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호

삼성전자가 아오지탄광으로 불렸던 이유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㉖]

“李 회장, ‘기술 동냥’ 다니며 모욕도 많이 당했다”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2-03-19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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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어령의 ‘이건희론’ 全文 소개

    • “창조하는 과학자나 예술가 단면 봤다”

    • 누구도 가고 싶지 않던 반도체 부서

    • “회사인지 놀이터인지 한숨 푹푹 나와”

    • 日 업체 누르고 시장 60% 거머쥐기까지

    삼성전자 반도체 초기 상황을 진두지휘했던 김광호 전 부회장이 공장을 돌며 직원들과 소통하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삼성전자 반도체 초기 상황을 진두지휘했던 김광호 전 부회장이 공장을 돌며 직원들과 소통하고 있다. [삼성전자 제공]

    이건희 회장이 유일하게 남긴 저작인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는 ‘내가 만난 이건희’라는 제목으로 이 회장에 대한 명사들의 간략한 인상 비평이 담겨있다. 그중에서 얼마 전 작고한 이어령 선생(전 문화부 장관)의 글이 있다.

    간간이 일부가 언론에 소개된 적은 있지만 전문을 소개하는 것도 의미가 있어 보인다. 이어령 선생의 글에 담긴 이 회장의 면모가 새롭게 다가온다. 특히 평생 말과 글을 써 왔던 지식인으로서 이 회장 인생의 방점이 구호나 말이 아니라 행동과 실천에 찍혀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는 대목이 와 닿는다. 앎과 삶이 일치했던 문화계 거장이 이 회장을 바라보는 시선이어서 울림이 크다. 다음은 전문이다.

    이어령이 만난 이건희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만난다. 그러나 만나게 되는 처음의 동기와 그 결과가 아주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만남은 처음이 아니라 과정,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서 결정된다. 그것은 영원한 미완의 조각을 새겨가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이건희 회장의 만남도 그러했다.

    내가 처음 이 회장을 만난 것은 영국의 에든버러 박물관에 한국관을 설립할 수 있게 협조를 구할 때였다. 아무리 나라일이라고는 하나 무슨 청탁을 하기 위해 남을 만난 적이 거의 없었던 나로서는 그 자리가 얼마나 거북하고 쑥스러웠는지 모른다. 더구나 이 회장과는 개인적인 친분은 물론이고 혈연이나 학연 그리고 지연조차 없어 함께 나눌만한 화제를 찾기도 어려웠다. 더구나 이 회장은 과묵한 분이라 자연히 그 만남은 무거운 침묵 속에서 이루어졌다.

    신라호텔이었던가. 이 회장과 마주 앉아 식사를 하던 그 방에는 분명 벽시계 같은 것이 있었을 리 만무했는데도 그때 일을 회상하면 어디에선가 한밤중에 울려오는 것 같은 둔중한 시계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 침묵의 공백은 이건희 회장의 낯선 그 음성으로 조금씩 채워지기 시작했다. 바로 이 회장을 만나고 난 뒤 뜻밖에도 제일기획팀이 나를 방문해 왔고. 문화부의 아이디어 가운데 예산이 없어서 하지 못하는 일이 있으면 민간 차원에서 해보겠다는 것이었다.

    특히 한국의 역사와 문화가 세계 잘못 인식된 것을 바로잡는 일은 해외에 지사를 가지고 있는 삼성 프로젝트로 추진해 보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모두 묵묵히 듣기만 하던 이 회장, 그리고 덤덤하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던 바로 그 이 회장 자신의 뜻이었음을 알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에든버러 박물관의 한국관 설립을 아무 조건 없이 쾌히 승낙할 때만 해도 나는 그것을 그저 기업인의 사업적인 결단으로만 알았다. 그러나 나로서는 단지 그 어색한 침묵을 피하기 위해서 한 소리들인 데도 이 회장은 그 말의 잿더미 속에서도 귀중한 한국 문화의 문제를 꺼내고 21세기 문명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고개가 절로 수그러지는 순간이었다. 실제로 그 뒤 삼성그룹은 각국 지사를 통해서 외국 교과서에 잘못 기록된 한국 관계 자료들을 조사수집하고 그것을 수정하는 일에 많은 공헌을 했다.

