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현민이 쓴 세 권의 책을 읽다
그림이 어찌나 멋져 보였던지…
전쟁 유해가 우선이냐 ‘쇼’가 먼저냐
“文, ‘홍보가 70% 정책은 30%’라 했다”
“국민이 아니라 늘 대통령이 주인공”
1월 16일(현지 시간) 아랍에미리트 두바이를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두바이 엑스포장 내 주빌리공원에서 열린 ‘한국의 날 K-POP 콘서트’에 입장하면서 관중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왼쪽은 탁현민 대통령비서실 의전비서관. [두바이=청와대사진기자단]
마키아벨리의 말이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군중은 늘 겉으로 보이는 것에 사로잡히고, 이 세상에 있는 건 오직 군중뿐이다.”
500여 년 전에 나온 이 말을 믿어도 되는가? 여전히 그의 ‘군주론’이 읽히고 거론되는 걸 보면 옛날이야기라고 일축할 건 아니다. 인간의 속성에 관한 한 50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거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간 달라진 정치의 기술적 측면, 즉 ‘미디어 정치’로 인한 ‘이미지 정치’의 심화를 감안한다면 오히려 오늘날에 더 들어맞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미지 정치’ 자체를 부정하거나 비난하는 건 비현실적이다. 보통 사람들 역시 일상적 삶에서 이미지 중심으로 소통하면서 정치인들에게만 이미지 소통을 하지 말라는 건 말이 안 된다. 어느 정도가 적정 수준인지 판단하긴 어렵지만, 본말(本末)의 전도가 이루어질 정도가 아니라면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문재인의 경우엔 어떨까? 이제 임기가 거의 다 끝나가는 문재인 정권 5년도 되돌아볼 겸 시간의 흐름 순서대로 문재인 ‘이미지 정치’의 총연출자인 탁현민 대통령비서실 의전비서관의 활약을 주요 사건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탁현민을 알기 위해 그가 쓴 세 권의 책을 읽었다. ‘탁현민의 멘션S’(2012), ‘흔들리며 흔들거리며’(2013), ‘당신의 서쪽에서’(2014). 필력이 놀라웠다. 대학다니는 내내 신춘문예 당선을 꿈꾸며 시도했던 문학도였다고 한다. 그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한 심사위원들이 너무 낡은 꼰대들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특히 ‘흔들리며 흔들거리며’를 읽으면서 너무 재미있어 어찌나 웃어댔던지, 옆에 있던 아내가 이런 말을 했다. “읽고 나서 꼭 그 책 줘.”
“문재인이 아들처럼 아낀 탁현민”
2016년 6월 양정철 전 대통령홍보기획비서관(왼쪽)과 탁현민 대통령비서실 의전비서관(오른쪽 두 번째)이 문재인 대통령과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는 모습. [더불어민주당]
탁현민은 2009년 6월 ‘노무현 추모 콘서트’, 4개월 후 노무현재단 창립 기념공연을 기획하면서 문재인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2011년 4월에 시작된 팟캐스트 ‘나꼼수’ 콘서트 기획을 맡음으로써 이후 사실상의 나꼼수 멤버로도 활약했다. 2012년 대선을 맞아 문재인의 대선 조직인 담쟁이포럼에 이름을 올린 탁현민은 선거운동을 토크 콘서트 형식으로 바꾸는 변화를 시도했다. 같은 해 12월 19일에 치러진 제18대 대선은 박근혜의 승리로 끝났지만, 탁현민과 문재인의 관계까지 끊어진 건 아니었다.
훗날 “문재인이 아들처럼 아낀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끈끈한 관계를 맺게 될 결정적인 ‘사건’이 2016년 6월에 일어났다. 히말라야 트레킹이다. 문재인이 양정철과 탁현민을 대동해 6월 13일부터 7월 9일까지 네팔·부탄 트레킹을 다녀온 것이다. 이 여행은 이후 언론이 문재인과 탁현민의 특수한 관계를 거론할 때마다 소환되곤 한다.
