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호

이야기의 한 형식, 암시의 묵시록

  • 함정임 │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입력2013-10-21 17: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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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의 한 형식, 암시의 묵시록

    김 박사는 누구인가?<br>이기호 지음, 문학과지성사, 404쪽, 1만3000원

    세상에 소설가는 많으나 이야기에 능한 소설가는 많지 않다. 이야기꾼에게는 대개 ‘천부적’이라는 수사가 부여되는데, 국내 작가로는 황석영 박완서 김소진 성석제, 국외 작가로는 영국의 로알드 달과 아프가니스탄계 미국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 그리고 중국 작가 위화 등이 그들이다.

    소설의 근간이 이야기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작가마다 태생과 기질이 다르듯 이야기를 구사하는 방법 또한 다양하다. 세상의 셀 수 없이 많은 소설가가 지금 이 순간에도 소설을 쓰고 있지만 그 어떤 작품도 (기계로 만들어낸 스마트폰이나 이어폰처럼) 똑같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설가의 능력은 세상에 널린 수많은 이야기에서 작품이 될 만한 소재를 선택하는 안목과 이것을 전달하는 방법에서 가늠된다. ‘최순덕성령충만기’(2004),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2006), ‘사과는 잘해요’(2009)에 이어 최근 ‘김 박사는 누구인가?’(2013)를 출간한 이기호는 바로 ‘소재 선택’과 ‘다채로운 화법 창출’ 면에서 2000년대 한국 작가군(群) 중 유력한 존재다.

    왔어 왔어. 그녀가 왔어. 나를 찾아왔어. 사무실로 왔어. 우릴 보러 사무실로 왔어. 그녀의 매니저도 왔어. 좆나리 멋진. 크라이슬러 밴을 타고 왔어. 매니저의 양아치들도 함께 왔어. 왔어 왔어. 그녀가 왔어. 그녀가 우리. 보도방에 왔어. 육개월 만에 왔어. 자신을 지우러. 지우러 왔어. 신참 계집애들은 신났지. 가수가 왔다고. 신이 나서 환장해. 신이 나서 소리쳐. 하지만 그녀는 차에서 안 내려.

    -‘버니’ 중에서

    천부적 이야기꾼



    이야기는 인간의 본능에 관계된다. 누구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고, 또 하고 싶어 한다. 이기호는 인간의 이러한 호모 내런스적인 기질을 다양한 서사체를 통해 실험한다. 앞에 인용한 데뷔작 ‘버니’부터 첫 소설집 ‘최순덕성령충만기’에 수록된 단편들에서 이야기하기의 기술을 다채롭게 펼쳐 보인다. 랩의 형식을 빈 ‘버니’의 랩체를 비롯해 성서의 이단 편집과 번역된 의고(擬古)투를 차용한 ‘최순덕성령충만기’의 성서체가 대표적이다.



    1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의인 최순덕에게 내린 성령의 감화 감동 이야기라 이곳에 하나의 보탬과 빠짐없이 기록하노니

    2 이는 대저 믿는 자에게 내린 성령충만의 산 역사요 증거더라

    3 서울 땅 아현동에 스물두 살 된 처녀가 한 명 살았으니 그 이름이 최순덕이더라

    4 순덕은 이미 그 어미 뱃속에서부터 하나님의 규례대로 흠 없이 산 자이니 성경으로 글자를 배우고 회당을 놀이터 삼아 자란 자이더라

    -‘최순덕성령충만기’ 중에서

    이처럼 이기호는 데뷔작 ‘버니’와 표제작 ‘최순덕성령충만기’를 통해 신인 작가에게 통과의례처럼 주어지는 새로움의 존재 증명을 충만한 이야기성(性)을 바탕으로 한 다채로운 문체 실험으로 치렀고, 이후 두 번째 소설집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와 장편 ‘사과는 잘해요’를 통해 21세기 한국 소설계에서 하이브리드 문체를 구사하는 이야기꾼으로까지 명명되며 입지를 다지고 있다. 그 결과 새로운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이야기꾼의 재능에 그치지 않는 문체 실험자의 역할을 계속해왔는데, 최근에 낸 신작 소설집 ‘김 박사는 누구인가?’는 지난 7년간 그가 궁구한 문체 고안자로서의 면모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첫 번째 Q&A

    Q: 김 박사님, 안녕하세요? 저는 이제 막 사범대학교를 졸업한, 올해 스물네 살이 된, 임용고시 재수생입니다. 이름은 그냥 최소연이라고 해둘게요. 꽤 오랫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끙끙거리고 있다가 이렇게 김 박사님께 펜을 들게 되었어요. (…) 김 박사님이라면 저와 똑같은 증상을 지닌 사람들을 여럿 만나보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용기를 낸 거죠. (…) 김 박사님, 제게 이상한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건 지금으로부터 약 4개월 전이었어요. (…) 어떤 목소리가, 남들에겐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계속 제 귓전에만 들려오기 시작한 거죠. 높낮이도 없고, 감정도 없고, 성별도 모르겠고, 나이도 모르겠고, 가끔 노래방 에코처럼 울리면서 들리는 (…) 차마 다시 적기도 민망한, 난생처음 듣는 욕설들이었다는 것만 밝혀둘게요.

