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그로호 작품의 공통적인 특징은 인간의 얼굴이 가려진 채 표현된다는 점. 마스크, 헬멧, 히잡 등을 둘러 기껏해야 눈만 빠끔 드러난 인간들. 그는 이런 상징을 통해 시스템에 순응하기 위해 개성을 숨겨야 하는 인간의 처지를 드러내고자 한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세계가 어두운 것은 아니다. 굵고 대담한 선과 이미지와 상충되는 짧은 구절의 텍스트 등은 만화처럼 익살스럽고 애니메이션처럼 역동적이다. 얼굴을 가린 채 바지춤에 손을 집어넣은 남자를 표현한 자수 작품의 제목은 ‘I am touch my morality’(2013).
1977년생인 누그로호는 30년간 장기 집권한 수하르토 정권이 몰락한 1990년대 후반부터 인도 자바 섬의 도시 욕야카르타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욕야카르타의 예술가들은 자유의 물결을 맘껏 향유하며 다각도의 실험을 펼쳤다. 누그로호 역시 벽화부터 조각, 회화, 만화책, 애니메이션, 그림자 인형극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왕성하게 활동해왔다.
전시장 입구에서 커다란 종이상자를 뒤집어쓰고 다리만 내놓고 있는 남자(정식 작품은 아니고 작가의 큐레이팅이다)를 보고 놀라지 말길. 흑백 작품 위주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그간의 누그로호 전시보다는 익살스러운 충격이 덜한 편이다. 전시장 내 벽에 그린 그림들은 누그로호가 서울의 인상을 표현한 것으로, 전시가 끝나면 지워질 예정이다. 전시 관계자는 “기록을 위해 사진으로 남기겠지만 작품으로 판매하진 않는다”고 했다.
● 일시 | 11월 3일까지 ● 장소 |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서울 강남구 청담동 99-5)
● 관람료 | 무료 ● 문의 | 02-541-5701, www.arariogalle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