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호

민주당 필망론이 제3신당 낙관론 근거

[한지원의 잠망경]

  • 한지원 정치경제평론가·‘대통령의 숙제’ 저자

    입력2023-06-02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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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태섭發 신당, 수도권 30석 가능할 듯

    • 한국 양당은 금권(金權)에 취약한 사이비 체제

    • 이재명 당대표 민주당, 상식 밖 정당으로 추락

    • 무너질 것은 언젠가 무너지는 법

    • 민주당 대체할 신당이 진보 자리 차지할 때

    4월 18일 금태섭 전 의원(왼쪽)이 주최한 ‘성찰과 모색 포럼’ 토론회 좌장을 맡은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가운데)과 이상민 민주당 의원. [뉴스1]

    4월 18일 금태섭 전 의원(왼쪽)이 주최한 ‘성찰과 모색 포럼’ 토론회 좌장을 맡은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가운데)과 이상민 민주당 의원. [뉴스1]

    총선을 1년가량 앞두고 창당 소식이 들려온다. 주인공은 금태섭 씨다. 김종인 씨도 그를 돕겠다고 나섰다. 정치평론가 열 중 아홉은 아직 비관론에 힘을 싣는 것 같다. 제3지대의 실패 역사, 승자독식 소선거구제라는 문턱, 대선주자급 인물 부재, 모호한 비전, 자금과 재정 부족 등이 이유다.

    나는 제3지대 성공을 낙관한다. 앞의 이유에 동의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비관론을 하나 더 가지고 있어서다. 바로 민주당 비관론이다. 나는 민주당이 조만간 사라질 것이라 확신한다. 그리고 사라지는 속도에 비례해 신당이 성공할 것이라 믿는다. 민주당 필망(必亡)론이 나의 신당 낙관론의 근거다. 금태섭 씨가 베팅한 수도권 30석,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이제부터 그 근거를 이야기해 보겠다.

    어설프게 시작된 한국의 양당체제

    노태우(가운데), 김영삼(왼쪽), 김종필 세 사람이 손잡고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을 탄생시켰다. [동아DB]

    노태우(가운데), 김영삼(왼쪽), 김종필 세 사람이 손잡고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을 탄생시켰다. [동아DB]

    이야기는 1990년 1월 22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날, 1987년 대선에서 경쟁한 네 후보 중 노태우·김영삼·김종필 세 명이 힘을 합쳤다. 이렇게 초거대 여당 민주자유당(민자당)이 탄생했다. 재야(在野) 지식인들은 격분했다. 노태우는 12·12 군사 반란의 2인자였다. 독재로 회귀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곳곳에서 나왔다.

    사후적으로 확인컨대, 다시 독재를 하려고 합당을 추진한 것 같진 않다. 당시 정권 실세이던 박철언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일본의 ‘55년 체제’를 벤치마킹했다. 보수 우위에서 진보와 경쟁하는 정당체제 말이다. 거대 보수당을 만들려면 연합정부가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의원내각제도 필요했다. 김종필은 보수연합과 내각제 개헌에 모두 적극적이었다. 김영삼은 내각제에는 관심이 없었다.

    합당에 동참하지 않은 김대중은 재야와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재야는 영어로 ‘outside the government’로 표현된다. 즉 행정·입법·사법 같은 정부에 참여하지 않는 학자, 작가, 종교인 등의 지식인을 칭한다. 서유럽에선 현대 정당정치가 활성화되기 이전까지 이들의 역할이 민주주의 발전에 매우 중요했다. 한국에서도 재야 지식인은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이들 상당수가 1987년 대선에서 김대중을 지지했고, 1991년에는 3당 합당을 비판하며 김대중 정당(민주당)에 대거 합류했다.



    민주화 이후 정치 비전을 두고, 보수는 3당 합당, 진보는 김대중과 재야의 결합을 선택했다. 이것이 바로 한국 양당체제의 시작이다.

    문제가 많았다. 보수당 프로그램은 시작부터 어그러졌다. 김영삼은 합당 직후 내각제 합의를 무효로 했다. 그는 반독재 투쟁을 당내 권력 경쟁으로 전환했고, 1987년 급조한 정치제도를 그대로 둔 채 자신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일만 주목했다. 선진국 정치체제의 표준이라고 할 의원내각제 개헌은 물거품이 됐다.

    다음으로 진보의 비전은 ‘보수 반대’라는 것을 제외하면 모호했다. 김대중은 탈냉전 세계화 시대에 진보가 있어야 할 위치를 정하지 못했다. 사회주의권은 몰락했고 서유럽 복지국가마저 신자유주의 개혁에 매진하던 시기다. 그는 내각제 같은 정치제도 변화를 바란 것도 아니었다. 보수와 구분되는 지향은 친일·독재·보수 세력이 남북 분단을 유지해 한국 사회 발전을 저해한다는 재야 역사관(분단체제론)뿐이었다.