    -‘김 박사는 누구인가?’ 중에서

    하이브리드 문체

    ‘김 박사는 누구인가?’는 질문과 답변 형식으로만 완성된 단편소설이다. 구성을 보면, 다섯 개의 ‘Q&A’와 ‘그리고 다시 Q’로 이루어져 있다. 일명, 응답(문)체 또는 상담(문)체. 최소연의 질문에 김 박사가 응답하는 방식으로 최소연이라는 인물이 현실에서 안고 있는 문제(사건)가 노출되고, 이 사건(에피소드)이 전개되면서 이야기는 하나의 길(최소연의 문제)로 흐르다가 두 갈래(최소연과 어머니의 문제), 세 갈래(최소연과 어머니와 아버지의 문제)로 점점 번져나간다.

    이야기의 줄기를 하나로 모아보자면, 임용고시 재수생 최소연은 어느 날 이상한 증세, 곧 남에게는 들리지 않는 욕설이 귀에 들리고 울리는 현상으로 괴로워하는데, 그것의 진원지는 교사로 반듯한 말만을 해온 어머니였고, 어머니가 평소와는 다른 모습으로 학교 운동장 벤치에 앉아 내뱉은 욕설의 진원지는 아버지였음을 추적해가는 과정이다.

    A (…) 어머니 또한 상처받은 영혼이 분명합니다. 오래전 어머니가 학교 운동장에서 수첩을 들여다보며 욕을 했을 땐,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것이 치유되지 않고 붕대에 감겨 있다가 최소연 씨로 인해 다시 세상에 삐죽, 튀어나온 것일 겁니다. 어쩌면 그것은 어머니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튀어나온 것일지도 모릅니다. (…)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일, 그것만큼 자기 자신을 치유하는 데 좋은 일은 없을 겁니다. 보다 정면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상, 김 박사였습니다.

    -‘김 박사는 누구인가’ 중에서

    이야기는, 인류의 흐름과 똑같이, 스스로 증식되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작가는 이야기를 어떤 그릇에 얼마나 담을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데, 이는 호흡과 분량, 그리고 형식(플롯)의 차원에 해당된다. ‘김 박사는 누구인가?’는 단편 양식이므로, 최소연의 Q와 김 박사의 A를 다섯 번 진행하고, 사족처럼(그러나 의미의 영역에서는 앞의 내용을 뒤엎는 의미심장한 반전) 짧게 ‘그리고 다시 Q’를 마지막에 얹고 있다. 독자는 첫 번째 Q&A만 읽어도 기계처럼 이후 진행 형식을 간파하게 마련이어서 이때에는 반전의 장치가 필요하다. 이 작품에서는 최소연과 김 박사가 다섯 번 오고간 Q·A의 순조로운 관계를 한순간에 파괴하는 ‘그리고 다시 Q’가 그것이다.

    그리고 다시 Q

    Q 김 박사님 김 박사님…김 박사님께서 해주신 이야기 잘 들었어요. 하지만 김 박사님…이 개새끼야, 정말 네 이야기를 하라고! 남의 이야기를 하지 말고, 네 이야기를, 어디에 배치해도 변하지 않을 네 이야기 말이야!

    -‘김 박사는 누구인가?’ 중에서

    풍부해진 ‘예언과 암시’

    소설은 이야기에 그치지 않은 고유한 미학이 창출될 때 작품으로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다. 이기호는 누구나 겪는 일상의 파편(이야기)들을 취사선택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배치(디자인)함으로써 이야기마다 고유성을 부여하는 데 탁월한 감각과 재능을 가지고 있다. ‘김 박사는 누구인가?’에 수록된 8편의 이야기는 재미(감각)에만 그치지 않는 작가의 성정(性情 또는 인간관, 세계관)이 배어 있는 진실한 작품들이다.

    이번 소설집의 특징은 이기호 소설의 특장인 ‘이야기하기’에서 나아가 ‘예언과 암시’가 풍부해졌다고 할 수 있다. 독자가 일방적으로 작가가 전하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닌, 작가가 곳곳에 배치한 틈(공간)으로 들어가 공명하는 묵시록이 그것이다. 1980년대 구로동 노동자로 살았던, 20년의 삶을 프라이드 자동차 한 대에 바친 삼촌의 순정을, 이 소설집의 표제작으로 삼아도 좋았을 ‘밀수록 가까워지는’의 드라마가 특히 그러하다. 소설은 단순히 이야기의 도구가 아닌, 인간의 미적인 영역(예술)을 창조하고 체험하는 세계임을 이 작품은 그대로 보여준다.

    나는 허리를 더 아래로 깊숙이 숙인 채, 프라이드를 밀었다. 나는 할머니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또 생각했다. 삼촌은 이렇게 집적 민 것 또한 노트에 적어놓은 것일까, 그렇다면 과연 그 거리는 어떻게 잴 수 있는 것일까.

    -‘밀수록 가까워지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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