의 지정학적 성격을 아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날에도 해양 세력을 대표하는 미국과 대륙 세력을 대표하는 중국이 힘을 겨루면서 전쟁으로 치달릴 것 같은 험악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만일 두 강대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 불꽃이 한반도로 번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긴박한 국제상황에서 우리가 어떤 입장을 취하고 어떤 정책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 앞날은 달라지게 된다.



논점2
38도선이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분할선이었을까.

우리는 흔히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더불어 주어진 북위 38도선에서의 분할이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분할이었다고 생각한다. 굳이 틀린 생각이라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정확한 사실은 아니다. 우리 역사에서 최초라고 말할 수 있는 분할은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킨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7세기 말에 이루어졌다. 그들은 한반도 서쪽의 대동강과 동쪽의 원산만을 잇는 선을 경계로 이북은 당나라에 귀속시키고 이남은 신라에 귀속시켰던 것이다. 이 선은 대체로 북위 39도 2분에 해당된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열강이 이후 한반도의 분할을 고려할 때 자신들이 ‘한반도의 목(neck of the Korean Peninsula)’이라고 부르는 이 선을 분할선 후보에 포함시킨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헨리 키신저는 자신의 명저들 가운데 하나인 ‘외교’에 “1950년 가을에 유엔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을 계속하던 때 이 선에서 멈출 수도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것은 이 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함으로써 전쟁을 멈추게 할 수 있었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고려 후기에도 이 선에 근접한 북위 38도 5분의 선에서 분할된 일이 있었다. 원종 10년인 1269년 서북면병마사영(西北面兵馬使營)의 기관(記官) 최탄(崔坦)이 난을 일으켜 오늘날의 평양인 서경을 비롯한 북계(北界)의 54개 성과 자비령 이북의 황해도 6개 성을 탈취한 뒤 원(元)에 귀부하자, 원 세조 쿠빌라이는 자비령을 경계로 이북을 동녕부라 명명하고 원에 내속시킴과 동시에 최탄을 동녕부 총관으로 임명한 것이다. 고려는 그때로부터 21년이 지난 충렬왕 16년인 1290년에 이르러 겨우 이 지역을 돌려받아 분할에서 벗어났다.

논점3
왜 전쟁을 전후한 시점에 분할이 논의됐는가.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는 한반도가 분할된 일이 없었다. 그러나 조선에서 열강이 개입된 전쟁이 예견되거나 실제로 일어나게 되면 반드시 분할이 거론됐다. 

임진왜란 때의 경우 | 첫째, 임진왜란 때였다. 선조 25년인 1592년 4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왜군이 조선을 침략하자 7월 명나라는 군대를 보내 조선을 지원했고 그 결과 1593년 4월 왜군은 한양에서 철수했다. 대륙국가인 중국은 조선이 해양국가 일본에 의해 장악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한 것이다. 

대체로 이때부터 명과 왜 사이에 평화교섭이 개시됐는데, 6월에 이르러 도요토미는 7개항 조건을 제시하는 가운데 조선의 경기·경상·전라·충청 4도를 자신에게 할양하고 나머지를 조선이나 명이 통치해도 좋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웨이쉐썽(魏學僧)을 중심으로 이 제의에 잠시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이 요구를 거부한 데 이어 이순신 장군이 승전을 거듭한 조선과 함께 왜를 패퇴시킴으로써 분할은 예방될 수 있었다. 

청일전쟁 직전의 경우 | 둘째, 그때로부터 약 300년 지난 청일전쟁 직전이었다. 조선을 둘러싸고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전운이 짙어가던 1894년 7월 22일 영국 외무장관 킴벌리 경은 조선의 북쪽을 청이 점령하고 조선의 남쪽을 일본이 점령하는 조건 아래 두 나라가 전쟁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자는 구상을 두 나라에 제시했다. 그는 점령의 선을 제시하지는 않았으나 만일 두 나라가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그 선은 대체로 북위 38도선이었거나 거기에 근접했을 것이다. 