문재인이 2017년 5월 9일 제19대 대선에서 승리해 대통령이 되자 탁현민은 대통령비서실 의전비서관실 선임행정관(2급)이 됐다. 문재인의 이미지 정치는 대통령 취임 이틀 만인 5월 11일에 첫선을 보였다. 문재인, 임종석(비서실장), 조국(민정수석) 등을 포함한 청와대 참모진이 와이셔츠 바람으로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들고 청와대 경내를 거니는 모습이 언론을 장식하면서 “전 정권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긍정적 평가를 이끌어낸 것이다.
다음 날 문재인은 첫 대외 활동으로 그동안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돼 왔던 인천공항공사를 방문해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선언했다. 행사 현장에 있던 일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고, 이 뉴스를 접한 일부 문재인 지지자들도 눈물을 흘렸다.
세상에 이렇게 훌륭한 대통령이 있다니! 이렇게 생각한 사람이 많았나 보다. 문재인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 시작했다. 지지율은 리얼미터의 5월 둘째 주 여론조사에서 74.8%를 기록했다. 이게 얼마나 무책임한 ‘희망고문’ 정책이었는지는 나중에 다 드러나지만, 아직은 문재인의 시간이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 이벤트보다 훨씬 더 감동적인 이벤트는 며칠 후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해 5·18 유족을 가만히 껴안아주던 모습이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감동 그 자체였다.
남북 정상회담 이벤트의 정치적 효과
2018년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초대형 이벤트가 열렸다.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만난 남북 정상회담은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림이 더욱 감동스러웠다. 판문점을 레이저빔으로 수놓은 것도 인상적이었지만, 가장 인상적인 건 문재인과 김정은의 도보다리 산책이었다. 여기서 나온 그림이 어찌나 멋져 보였던지 나중에 시진핑과 도널드 트럼프까지 따라 할 정도였다.남북 정상회담의 정치적 효과는 컸다. 문재인의 지지율은 80%대로 상승했으며, 40여 일 후에 치러진 6·13 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은 압승을 거뒀다. 어찌나 그 충격이 컸던지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우리는 참패했고, 나라는 통째로 넘어갔다. 모두가 제 잘못이고 모든 책임은 저에게 있다”며 대표직 사퇴를 선언할 정도였다.
같은 해 9월 18일부터 20일까지 평양에서 개최된 제3차 남북 정상회담도 감동적 장면이 많은 이벤트였다. 능라도 5·1경기장에서 15만 평양시민은 문재인의 연설에 박수로 호응했고, 백두산 천지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남북 정상이 손을 맞잡아 올린 장면은 이 회담의 백미를 장식했다. 그러나 다음 해 북한이 문재인의 광복절 경축사에 대해 쓴 ‘삶은 소 대가리’라는 표현이 시사하듯, 남북 정상회담의 성과는 문재인의 국내용 정치적 승리에 기여한 것으로만 그치고 말았다.
그간 혹사당할 정도로 열심히 일한 것에 지쳤던지 탁현민은 2019년 1월 하순 사임했다가 1년여 후인 2020년 5월 다시 청와대로 복귀했다. 이전의 선임행정관 직위에서 승진해 1급 고위공무원인 의전비서관으로 임명된 것이다.
탁현민이 청와대를 떠났을 때 치러진 제21대 총선(2020년 4월 15일)에서 문 정권은 예상을 깨고 180석을 거머쥐는 대승을 거뒀다. 코로나19가 초래한 국민적 위기의식과 더불어 코로나 긴급재난지원금의 효과 덕분이었다. 이 총선 결과는 불행하게도 문재인의 ‘이미지 정치’를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자기들 잘난 덕분에 이긴 걸로 생각했으니, 해오던 대로 계속하는 게 촛불민심에 부응하는 길이라 믿은 것이다. 그 바람에 이미 엉망이 된 부동산정책도 어떤 교정의 기회를 얻지 못한 채 대실패를 향해 계속 질주했다.
전쟁 영웅들의 유해는 무대 ‘소품’이었나?
