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세기 이후 자취를 감춘 듯했던 ‘낭만 해적’이 ‘현대 해적’으로 부활했다.
- 선박 납치와 인질극을 서슴지 않는 현대 해적은 해양 평화를 깨트리는 주범이다. 해적질은 인류가 바다에 진출하면서부터 시작됐다. 해양의 역사는 곧 해적의 역사다. 김석균 해양경찰청장의 해적 이야기엔 해양의 역사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이 담겨 있다.<편집자>
2011년 1월 21일 해적에게 납치됐던 삼호주얼리호를 완전히 장악한 청해부대 UDT 대원들이 조타실 주변을 지키고 있다. 생포된 채 무릎을 꿇고 있는 해적들도 보인다.
해적의 공격으로 국제사회가 겪는 인적·물적·경제적 피해는 막대하다. 무엇보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 인명피해다. 2011년에만 선원 1118명이 인질로 잡혔고 이 중 24명이 살해됐다.
해적 공격에 의한 경제적 피해는 몸값, 선박·화물 피해, 화물 운송 지연, 선박 보험료 증가, 군사적 비용 등으로 나눠볼 수 있다. 지난해 2월 발표된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국제사회가 지금까지 소말리아 해적에게 지불한 몸값만 3억 달러에 달하고, 보이지 않는 경제적 피해는 70억~120억 달러에 달한다.
해적질은 여러 나라의 해상무역에 큰 피해를 끼치고 있다. 선박들이 해적의 공격을 우려해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지 않고 운항일수가 늘어나더라도 희망봉으로 우회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에 따라 운하 소유국인 이집트는 커다란 재정적 손실을 입고 있고 선사들의 운송비용도 크게 증가했다. 희망봉으로 우회할 경우 대체 항로의 거리는 3500마일 더 길고 항해기간은 12∼15일이 더 소요됨에 따라 하루에 2만∼3만 달러의 추가비용이 들어간다. 우회하는 비용은 2011년 기준으로 4억8000만∼6억8000만 달러에 달했다.
해적이 기승을 부리면서 보험료도 가파르게 인상되고 있다. 보험업계는 소말리아 해적이 활개 치는 인도양을 ‘전쟁 위험지역’으로 분류하고 2008년 후반기에 아덴만을 통과하는 선박의 보험료를 10배나 올렸다. 이 때문에 아덴만을 통과하는 전체 수송비용이 상승하는 결과를 낳았다.
선박보험료 10배 껑충
보험료와 해상 수송비용의 증가는 결국 중동산 유가를 올리고, 중동산 석유에 의존하는 국가들은 그만큼 더 높은 유가를 지불해야 한다. 이것은 연쇄적으로 모든 산업의 비용을 상승시키고 세계 무역비용도 증가시킨다. 소말리아 해적이 중동산 석유가격을 올리고 그 비용이 고스란히 전 세계 경제에 전가되는 구조다.
해적 피해가 커지면서 선사들은 자구책으로 보안 장비를 강화하고 무장요원을 승선시키고 있다. 선사들은 보안장비를 설치하고 사설 무장요원을 고용하기 위해 10억∼11억6000만 달러의 비용을 쓰고 있다. 30여 국가가 해적 퇴치 활동에 군대·장비·함정을 지원하는 데 10억2000만 달러를 썼다. 해적을 체포할 경우 이들을 사법처리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2011년 20개국이 해적을 체포했는데 이들을 기소하는 비용만 1600만 달러가 들어갔다.
현대 해적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19세기 말 이후 해적질이 확연히 줄면서 바다에서 해적이 자취를 감춘 듯했다. 역사 속 낭만적인 이미지의 해적이 ‘현대 해적’이라는 무서운 이름으로 다시 바다로 돌아왔다. 현대 해적에겐 대항해시대 해적에게서 엿보이던 낭만과 환상이 없다. 뱃사람들의 목숨을 위협하고 재물을 탈취하며 해양 질서를 파괴하는 ‘바다의 악당’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은 채 현대의 첨단 정보통신 기술과 무기를 활용해 더욱 지능화하고 흉포해져서 돌아왔다.