청은 만일 자신의 점령지에 조선의 수도 한양이 포함된다면 그 제의에 응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일본은 승전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그 제의를 물리쳤다. 이 모든 과정에서 조선 조정은 완전히 배제돼 그러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여기서 우리는 왜 영국이 중재안을 내놓았는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해양국가인 영국은 같은 해양국가인 일본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영국이 보기에 청일전쟁이 일어나면 일본이 반드시 승리하리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본이 우선 절반이라도 차지할 수 있게끔 분할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아관파천의 시기 : 38도선이 최초로 제시되다 | 셋째, 아관파천 시기와 환궁 이후의 시기였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크게 확보하게 되자, 조선 조정은 대륙 세력인 러시아(그때의 호칭으로는 아라사)의 힘을 끌어들여 해양 세력인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하고자 했다. 이러한 인아거일(引俄拒日) 정책의 선봉에 민비가 있었다. 일본의 대응은 야만적인 민비 시해였다. 놀란 고종은 1896년 2월 조정을 서울 주재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겨 거기서 친러내각을 유지했다. 

당황한 일본은 1896년 5월 26일 모스크바의 우스펜스키 대사원에서 거행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국왕의 특사로 육군원수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파견하고 그를 통해 6월 9일 러시아 외무장관 알렉세이 로바노프에게 조선의 분할을 제의하게 했다. 38도선 이북의 조선을 러시아의 영향권 아래 두고 이남의 조선을 일본의 영향권 아래 두도록 합의하자는 취지였다. 38도선이 분할선으로 제시된 최초의 경우였다. 

로바노프 외무장관은 이 제의를 거절했다. 그때 러시아는 경상남도의 마산포(馬山浦·러시아어 표기로는 Mozampo)를 비롯한 남해안의 부동항들에 관심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국왕과 정부가 자국의 공사관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자국에 결코 불리하지 않다고 계산했던 것이다. 

러시아 황제의 대관식에는 조선에서도 궁내부특진관 겸 전권특명공사 민영환을 단장으로 하고 윤치호를 단원으로 하는 사절단이 참석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흥정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아관파천 청산 직후의 시기 | 그때로부터 다시 2년이 지나서 고종은 러시아공사관 생활을 청산하고 경운궁으로 돌아온 이후,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격상시키면서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줄어들었으며 일본의 영향력은 커졌다. 

새로운 전환을 목격하면서, 1898년 조선 주재 러시아공사 알렉세이 드 스페이에는 조선 주재 일본공사에게 평양을 포함하는 조선의 북부를 러시아가 차지하고 한양을 포함하는 조선의 남부를 일본이 차지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던 일본은 거절했다. 

러일전쟁 직전의 경우 : 39도선이 최초로 제시되다 |
넷째, 러일전쟁 직전이었다. 그사이 일본이 군사력을 증강시킨 데 이어 1902년 1월 영국과 동맹을 맺고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도 사양하지 않을 태세를 보이자 러시아는 조선을 분할해 일본을 무마시키고자 했다. 1903년 10월 3일, 주일 러시아공사 로만 로마노비치 로젠 남작을 통해 일본 정부를 상대로 (1)39도선 이북의 조선을 두 나라 가운데 어느 나라도 군대를 보내지 않는 중립지역으로 만들고 (2)그 이남의 조선에 대한 일본의 ‘특별한 이익’을 러시아는 보장한다는 안을 제의했다. 분할선으로서 39도선이 제의된 최초의 사례다. 

이 제의에 대해, 일본은 한만(韓滿) 국경을 경계로 삼아 양쪽에 각각 50㎞의 중립지대를 설치할 것을 제의했다. 이것은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하겠다는 일본 정부의 뜻을 담고 있었다. 러시아는 이 제의를 거부했다. 이에 일본은 1904년 2월 10일 러시아를 상대로 선전포고했으며, 그 이듬해 러시아를 완전히 굴복시켰다. 