    장관직을 물러난 뒤 나는 삼성복지재단 이사회에서 또는 무슨 자문회 같은 자리에서 여러 번 이 회장을 만날 기회를 가졌다. 그때마다 처음 침묵 속에서 들었던 시계추 소리가 경이로운 새 목소리로 바뀌게 되는 충격을 맛보곤 했다.

    한담 속에서도 나는 늘 이건희 회장의 21세기 문명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과 한국문화에 대한 확고한 인식에 대해 찬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분야에서 전문가를 자처해 왔던 내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것. 느끼지 못했던 것을 이 회장의 어눌한 몇 마디 말 속에서 깨닫게 될 때에는 나 자신의 무력감까지 느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분의 지식은 책에서만 얻은 것이 아니라 세계를 무대로 한 폭넓은 기업 현장 속에서 직접 얻고 닦은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가 열 마디 할 때 이건희 회장은 한마디를 하지만 그 한마디가 내 열 마디를 누른다.

    내가 이건희 회장을 만날 때마다 무력감을 느끼는 이유는 좀 더 깊은 데 있다. 그것은 이건희 회장의 지식과 통찰력은 곧 실천이며 행동이라는 점이다. 한번은 삼성에서 개발한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비판했더니 6개월 후에는 놀랄 만큼 버전 업(up)한 것을 담당자가 직접 들고 와 프리젠테이션을 한 적도 있었다.

    휴머니티의 면에서도 그렇다. 하루는 이건희 회장과 함께 한 자리에서 삼성에서 개발한 특수용도의 컴퓨터에 대한 설명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OCR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시각 장애인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프로그램이었던 것이다. 물론 복지사업의 일환으로 이 회장의 발상과 의지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돈이 되지 않는 일이라도 소외된 이웃들의 아픔을 더는 일이라면 과감하게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직접 챙기는 열정을 직접 목격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이 회장은 그것을 더 보완하여 한국만이 아니라 국제기구를 통해서 세계의 모든 시각 장애인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하라고 지시했다. 남들이 보는 공개 석상이 아니라 몇몇 사람들만의 식사 자리였기 때문에 그 말이 더욱 진솔하게 들렸다.

    한번은 아주 우연히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이 회장을 만났다. 비행기를 타기 직전 배웅을 나왔던 일본 고단샤(講談社) 스스키 부사장으로부터 일본 경제신문사에서 주최한 이건희 회장의 강연을 듣고 감동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여서 그 반응을 좀 알려드리려고 했지만 말할 기회를 찾지 못했다.

    이 회장은 조용히 자리에 앉아서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행자들과도 내내 한마디 말을 나누는 것을 보지 못했다.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깊은 침묵 속에서 울려오는 시계추 소리 같은 것을 들었다. 나는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분의 옆얼굴에서 기업인이 아니라 외롭고 깊은 침묵 속에서 끝없이 무엇인가를 창조해가는 과학자나 예술가의 한 단면을 보았다. 나는 그때 이 회장과의 만남을 분명히 하나의 단어로 정리할 수 있었다. ‘그는 homo faber(호모 파베르, 도구의 인간)가 아니다. homo pictor(호모 픽토르, 창조적 인간)’라고….”

    전자사업 하려면 필요하긴 한데

    삼성반도체의 전신인 경기 부천시 한국반도체 공장. [삼성전자 제공]

    삼성반도체의 전신인 경기 부천시 한국반도체 공장. [삼성전자 제공]

    삼성은 1977년 한국반도체 지분을 100% 인수한 후 회사 이름을 ‘삼성반도체주식회사’로 바꾸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트랜지스터 생산을 빼고는 별다른 품목이 없었고 사업을 확장할 돈도 없었다. 급기야 2년 뒤인 1979년 11월에는 삼성전자 내 반도체 사업부로 흡수된다. 이 과정을 진두지휘한 이가 김광호 전 삼성전자 부회장이다.

