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 가운데 G가 단연 최우선
오너가 이끌어야 책임·뚝심 경영 가능
최선 절충안=이사회 경영… “투명하면 문제없어”
사외이사 독립성은 고도의 전문성 통해 실현
행동주의 펀드? “아직 시기상조”
5월 2일 김화진 교수는 ‘신동아’와 인터뷰하면서 “이사회 경영이 한국 실정에 맞는 최선의 절충안”이라고 말했다. [김도균 객원기자]
5월 2일 서울 중구 한 호텔에서 만난 김화진(63)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말이다. 김 교수는 30여 년간 기업 지배구조 분야에 천착해온 ‘한국 지배구조 연구 1세대’다. 서울대 수학과 졸업 후 독일 뮌헨대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하버드대 로스쿨을 졸업했다. 미시간, 스탠퍼드, 텔아비브, 뉴욕대 등에서 기업 지배구조 과목을 강의하고 옥스퍼드, 케임브리지대 등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는 세계적 학자다. 4개 국어로 발간된 저서가 있다. 이 가운데 우수학술도서로 지정된 ‘소유와 경영’(2005) ‘기업인수합병’(2008) ‘기업지배구조와 기업금융’(2010) 등은 지배구조 연구자들 사이에서 꾸준히 읽히는 명저로 꼽힌다.
대통령자문 국민경제자문회의 전문위원, 국민연금기금 의결권행사 전문위원, 금융감독원 외부평가위원, 금융투자협회 공익이사 등을 지냈고 현재 현대모비스, 맥쿼리인프라 사외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많은 지배구조 전문가들이 대기업 중심의 한국 기업문화 및 지배구조에 대해 “글로벌 스탠더드에 뒤떨어진다”고 평가한다. 소유와 경영이 분리돼 있지 않다거나, 자식에게 오너 자리를 승계하는 ‘족벌’ 경영을 문제로 꼽는 식이다.
김 교수는 다른 시각을 갖고 있다. “한국 기업 지배구조에 평점을 주자면 ‘A’를 주겠다”고 말한다. “개별 기업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높은 수준에 올랐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흔히 ‘코리아 디스카운트’ 원인으로 오너 중심 지배구조를 꼽는 통념에도 “그렇게 나쁘게만 볼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여론과 거꾸로 가는 견해의 근원은 ‘실증’이다. 이론적 논쟁에서 벗어나, 4만 쪽이 넘는 사례 연구를 통해 얻어낸 30여 년 천착의 결론이다.
김 교수는 오너 경영이 전문경영인 체제보다 장기적 기업 발전에 유리하다고 본다. 단 ‘이사회 경영’을 보완책으로 제시한다. 그는 “오너가 전횡을 일삼지 못하도록 경영을 투명화하면 문제가 없다. 이사회 기반 오너 경영이 한국 실정에 맞는 최선의 절충안”이라고 강조했다.
대주주라고 경영 못 하게 하면 위법
대다수 지배구조 전문가들은 한국 기업 지배구조를 박하게 평가한다. A 평점이 꽤 후하게 느껴진다.“국내 시각이 제일 박하다. 외국에선 좋게 본다. 세계 교수들이 팀을 조직해 러시아의 지배구조를 연구하는 프로젝트를 한 적 있다. 러시아 당국에서 발주했다. 나한테 참여해달라고 연락이 왔다. ‘미국, 영국 등 선진국이 많은데 왜 한국 교수인 나를 택했느냐’고 물었더니 ‘과거엔 나빴지만 지금은 A급 국가다. 노력해서 좋아진 것이라 오히려 배울 점이 더 많을 것 같다’고 하더라. 그때 한국 기업 지배구조가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실감했다. 과거엔 C, D 급이었지만 이젠 아니다.”
김 교수는 칼럼을 다수 쓴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이 화두가 되자 이에 대한 견해도 피력했다. 3월 한 칼럼에서는 “ESG 가운데 G가 최우선”이라고 말했다. 대다수 기업이 ‘제로 웨이스트’ ‘친환경’ 등 E에 주력하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이 역시 일반적이지 않다.
왜 지배구조가 최우선인가.
“단연 최우선이다. E든, S든 하려면 우선 방법론이 있어야 한다. 예컨대 친환경 기업 활동을 꾀한다고 해보자. 결정권자가 누구인지 중구난방이라면 아무것도 추진할 수가 없다. 오너든, 이사회든 운영 체계가 갖춰져야 뭐라도 할 수 있다.”