2020년 6월 25일 서울공항에서 열린 ‘6·25전쟁 70주년 기념식’에서 국군 참전용사 유해 147구를 봉환하는 행사가 청와대에 복귀한 탁현민의 실력을 보여주는 첫 대규모 무대가 됐다. 이 행사 덕분에 많은 사람이 건물 외벽에 다양한 콘텐츠 영상을 투사하는 기법이라는 ‘미디어 파사드’에 대해 알게 됐고, 비행기 동체에 비춘 영상에 깊은 감동을 받았겠지만, 이는 유해에 대한 존중과 시청자의 감동 가운데 “무엇이 우선인가?”라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유해는 이날이 아니라 전날 도착했고, 행사장에 서 있던 공군 비행기는 다른 비행기였는데, 사흘 전부터 이 비행기를 행사장에 세워놓고 예행연습을 하느라 유해는 원래 실려 온 비행기에서 내려져 어디선가 하룻밤을 보내고 그중 유해 7구는 행사를 위해 다른 비행기에 실려 있었다는 게 밝혀졌기 때문이다.
비행기 동체에 무대 영상을 비추는 일이 기술적으로 시간이 오래 걸려 미리 다른 비행기를 갖다놓고 작업했다는 해명이 나왔지만, 이게 과연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일이었느냐는 비판이 제기됐다. 유해가 70년 만에 조국 땅을 밟는 순간을 생중계로 보는 줄 알았던 시청자들을 사실상 속이면서까지 꼭 그렇게 했어야만 했느냐는 것이다. 고국으로 돌아오는 유해가 행사의 중심이 아니라 비행기와 영상 투사 등 쇼가 우선이었다는 점에서 정부가 전쟁 영웅들의 유해를 무대 ‘소품’ 취급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탁현민의 이미지 정치에 대한 청와대 내부 반론은 없었을까? 그건 거의 불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탁현민의 파워가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강찬호 중앙일보 논설위원은 2020년 7월 30일자 칼럼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진짜로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누굴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양정철·윤건영·김경수 외에 탁현민을 지목한 여권 관계자의 말을 이렇게 소개했다.
“캠프에서 이벤트를 할 때 우리가 짜는 계획은 다 소용없다. 탁현민이 들어와 뒤집으면 끝이다. 문 후보도 탁현민에겐 꼼짝 못 하더라. 절대적으로 매달리더라. 탁현민의 힘은 밖에서 알려진 것 이상이다. 그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이는 캠프 시절의 이야기지만, 문재인 집권 이후 탁현민의 힘이 더 강해졌으면 강해졌지 달라진 건 없었다. 문재인 자신부터 홍보의 중요성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고민정 민주당 의원은 ‘일요신문’(2020년 8월 13일) 인터뷰에서 문재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즘도 소통과 홍보 잘하라는 비판을 많이 듣는다. 부대변인과 대변인일 때도 ‘그분’께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홍보 많이 해라’였다. ‘정책 아무리 잘 만들어도 홍보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 ‘홍보가 70%고 정책은 30%’라는 말까지 할 정도로 문 대통령은 홍보의 중요성을 많이 말했다.”
물론 얼마든지 좋은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이지만, 그런 홍보 중시 마인드가 문재인의 탁현민 의존도를 높였을 것이라고 추정해도 무리는 없을 게다. 당시 야권에선 탁현민을 심지어 “청와대의 괴벨스와 같은 존재”로 보는 시각마저 있었지만, 탁현민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다.
“탁현민이 대한민국 대통령인가”
문재인은 부지런한 대통령이었지만, 이 미덕은 주로 ‘이미지 정치’를 위해 발휘됐다. 질병관리본부를 질병관리청으로 승격시킨 문재인은 승격 하루 전날인 2020년 9월 11일 초대 질병관리청장 정은경에게 직접 임명장을 주기 위해 충북 오송에 있는 질병관리본부를 찾았다. 문재인은 정은경을 “K방역의 영웅”이라고 극찬했으며, 정은경은 대통령 뒤에서 감사 표시로 허리를 90도로 숙였다.이 행사를 기획한 탁현민은 “(대통령이) 권위를 낮출수록 권위가 더해지고 감동을 준다”며 자화자찬했지만,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엔 임명장 이벤트를 방역지침 위반이라며 비판하는 항의 글이 올라왔다. 작성자는 “(정부의 방역) 명령을 실천하는 중에 손님도 없는 상황에서 영업 정지당해 다 죽어가는데 공무원들이 빼곡히 서서 사진 촬영하는 장면을 소상공인들이 어떠한 심정으로 바라봐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같은 해 9월 19일 청와대에서 열린 제1회 청년의날 기념식은 어떤가. 이 행사엔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 방탄소년단(BTS)이 ‘청년 대표’로 참석했다. 문재인은 이날 행사에서 ‘공정’을 37번이나 언급했지만, 세계에서 가장 바쁘고 주목받는 아티스트인 BTS가 과연 불공정에 분노하고 부동산으로 좌절하는 청년을 대표하는지 논란이 제기됐다.