    김 전 부회장은 입사 후 내내 TV생산팀에서 일하다 반도체 사업부로 옮긴 뒤 이후 반도체 부문 대표이사 사장(1990년), 삼성전자 사장(1992년), 삼성전자 부회장(1994년), 삼성전관(현 삼성SDI) 회장(1997년)을 지냈다. 삼성전자의 초기 반도체 공정을 지휘하며 반도체를 키운 대표적 전문 경영인이다. 그가 전하는 초기 상황은 이렇다.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던 1970년대 말은 삼성전자가 제대로 된 경영을 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이병철 회장이 제게 ‘강군이 전자에서 1300억을 말아먹었다’고 말씀하셨을 정도였으니까요. 물론 농이 섞인 말씀이셨지만 투자금액에 비해 성과는 미치지 못했던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추정컨대 당시 비서실에선 ‘아니, TV도 제대로 못 만들면서 어떻게 반도체를 하겠다는 것이냐’ 반대를 많이 했을 겁니다. 당연한 반응 아니었을까요. 더구나 삼성이 (한국 반도체를) 먼저 사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그쪽에서 ‘더 이상 못하겠으니 손들고 가져가시오’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왜 부실 덩어리를 떠안느냐’는 회의적인 여론이 많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삼성이 전자사업을 하는 한 반도체는 꼭 필요하다는 데에 기술자들이라면 모두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에 항상 끌려 다니는 처지였기 때문에 어떻게든 우리도 자립을 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있었지요. 당시 일본 기업들은 당시 우리를 거의 ‘가지고 노는’ 수준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부품이 없다’며 발뺌하거나 국제 시세보다 비싸게 받으려 했으니까요.”

    색(色)신호 IC개발하면서 연구소 출범

    1983년 호암 이병철 회장의 반도체 진출 선언 이후 4년 만에 1메가디램 해외 첫 출하를 축하하는 모습. [삼성전자 제공]

    1983년 호암 이병철 회장의 반도체 진출 선언 이후 4년 만에 1메가디램 해외 첫 출하를 축하하는 모습. [삼성전자 제공]

    반도체 사업은 삼성전자로 흡수된 뒤에도 전반적으로 지지부진했다. 그런 와중에도 눈에 띄는 성과는 있었다. 색신호를 분리해 화면에 띄워 주는 작은 칩인 색(色)신호 IC를 개발한 것이다. 색신호 IC는 컬러TV에 반드시 필요한 핵심 부품이었는데 마침 출범한 5공화국 전두환 정부가 컬러TV 방송을 허용(1980년)하면서 막대한 수요가 발생하던 차였다. 삼성이 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전량을 일본 수입에 의존해야 했던 부품이기도 했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는 당시로서는 거금이던 3억5000만원이라는 개발비를 들여 1981년 11월 색신호 IC 개발에 성공했다. 이는 트랜지스터나 만들던 기존 반도체 기술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은 성과였다.

    탄력을 받은 삼성전자는 1982년 1월 경기 부천시 공장에 반도체 연구소(지하1층~지상 3층)를 별도로 만들기에 이른다. 기존까지는 생산 부서 한 귀퉁이에서 제대로 된 장비나 자금 지원도 받지 못하고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던 반도체 연구 개발 사업이 바야흐로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가전제품에 들어가는 칩을 소규모로 개발하고 생산했을 뿐 D램은 생각지도 못한 때였다.

    기술 동냥 다녔던 이건희 회장

    지난 회에서 필자는 이건희 회장이 생전에 “일본, 미국을 직접 다니면서 반도체 기술자들을 만나 기술을 전수해달라고 사정하는 ‘기술 보따리 장사’를 했다”는 말을 전했는데 김광호 전 부회장은 그런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원천 기술이 없으니 선진 기술을 배워 와야 하는데 누가 쉽게 알려주겠습니까. 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회장님이 미국과 일본 기업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기술 좀 가르쳐 달라고 사정하며 애를 많이 쓰셨다는 것은 저를 포함해 당시 임직원들이 모두 전해 들어 알고 있는 사안이었습니다.

    회장은 ‘기술 동냥’을 다니며 모욕도 많이 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미국 회사들을 접촉하며 ‘기술 이전 좀 해 달라’고 할 때 마다 ‘We do not sell technology, we sell Products (우리는 제품을 팔지 기술은 팔지 않는다)’는 말만 듣고 허탕치고 귀국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날들이 많았다는 거죠.

    하기야 한국이 지금처럼 잘 살기는커녕 국제사회에서 전혀 존재감이 없던 아시아 저개발국이었던 데다 일본은 그렇다 쳐도 특히 미국인들 입장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개발도상국의 기업인이 찾아와서 반도체 기술을 가르쳐 달라고 하니 속으로 얼마나 코웃음을 쳤을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까.

