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월 6일 조선일보가 처음 보도한 혼외자 의혹은 자매사 TV조선의 후속보도에 힘입어 사실로 굳어지는 양상이다. 채 전 총장과 특별한 관계인 임모 여인 집 가정부를 지냈다는 이모 씨는 TV조선 인터뷰를 통해 채 전 총장이 임 여인 집에 수시로 들렀으며 혼외아들과 여행까지 했다고 폭로했다. 채 전 총장에게 직접 밥상을 차려줬다는 이 씨의 증언은 매우 구체적이어서 누구나 믿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진실의 추는 여전히 사실과 추론의 경계에서 기우뚱거린다. 당사자들이 강력하게 부인하기 때문이다. TV조선 보도 내용에 대해 채 전 총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면서 법적 대응을 천명했다.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에 편지를 보내 자신의 아이는 채 전 총장과 관계없다고 밝혔던 임 여인도 다시 나섰다. 임 여인은 한겨레신문과의 통화에서 “편지 내용은 다 사실”이라며 다시 한 번 혼외자 의혹을 강하게 부인했다.
불륜이든 아니든 남녀관계는 어느 한쪽이 부인하면 확인하기 어렵다. 더욱이 이번 사건처럼 양측이 다 인정하지 않으면 설사 사실이라도 입증하기가 힘들다. 나아가 두 사람 사이에 자식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것은 더욱 그렇다.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으로 보면 채 전 총장의 혼외자 의혹은 사실일 개연성이 있다. 그럼에도 사실이 아닐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것은 당사자들이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과 사실이 다를 수 있다는 얘기다. 유전자 검사를 하지 않는 한 말이다.
“총장 될 때 그런 얘기 나돌아”
채 전 총장은 조선일보를 상대로 정정보도 소송을 제기하면서 “조선일보가 추론의 함정에 빠져 사실 확인을 소홀히 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가 내세운 ‘사실’은 이런 것들이다. ‘채 전 총장의 지인들이 채 전 총장과 임 씨가 잘 아는 관계였다고 말했다’ ‘해당 아동이 다녔던 학교 교직원이 어떤 기록에서 아동의 아버지 이름이 ‘채동욱’으로 기재된 것을 봤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친구들이 해당 아동으로부터 아빠가 검찰총장이 됐다는 말을 들었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언론보도 관행에 비춰 조선일보가 이런 정황을 근거로 ‘밝혀졌다’라거나 ‘확인됐다’ 따위의 단정적 표현을 쓴 것은 지나친 것이었다. 하지만 의혹을 제기하기에 충분한 정황증거를 확보한 것은 틀림없다. 임 여인의 편지 내용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편지에서 채 전 총장과의 인연을 밝히면서 학적부에 아이 아빠 이름을 ‘채동욱’으로 기재한 사실을 인정했다.
조선일보의 첫 보도 직후 채 전 총장의 측근인 검찰 고위간부는 기자에게 “두 사람이 알고 지낸 건 맞는데 여자 쪽에서 일방적으로 그런 얘기를 흘리고 다닌 것 같다”고 귀띔했다. 임 여인의 자식이 채 전 총장의 혼외자가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한 얘기였다. 반면 채 전 총장의 선배로 검찰 고위직을 지낸 모 변호사는 “총장 될 무렵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 얘기가 나왔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차마 당사자에게 못 물어보겠더라”고 했다.
“당사자가 사실이 아니라고 하지 않나. 나로선 채 총장을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설령 사실이라도 그게 신문 1면 머리기사가 될 정도로 중대한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 혼외자를 둔 것이 문제라는 건지 그걸 밝히지 않은 것이 문제라는 건지. 관련자 누구도 문제 삼지 않는 상황에서 그것이 검찰총장의 직무와 어떤 관련성이 있다는 건가.”
검찰 안팎의 기류는 묘한 변화를 보인다. 사건 초기만 해도 검찰 내부에선 채 전 총장에 우호적이거나 동정적인 기류가 강했다. 혼외자 의혹의 사실 여부보다 정권 차원의 ‘총장 찍어내기’ 의혹에 대한 관심이 더 컸다. 채 전 총장이 관련 의혹을 부인하며 조선일보 보도를 ‘검찰 흔들기’로 규정한 것도 검사들의 의구심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의 감찰 지시는 울고 싶은데 뺨 때린 격이었다. 자신들의 수장을 사생활 파헤치기로 공격하는 것에 대해 자존심이 상했던 검사들은 황 장관에게 분노를 표출했다.
서울서부지방검찰청 평검사들이 집단성명을 발표한 직후 김윤상 대검찰청 감찰1과장과 박은재 대검 미래기획단장이 검찰 내부 게시판 이프로스(e-Pros)에 장관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특히 채 전 총장의 ‘호위무사’를 자처한 김 검사는 항의 차원에서 사의를 표했는데 그의 사표는 9월 말 채 전 총장의 사표와 함께 수리됐다. 서울서부지검 외 몇 군데 검찰청에서도 검사들의 반발 기류가 있었으나 윗선의 만류로 실제 행동으로 표출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