탁현민의 자화자찬도 보기에 좀 민망했다. 중앙일보 논설위원 안혜리는 ‘탁현민이 대한민국 대통령인가’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이렇게 비판했다.
“행사 당일에 마치 본인이 대통령인 양 ‘메시지를 고민했다’고 떠벌리고, 행사에 참석한 BTS가 대통령에게 전달한 선물을 놓고도 ‘나의 선물’이라고 생색을 냈다. 반면 이날 문 대통령 SNS는 단순했다. ‘정부는 기회의 공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청년들은 상상하고, 도전하고, 꿈을 향해 힘차게 달려주기 바랍니다.’ 두 SNS만 놓고 보자면 탁 비서관이 지휘관이고 대통령은 그저 연출가의 의도를 충실히 구현해낸 무대 위 배우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행사는 탁현민이 그렇게 뻐기고 싶었을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건 보름 후인 10월 3~4일 이틀간에 걸쳐 경향신문·한국리서치가 문재인의 국정 운영에 대한 여론조사를 한 결과에 따르면, 유일하게 ‘잘하고 있다’는 평가(50%)가 ‘잘 못하고 있다’는 평가(45%)보다 높은 건 국민과의 소통 항목이었다는 사실이다. 문재인이 대통령 취임사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해 강조했던 소통에 대한 약속이 사실상 부도가 났다는 점에 비추어 본다면, 바로 이게 ‘이미지 정치’의 파워는 아닐까?
그해 12월 11일 문재인이 경기 화성시 한국토지주택공사(LH) 임대주택 100만호 기념단지인 동탄 공공임대주택 단지를 방문한 것도 그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는 “아늑하고 아주 아기자기하다” “신혼부부 중에 선호하는 사람이 많겠다”며 호평을 이어갔다. 공공임대주택에 대한 대통령의 관심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행사였지만, LH가 이 방문 일정을 위해 약 4억5000만 원을 지출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되었다.
이 임대주택은 최근에도 부실 시공으로 주민들의 하자 피해 호소가 줄을 잇는 곳임에도 대통령을 위한 보여주기식 이벤트를 연출하기 위해 따로 인테리어와 보수공사에 돈을 들였다는 것이다. 야당은 “대통령 행사를 위해 서민들의 실상과는 동떨어진 판타지 연출극을 펼치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정의·평등·공정은 탁현민의 소품으로 전락”
2021년 2월 5일 문재인은 전남 신안군 임자대교에서 열린 ‘세계 최대 풍력단지 48조 투자 협약식’을 찾아 “완전히 가슴이 뛰는 프로젝트” “현존하는 세계 최대 해상풍력단지보다 무려 일곱 배나 큰 규모”라며 강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행사장에는 거대한 크기의 풍력발전기 여러 대가 설치돼 있었다. 그런데 이는 모두 모형으로, 이를 위해 3억 원 가까운 예산이 투입됐다는 게 나중에 밝혀졌다. 이 모형을 돌리기 위해 발전기가 투입됐다. 야당은 “전기를 생산하는 풍력이 아닌 전기를 소비하는 풍력인 셈이다. 보여주기식 행사를 위해 국민 혈세를 낭비하는 꼴이다”라고 비판했다.같은 해 3월 초순에 벌어진 백신접종 모의훈련, 백신 모형을 사용한 민·관·군·경 합동 수송 훈련, 테러 세력에 의한 백신 탈취 방지 훈련은 많은 사람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정치쇼의 압권이자 백미”라는 비판도 나왔다. 그게 대통령이 직접 참관하고 텔레비전에 방영하는 호들갑을 떨 일이냐는 것이었지만, 그럴 만한 이유는 있었다. 한국은 2월 26일에야 백신접종을 시작해 세계에서 102번째를 기록한 나라였으니, 문 정권의 입장에선 그런 쇼를 통해서라도 백신 정책의 실패를 감출 필요를 느꼈을 게다.
