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방정부-재정, 주정부-행정 지원, 시민단체-운영 책임
- ‘사유화→난개발’ 막기 위한 ‘땅 사 모으기’가 출발점
- 분단의 현장에서 세계적 생태관광 명소로 탈바꿈
- 유럽 전역 남북 관통하는 생태벨트로 확대
부르크렌첸의 엘베 강을 따라 펼쳐진 그뤼네스반트.
폴란드-체코 국경지대의 스테티 산지에서 발원한 엘베 강은 체코 북부와 드레스덴 등 독일 동부를 지나 함부르크 부근에서 북해로 흘러든다. 수도 베를린과 제2의 도시 함부르크 중간에 자리 잡은 부르크렌첸(이하 렌첸)은 엘베 강을 사이에 두고 동·서독으로 나뉜 접경지역이었다.
중세 유럽 도시의 면모를 그대로 간직한 렌첸은 독일 통일 후 ‘체험 그뤼네스반트 프로젝트’의 거점도시로 선정됐고, 이후 독일은 물론 유럽을 대표하는 생태관광 명소로 탈바꿈했다. ‘체험 그뤼네스반트’는 자연과 문화,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돼 그뤼네스반트로 더 많은 방문객을 끌어들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 방문객은 접경지역의 잘 보존된 생태환경과 함께 이제는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된 분단의 현장을 둘러볼 수 있다.
분단이 조성한 생태환경
엘베 강을 끼고 니더작센 주와 인접한 렌첸은 브란덴부르크 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다. 중세 때 지어진 요새 시설 일부가 남아 있고, 고성(古城)은 호텔과 레스토랑으로 운영된다. 렌첸 중심부의 고성 한켠에는 그뤼네스반트의 운영 책임을 맡고 있는 베우엔데(BUND·독일의 환경 및 자연보호 연합) 방문자센터가 있다. 그뤼네스반트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방문자센터 책임자 디터 로위폴트 씨는 “렌첸은 그뤼네스반트 프로젝트의 거점지역일 뿐만 아니라 엘베 강 하천경관 생태보호구역으로도 지정돼 있어 생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주요 방문지가 되고 있다”고 전했다.
방문자센터에서는 렌첸의 통일 전후 변화상을 사진으로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엘베 강을 앞에 두고 철조망에 가로막혀 인적 없던 선착장은 지금 요트 정박장으로 바뀌어 활기에 차 있다. 철로가 끊어진 채 접경지역 표시 말뚝이 서 있던 자리는 새로 철로가 놓여 독일 고속철 이체(ICE)가 빠른 속도로 지나고 있다.
강가에 설치된 감시 망루는 통일 이후 엘베 강 유역 그뤼네스반트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로 변모했다. 망루 꼭대기에도 분단 시절 이곳 풍경이 담긴 사진이 전시돼 있어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볼 수 있다. 철조망과 감시초소로 상징되던 분단의 현장은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실감케 할 만큼 딴판으로 변해 있다.
로위폴트 씨는 “분단은 역설적으로 자연생태계가 살아 숨 쉴 수 있는 훌륭한 여건을 조성했다.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기 힘든 멸종 위기 희귀 동식물을 이곳에선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동식물이 살지 못하는 곳은 결국 사람도 살 수 없다”며 “생태를 잘 보존해 후손에게 물려줘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고 강조했다.
‘빈틈 메우기 프로젝트’
렌첸 베우엔데 방문자센터 책임자 디터 로위폴트 씨가 그뤼네스반트의 변화상을 설명하고 있다.