사멸된 해적이 다시 살아난 게 아니다. 해적의 명맥은 어디에선가 이어져왔다. 소규모로, 산발적으로 있었던 해적행위는 국제사회 전체가 신경 쓸 정도가 아니었고 지역적 문제에 불과했다. 그러나 병원균이 활동할 수 있는 적당한 온도와 습도가 만들어지면 일시에 확산되듯이 해적도 발호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지자 ‘낭만’에서 뛰쳐나와 잔혹한 폭력을 자행하는 현대 해적으로 부활했다. 현대 해적의 기원은 해적활동이 정점을 찍은 근세 대항해시대를 지나 고대 해양국가, 그리고 훨씬 이전의 신화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크레타人이 꽃피운 해양문화
항해는 바다를 주로 사람의 이동과 물자의 수송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가 행한 최초의 국제적 사업’이라 할 수 있는 항해의 기원은 전설과 신화의 세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전설과 신화는 역사가 아니기 때문에 사실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항해의 역사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됐다는 것이다.
항해는 주변 세계를 소유하려는 인류의 의지와 수평선 뒤에 존재하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험심을 반영한다. 수천 년을 지나는 동안 배를 이용한 운송은 육상의 어떤 운송수단보다 우월했다. 노에서 돛, 연안 스케치에서 해도, 자석에서 나침반, 천체 관측에서 천문항법, 태양 운행에서 시간 측정으로 발달한 천문지식과 항해술의 발전은 더 많은 사람과 화물을 싣고 더 먼 바다로 항해할 수 있게 했다.
초기엔 지중해가 항해의 중심이었다. 지중해로 가장 먼저 진출한 사람들은 오늘날 레바논 해안에 살았던 페니키아인들이었다. 기원전 2000년대 전반기 페니키아인들은 지중해의 남부, 중부를 중심으로 항해와 무역을 했고, 해상전투를 위해 전선을 처음으로 제작했다. 페니키아인들은 지중해 연안에서 무역에 종사하면서 사르데냐 섬, 코르시카 섬과 같은 곳에서 여러 식민도시를 건설했는데 기원전 6세기에 오늘날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 근방에 세운 카르타고도 그중 하나였다.
고대 그리스인도 조선 등 해양기술이 뛰어났다. 그리스인들은 남이탈리아와 흑해 연안에도 다수 진출해 시칠리아 섬 등에서 먼저 자리 잡고 있던 페니키아인들을 쫓아냈다. 항해의 전통은 그리스인들보다 앞서 크레타인들이 갖고 있었다. 크레타 섬 사람들은 소아시아에서 이주해와 기원전 2000∼600년 사이에 크노소스를 중심으로 미노스 문명이라 불리던 고도의 해양문화를 꽃피웠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를 쓴 그리스의 서사시인 호메로스가 ‘포도 빛 바다’라고 표현한 에게 해에는 2000여 개의 크고 작은 섬이 있다. 고대 에게 해 섬들은 이집트 및 오리엔트 문화권과 해상교역을 통해 유럽의 다른 지역보다 일찍 고도의 문명을 꽃피웠고 그리스 문명의 중심부가 됐다.
그리스 최남단에 있는 크레타 섬은 고대로부터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3개 대륙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번창하면서 미노스 문명을 꽃피웠다. 미노스 문명이라는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크레타의 왕 미노스에서 유래됐다.
미노타우로스의 迷宮
페니키아 공주인 에우로페의 미모에 반한 제우스가 흰 소로 변장해 그녀를 등에 태우고 크레타 섬으로 데려갔다. 미노스는 제우스와 에우로페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이다. 미노스는 크레타의 왕위계승을 놓고 형제들과 분쟁을 벌일 때 신의 뜻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빌었다. 바닷속의 황소를 보내주면 그 황소를 신들에게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미노스는 포세이돈이 보내준 황소 덕분에 왕이 됐으나 아름답고 근사한 황소가 탐이 나 감춰두고 신들에게 바치지 않았다. 화가 난 포세이돈은 미노스의 아내 파시에로가 황소에게 욕정을 품게 했다. 파시에로는 나무로 만든 암소에 숨어들어가 황소와 관계를 맺었고 이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머리는 소이고 목 아래는 인간인 미노타우로스(Minotauros)였다. 미노타우로스는 ‘미노스의 소’라는 뜻이다.
경악한 미노스는 미노타우로스를 유폐하기 위해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도록 설계된 미궁(迷宮) 라비린토스를 짓게 하고 그곳에 미노타우로스를 가두어버렸다. 그리고 해마다 아테네에서 조공으로 보내온 7명의 소년과 소녀를 제물로 바쳤다.