여기서 다시 상기하고자 하는 사실은 같은 해양국가인 영국의 적극적인 일본 지원이다. 대륙국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은 러시아군대가 영국의 영향 아래 있는 수에즈운하를 통과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러시아군대는 아프리카대륙을 돌아 인도양으로 빠져나오는, 길고 지루한 여로를 항해했다. 이미 그 과정에서 러시아군은 사기가 떨어졌으며 막상 결전장 동해에 당도하면서 예기(銳氣)가 하늘을 찌를 것 같은 일본군에게 일패도지(一敗塗地)하고 말았다. 

이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기로 하자. 왜 한반도를 둘러싸고 전쟁이 임박한 시점 또는 전쟁이 일어난 시점에 분할이 거론됐는가. 해양 세력이나 대륙 세력은 한반도를 어느 한쪽이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것보다는 자신도 참여해 분할함으로써 절반이라도 확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계산했기 때문이다. 

청나라를 패배시킨 데 이어 ‘강대국’ 러시아마저 굴복시킨 ‘신흥국’ 일본의 완승 앞에서, 한반도를 독점 지배하려는 일본의 야심을 억제할 나라는 어디에도 없게 됐다. 그렇지 않아도 같은 해양국가로서 일본을 지원해 온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곧바로 일본과 러시아의 대표를 미국 뉴햄프셔주의 군항 포츠머스로 초청해 일본의 독점적 조선 지배를 뒷받침하는 조약을 성립시켰다. 영국은 이 조약을 지지했다. 여기에 힘입어 일본은 곧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었으며 그때로부터 5년이 채 되지 않은 1910년 8월 조선을 완전히 병탄했다.

논점4
코리아에 대한 신탁통치 구상에서 한반도 분할의 기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제공]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제공]

일제가 한반도를 병탄한 뒤 국제사회는 그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어느 한 나라도 국권을 빼앗긴 조선에 대해 조의를 표하지 않았고 일제의 폭거에 대해 항의하지도 않았다. 이제, 미국에서 이승만의 항일독립운동을 도왔던 로버트 올리버 교수의 표현으로, 코리아는 ‘잊힌 나라’가 됐다. 

이처럼 매우 불리한 국제 여건 속에서도, 조선=한국인이 독립을 요구하며 항일운동에 나섰다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놀라운 일이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그리고 한국광복군 창군 등은 조선=한국인의 독립 열망과 투지를 반영했다. 그렇지만 국제사회는 여전히 무관심하거나 냉담했다. 심지어 스탈린의 소련은 소련 영토 안에서 활동하던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상당수를 추방하거나 박해하기도 했다. 

일본의 조선=한국에 대한 독점 지배는 오래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일본의 결정적 패착이 시작됐다. 미국과 영국 등 해양국가들의 지원을 받아 조선=한국을 독점 지배할 수 있었던 일본은 1941년 군국주의자들의 잘못된 발상과 판단으로 오히려 해양국가들을 적으로 돌리고 히틀러의 나치독일과 무솔리니의 파시스트이탈리아와 손을 잡은 데 이어 그들과 함께 ‘추축국’ 동맹을 형성한 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당시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이끌던 이승만이 자신의 명저 ‘일본 내막기’에서 예견한 그대로였다. 이로써 일본은 나치독일과 파시스트이탈리아를 공동의 적으로 삼은 미국·영국·소련·프랑스·중화민국 중심의 연합국과 전쟁관계에 들어가게 됐다. 

이렇게 전쟁이 확대되면서 연합국 사이에서 일련의 회담이 열리게 됐고, 그 회담 가운데 몇몇 회담은 조선=한국의 장래를 다루거나 거기에 영향을 주기에 이르렀다. 이 회담들이 우리에게 익숙한 워싱턴에서의 미·영 외무장관회담(1943년 3월), 미·영·중 정상 사이의 카이로회담(1943년 11월), 미·영·소 정상 사이의 테헤란회담(1943년 11월), 미·영·소 정상 사이의 얄타회담(1945년 2월), 미·영·소 정상 사이의 포츠담회담(1945년 7~8월) 등이다. 