    더 안타까웠던 것은 삼성 내부에서조차 반대만 많았지 이 부회장(당시 직함)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행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부회장으로서 절대 표면으로는 나타나지 않으시고 뒤에서 조용히 ‘이거 좀 해봐라' ‘저거 좀 해봐라’ 하신 적이 많았는데 대부분 직원들이 반도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보니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김 전 부회장은 구체적인 사례를 기억해냈다.

    “1980년인가 81년도로 기억하는데 페어차일드라고 미국에 유명한 반도체 회사를 가까스로 설득해 D램 기술을 이전해 주겠다는 언질을 받은 모양입니다. 이 부회장이 당장 검토해보라고 했지만 경영도 어려운 상황에서 도저히 자금력으로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임원진들이 난색을 표하는 바람에 포기했던 일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이건 여담이지만, 이 부회장은 열린 마음으로 부하 직원들을 편하게 대해주셨습니다. 부천 공장에서 일할 때 가끔 ‘밥 먹었냐’고 전화를 하실 때가 있었습니다. ‘아직 안 먹었습니다’라고 하면 장충동 댁으로 오라고 하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나눴습니다. 맞담배를 피우며 기술 얘기, 제품 얘기. 회사 얘기 있는 그대로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했으니까요.”

    반도체 사업팀이 한직이던 시절

    2021년 12월 22일 서울 종로구 평창로 자택 서재에서 동아일보와 마지막 인터뷰를 하고 있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장승윤 동아일보 기자]

    2021년 12월 22일 서울 종로구 평창로 자택 서재에서 동아일보와 마지막 인터뷰를 하고 있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장승윤 동아일보 기자]

    지금이야 삼성전자 반도체가 대한민국을 넘어 명실상부한 글로벌 독점 사업이 됐지만 초창기에는 삼성 내부에서 모든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하지 않았던 부서였다고 한다.

    김 전 부회장 역시 삼성전자의 핵심 사업부였던 TV생산팀에서 일하다 갑자기 반도체 업무를 하라고 해서 “사표를 써야 하나 생각할 정도로 막막했다”고 하니 말이다. 그의 말이다.

    “1979년 9월쯤으로 기억합니다. 호암이 삼성반도체주식회사를 전자로 흡수해 반도체 사업팀을 만들 예정이고 여기에 전자 사람들을 보낼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습니다. 다들 ‘설마 내가 가는 일이 있으랴’하면서 완전 남의 일로 생각하고 있었죠.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강진구 사장이 급하게 부른다고 해서 밥 먹다 말고 달려갔더니 ‘회장께도 보고가 됐으니 빨리 삼성반도체로 가서 인수인계를 하라, 반도체를 전자 내 사업부로 흡수한다’는 거 아닙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삼성반도체회사는 ‘아오지 탄광’으로 불렸습니다. 죽어라 고생만하고 미래를 보장받지 못한다는 거였죠. 인사발령 소식을 전해들은 동료 직원들은 ‘완전 물 먹은 인사’라며 ‘절대 가서는 안 된다’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실제 가보니 어땠나요.

    “현장 상황은 더 심각했습니다. 사장이 제 손바닥을 딱 치면서 ‘인수 끝!’ 하더니 가버리는 거 아닙니까. 공장을 둘러보니 말이 반도체 회사지 가전제품에 들어가는 칩을 소규모로 개발하고 생산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직원들은 일거리가 없어서 놀고 있고…. 회사인지 놀이터인지 한숨만 푹푹 나오더라고요. 너무 체계가 안 잡혀 있었으니까요.”

    직원들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한마디로 흉흉했습니다. 회사가 없어지는 것 아니냐는 소문이 좍 퍼져 있었죠. 저는 회사를 살리러 온 사람이 아니라 정리하러 온 사람이라는 말들이 돌고 있었습니다. 과연, 며칠이 지나자 엔지니어들이 줄 사표를 내고 나가 버리는 거 아닙니까. 20~30명이 한꺼번에 나간다고 하니까 초기에는 이 사람들 뜯어 말린다고 애 많이 썼습니다.”