5월 7일 김부겸 국무총리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에서 참고인 신분으로 출석한 김경율 경제민주주의21 공동대표는 “이른바 ‘정의’ ‘평등’ ‘공정’, 이런 것들이 집권 4년 동안 많이 희화화돼 버렸다”며 “매몰차게 말씀을 드리면 탁현민 비서관의 어떤 소품 정도로 전락해 버리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탁현민식 이벤트를 좋아한다는 걸 안 정부 부처들은 문재인의 눈에 들기 위해 ‘탁현민 따라 배우기’ 경쟁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6월 중순에 터진 ‘G7 회의 사진 조작’ 사건을 이해하긴 어려울 것이다. 이는 정부가 문재인이 초청국 정상 자격으로 참석한 주요 7국(G7) 정상회의를 알리면서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의 모습을 잘라낸 단체 사진을 홍보 포스터에 사용함으로써 마치 문재인이 가운데 서 있는 것처럼 조작한 사건이다.
정부는 ‘사진 한 장으로 보는 대한민국 위상’이란 제목의 홍보 포스터에서 “이 자리 이 모습이 대한민국의 위상입니다. 우리가 이만큼 왔습니다”라고 했다. 박수현 대통령비서실 국민소통수석비서관은 페이스북에 이 사진을 올리며 “대한민국 국격과 위상을 백 마디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더 크게 말하고 있다”고 했다. 청와대는 사진 조작이 드러나자 “편집 디자이너의 제작상 실수였다”고 했지만, 문 정권의 홍보는 매사 그런 식이었다.
‘누리호 개발 과학자 병풍’ 논란
문재인 대통령이 2021년 10월 21일 전남 고흥 나로우주센터 연구동에서 한국형발사체 누리호의 발사를 참관하고 있다. [고흥=청와대사진기자단]
이에 현장을 지휘했던 탁현민은 “악마 같은 기사”라고 반발했다. 하지만 한국형발사체 개발사업본부의 주역인 조광래 전 한국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 원장은 “통제동이 발사를 앞두고 정신없이 바쁘고 신경줄이 잔뜩 조여진 상황이었는데, 청와대 의전팀·경호팀들뿐 아니라 이벤트 기획사 사람들까지 돌아다녔다. 발사 당일 아침에는 통제동 출입까지 일일이 통제해서 연구원들이 들고나기 힘들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게다가 발사 후 본부장을 비롯한 항우연 엔지니어들을 40분 이상 뻗치기(대기)시킨 게 결정타가 됐다. 애초 항우연에서는 발사 현장에 대통령이 오지 않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보냈다. 대통령이 발사 현장에 오게 되면 어쩔 수 없이 통제가 많이 이뤄지고, 방해될 수밖에 없다. 다른 나라의 경우 대통령이 발사 현장에 직접 오지 않고 메시지를 보내는 데 그친다. 그게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10월 25일 문재인은 마지막 국회 시정연설을 했다. 국무총리가 대신하던 과거와 달리 대통령이 직접 출석해 연설한 건 잘한 일이었지만, 문제는 생중계를 12개 채널에서 했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모든 채널이 똑같이 화면을 나눠, 절반은 대통령 연설 모습, 다른 절반은 연설 내용을 설명하는 ‘청와대 제공’ 그래픽을 보여줬다. 이전 정권에선 못 보던 방식이었다. 이런 중계 방식은 과거보다 더 권위주의적인 일방통행이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시정연설 내용도 문제였다. 늘 그래왔듯이 또 자화자찬 일색이었다. 정의당은 “자화자찬 K(케이) 시리즈에 가려진 ‘K-불평등’은 외면한 연설”이라고 혹평했다.
“문 대통령은 K-방역, K-조선, K-팝, K-푸드, K-뷰티, K-반도체, K-배터리, K-바이오, K-수소, K-동맹 등 10가지가 넘는 화려한 K-시리즈 속에 정작 어두운 K-불평등은 말하지 않았다. 정부가 말하는 경제 지표는 선진국인데, 왜 시민들의 삶은 선진국이 아닌지에 대해 문 대통령은 그 대답을 했어야 한다.”
한국은 ‘도덕쟁탈전 벌이는 거대한 극장’인가?
