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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도 못 만들면서 무슨 반도체냐”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㉕]

이건희 회장이 사재 털어 한국반도체 인수한 사연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2-03-05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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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성 반도체의 전신 한국반도체

    • 삼성·강기동 공동 경영체제로 바뀌다

    • 긴급 사장단 회의 소집한 호암

    • “美日 기업도 힘겨워하는 사업을…”

    • 초기에는 ‘기술 보따리 장사’

    2010년 2월 5일 삼성그룹 창립자인 고(故) 이병철 회장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린 가운데, 이건희 회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 [동아DB]

    2010년 2월 5일 삼성그룹 창립자인 고(故) 이병철 회장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린 가운데, 이건희 회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 [동아DB]

    2017년 8월 별세한 고(故) 강진구 전 삼성전자 회장은 삼성그룹의 1세대 전문 경영인으로 삼성 반도체 신화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다. 이병철·이건희 회장 2대(代)에 걸쳐 삼성전자의 기틀을 닦은 이로 평가받는다. 1973년 삼성전자 전무에 오른 이후 1998년 회장에서 물러날 때까지 25년간 대표를 맡으면서 1983년 삼성전자 최초의 메모리 반도체인 64KD램과 세계 최초 64MD램 개발을 이끈 주역이다. 1995년 삼성이 그룹 발전을 이끈 인물을 기리기 위해 만든 ‘삼성 명예의 전당’ 1호로 헌액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1996년 ‘삼성전자 신화와 그 비결’이란 자서전을 펴냈는데 이건희 회장은 추천사에서 “오늘의 삼성전자를 있게 한 최대의 공로자”라고 강 전 회장을 평가했다.

    그의 책에는 삼성전자 반도체 초기 역사가 잘 담겨있다. 강 전 회장은 삼성전자 반도체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한국반도체 파산 소식을 삼성 내에서 처음 전해들은 사람이다. 그는 소식을 듣자마자 호암 이병철 회장에게 알렸다고 밝히고 있다. 강 전 회장의 말이다.

    “삼성전자 사장으로 취임한 지 1년여가 지난 1974년 12월초였다. 한국반도체를 세운 강기동 박사의 합작 파트너인 미국인 서더스 씨가 만나자고 해서 나갔더니 자기가 갖고 있는 회사 절반의 지분을 넘겨주고 사업에서 손을 떼고 싶다는 거였다.

    강기동 박사와 둘이 각각 50만 달러 씩 총 100만 달러를 투자했는데 더 이상 끌고 갈 수가 없다는 거였다. 삼성전자가 전자사업을 하는 이상 반도체를 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며 지분인수가 큰 기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강 전 회장은 이로부터 두 달여 전 한국반도체가 경기 부천시에서 공장 준공식을 할 때 직접 현장에 가보기도 했다며 이렇게 말을 잇는다.

    “당시 삼성전자는 흑백TV, 세탁기, 냉장고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제품에 마이크로 컨트롤이라는 반도체를 사용하고 있었다. 마이컴이라고도 불렀는데 계산 기능을 갖고 있으면서 기계를 컨트롤하는 집적회로(IC)였다. 그렇지 않아도 반도체 없는 전자회사는 엔진 없는 자동차 회사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그 엔진을 인수하라는 것 아닌가….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이튿날 호암께 ‘사야겠다’고 보고하자 ‘알아서 하라’고 하셨다. 호암은 두 말이 없으셨다. 승인이 난 것이다. 1974년 12월 6일자로 한국반도체(주)의 주식 50% 인수가 확정된 것이다.”

    대한민국 반도체 역사의 始祖 강기동

    한국반도체의 설립자인 강기동 박사가 2018년 낸 자서전 ‘강기동과 한국 반도체’. [아모르문디 제공]

    한국반도체의 설립자인 강기동 박사가 2018년 낸 자서전 ‘강기동과 한국 반도체’. [아모르문디 제공]

    한국반도체는 어떤 회사였을까. 이 회사 설립자 강기동 박사는 강진구 전 회장의 서울대 공대 전자공학과 1년 후배이기도 했다. 강기동은 대한민국 반도체 역사에서 꼭 기억해야할 인물이다. 반도체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 최초의 반도체 회사를 설립했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따지면 대한민국 1호 반도체 회사는 삼성이 아니라 한국반도체라고 할 수 있다.