이 회담들을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분석하기에 앞서 꼭 지적해야 할 사실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미국은 일제가 패망한 이후 코리아에 즉각적이면서 완벽한 독립을 주기보다는 일정한 기간에 걸쳐 코리아에 관계된 국가들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신탁통치의 실시를 고려했다는 사실이다. 카이로회담에서 ‘적당한 절차를 밟아(in due course)’라는 애매모호한 구절로 처음 국제회담의 합의문서에 등장한 이 구상에 대해 서로 대립되는 분석이 제시돼 왔다. 이 구상이 결과적으로 소련과 한반도 분할에 참여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일제가 패망한 이후에도 소련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는 근거를 마련했다는 주장, 반면에 그 구상을 조선=한국인이 받아들였더라면 신탁통치가 끝난 뒤 분할이 아니라 완전한 통일을 보게 됐을 것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논점5
소련을 극동전에 끌어들이려고 한 연합국의 정책에서 한반도 분할의 기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둘째, 일련의 전시 연합국회담에서 특히 1943년 10월 이후, 일본을 상대로 하는 전쟁 이른바 극동전에 소련이 참가하도록 미국이 끈질기게 요구한 사실이다. 일본과의 전쟁을 사실상 혼자 수행하던 미국은 소련이 동참해 준다면 부담이 크게 줄어들고 또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럽에서 독일과의 전쟁을 사실상 혼자 수행하던 소련으로서는 병력을 동북아시아로 분산하기 어려웠다. 

이 문제는 우선 테헤란회담에서 봉합됐다. 미국과 영국이 1944년 5월 1일 유럽에 진공해 이른바 제2의 전선을 형성함으로써 소련을 도울 것이라고 약속하고, 소련은 ‘독일이 완전히 패망한 뒤’ 대일전에 참전할 수 있을 것임을 약속한 것이다. 

이 약속은 1944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처칠과 스탈린 사이의 회담, 처칠-스탈린 회담에 소련 주재 미국대사 해리먼과 주소(駐蘇)미국군사사절단장 존 딘 소장이 합석한 회담, 미국과 소련 사이의 고위 군사회담 등에서 더 구체화됐다. 이 일련의 회담에서, 스탈린은 소련이 극동의 일본군을 격파하기 위한 계획을 설명하는 가운데 ‘코리아의 북변(北邊)에 위치한 항구들’을 소련의 육군과 해군이 점령해야 한다고 제의했고, 미국과 소련은 ‘묵인’했다. 이로써 함경북도의 항구들인 웅기·나진·청진 등에 대한 소련군의 작전에 관해, 비록 묵시적이지만, 미국-영국과 소련 사이에 합의가 성립됐다. 

이 묵시적 합의는 한반도의 장래와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우리가 앞으로 다시 살피게 되듯, 소련군의 한반도 진입에 합의함으로써 결국 한반도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되는 단초를 열어놓은 것이다.

논점6
한반도의 분할은 얄타회담에서 밀약된 것인가.

그 합의로부터 4개월 뒤인 1945년 2월 소련의 얄타에서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소련의 스탈린 총리, 영국의 처칠 총리 등이 참석한 연합국 정상회담이 열렸다. 얄타는 당시 소련을 구성하던 15개 공화국 가운데 하나인 우크라이나공화국의 크림반도에 위치한 휴양항구로, 소련이 해체되면서 우크라이나공화국도 독립하자 자연히 우크라이나에 귀속됐다. 그러나 2014년에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크림반도를 되찾아오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소속으로 굳어졌다. 

한때 우리나라에서는 한반도의 분할이 이 얄타회담에서 밀약됐다는 소문이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너무나 부자연스러운 조국의 분할을 도저히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한인들은, 그 분할에는 자신들을 수천 년 동안 이러저러한 형태로 괴롭히거나 핍박했던 주변 강대국들의 ‘농간’이 개입됐을 것으로 확신했던 것이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전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이면서 ‘프린스턴대학교 정치학 박사’ 이승만이 얄타회담 직후 ‘얄타밀약설’을 제기하자 많은 사람이 쉽게 믿은 것이다. 이승만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그의 견해는 정설로 굳어져 이승만 정부 시대에는 교과서에 그렇게 단정적으로 쓰였다. 