    유사품 같은 제3지대 신당들

    문제는 보수의 궤도 이탈보다 진보의 모호함이었다. 보수 이념은 주로 진보 또는 자유주의, 좌파에 반대하는 이념으로 형성됐다. 18세기에는 자유주의적 의회(국민) 주권에 반대한 왕정복고파로, 19세기에는 좌익 급진파가 주도한 프랑스혁명을 비난하는 온건파로, 20세기에는 정부 확장을 인류 진보의 필수 요건으로 보는 사회주의에 맞서 케인스주의를 비판하는 시장주의자로 보수는 자리를 잡았다. 정당체제도 마찬가지다. 기독교민주당, 보수당 등으로 불리는 유럽의 보수정당들은 사회당, 사민당, 공산당 등의 집권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55년 체제로 불리는 일본의 정당체제 역시 사회당 집권을 봉쇄할 목적으로 자유당이 중도파 민주당과 합당해 탄생했다. 요컨대 진보가 모호하면, 덩달아 그것에 반대하는 보수도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내각제 개헌을 매개로 한 연합정치와 보수연합을 통한 진보 집권 억제책을 구상한 3당 합당은 보수정치의 세계적 계보와 일맥상통하는 것이긴 했다. 문제는 그들이 반대하는 진보의 ‘실체’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이 같은 모호성이 두고두고 문제가 된다. 한국의 민주당은 미국식 민주당도, 영국식 노동당도, 유럽 대륙의 사민당도, 일본의 사회당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반(反)진보로서 보수가 서는 양당체제가 아니라, 반(反)보수로서 진보가 서는 거꾸로 선 양당체제가 이렇게 출현했다.

    양당체제는 자유주의·보수주의, 진보·보수, 좌파·우파 같은 역사적 이념 대립을 정치적으로 대변하는 두 정당에 의해 유지된다.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 영국의 노동당과 보수당, 유럽 대륙의 사회주의 계열과 기독교 계열 정당이 각각의 사례다. 하지만 앞서 봤듯 한국적 양당체제에는 이념적 공백이 많다. 그렇기에 다른 이념, 다른 정치세력에 대한 국민적 갈망이 클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제3지대로 불리는 신흥 세력이 반복해서 출현했다.

    첫 시도는 1992년 정주영의 통일국민당 창당이다. 진보·보수 같은 이념 대신 재벌 총수의 자수성가 스토리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의 신당은 창당 한 달 만에 14대 총선에서 30석을 차지해 교섭단체까지 꾸렸다. 돌풍이었다. 진보와 보수에 대한 이념 대립이 뒤죽박죽인 상황에서 성공한 기업가 이야기는 꽤 신선했다. 딱 거기까지였다. 그의 실용주의 역시 이미지였을 뿐이다. 내용이 없었다. 그해 말 대선에서 정 후보는 저조한 득표율로 낙선했다. 이후 현대그룹이 부패비리로 수사를 받자, 당은 공중분해 됐다.

    사이비 양당체제의 치명적 약점 중 하나가 바로 금권(金權)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정치의 근거를 역사적 이념 속에서 찾지 못하니, 양당이 정치 독과점을 유지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든다. 노태우는 현재 화폐가치로 1조 원 넘는 비자금을 모아 선거자금으로 썼다고 밝혔다. 정주영은 이럴 바에야 아예 금권이 정권도 같이 하는 게 낫지 않으냐는 질문을 공개적으로 던졌다.

    1997년 대선 때 김대중(가운데)은 김종필(왼쪽), 박태준과 손잡는 ‘DJT연대’로 집권에 성공한다. [동아DB]

    1997년 대선 때 김대중(가운데)은 김종필(왼쪽), 박태준과 손잡는 ‘DJT연대’로 집권에 성공한다. [동아DB]

    양당체제를 비집고 들어간 두 번째 시도는 김종필이 했다. 그는 1995년 민자당을 탈당하며 ‘충청도 핫바지론’을 내걸고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했다. 자민련은 1996년 총선에서 충청권과 대구·경북을 싹쓸이해 50석을 가진 제3당으로 도약했다. 정부와 여당에 무시당하고 있다는 지역정서를 최대한 끌어낸 결과다. 김종필은 1998년에는 김대중과 연합정부까지 꾸렸다. 그러나 대통령제에서는 제도가 아니라 대통령의 의지에 의존해 연합이 유지된다. 내각제와 달리 연합정부가 안정되기 어렵다. 김대중 집권 1년 차가 지나면서 연합정부에 금이 갔고, 2000년 총선에서 여권이 분열하며 자민련은 참패했다.

