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연구재단 등, 논문 180만 편 인터넷 무료 열람 추진
- “선진국 논문은 비싸게 사고, 한국 논문은 공짜로 주고…”
- “학술 韓流 위축…인문사회학·자연과학 경쟁력 급락”
- 교육부·한국연구재단 “정보공유 운동 차원”
최근 한국연구재단은 2013년 말까지 인문사회과학 분야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 전체 논문의 70%에 해당하는 61만여 편을 오픈액세스(OA·인터넷 등을 통해 세계 어느 곳에서도 무료로 열람할 수 있도록 하는 것)로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여기에 드는 비용은 한국연구재단이 대는데, 이 재단은 정부 예산을 받아 사업을 운영하는 곳이다. 현재 오픈액세스로 공개돼 있는 국내 인문사회과학 분야 논문은 26만9602편이다.
“너무 나갔다”
이에 대해 한국전자출판협회는 “전 세계에서 이렇게 많은 논문을 무료로 공개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며 정책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이경표 누리미디어 이사는 최근 한국전자출판협회 주최 ‘학술 한류의 현재와 미래’ 세미나에서 주제 발표를 맡아 논문 무료 공개 정책을 비판했다. 다음은 이 이사와의 일문일답이다.
▼ 오픈액세스라는 용어가 좀 생소한데, 쉽게 말해 인터넷에 논문을 무료로 깐다는 이야기죠?
“오픈액세스는 원래 다국적 데이터베이스 업체의 횡포를 견제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된 운동입니다. 엘스비어, 스프링어 등 세계 8대 데이터베이스 업체들이 세계 SCI(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 저널의 50% 이상을 독점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이들 업체가 이런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데이터베이스 사용료를 고가로 인상해왔어요. 또 데이터베이스 상품 하나에 상당량의 저널을 끼워 팔아요. 도서관과 연구기관이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가의 제품을 구매하지 않을 수 없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오픈액세스 운동이 시작된 겁니다.”
▼ 우리나라에선 그간 어떠했습니까.
“코리아메드(Korea Med)와 이를 운영하는 의학학술지편집인협의회가 십수 년간 학술 정보의 오픈액세스에 기여했고….”
▼ 카피라이트(copy right·저작권)에 대항한 카피레프트(copy left·무료로 자유롭게 볼 권리)의 일환으로 논문 오픈액세스를 이해하면 되겠군요. 정부가 카피레프트 운동에 발 벗고 나서는 게 이례적이긴 하지만, 굳이 학술계가 여기에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세계의 오픈액세스 운동과 맞지 않는 ‘너무 나간 정책’이기 때문이죠.”
이 이사는 DOAJ.org의 통계를 근거로 들었다. DOAJ.org는 전 세계 모든 오픈액세스 저널과 논문을 커버하는 것을 목표로 오픈액세스 운동가들이 운영하는 사이트인데, 여기에 따르면 2013년 6월까지 10여 년간 축적된 전 세계 오픈액세스 논문은 120개국의 학술저널 113만9900여 편이다.
전 세계 합친 것 1.5배
그런데 한국은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이 오픈액세스로 공개한 논문만 이미 120만 편으로 전 세계 무료 공개 논문 수를 초과했다. 연말까지 한국연구재단이 무료 논문 61만 편을 공개하면 한국 한 나라의 오픈액세스 논문이 전 세계 오픈액세스 논문의 1.5배에 달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한국 논문은 세계에 공짜로 주면서 선진국 논문은 값비싸게 사야 한다’는 점이 가장 큰 논란거리다. 이어지는 한국전자출판협회 관계자와의 일문일답이다.
▼ 오픈액세스의 취지는 좋지만, 현실적으로 다른 나라는 여전히 유료화로 묶어두는데 한국만 죄다 무료로 공개하는 것은 문제라는 거군요.
“세계적으로 오픈액세스의 대상이 되는 논문은 의학, 과학기술 등 공공성이 강한 분야이면서 정부와 공공기관이 연구비를 지원한 논문에 한정되는 게 보통입니다.”
▼ 학술 분야에서 세계 1위 격인 미국은 어떤가요.