그러나 ‘얄타밀약설’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 회담에 관련된 모든 문서가 공개된 뒤 살펴본 결과 어느 쪽도 한반도 분할을 제기한 일이 없었으며, 한반도와 관련해 ‘분할’ 또는 ‘38도선’이라는 단어 자체가 등장한 경우가 아예 없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얄타회담이 한반도의 분할에 대해 무관하다는 것은 아니다. 이 회담에서 스탈린은 루스벨트의 제의를 받아들여 미국이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전제 아래 “독일이 항복한 때로부터 3개월 이내에 극동전에 참가한다”라고 공식 약속했다. 실제로 소련은 그 3개월이 꼭 채워진 1945년 8월 8일 일본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고 대일전에 참가하면서 코리아의 북변 항구에 진입하기 시작한다.

논점7
트루먼 행정부의 출범은 한반도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그런데 얄타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양해가 이뤄졌다.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어느 한 나라에 의한 코리아의 군사점령에 반대한다는 데 뜻을 같이함으로써 코리아에 대한 ‘공동점령’에 원칙적으로 합의한 것이다. 그러나 그 구체적 방법과 내용을 끌어내지 못함으로써 한반도의 장래를 여전히 애매모호한 상태로 남겨놓았다. 

그때로부터 약 2개월이 지난 1945년 4월 12일 루스벨트가 병사했다. 자연히 부통령 트루먼이 곧바로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렇게 트루먼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집행한 외교정책의 성격과 방향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 학계에서 토론이 진행되는데, 그 핵심 논점은 2차대전의 종결을 전후한 시점 이후 전개된 동서냉전이 트루먼의 대통령직 계승으로 시작됐다는 주장에 연결됐다. 

그 대표적 논자가 미국의 국제정치학자 마크 갈리치오 박사다. ‘냉전은 아시아에서 시작됐다’는 책을 쓴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이면서 반소주의자인 트루먼이 대통령이 되면서, 공산주의나 소련에 대해 ‘이해하는’ 입장을 취함과 동시에 ‘유화정책’을 편 전임자와는 달리, 소련과 한 기존 약속을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고 그 약속을 가능하면 지키지 않는 쪽으로 이끌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여기에 대한 반론이 뒤따른 것이 사실이지만, 트루먼 취임 이후 미국이 소련에 대해 강경한 정책을 쓰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게 된 요인으로 적어도 다음 세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당시의 유럽 정세였다. 소련은 동유럽을 석권하고 있었으며 특히 폴란드는 철저히 소련의 위성국가로 자리를 잡은 것처럼 보였다. 이것은 스탈린이 얄타에서의 약속을 깨뜨리고 동유럽에서 영토적 팽창정책을 추구하는 것으로 비쳤다. 또 소련이 유럽에서 점령한 지역들에서 보여주는 인간기본권 침해와 유린은 트루먼의 반소반공주의적 신념을 강화시켰다. 

둘째, 영국 총리 처칠의 거듭된 경고였다. 그는 폴란드의 상황은 동유럽을 소련의 지배권 아래 두려는 스탈린의 정책을 그대로 증명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연합국이 과연 얄타협정을 준수해야 할 것인지 회의를 표시했다. 그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얄타협정의 수정을 요구하는 이른바 얄타수정주의를 이끌었다. 

셋째, 미국 국내에서 그리고 행정부에서 대소(對蘇)강경론이 우세해졌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소련의 행태에 미뤄, 동북아시아를 소련의 지배권 아래 두려고 시도할 위험성이 크다고 경고했다. 따라서 그들은 미국이 이제라도 얄타협정의 틀에서 벗어나 소련의 대일전 참가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얄타수정주의가 대두한 것이다. 