2022년에도 달라진 건 없었다. 아니 대선이 임박하면서 보기에 민망한 일이 속출했다. 예컨대 이재명 민주당 대선후보가 국산 장거리요격체계 L-SAM을 띄우자, 청와대가 “L-SAM 시험 발사 성공”이라며 호응했고, 국방부는 ‘개발 중인 무기 공개 불가’의 공보 준칙을 어기고 요격 시험도 안 한 L-SAM의 영상을 언론에 배포해 논란을 빚었다. 게다가 L-SAM 영상 도입부에 5년 전 미국 요격체계의 웅장한 발사 장면을 몰래 집어넣어 영상 조작 논란까지 일으켰다.이렇듯 사실이나 진실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 정치’는 문 정권의 속성이 됐고, 이는 문재인의 자화자찬 중독과도 무관치 않다. 문재인의 3·1절 기념사가 그런 자화자찬과 자부심의 압축판으로 흐른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모두 다 아름다운 이야기이긴 했지만, 다수 유권자는 그런 자화자찬에 호응하지 않았다. 대선 기간 내내 정권교체 열망이 정권 재창출 열망을 압도했고, 이는 결국 윤석열의 당선으로 이어졌으니 말이다.
이강래 전 대통령비서실 의전비서관실 선임행정관은 “최고의 의전은 VIP(대통령)를 띄우고, 감동시키는 게 아니라 VIP가 만나는 사람, 더 나아가 그걸 뉴스를 통해 보는 국민을 감동시키는 것”이라며 “탁 비서관이 만들어낸 작품(행사)을 보면 문재인 대통령이 약속했던 ‘국민이 주인공’이 아닌 늘 ‘대통령이 주인공’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어찌 생각하면 그건 오히려 사소한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누가 주인공이 되건 전반적인 국정 운영이 상식적 수준만 유지했어도 정권교체의 열망이 그렇게까지 높진 않았으리라. 문제의 핵심은 ‘국정 운영의 이벤트화’에 있었다. 부동산 가격 폭등을 비롯해 큰 문제가 터지면 “우리가 혹 잘못 하고 있는 건 아닌가”라고 성찰을 하는 대신 문제를 감추거나 호도하는 ‘이미지 연출’에 청와대의 역량이 집중됐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그렇게 했던 심리의 바탕엔 자신들만이 선하고 정의롭다는 독선과 오만이 자리 잡고 있었고, 이게 바로 그 지긋지긋한 ‘내로남불’의 온상이 됐다. 서울대 철학과에서 8년간 유학한 일본 철학자 오구라 기조는 “한국 사회는 사람들이 화려한 도덕 쟁탈전을 벌이는 하나의 거대한 극장”이라고 했는데, 이를 드라마틱하게 입증해 준 주인공이 바로 문재인과 문 정권 세력이었다. 도덕 쟁탈전에서 패배한 야당은 적폐청산의 대상이었을 뿐 민주주의적 대화나 협치를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걸 문재인은 집권 기간 내내 질리도록 실천해 왔다. 이게 바로 그의 높은 임기 말 지지율을 떠받치는 보루가 됐으니, 이걸 비극이라고 해야 할지 희극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탁현민에겐 죄가 없다. 가수 윤도현은 ‘탁현민의 멘션S’ 추천사에서 ”때로는 탁현민이 우리 무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의 무대를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고 했다. 이 말이 시사하듯 탁현민은 단지 유능했을 뿐이다. 문재인의 도덕적 독선과 오만을 공유하고 실천한 건 그가 문 정권에서 일할 수 있었던 조건이었기에 그마저 탁현민을 탓할 일은 아니었다. 같은 이치로 문재인만을 탓하는 것도 공정치 못하다. 그를 원했던 지지자들의 민심을 감안컨대, 오랜 세월 ‘도덕 쟁탈전’이 전개돼 온 한국 근현대사의 업보라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강준만
● 1956년 출생
● 성균관대 경영학과 졸업, 미국 위스콘신대 메디슨캠퍼스 언론학 박사
● 現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 저서 : ‘발칙한 이준석: THE 인물과사상 2’ ‘싸가지 없는 정치’ ‘부동산 약탈 국가’ ‘한류의 역사’ ‘강남 좌파’ ‘노무현과 국민사기극’ ‘김대중 죽이기’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