아테네 사람들은 미노스에게 바쳐야 하는 조공 때문에 큰 고통을 겪었다. 형제들과 아테네의 왕위를 다투던 테세우스는 미궁으로 들어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공물로 바쳐진 아테네의 젊은 남녀를 구해올 것을 자청했다. 그는 아버지 아이게우스 왕의 만류에도 고통 받는 백성을 구하겠다고 결심하고 크레타로 향하면서 “무사히 구하면 돌아오는 배에 흰 돛을 달겠다”고 약속했다.
테세우스가 크레타에 도착해 미노스 왕을 만나는 자리에 왕의 딸 아리아드네가 동석했다. 아리아드네는 늠름하고 아름다운 청년 테세우스에게 첫눈에 반해버렸다.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에게 칼 한 자루와 실타래를 줬다.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가 일러준 대로 실타래를 풀면서 미궁으로 들어간 후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실타래를 따라 무사히 왔던 길을 되돌아 나올 수 있었다. 실제로 20세기 초에 발굴된 크노소스 궁전은 방이 1300개나 되는 미궁이었다.
한편 아테네의 아이게우스 왕은 아들 테세우스의 무사귀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테세우스는 살아서 돌아가면 배의 검은 돛을 흰 돛으로 바꿔 달겠다는 아버지와의 약속을 까맣게 잊고 항구로 들어왔다. 아크로폴리스 언덕에서 검은 돛을 단 배를 본 아이게우스는 아들이 죽은 줄만 알고 절망해 바다로 몸을 던져버렸다. 이후 그 바다는 ‘아이게우스의 바다’, 즉 에게 해로 불리게 됐다.
해양민족의 출현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술의 신 디오니소스는 배를 타고 여러 섬을 정복하기 위해 돌아다니다 튀레노이 해적에게 붙잡히자 사나운 해적을 온순한 돌고래로 만들었다.
해양민족(Sea Peoples)은 에게 해, 아드리아 해, 서부 지중해에서 이주해와 기원전 13세기 말부터 12세기 초에 걸쳐 이집트 제국을 침략한 사람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해양민족은 진정한 의미에서 해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배를 타고 이주하는 공격적인 부족이었으므로 크게 보면 해적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해양민족은 동맹군을 형성해 이집트를 침략했으나 기원전 1186년 나일 강 삼각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해 궤멸했다. 그러나 기원전 1220년을 전후해 기원전 1186년에 궤멸할 때까지 동부 지중해를 완전히 지배했다. 해양민족은 해상무역을 시작했지만 동시에 해적행위도 했다. 그들은 선박과 해안도시를 습격하며 이집트를 제외한 모든 세력을 물리쳤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해양민족은 역사상 최초의 해적동맹이라 할 수 있다.
해양 도시국가들은 해양민족을 흡수함으로써 해양활동의 범위를 점차 확대했다. 해양민족은 독자적인 도시국가를 형성하지는 못했지만 지중해와 에게 해, 아프리카 북부 연안에 형성된 해양 도시국가들에 흡수됨으로써 이들의 해양 진출에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해양 도시국가들은 해양으로 본격 진출하면서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하려고 서로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리스 반도를 중심으로 지중해와 에게 해에 형성된 삼각 해양교역 네트워크의 중심에 위치한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가장 먼저 해양 패권을 차지했다. 이후 아테네·미케네·로도스와 같은 그리스 반도의 해양 도시국가와 페니키아·크레타와 같은 지중해 연안의 해양 도시국가들은 독자적 해양 패권을 확보하기 위해 쟁투를 벌였다.
내륙 도시국가들도 지중해 방향으로 지속적인 진출을 시도했다. 이에 따라 내륙의 도시국가와 해양 도시국가 간에 지중해 패권 장악을 위한 전쟁이 벌어졌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지중해 패권 경쟁은 기원전 2000년경 내륙 도시국가 이집트와 크레타 섬의 해양 도시국가 크레타 미노스 사이의 전쟁이었다. 이어 기원전 1650년 청동기 도입으로 급속히 발전한 크레타 미노스가 해외 식민지 확장 과정에서 미케네와 지중해 해양 패권을 놓고 전쟁을 했고, 기원전 1100년부터 페니키아와 그리스가 전쟁을 벌였다. 기원전 500년경 지중해의 해양 패권 경쟁은 소아시아 지역의 내륙 도시국가와 그리스 반도의 해양 도시국가 간 경쟁으로 확대됐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아테네와 페르시아 간 전쟁(기원전 494∼479),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치러진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이다.
특히 아테네와 페르시아의 전쟁은 고대 유럽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의미가 크다. 두 나라는 각자의 해외 식민지를 중심으로 군사동맹을 결성함으로써 지중해와 에게 해, 마르마라 해와 보스포루스 해협, 그리고 흑해에 이르는 해양교역 네트워크를 확보하기 위한 전쟁을 벌였다.