트루먼의 대통령직 계승 직후 대전은 종말을 향해 빠르게 진전됐다. 5월 8일 독일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했다. 나치독일의 동반자였던 이탈리아는 1943년 7월 일어난 쿠데타로 무솔리니를 권좌에서 추방한 데 이어 연합국에 항복했다. 이렇게 유럽에서 대전이 이탈리아와 독일의 패망으로 매듭지어진 상황에서, 미군은 6월 30일 오키나와 전체에 대한 점령을 완료했으며 일본 본토로의 진공에 들어갔는데, 이로써 추축국들 가운데서 마지막 생존자인 일본의 패망은 눈앞에 다가온 것처럼 보였다. 이제 연합국의, 특히 미국의 관심은 일본의 장래, 그리고 부수적으로 일본의 식민지인 코리아에 대해서도 이전 시기에 비해 훨씬 더 많이 쏠리게 됐다. 

코리아에 대한 관심의 핵심은 군사작전이었다. 이 문제와 관련해 소련의 대일전 참가 문제가 다시 뜨겁게 토론됐다. 당시 전황에 미뤄 소련군의 참전이 불가피하다는 의견, 대조적으로 소련군의 참전은 결국 코리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를 소련의 영향권으로 편입시키게 될 것이므로 막아야 한다는 의견이 맞섰다. 그러나 대세는 소련군 참전, 소련군의 한반도 진입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다만 예외적으로 미국 전쟁부(오늘날의 국방부) 산하의 합동참모본부에 소속된 합동전쟁계획위원회는 1945년 6월 28일에 작성한 계획안에서 미국의 한반도 단독점령안을 채택했다. 이완범 교수가 지적했듯, 미국은 소련의 한반도 북부에 대한 관심을 알면서도 코리아 전체를 자신의 세력권 안으로 편입시킨다는 방향으로 잠정적 결론을 내린 것이다. 만일 미국이 이 안을 끝까지 관철할 수 있었다면, 한반도의 분할은 회피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되듯 미국은 이 안을 버리고 소련군과의 공동점령안을 채택한다.

논점8
소련은 코리아에 대해 어떤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나.

비록 폐기되지만 미국의 합동전쟁계획위원회가 미국의 한반도 단독점령안을 채택한 그 시점에 소련은 코리아와 관련해 적어도 두 가지 계획안을 마련했다. 첫째, 6월 28일 스탈린은 소련군이 함경북도의 나진·청진·융기 세 항구를 점령한다는 원래의 계획을 공식적으로 재가했다. 둘째, 그다음 날에 소련 외무부 극동제2국은 코리아가 앞으로 소련에 대한 공격의 발판이 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코리아에 ‘소련과 코리아 사이에 우호적이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정부’를 세우도록 해야 한다는 건의안을 만든 것이다. 이 건의안은 “코리아에 대해 연합국이 신탁통치를 실시하게 되면 소련은 두드러진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스탈린이 재가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건의안은 무엇을 뜻하는가. 소련은 일제가 패망한 이후의 코리아에 대해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놓아야 한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이제 코리아에서 소련이 자국의 이익을 놓고 미국과 경쟁하거나 대립하게 될 가능성은 높아졌다.

논점9
한반도의 분할은 포츠담회담에서 밀약된 것인가.

이상에서 살폈듯, 코리아의 장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흐름 속에서 1945년 7월 17일 패전국 독일의 수도 베를린 근교의 포츠담에서 전시연합국회담으로서는 마지막인 회담이 트루먼 미국 대통령과 스탈린 소련 총리 및 처칠 영국 총리 사이에 열렸다. 이 회담이 진행되던 때 영국에서 실시된 총선거에서 예상을 깨고 노동당이 승리함에 따라 7월 26일에 총리가 된 노동당 당수 애틀리가 7월 28일부터 영국대표단을 이끌었고 패배한 보수당 당수 처칠은 귀국했다. 