    강기동은 삼성은 물론 훗날 현대반도체(현 SK하이닉스) 설립에도 관여했다. 현재 미국 네바다주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2018년 자서전 ‘강기동과 한국 반도체’를 낸 바 있으며 국내 언론에도 근황이 간간이 소개된 적이 있다.

    그는 1958년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당시만 해도 미국 내 반도체 특성화 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 오하이오 주립대로 유학을 가 1962년에 박사학위를 받는다. 이후 애리조나 주 사막 도시 피닉스에 있는 모토롤라에 입사한 뒤 반도체 핵심 기술 연구에 착수하게 된다. 당시 모토롤라는 일본이 가장 배우고 싶어 했던 세계 최고 반도체 생산회사였다. 강기동은 생산 책임을 맡으면서 핵심 기술을 연구한다.

    자서전 출간을 계기로 2018년 11월 서울에 왔던 그를 서울대 동창회보가 인터뷰한 것이 있는데, 여기에 한국반도체 설립과 관련한 언급이 있어 소개할까 한다.

    모토로라에서 무슨 일을 하셨나요.

    “새로운 반도체를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용도를 정해놓고 하는 게 아니라 먼저 만들어 놓고 용도를 찾는 식이었죠. 미 국방부 극비 프로젝트인 ‘Minuteman(대륙간 탄도탄)’에 관련된 일도 했지요. 특히 반도체 제작 공정에서 중요한 물, 가스의 순도(純度) 문제 해결을 위해 여러 방법을 찾았어요.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불순물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고 순도(純度) 환경을 위해 반도체용 약품을 따로 만들어 달라고 요구해 이게 업계 표준이 되기도 했죠.”

    한국반도체 설립은 어떻게 해서 이뤄진 건가요.

    “한마디로 모험이었습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미국 첨단 기술을 해외로 유출한 반역범으로 몰릴 수도 있었으니까요. 모토로라 반도체 연구소에 있을 때 군사 기밀 프로젝트도 함께 수행했었는데 내 조국 대한민국에 선진 반도체 기술을 이식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편법을 썼습니다. 미국에 회사를 설립하고 한국에 조립 공장을 만드는 식으로 포장을 한 거죠. 회사 설립까지는 문제가 없었는데 막상 공장을 지으려고 할 때 중동 전쟁이 터져 돈 문제 등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창립은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어요. 삼성에서 인수한 후 기술 지도를 위해 2년간 사장을 맡았다가 지분을 다 팔고 미국으로 돌아갔지요.”

    1970년대 초 한국은 매우 열악한 환경이었을 텐데요.

    “무척 힘들었죠. 반도체 전 공정이 제 머릿속에는 다 있는데, 실제 구현하려니까 부딪히는 문제들이 한둘이 아니었어요. 우선 장비들을 전부 미국에서 가져와야 하는데 당시 세관 목록에 없던 것이 많아 막히기 일쑤였어요. 겨우 가져와도 이동 과정에서 망가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지요. 전기 공급이 끊긴 적도 간혹 있었고요. 반도체에 대한 이해도도 낮아 정부나 업계 사람들을 만나 도움을 구하기도 힘들었어요. 당시 큰 전자회사들도 반도체를 하던 회사들이 있긴 했는데 원시적인 조립 수준에 머물고 있을 때여서 제가 하려던 일을 비현실적인, 불가능한 일로 여겼던 것 같아요.”

    그래도 그때 하셨던 고생이 지금 우리가 반도체 강국으로 가는 밑거름이 된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지요. 1983년 삼성이 우리나라 최초로 64K DRAM을 개발하는데 그 반도체가 한국반도체가 있었던 부천 공장에서 나왔습니다.”


    시대조류는 산업화에서 정보화로

    강기동의 말대로 한국반도체 설립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물론 그 당시 한국에 반도체 공장이 없던 것은 아니다. 1965년 미국 코미(KOMY) 그룹을 시작으로 미국의 시그네틱스, 페어차일드, 모토롤라, 일본의 도시바가 진출해있었다.

    하지만 이들 모두 한국인들의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려는 다국적 기업들로 자국에서 가져온 칩을 한국에서 조립하는 수준이었다. 1974년 1월 경기 부천시에 세워진 한국반도체는 칩 설계에서부터 당시로서는 최첨단 75㎜(3인치) 웨이퍼(반도체 칩 원재료가 되는 동그란 실리콘 기판) 생산라인까지 전 공정을 갖춘 그야말로 제대로 된 대한민국 최초의 반도체 공장이었다.