기원전 560년 이후 소아시아 지역을 통일한 페르시아는 해양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3차에 걸쳐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해 그리스 반도 진출을 시도했다. 이에 맞서 아테네는 스파르타 등과 범(汎)헬레닉 동맹을 형성해 대항했다. 페르시아의 1차 원정은 에게 해 근처에서 폭풍우를 만나면서 실패로 끝났고, 2차 원정은 그리스의 마라톤 만에 기습 상륙했으나 유명한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스파르타 연합군의 포위전술에 밀려 패했다.
두 차례 원정에서 연이어 실패한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은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다시 3차 원정에 나섰다. 기원전 480년 9월 310척의 함선으로 구성된 범헬레닉 연합함대를 이끌던 스파르타의 테미스토클레스 장군은 1200척에 달하는 페르시아 함대에 대한 수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좁은 살라미스 해협으로 유인해 기습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이것이 세계 4대 해전의 하나로 유명한 살라미스 해전이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대패한 페르시아는 유럽으로 진출할 의지를 접었다. 페르시아와 벌인 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는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해 해양제국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아테네의 승리는 싹트던 민주주의를 동방의 전제 왕권으로부터 지켜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고대 도시국가들의 해양 패권 경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원전 264∼201년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3차례 벌어진 포에니 전쟁이다. 포에니 전쟁에서의 승리는 도시국가 로마가 공화정에서 벗어나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분기점이 됐다.
항해와 해적의 기원
2011년 4월 케냐 몸바사 항 근처에서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됐다가 582일 만에 풀려난 제미니호 선원 4명이 지난해 12월 5일 귀국했다.
역사서에 등장하는 해상 약탈 기록을 통해 고대 세계에서도 해적이 활개를 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대 세계 해적에 관한 기록은 지중해를 비롯한 유럽 지역에만 있는 게 아니다. 사람들이 바다를 통해 교역을 하는 곳이면 어느 곳이나 있었고, 따라서 고대 아시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고대 이집트·그리스·로마의 상업 활동은 바닷길에 준동하는 해적에게 끊임없이 유린당했다. 기록이 많지 않아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해적의 역사는 아주 오랜 옛날 그리스의 신화 속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배를 타고 여러 섬을 정복하기 위해 돌아다니던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튀레노이 해적에게 붙잡히자 사나운 해적을 온순한 돌고래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해적은 피라미드가 건설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루카는 기원전 14세기 지중해 소아시아 해역에 기지를 두고 약탈하던 해적 무리다. 이집트 역사에서는 기원전 14세기에 이들 루카 해적이 키프로스 섬을 습격했다고 전한다. 해적의 활개는 동부 지중해의 청동기 문화를 쇠퇴하게 하고 고대 문명의 암흑시대를 열었다. 암흑시대에는 그리스·크레타·서부 지중해까지 해적이 준동했다. 그런데 해상무역이 감소하자 해적도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12세기 루카 해적은 해양민족으로 알려진 바다 부족에 동화하면서 소멸했다.
고대에는 먼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선박과 항해술이 발전하지 않아 육지에서 볼 수 있는 연안으로 항해하는 일명 ‘해안 싸고돌기(coast hugging)’라는 항해를 했다. 이러한 항해 습관 탓에 해적은 은거지에서 자리 잡고 있다가 눈 깜짝할 새 선박을 덮쳐 화물을 약탈하고 선원을 납치할 수 있었다. 해적은 폭풍우가 치고 파도가 치는 겨울에는 활동을 멈추고, 작고 좁은 만이나 추적이 불가능한 바위투성이의 해안 은신처에서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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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해적은 시칠리아 북쪽 해안의 에올리안 제도에서 겨울을 보냈는데 화산이 비쭉비쭉 솟아 있는 이곳은 2500여 년 동안이나 해적 은신처로 활용됐다. 일리안 해적은 오늘날 크로아티아 해안 근방의 아드리아 해에 있는 이스트리아 반도에 소굴을 두고 활동했다.
아시아의 상황도 비슷했다. 기원전 7세기 페르시아 만에서는 해적이 들끓었다. 아시리아 왕들은 원정 해적토벌대를 조직해 중국·인도·중동의 국가들과 해상교역을 가로막는 해적을 토벌했다. 이 시기에 난파한 무역선에서 초기 해적의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됐는데, 해적이 쏜 화살이 선체를 꿰뚫은 흔적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