한때 다른 나라에서도 그러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이 회담에서 한반도의 분할이 밀약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얄타에서 결정된 것이 아님이 밝혀지자 그렇다면 포츠담에서 결정된 것이 아니었겠느냐는 추측에서 출발한 주장이다. 그러나 이 회담의 기록이 사실상 모두 공개됨에 따라 그것 역시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다시 말하지만, 코리아에 관해 ‘분할’이라든지 ‘38도선’이라는 단어는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상기해야 할 점은 이때의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전임자와는 달리, 공산주의 그 자체와 소련에 대해 철저히 불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공산주의와 소련은 ‘생래적인 악(惡)의 존재’이면서 ‘속임수의 대가’인 만큼 처음부터 협상을 통해 공동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견해는 비현실적이라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회담이 열린 시점에 미국은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기에 훨씬 더 큰 자신감으로 소련을 상대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한반도를 소련과 나눠 갖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갖지 않았다. 

오히려 트루먼은 ‘독일이 항복한 때로부터 3개월 이내’에 대일전에 참가한다는 스탈린의 얄타에서의 약속을 철회시키거나 무효화시키고 싶은 희망을 가졌다. 바꿔 말해, 소련의 참전 없이 미국 단독의 군사력으로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기를 바란 것이다. 그래서 트루먼은 그 속셈은 감춘 채 스탈린에게 소련이 대일전에 참가할 뜻을 여전히 갖고 있는지 물었다. 스탈린은 참전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스탈린은 소련의 참전이 8월 15일 이전에는 불가능하다는 취지를 덧붙였다. 

여기서 트루먼은 8월 초순 일본에 원폭을 투하하면 소련의 참전 없이도 일본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일본은 물론이고 코리아와 만주도 미국 단독으로 점령할 수 있다고 믿게 됐다. 그래서 트루먼은 7월 27일 우선 처칠과 공동으로 일본에 대해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을 발표했다. 스탈린은 이 시점에서는 소련이 일본과 중립·불가침조약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 이 선언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는 8월 8일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하면서 비로소 이 선언에 동참한다. 

위에서 살폈듯, 포츠담 정상회담에서는 코리아의 분할이 전혀 거론되지도, 합의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트루먼을 수행한 미국 군사대표단과 스탈린을 수행한 소련군사대표단 사이에서는 코리아에 다한 공동점령계획이 원칙적인 수준에서 논의됐고, 대체로 코리아의 북쪽은 소련군이 점령하고 남쪽은 미국이 점령한다는 데 양해가 성립됐다. 미국 군사대표단 안에서는 미군이 점령하는 지역은 ‘38도선에 가까운 선’ 이남이 될 것이라는 의견이 제시됐다. 그러나 미국 군사대표단이 이 의견을 소련 군사대표단과 나누지는 않았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대목이 하나 있다. 미국 군사대표단 사이에서 ‘38도선에 가까운 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군이 각각 분할 점령한다는 이 의견이 제시된 자리에 합동참모본부의 전략·정책단장 조지 링컨 준장이 참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앞으로 보듯, 그는 미국 정부가 8월 12일, 소련을 상대로 38도선에서의 분할을 제의하기로 결정하는 회의에 참석한다.

논점10
일본은 왜 항복을 지연시키고 있었는가.

미국과 소련이 코리아로의 진공을 위한 군사작전을 논의할 정도로 전황은 일본에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무엇보다 미국과 영국은 공동으로 일본에 항복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일본은 왜 항복하지 않고 있었나. 

이 중요한 시점에 일본은 소련과 미국을 상대로 종전과 평화를 위한 이른바 화평공작을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었다. 소련은 일본의 교섭에 냉담했다. 스탈린은 일본과의 전쟁에 들어가 승전국의 일원이 될 때 얻을 이익이 훨씬 클 것으로 예상했다. 미국은 잠시 일본 제의에 응함으로써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할 수 있는 일본 본토에서의 작전을 피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원폭을 쓰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으로 기울어졌다. 

여기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대목이 있다. 그것은 트루먼 대통령의 위촉을 받아 후버 전 공화당 대통령이 이끈 자문위원단의 건의였다. 그들은 코리아와 대만을 일본이 그대로 통치한다는 조건을 제시하면 일본이 종전에 합의할 것이라는 방안을 건의한 것이다. 트루먼은 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 건의는 미국이 경우에 따라서는 코리아를 버릴 수 있음을 말해 주었다.

논점11
무엇이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냈을까.