어떤 형태의 지배구조가 적합하다고 보나. 흔히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는 게 바람직하다고들 말한다.
“현재 한국 기업에서 소유와 경영이 분리돼 있지 않다고 한다면 틀린 것이다. 상법상 이미 분리돼 있다. 현실에서 그렇지 않아 보이는 까닭은 대주주가 회사를 경영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오너가 경영을 하는 것이 맞느냐는 건데…. 30년 넘게 연구하며 생각을 많이 했다. 괜찮다고 본다. 이론으로 가면 끝이 없고, 사례를 연구해보니 한국 사정상 오너 경영만큼 더 나은 결과를 낳을 수 있는 모델이 없더라. 여론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오너 경영의 나쁜 점이 유난히 부각돼서 그렇다. 그럼에도 난 한국 기업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째서 그런가.
“한국 기업은 대개 오너가 곧 대주주다. 예컨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게 경영을 못 하게 한다고 가정해보자. 대주주인데 오너라고 경영을 못 하게 한다면 위법이다. 그렇다고 지분율만큼 경영권을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분 20%를 갖고 있다고 경영을 20%만큼 시킬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반대로 전문경영인은 지분이 하나도 없어도 경영 전권을 가진다. 오너 경영, 전문경영인 경영 논란에서 지분율에 초점을 맞추면 안 된다. 오너가 가진 ‘사회적 자산’에 주목해야 한다.”
사회적 자산?
“흔히 ‘인맥’으로 여겨지곤 하는데, 그보단 더 넓은 표현이다. 한 사람이 사회에서 활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영향력을 말한다. 오너는 이것이 어마어마하게 크다. 가정에서, 어릴 때부터 길러지기에 성장하고 나면 이미 스스로의 가치보다 훨씬 큰 사회적 영향력을 갖게 된다. 또 보통 사람에게는 없는 소양이 하나 더 있다. 책임감이다.”
김화진 교수는 한 가지 일화를 꺼냈다.
“한 미국 대기업 회장이 유언을 남겼다. ‘내가 살면서 가장 무서웠던 일은 할아버지, 아버지를 거쳐 내게 온 이 회사가 내 대에서 망가지는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책임감이다. 전문경영인이 갖지 못할 소양이다. 나는 이것이 국가적 자산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이사회 경영에 해답 있다
3월 31일 서울 서초구 KT연구개발센터에서 열린 KT 정기주주총회에서 주주들이 주주 확인을 받고 있다. 이날 주주총회에서는 KT의 강충구·여은정·표현명 사외이사 3인의 재선임 여부가 결정될 예정이었으나 사퇴로 인해 안건이 변경됐다. 김화진 교수는 “소유분산기업에서 벌어지는 경영진 관련 이슈는 명확한 오너가 없어 발생한다”고 말했다. [뉴스1]
“경영을 투명화하면 된다. 예전 선대들이 그랬던 것처럼, ‘구중궁궐’에서 누가 뭘 하는지 모르는 방식을 버려야 한다. 해답은 ‘이사회 경영’이다. 오너와 함께 이사진이 모여서, 모두가 알 수 있도록 공개하고 문서로 남기는 거다. 소유·경영 분리 논쟁에서 최선의 절충안이라 본다.”
소유분산기업은 오너가 없다. 이런 곳에서도 이사회 경영이 효과를 볼 수 있나.
“‘오너가 없어 이미 이사회가 경영을 하는 곳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내가 말하는 이사회 경영이란 ‘오너가 있는’ 이사회 경영을 일컫는다. 대표적 소유분산기업인 금융지주사를 예로 생각해보자. 전문경영인 체제인데, 대표를 뽑을 때마다 논란이 인다. 최근엔 횡령 사건과 사외이사 사퇴 사태까지 터졌더라. 뚜렷한 오너가 없어서 벌어지는 문제다. 이럴 땐 정부의 역할을 키워야 한다. 세계적 트렌드도 그렇다. 정부와 기업이 파트너십을 구축해 경영을 해나간다.”
김화진 교수는 바람직한 이사회의 ‘키 포인트’로 사외이사를 꼽았다. 사외이사는 기업 외부 인사로서 경영진에 대한 감시와 견제 기능을 통해 기업 경영 투명성을 높이는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사실상 ‘거수기’ 노릇을 한다는 비판을 받는 실정이다. 지난해 12월 27일 공정거래위원회 발표에 따르면 2021년 공시집단 소속 상장사(288개) 이사회 안건(8027건) 가운데 원안 가결률은 99.3%(7972건)다. 사외이사의 반대로 통과되지 않은 안건의 비중은 0.69%(55건)에 불과했다.