그뤼네스반트 보존 활동은 시민단체가 시동을 걸었다. 동·서독 접경지역 보존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인식한 베우엔데는 통일 이전인 1980년부터 접경지역 식생과 생태에 관한 조사를 벌였다. 통일 직전인 1989년 12월에는 동·서독의 자연보호주의자들이 만남을 가졌고 이 자리에서 ‘그뤼네스반트’라는 이름과 여러 보존 방안이 나왔다. 통일이 가시권에 들어온 뒤 베우엔데는 접경지역이 관통하는 여러 주정부와 함께 ‘그뤼네스반트 프로젝트’ 협약을 체결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통일 이후 그뤼네스반트는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토지 소유주들이 마구잡이로 농사를 짓거나 각종 개발을 무분별하게 진행한 탓에 크게 훼손된 것. 주정부와 시민단체 차원의 보존 노력이 한계에 부딪히자 연방정부가 재정을 지원하며 그뤼네스반트를 생태서식지로 복구하는 작업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연방자연보호청의 우베 리켄 박사는 “그뤼네스반트를 과거 독일과 유럽의 분단을 상기시키는, 살아 있는 기념지역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그는 “생태가 가장 잘 보존된 접경지역을 자연 그대로 보존하려면 최대한의 면적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개인 소유의 부지를 가능한 한 많이 매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연방정부는 재정을 지원하고, 그뤼네스반트가 속한 각 주정부는 행정·관리업무를 맡았다. 베우엔데 등 시민단체는 사유지 입수 작업과 함께 다각도의 연구를 수행했다. 베우엔데는 훼손된 그뤼네스반트 지역을 생태서식지로 복구하기 위한 ‘빈틈 메우기’ 프로젝트 등을 진행했다. 뜻있는 시민의 후원을 받아 그뤼네스반트에 접한 지역의 토지를 직접 사들이거나 토지이용 전환을 유도하고, 경작주나 목축업자들을 설득해 토지에 적합한 경제활동을 영위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했다.
가장 넓은 면적의 그뤼네스반트가 포함된 튀링겐 주는 그뤼네스반트의 보존과 자연보호에 집중하고 있다. 위르겐 라인홀츠 튀링겐 주 농림환경자연보호부 장관에 따르면 그뤼네스반트를 떠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대체 토지를 받을 수 있도록 법과 제도가 곧 바뀐다고 한다.
시민단체와 주정부의 주도로 그뤼네스반트 토지 소유권을 확보하면서 이곳을 찾는 관광객과 지역 주민을 위한 서비스 시설도 크게 확충했다. 분단으로 끊겼던 일부 도로와 철로를 다시 연결했고, 그뤼네스반트를 따라 저전거도로도 새로 놓았다. 수많은 산책로와 전망대, 관찰탑, 안내판 등도 설치했다. 연방정부, 주정부, 시민단체들의 노력이 어우러져 상승효과를 내고 있는 것이다.
연방정부는 지금도 그뤼네스반트의 약 30%를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하거나 국립공원으로 보호하고 있는데, 리켄 박사는 “그뤼네스반트 전체를 국립 자연유적지로 보호할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전했다. 베우엔데 활동가 다니엘라 라이츠바흐 씨는 “그뤼네스반트 양쪽에 놓인 지역과 상호 연결성을 높여 보존가치를 높이는 것이 그뤼네스반트 프로젝트의 주요 목표”라며 “그뤼네스반트는 생명 공간들의 연계망을 구축하는 중심축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유럽 그뤼네스반트’
독일 그뤼네스반트 프로젝트는 유럽 그뤼네스반트 프로젝트의 단초가 됐다. 유럽 그뤼네스반트 프로젝트는 북쪽 노르웨이 인근 바렌츠 해부터 유럽을 남북으로 관통해 남쪽 흑해에 이르는 총 길이 1만2500km의 생태 공간을 연결하는 구상. 베우엔데는 유럽 중앙지역의 프로젝트 조율을 담당하고 있다. 라이츠바흐 씨는 “베우엔데는 중부 유럽 그뤼네스반트의 주도자로서 생태서식지 결합과 유지,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그린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지역 발전에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널리 알리고 있다”고 밝혔다.
분단으로 막혀 을씨년스러운 접경지역을 세계적 생태지대로 탈바꿈시킨 그뤼네스반트는 이제 독일 국경을 넘어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한국 정부가 세계평화공원 조성을 추진하는 비무장지대(DMZ)가 나아갈 방향 또한 그뤼네스반트와 크게 다르지 않다. DMZ세계평화공원을 성공적으로 조성하는 것은 분단의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는 일일 뿐 아니라 한반도에서 삶을 지속할 남북한의 후세들에게 세계적인 생태자원을 물려주는 대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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