“미국에선 하버드대, 캘리포니아주립대, 밀워키대 같은 곳이 오픈액세스에 적극적인 대학으로 평가됩니다. 그러나 이들 대학도 교수의 강의 동영상 등을 일반에 공개하는 정도에 그치지, 학술논문을 무료로 제공하지는 않죠. 그런데 한국에선 학술 선진국이 오픈액세스를 추진한 배경과 그 제한적 성격을 인식하지 않고 맹목에 가까울 정도로 밀어붙이고 있어요.”
▼ ‘무조건 무료’의 실질적 문제점이라면.
“한국은 지금까지 글로벌 데이터베이스 업체에 고액의 사용료를 내면서 선진국의 연구 성과를 구매해 배워왔어요.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고요. 한국 시장에 진출한 이들 글로벌 업체의 연간 매출은 2012년을 기준으로 2000억여 원에 달합니다. 대학이나 연구기관 1곳당 1억~20억 원의 구독료를 지불하는 편이죠. 그런데 한국의 연구 성과는 무조건 무상으로 개방하고 선진국의 연구 성과는 계속 비싼 값에 사보라는 것이니, 이치에 맞지 않는 거죠. 국익을 지키는 데도 부합하지 않고요.”
이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면, 일종의 ‘논문 유통업’이라고 할 수 있는 학술 콘텐츠 데이터베이스 업종은 막대한 수익을 내는 사업 분야이고, 학술 논문도 상당한 고부가가치 지식상품으로 평가되는 셈이다. 학술 콘텐츠 데이터베이스 업종의 선두권에 있는 네덜란드의 엘스비어는 학술 콘텐츠로 연간 5조 원가량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향후 한국인이 생산한 논문이 여러 나라에서 값비싸게 구독되고 한국의 토종 학술 콘텐츠 데이터베이스 업체가 글로벌 업체로 성장할 가능성은 어느 정도일까. 학술계에선 “지금 추세라면 충분히 실현 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정부의 논문 무료 공개를 비판한 한국전자출판협회 세미나.
2011년 한국연구재단의 발표에 따르면 SCI에 등재된 한국 논문은 4만4718편이다. 국가별 SCI급 논문 게재 건수로는 세계 11위에 해당하고, 중복을 제외한 전 세계 총 논문 126만892편 중 3.55%의 점유율을 보이는 것으로, 결코 작지 않은 비중으로 평가된다.
한국 정부의 2013년 예산 중 연구개발(R·D) 투자는 16조9000억 원대인데(기획재정부 자료), 이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세계 3위에 해당한다. 2012년 개인연구비 규모는 8000억 원대였다. 특히 박근혜 정부는 대통령 공약사항인 ‘창조경제 구현’과 관련, R·D에 8조1000억 원을 투입해 2017년까지 GDP의 5% 수준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이러한 정황을 감안하면 향후 한국인이 생산하는 논문의 양과 질은 더욱 좋아질 것으로 예견할 수 있다.
한국전자출판협회 관계자는 “한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인 데다 전 세계에서 한국의 경제, 과학, 기술 발전과정을 모델로 삼으려는 나라가 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 논문의 국제적 가치도 빠른 속도로 올라가고 있다”고 말했다. 가령 한국의 반도체, 조선, 자동차, 금속, 의학 등의 경쟁력은 세계 최상위급인데, 이들 분야의 국내 논문은 선진국 논문에도 뒤지지 않는 최신 트렌드와 고급 정보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 학술논문 데이터베이스를 구독하는 해외 기관도 최근 3년 사이 2배로 늘었다고 한다. 한국학 관련 자료를 서비스하는 해외 대학 도서관 담당자들에 따르면 한국에서 생산된 논문에 대한 반응도 좋은 편이다.
미국 하버드대 학술자료 담당자인 강미경 씨는 “한국 학술논문 데이터베이스 업체인 DBpia의 필요성이 이제는 해외 사서들 사이에도 확산된 상황이다. 없어서는 안 될 데이터베이스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UCLA의 수 첸 도서관장은 “한국 논문은 꼭 필요한 자료여서 구독을 중단할 계획이 없다”고 했다.
논문 저자들에게 ‘슈퍼甲’ 행세
학술계 일각에선 음악, 드라마, 영화, 게임 등 대중문화 분야의 한류 콘텐츠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2010년 5조 원의 생산유발효과와 2조 원의 부가가치 창출 효과를 가져왔는데, 학술 분야도 육성하기에 따라선 대중문화 분야 못지않은 한류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한국연구재단의 논문 무료화 계획에 의해 이러한 장밋빛 전망이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다.