    한국반도체는 숫자를 빨갛게 표시하는 디지털 손목시계용 칩 생산을 우선 목표로 했지만 출발부터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돈이 부족했다. 초기에 들어간 100만 달러는 미국이나 일본 회사들 투자비용의 10%에 불과할 정도로 작은 액수였다.

    운도 좋지 않았다. 1973년 오일쇼크 여파로 장비와 자재 값이 천정부지로 뛰었다. 결국 준공 2개월 만에 미국인 투자자가 먼저 손을 들고 삼성에 지분을 팔아버렸고 이후 삼성과 강기동 공동 경영체제로 바뀐다.

    삼성과의 합작투자 회사로 다시 출발한 한국반도체는 1년도 채 되지 않은 1975년 9월 LED(발광다이오드) 전자손목시계용 반도체 칩 개발에 성공한다. 시간이 숫자로 빨갛게 표시되는 전자 손목시계는 당시만 해도 전 세계적 각광을 받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첨단 제품이 나온 격이어서 박정희 대통령이 외국 방문객들에게 ‘대통령 박정희’를 새긴 시계를 선물로 주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한국반도체는 트랜지스터 생산과 TV용 집적회로(IC) 양산에도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고(故) 강진구 전 삼성전자 회장(사진)은 삼성그룹의 1세대 전문 경영인으로 삼성 반도체 신화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다. [동아DB]

    고(故) 강진구 전 삼성전자 회장(사진)은 삼성그룹의 1세대 전문 경영인으로 삼성 반도체 신화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다. [동아DB]

    하지만 1976년 말부터 시장이 갑자기 위축되면서 다시 위기가 닥쳤다. 결국 강기동마저 두 손을 들었다. 나머지 50% 지분을 모두 삼성에 팔고 미국으로 떠나겠다고 한 것. 이 대목에서 이건희 회장이 등장한다. 다시 고 강진구 전 회장의 회고다.

    “호암께 한국반도체의 나머지 절반을 인수하는 것과 관련해 보고하러 들어갔다. 호암은 보고를 다 듣고 난 다음 바로 그 자리에서 이건희 회장(당시에는 이사)에게 전화를 걸어 의견이 어떠냐고 물었다.

    전화가 끝난 다음 ‘이건희 이사가 반도체 사업은 대단히 중요하며 안하면 안 될 사업이니 허락한다면 자신이 개인 출자까지 하겠다고 하더라’고 말해주었다. 이렇게 해서 한국반도체 완전인수가 결정되었다.”

    생애 첫 사업을 선택하다

    이건희 회장이 사재를 털어 한국 반도체를 인수하겠다고 나선 배경에는 호암은 물론 회사 경영진들도 반도체 회사 인수를 탐탁지 않게 여겼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고인이 직접 밝힌 글 ‘반도체 사업의 시작’에는 당시 상황이 비교적 소상히 설명돼 있다.

    “1974년 한국반도체라는 회사가 파산에 직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엇보다도 ’반도체‘라는 이름에 끌렸다. 그동안 내 나름대로 첨단 산업을 물색하면서 반도체 사업을 염두에 두고 있던 중이었다.

    시대 조류가 산업사회에서 정보화 사회로 넘어가는 조짐을 보이고 있었고 그중 핵심인 반도체 사업이 우리 민족의 재주와 특성에 딱 들어맞는 업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그러나 한국 반도체를 실제로 조사해 보곤 실망이 컸다.

    이름만 반도체지 트랜지스터나 만드는 수준이었다. 언제 LSI(대규모집적회로), VLSI(초대형 집적 회로)를 만들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상당한 고민 끝에 인수를 결심했다. 전자 산업뿐만 아니라 자동차, 항공기술 등의 분야는 핵심 부품인 반도체 기술 없이는 불가능한데다 한국 반도체를 종자(種子)로 국내 하이테크 산업에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경영진은 TV하나 제대로 못 만드는 형편에 최첨단으로 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고 시기상조라고 하면서 회사 인수에 강하게 반대했다. 결국 나는 사재를 털어 내국인 지분을 인수했다.”

    당시 중앙일보, 동양방송, 동방생명(현 삼성생명), 중앙개발을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던 이건희 회장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한 생애 첫 사업으로 반도체 업에 도전했다.