    당시 종업원은 얼마나 있었나요.

    “한 1000여 명 정도 됐습니다. 공장이 경기 부천과 서울 대방동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부천은 강기동 박사가 만든 것이었고 대방동은 페어차일드가 운영하던 국내 조립 공장을 삼성이 샀던 거였습니다.

    저는 대방동과 부천을 왔다 갔다 했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너무 앞이 안보여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급기야 강진구 사장을 찾아가 ‘저더러 그냥 ‘조용히 회사 나가라’고 하셨으면 바로 사표 쓰고 나갔을 텐데 왜 나를 이런 곳으로 쫓아 보냈습니까’ 항의한 적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우선 대방동 공장을 부천으로 합치는 일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런 저런 반대 의견이 많았습니다. 부천이 좁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무실 칸막이 다 뜯어내고 책상을 다닥다닥 붙여 모아라, 그래도 모자라면 내 책상은 현관 앞에 갖다 놔라’ 하는 식으로 난리를 쳐 가지고 공장과 사무실을 다 부천에 쑤셔 넣다시피 했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사무실과 인력이 안정됐다는 판단이 들 때 쯤 반도체 시계 칩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엔 대만과 홍콩이 주요 소비국이었습니다. 홍콩을 수도 없이 드나들었습니다.

    제가 이전까지 TV를 만들던 사람이었으니까 그쪽 전자업계에도 안면 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TV팔던 사람이 어쩌다 하찮은 시계 칩을 팔러 왔나’ 하는 표정으로 새까맣게 어린 직원들까지 엄청 괄시를 하더라고요.

    그런데 이게 먹혔습니다. 당시 홍콩 시계업체들은 칩을 대만과 홍콩을 왔다 갔다 하는 보따리 장사들한테 주로 사고 있었는데 저 같은 총책임자가 직접 날아 와서 가격이며 납기를 약속하니까 믿음을 준 거죠.

    하지만 쉽지는 않았어요. 미국 맥도날드 매장에서 ‘기브 어웨이 프레즌트(Give away Presenrt)’라고 얼마 이상 햄버거를 사면 플라스틱 손목시계를 공짜로 주는 이벤트를 했는데 배터리 다 떨어지면 버리는 1회용 시계였습니다. 그런 곳들을 상대로 장사를 했으니 얼마나 영세한 데를 찾아 다녔겠습니까. 비싼 홍삼 몇 통씩 사 갖고 가서 나눠 주면서 제발 좀 발주해 달라 사정하면서 다녔습니다.”

    일본 업체들의 견제

    그는 무엇보다 제일 힘들었던 일이 일본 업체들의 견제였다고 했다.

    “당시 시계 칩 시장은 일본 OKI라는 전기회사에서 만든 게 압도적인 독점력을 갖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삼성이 들어오니까 치킨 게임을 시작한 겁니다. 개당 50센트에 팔던 걸 가격을 뚝뚝 떨어뜨렸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49센트에 팔기 시작했더니 이번엔 48센트, 우리가 46에 팔았더니 44 이런 식으로 덤핑을 하는 겁니다. 급기야 30센트까지 내려왔어요. 우리나 일본이나 팔면 팔수록 모두 적자가 나는 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 과정에서 중요한 교훈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고 했다.

    “어떻든 물건을 계속 만드니 생산 노하우가 생겨 불량률이 확 줄어들었습니다. 반도체에서 전문적으로 얘기하는 개념 중에 ‘러닝 커브(Learning Curve, 학습 곡선)라는 게 있습니다. 새로운 기술을 처음 배울 때에는 더디게 익히지만 어느 시점을 지나면 확 가속도가 붙는다는 거죠. 칩 가격이 30센트로 내려오고 생산량이 늘면서 불량률이 확 떨어져 우리도 드디어 흑자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꾸로 치킨 게임에 나서 19센트까지 떨어뜨렸습니다.

    결국 OKI가 손을 들고 물러나면서 삼성이 세계 시장의 60%를 거머쥐게 됩니다. 세계 시장이라고 해봐야 대만하고 홍콩이 전부였지만 어떻든 우리 마음대로 시장을 쥐락펴락 하게 되니 신이 났습니다. 이후에도 절대로 값을 올리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어떻든 이게 초창기 반도체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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