한국전자출판협회 관계자는 “정부가 조금만 도와주면 우리 학문이 크게 성장할 수 있을 텐데 오히려 논문 무차별 무료화를 단행해 학술 한류의 싹을 죽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국내 학술논문 데이터베이스 업체의 한 관계자는 “무료화하는 논문들 중에 SCI급 논문들이 포함된다면 정부는 이들 논문에 대해 권리가 있는 글로벌 데이터베이스 업체에 거액을 보상해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학술계에 따르면 해외에서는 어떤 논문을 무상 공개하려면 공개자가 그 논문을 서비스하는 데이터베이스 업체에 오픈액세스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데이터베이스 업체인 스프링어는 논문 한 편당 오픈액세스 비용으로 3000달러를 받고 엘스비어는 500~5000달러를 받는다고 한다. 한국 논문 무료화를 위해 해외에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클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한국전자출판협회 관계자는 “‘정부와 한국연구재단이 논문 오픈액세스를 강력하게 추진하는 실제 배경엔 사업 영역을 확대하려는 부처 이기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는 이야기가 학술계에서 돌고 있다”고 전했다.
논문 무료화는 논문을 쓰는 국내 학자들의 저작권 보호 논란과도 연결돼 있다. 한국연구재단은 학술지 등재 여부를 결정하고 지원하는 등 학술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또한 등재 학술지 논문 게재 건수는 교수 임용 및 평가 등에 중요 기준이 되고 있어 국내 학자들은 등재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이와 관련해 한국연구재단은 학술지가 논문을 무상 서비스할 경우 등재 학술지 인정 항목에서 가점을 주고 있다. 이에 따라 학술지들도 논문 저자들에게 무상 게재를 유도함으로써 논문 게재 전까진 ‘을’의 처지인 논문 저자들이 어쩔 수 없이 동의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런 점을 비판하는 측은 “정부가 논문 저자들에게 ‘슈퍼 갑’ 행세를 하고 있다”, “선진국처럼 논문 저자들의 저작권도 정당하게 보장해줘야 학문이 발전한다”고 주장한다.
교육부 “무료 공개는 세계 추세”
이길연 변호사는 “한국연구재단의 학술지 평가기준상 유상으로 논문 서비스를 해온 학회는 무상으로 해온 학회에 비해 불리한 점수를 받게 되어 있는데, 유상인지 무상인지에 따라 배점을 달리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 처사인지 의문”이라고 했다.
손정달 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 사무국장은 “한국연구재단과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은 논문 오픈액세스에 대한 배점을 책정해 학술지 지원 유무를 결정하려 한다”면서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이어 “논문 저작권자의 의사를 확인하지도 않고 무리하게 오픈액세스를 추진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고 덧붙였다.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은 ‘논문을 무료로 열람케 하면 학자들이 적은 비용으로 선행 논문을 참고할 수 있어 논문을 더 많이 써낼 것’이라는 반대 논리를 편다. 한국전자출판협회는 최근 교육부에 “국내 논문은 해외에 무료로 공개하고 해외 논문은 고가로 도입하는 건 국부 유출이 아니냐”는 질의서를 보냈다. 교육부는 답변 공문에서 “논문 생산자와 이용자 간 공유라는 오픈액세스는 전 세계적으로 추진되는 운동이므로 한국만 국부를 유출시킨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밝혔다. 이어지는 교육부의 답변 내용이다.
“아시아-태평양 국가 연구지원기관들은 오픈액세스를 촉진시키고자 실현가능한 방법들을 논의함. 2013년도 세계연구기관협의회의 메인 주제로 ‘오픈액세스’가 채택돼 13개 액션플랜이 논의됨.”
이에 대해 한국전자출판협회 관계자는 “논의만 한 것을 두고 ‘세계적인 추세’라고 하니 억지다. 정부가 너무 앞서가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반박했다. 이 관계자는 “세금 낭비하면서 학문 퇴보시키는 모순은 수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육부는 논문의 유·무상 제공 여부에 따라 학술지를 차별화해 점수를 부여하는 점에 대해선 “학술지의 접근성을 변별하는 항목이므로 타당하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