    지역주의는 한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도 지역에 따라 민주당 강세, 공화당 우세 지역은 구분돼 있다. 스윙 스테이트라고 하는 경합 지역은 얼마 되지 않는다. 영국의 스코틀랜드국민당이나, 독일의 바이에른기독교사회연합 같은 지역정당도 많다. 영호남 지역주의에 충청 지역주의를 더한 것이 김종필의 오판은 아니란 이야기다. 그의 실패 원인은 모든 측면에서 어정쩡했다는 점이었다. 충청권만으로 양당에 버금가는 세력을 만들 수 없었고, 대통령제에서 연합정부는 구조적으로 불안정했다. 더군다나 그는 불완전한 보수 이념을 쇄신하는 프로그램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보수를 내걸고 진보와 연합했다.

    세 번째 시도는 국민의당 사례다. 2016년 대선주자급 정치인으로 부상한 안철수 씨가 비노무현계 호남권 정치인들을 이끌고 신당을 만들었다. 그해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의 호남 홀대론에 화난 호남 유권자들이 표를 몰아줬다. 국민의당은 38석을 얻어 교섭단체 지위를 단숨에 얻었다. 안철수는 양당의 이념적 공백을 성공한 기업인 이미지로 채웠다는 점에서 작은 정주영이었다. 또한 국민의당은 지역 소외 감정을 자극해 성공했다는 점에서 작은 자민련이었다. 말하자면, 앞선 두 차례의 시도를 좀 더 작은 규모로 재현한 것이었는데, 당의 붕괴 방식도 앞선 사례들과 비슷했다.

    이념을 앞세워 제3지대에 도전한 세력은 민주노동당(민노당)이다. 민노당은 민주적 사회주의를 강령에 넣었고, 북유럽 사민당과 비슷한 분위기로 진보 자리를 꿰차려 했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 22명의 광역·기초 의원을 당선시켰고, 2004년 총선에서는 10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해 제3당 자리에 올라섰다. 그러나 한계 역시 분명했다. 민노당 최대 계파였던 민족해방파(NL)는 급진화된 재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들은 분단체제론을 한 단계 더 밀고 나가 북한 정권을 추종했다. 2012년에는 노무현계 정치인 일부가 참여한 통합진보당이 민주노동당을 계승했다. 그러나 민노당과 같은 이유로 통합진보당도 붕괴했다. 일부가 정의당으로 재결집해 오늘날에 이르고 있지만, ‘민주당 2중대’ 소리를 듣는다. 소득주도성장, 조국 사태, 검수완박(검찰수사권완전박탈) 입법 등 핵심 쟁점에서 민주당과 같은 입장에 섰기 때문이다.

    탄핵당한 보수와 타락한 진보

    민주화 이후 보수와 진보는 10년씩 정권을 주고받았다. 그사이 제3지대 신당은 현대적 이념의 부재라는 한국적 양당체제의 근본 문제를 건드리지 못했다. 금권, 지역주의, 유사 이념 등은 오답이었다. 양당체제는 더욱더 공고화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무너질 것은 언젠가 무너지는 법이다.

    보수의 파탄은 3당 합당 이후의 프로그램을 만들지 못하면서 시작됐다. 포스트 김영삼 시대 보수를 만들겠다고 나선 뉴라이트 운동이 대표적이다. 우여곡절을 거치며 최종적으로 남은 건 아스팔트 우파로 불리는 ‘태극기부대’였다. 혁신이 아니라 퇴행이었다. 민자당의 주요 세력 역시 후예를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탄핵 사태를 예고한 2016년 ‘옥쇄파동’의 주인공이 김영삼계의 마지막 좌장이라고 할 김무성 씨였다는 점이 상징적이다. 박근혜 탄핵 사태는 혁신에 실패한 보수의 몰락을 가속시켰다. 탄핵 이후 지금까지도 제대로 된 정당을 꾸리지 못하고 있다. 후보를 세울 역량이 없어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영입해 가까스로 대선에서 승리했다. 여당이 되고도 정국 주도권은 고사하고 새 당대표를 뽑는 데 집권 1년 차를 모조리 허비했다. 40년 역사의 정당이 정치 경력 2년의 대통령에 끌려다닌다.