사외이사의 기능이 사실상 작동하지 않는 상태 아닌가.
“사외이사의 진정한 가치는 존재 자체에 있다. 존재만으로도 경영진의 횡포가 훨씬 줄어든다.”
오너와 친분이 있다거나, 사법 리스크를 관리해주기 위해 영입되는 경우가 많다. 독립성 문제가 수시로 거론된다.
“현재 웬만한 기업에선 사외이사를 영입할 때 최대한 객관적 프로세스를 거친다. 그 과정에서 회사와 어느 정도 연이 있는 사람이 선임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다르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사외이사가 오너랑 가까운 사이인 게 꼭 나쁠까. 오히려 친한 사람이 쓴소리를 할 수 있다. 입바른 소리를 해도 위태롭지 않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라면 눈치 보지 않고 할 말을 할 수 있다. 보통의 사외이사에겐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또 주로 독립성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전문성도 무시해선 안 될 요소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드는 말이라고 해도 전문적 의견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진정한 독립성은 고도의 전문성에서 나온다.”
전문성은 어떻게 확보할 수 있나.
“대부분 사외이사가 각자 분야에선 전문성을 갖고 있다. 중요한 건 회사 업무에 대한 전문성이다. 단시간에 될 일은 아니고, 그래서 교육이 중요하다. 사외이사 스스로의 노력도 필요한 부분이다.”
지배구조 개선=사회 정화
지난해 12월 27일 세종 정부세종청사에서 민혜영 공정거래위원회 기업집단정책과장이 ‘2022년 공시대상기업집단 지배구조 현황 공개’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이날 발표에 따르면 2021년 공시집단 소속 상장사(288개) 이사회 안건(8027건) 가운데 원안 가결률은 99.3%(7972건)로 사외이사 반대로 통과되지 않은 안건의 비중은 0.69%(55건)에 그쳤다.[ 뉴스1]
“물론이다. 지배구조가 다는 아니지 않나. 기술이나 사람의 능력도 평가 요소다. 한국의 지배구조를 기반으로 기술력을 쌓아나간다면 충분히 경쟁력 있다. 또 지금의 오너들은 과거의 오너와 달리 체계적 교육을 받았다. 이미 글로벌 스탠더드가 몸에 배어 있다. 과거처럼 감시와 견제가 허술하지도 않아 전횡하지 못한다.
근래 SM, KT&G, 금융지주사 등 기업 경영에 행동주의 펀드가 영향을 미치는 사례가 나타난다. 행동주의 펀드도 지배구조 개선에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국에선 아직 시기상조다. 행동주의 펀드가 성공하려면 기관들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재작년에 미국 엑슨모빌이 지분 0.1%도 갖고 있지 않은 행동주의 펀드에 이사회 자리를 세 개나 내줬다. 기적에 가까운데, 거대 기관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한국 행동주의 펀드들이 과연 거대 기관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규모, 실력, 철학 모든 면에서 아직 부족하다.”
김화진 교수는 지배구조 개선이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넘어서는 효과가 있다고 당부하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시장 저평가는 물론 사회 전반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게 골자다.
“지배구조를 개선하면 기업 경영을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 이는 당연히 전제된다. 과거 외국에서 잠시 일한 적 있다. 어떤 회사를 인수하려 했는데, 그곳 사장이 횡령 등 나쁜 일을 참 많이 했다. 어느 날 그의 초대로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테이블 매너가 나쁘다고 자녀들을 야단쳤다. ‘손님들이 와 계신데 그렇게 하면 되느냐’고. 회사에서는 나쁜 일을 그리 많이 하면서 집에서는 훌륭한 아버지 노릇을 한 거다. 보통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개인으로선 안 할 일을 회사에 있으면 조직에 맞추기 위해 비도덕적 일을 하게 될 때가 있다. 지배구조가 개선되고 투명 경영이 정착되면 이러한 괴리가 줄어든다. 일종의 사회 정화다. 지배구조 개선이 기업, 경제를 넘어 사회 전체를 좀 더 아름답게 만드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이현준 기자
mrfair30@donga.com
대학에서 보건학과 영문학을 전공하고 2020년 동아일보 출판국에 입사했습니다. 여성동아를 거쳐 신동아로 왔습니다.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걸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관심이 많습니다. 설령 많은 사람이 읽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겐 가치 있는 기사를 쓰길 원합니다. 펜의 무게가 주는 책임감을 잊지 않고 옳은 기사를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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