    앞선 회에서 언급한 조태훈 건국대 명예교수는 2018년 1월 온라인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비서실 팀장으로 있던 어느 날 오후 긴급 사장단 회의가 소집되었다. 이병철 회장께서 좌우에 홍진기 중앙일보 회장과 이건희 부회장을 대동하고 회의를 주재하셨다.

    호암은 ‘우리 삼성이 반도체 사업을 해야 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해야 하는데 천문학적인 큰돈을 투자해야 하고 리스크도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특별히 사장단 여러분의 의견을 물어 보기 위해 회의를 소집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곧이어 사장들을 앉은 순서대로 호명하시면서 반도체 사업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여부와 왜 그렇게 생각하는 지를 밝히라고 했다.

    3분의2 정도 사장들이 반대 의견을 냈다. 위험 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에 잘못될 경우 그룹의 존립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이 핵심 이유였다. 하지만 삼성의 반도체 사업은 대다수 사장들의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하기로 결단이 내려졌다. 이 사활을 건 결단의 배후에는 당시 막 후계자로 결정되어 부회장직에 오른 건희의 역할이 컸다.”

    삼성 사활 건 진출 배후에는 이건희 부회장

    이건희 회장은 월간조선 2000년 7월호 인터뷰에서 반도체 사업 진출 초기를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이병철 회장께서는 처음에 반대했다고 들었습니다. 회장께서 반대하신 논리는 무엇입니까.

    “선대 회장은 여러 큰 사업을 일으키셨지만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가시는 신중한 분이셨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반도체 사업은 지금 기준으로 라인 한 개를 갖추는데 1조 5000억 원이 들어갈 만큼 리스크가 큰 데다 500여 개 공정에서 어느 한 군데도 불량이 없어야 하고 현미경으로 볼 수 있는 먼지가 1평방미터 안에 한 개 이하여야 하는 초 청정 기술을 필요로 합니다. 그때까지 삼성이 해왔던 사업하고는 개념 자체가 달랐던 거죠. 그래서 제가 우선 사재라도 털어서 시작하겠다고 말씀드리고 여러 자료를 수집해서 수시로 설명을 드렸습니다.

    선대 회장께서도 사업 감각이 남다르셨던 분이라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심각하게 고민을 하셨습니다. 1982년에는 27억 원을 들여 반도체 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본격적으로 지원을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당시 정부와 경제계에서는 ‘반도체처럼 불확실한 사업에 수억 달러를 투자했다가 실패하면 국민 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줄 것이다. 미국, 일본의 최고 기업들도 힘겨워하는 사업을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라며 크게 반대했습니다. 주변에서 이렇듯 반대하니 선대 회장께서도 멈칫하지 않으실 수가 없었죠.
    결국 고민하시던 끝에 1983년 2월 ‘누가 뭐래도 삼성은 반도체 사업을 한다’는 도쿄 구상을 선언하시게 된 겁니다. 그 이후로 반도체 사업은 삼성의 미래 사업으로 힘을 받아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도체 사업의 성패는 첨단기술 확보에 달려 있습니다. 이 첨단 기술을 삼성은 어떤 방식으로 확보하셨습니까.

    “반도체를 시작할 때만 해도 국내에는 기업, 연구소, 학계 어디에도 전문가가 없었습니다. 미국이나 일본에서 들여와야 되는 데 두 나라 모두 첨단기술 보호 차원에서 기술 이전을 회피했습니다. 오죽하면 미일(美日) 간에 반도체 스파이전까지 있었겠어요. 결국 제가 시작한 일이니 제가 책임을 져야 했지요.

    초기에는 직접 일본, 미국에 가서 반도체 기술자들을 만나고 설득해서 우리 기술진에게 기술을 전수하는 ‘기술 보따리 장사’를 했습니다. 실리콘 밸리에 가서는 당시 삼성전자 사장 월급의 네 배, 다섯 배를 주고 전문가들을 뽑아오기도 했습니다. 기술 개발할 때에는 미국 현지에 연구소를 세우고 한국에 있는 연구진들과 같이 시작해서 경쟁을 시켰습니다.”

    고인의 말은 이처럼 간단하지만 그 속사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국 반도체 산업사(史)를 관통하는 드라마틱한 사건들과 에피소드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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