    양당체제 붕괴의 클라이맥스는 문재인 정부 5년이다. 재야 후예라고 할 86세대 운동권 출신들이 권력 중심부를 장악한 이후 민주당은 타락의 막장으로 향했다. ‘문빠’ ‘개딸’로 불리는 홍위병 문화, 소득주도성장이나 기본소득 같은 반(反)경제학 정책, ‘검수완박’ 같은 정파적 사법개혁이 진보를 집어삼켰다. 자유주의 요체인 다원적 문화, 경제학적 합리성, 법치 원칙 등은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조국 사태로 상징된 위선과 기득권은 진보나 좌파가 가장 혐오하던 것들이다. 객관적 주변 정세를 무시한 세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과 반일 캠페인은 진보가 여전히 분단체제론식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있음을 입증했다.

    이재명 당대표에 이르러서는 아예 상식에서 벗어난 정당으로 추락하고 만다. 민주당은 수십조 원 재정적자가 예상되는 법안을 전문가 검토도 없이 국회 머릿수로 밀어붙였고, 자신들이 4년간 방치한 징용노동자 소송 건을 갖고 반일 선동을 일삼았다. 당대표 ‘방탄국회’를 수개월간 여는가 하면, 열성 지지자를 이용해 당내 비판 세력의 입을 막고, 위장 탈당한 의원을 영웅 대우하며 복당시켰다. 대통령 권력까지 저 당에 있었다고 상상하면 등골이 오싹해질 지경이다.
    정리해 보자. 결론은 간단하다. 현재와 같은 양당체제로는 이제 정부 구성조차 어려운 최종 국면이 도래했다.

    22대 총선 통해 새 양당체제 들어설 것

    보수는 무능해도 살아남을 수 있다. 민주당 정부가 만든 영웅이 반(反)민주당 기치를 들고 대통령이 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보수는 이념의 특성 자체가 반(反)진보다. 타락했더라도 진보를 칭하는 세력이 있으면 유지는 된다.

    진보는 다르다. 진보는 역사를 끌고 가는 이념이다. 오로지 반(反)보수=진보라는 건 처음부터 난센스였다. 지금까진 어찌어찌 버텨왔다. 김대중이란 역사적 상징, 소선거구제라는 진입장벽, 지역주의, 보수의 동시적 퇴행, 제3지대 신당들의 실패 등등. 그러나 이것도 이제는 시효 만료다. 민주당은 현대 정치의 하한선 밑으로 떨어졌다. 물론 진보와 보수라는 현대적 이념 대립이 사라진 건 아니다. 누군가는 진보 쪽 이념을 정치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이 점이 22대 총선에서 신당이 이전 제3지대들과 다르게 성공할 수 있는 첫 번째 이유다. 굳이 양당체제를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 금권, 지역정서, 사이비 이념 같은 무리수를 둘 필요가 없다. 사라지는 민주당 자리를 채울 열정만 있으면 된다. 타락한 진보를 확실하게 청산하고, 시대에 맞는 진보를 분명하게 제시하면 된다.

    한국의 경제, 인구, 안보 상황이 앞선 30년과 완전히 달라졌다는 점도 신당의 성공 가능성을 높인다. 사이비 양당체제는 단군 이래 가장 풍요롭고 평화로웠던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경제는 고소득 국가의 풍요를 누릴 만큼 성장했고, 안보도 탈냉전 세계화로 인해 분단 이후 최고로 안정됐다. 하지만 2020년대 상황은 정반대다. 인구는 절벽에 부딪혔고, 저성장이 고착화됐다. 신냉전이 도래해 한반도가 그 한복판에 또다시 섰다. “잃어버릴 30년”이란 이야기가 나온다. 불안정한 양당체제가 유지돼도 그럭저럭 괜찮을 수 있었던 시대는 끝났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더글러스 노스(Douglass North)는 선진국 특징이 위기 대처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고도성장은 후진국들도 할 수 있다. 선진국과 후진국 차이는 성장의 강도가 아니라 침체의 강도다. 후진국들은 마이너스 성장 탓에 고도성장 성과를 지키지 못한다. 선진국은 반대다. 비유하자면, 후진국이 10골을 넣고 12골을 먹는 게임을 한다면, 선진국은 2골을 넣고 1골만 먹는 게임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기 대처 능력은 어떻게 향상되는가. 그는 좋은 제도가 핵심이라고 말한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문제를 단박에 처리하는 영웅이 등장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영웅은 운이 나쁘면 나타나지도 않는다. 효율적이고 공정한 제도가 위기에 반응해 효과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정당은 이런 제도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주체다.

    오늘날 정당에 요구되는 덕목은 ‘문제를 해결하는 책임성’이다. 양당체제의 한 축을 차지한 민주당에는 진보는 없고 ‘권력을 추구하는 당파성’만 가득하다. 위기가 심화할수록 대중은 과거 유산과 더 쉽게 단절한다. 새로운 양당체제, 즉 민주당을 대체하는 신당이 진보 자리를 차지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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