트루먼 대통령의 결정에 따라, 미군은 일본 현지시각으로 1945년 8월 6일 아침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그런데도 일본이 항복 의사를 표시하지 않자 미군은 현지시간으로 8월 9일 오전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폭을 투하했다. 그때로부터 꼭 12시간이 지난 시점에 소련은 일본을 상대로 한 전쟁에 들어갔다. 더는 버티기 어려워졌다고 판단한 일본은 8월 15일 항복을 선언했다. 

그러면 무엇이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냈을까. 이 중요한 물음에 대해, 미국 정부는 당연히 미군의 원폭 투하를 내세웠고, 소련 정부는 소련군의 참전을 내세웠다. 학계의 의견도 양분돼 있다. 그러나 그때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가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한 때로부터 이틀 뒤이면서 소련이 선전포고를 하기 직전의 시점에 국왕에게 원폭 투하에 관한 상황을 보고하면서 이를 전기로 삼아 전쟁 종결을 결심하도록 건의했으며, 국왕이 이 건의를 받아들인 사실을 중시하는 경우, 원폭 투하가 항복을 이끌어냈다고 해석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논점12
일본의 늦어진 항복이 코리아의 분할을 가져왔다.

여기서 우리가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사실에 착안하게 된다. 그것은 일본이 평화공작에 매달려 항복을 늦췄기에 자국 국민에게 엄청난 손해를 끼쳤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분할을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트루먼 대통령이 한때 기대했던 대로 일본이 적어도 8~9일 전에만 항복했어도 소련군의 한반도 진입을 막을 수 있었고, 그렇게 됐으면 한반도의 분할은 회피될 수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일제는 패망하면서도 우리 민족에게 또 한 차례의 엄청난 손해를 끼쳤다는 비난을 받을 만하다.

논점13
마침내 38도선에서의 분할 : 분할선을 더 올릴 수 없었을까.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조인식.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 제공]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조인식.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 제공]

일본의 항복이 임박했음을 확인한 미국 전쟁부는 8월 10일 저녁 한반도에서 미군과 소련이 각각 점령할 지역을 확정 지을 선을 마련했다. 구체적으로, 전쟁부 차관보 존 매클로이의 지시를 받아 딘 러스크 육군 대령과 찰스 본스틸 육군 대령은 함께 그 선으로 38도선을 제시했다. 이미 소련군이 북위 41도선까지 진공해 온 현실을 고려해, 적어도 수도 서울 그리고 제1항 부산과 제2항 인천을 미군의 점령지역 안에 포함시키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 38도선을 채택한 것이다. 이 결정을 매클로이 차관보는 그대로 받아들였는데, 그의 지시로부터 수락까지 약 30분이 소요됐다. 

매클로이는 38도선 안을 국무부·전쟁부·해군부 조정위원회에 올렸으며, 이 위원회는 8월 12일 이 건의를 검토했다. 이 자리에 우리가 앞에서 살폈던 존 링컨 준장이 참석해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이에 따라 이 위원회는 이 안을 8월 14일 트루먼에게 보고했으며, 트루먼은 이튿날 스탈린에게 ‘통고’했다. 스탈린은 즉시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이로써 38도선에서의 분할이 결정됐다. 

여기서 우리는 분할에 서글픔을 느끼면서도 분할선의 상향 조정을 거론한 가드너 해군 소장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는 조정위원회의 토론 때 39도선을 제의했지만 링컨의 강력한 반론에 부딪혀 관철하지 못했다. 

미국인 선교사로 한반도의 지리를 깊이 연구한 섀넌 매큔 교수에 따르면, 38도선에서의 분할 결과로, 12개의 강과 75개 이상의 샛강이 잘렸고, 수많은 산이 갈렸으며, 181개의 작은 우마차길, 104개의 지방도로, 15개의 간선도로, 6개의 철로가 절단됐다. 이 분할선은 1953년 7월 27일 성립된 조선=한국정전협정의 결과 휴전선으로 바뀌었고,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신동아 2020년 8월호

김학준 단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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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8월 7일에만 항복했어도 분할 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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