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찬호는 原石, 류현진은 ‘완성품’
- “국내 최고는 ML에서도 통한다” 입증
- 영어 못해도 특유의 친화력으로 안착
- 좌타자 잡으려면 슬라이더 갈고닦아야
국내 프로야구에서 7년 동안 에이스로 활약한 류현진은 LA다저스 입단 첫해, 박찬호가 이루지 못한 것들을 차례로 달성했다. 올 오프시즌 프리에이전트(FA)가 되는 신시내티 레즈의 추신수는 박찬호가 2001년 텍사스 레인저스와 계약한 ‘5년 6500만 달러’를 간단히 뛰어넘을 전망이다. 2013년 메이저리그는 투타(投打)에서 류현진과 추신수의 눈부신 활약으로 야구팬들을 그 어느 해보다 즐겁게 했다.
‘과잉투자’ → ‘헐값계약’
박찬호와 류현진은 여러 공통점을 갖고 있으면서도 다른 점이 많다. 박찬호는 대학생 시절 미국으로 날아가 메이저리그를 개척한 선구자다. 류현진은 국내 프로야구에서 전성기를 누린 투수의 미국 진출 사례다. 그간 이상훈, 구대성 등 국내 프로야구 출신 투수(모두 좌완이다)들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경우가 있었지만, 이들은 프라임타임을 지나 큰 임팩트를 주지 못했다. 메이저리그를 잠시 거쳐간 경우에 불과하다.
류현진은 한창 나이(26세)에 포스팅시스템으로 진출한 것부터 다르다. ‘국내 최고’는 메이저리그에서도 통한다는 것을 보여준 모범사례다. 포스팅시스템이란 완전 FA(국내는 9년)가 되기 전에 미국 진출을 선언, 구단이 이적료를 받는 제도. 일본 프로야구 선수들이 미국에 진출하면서 이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해 만든 것으로, 한국에도 같이 적용된다. 한국에서 FA가 되면 구단은 선수와 보상금을 받지만, 선수가 메이저리그로 진출하면 빈손이 된다. 그래서 FA가 되기 2년 전에 외국 진출의 문을 열어 준다.
류현진이 이 혜택을 받아 한화 이글스가 포스팅했고, LA다저스 구단은 2573만7737.33달러(약 280억 원)라는 가장 높은 금액을 적어내 단독협상 교섭권을 확보했다. 미국에서는 ‘계약을 샀다’는 표현을 쓴다. 이 돈은 한화 이글스가 챙겼다. 류현진은 ‘슈퍼에이전트’로 통하는 스콧 보라스를 고용해 6년 총 연봉 3600만 달러(약 390억 원)에 계약을 체결했다. 따라서 다저스가 류현진을 영입하기 위해 투자한 금액은 6100만 달러가 조금 넘는다. 예상을 훨씬 웃도는 포스팅 액수와 연봉 계약이었다. 이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과 월드베이스볼 클래식(WBC) 2회 연속 4강 진출의 성과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 프로야구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졌음을 반영한 결과였다.
계약 당시 ‘LA타임스’는 비아냥거리는 투로 다저스가 미국에서 검증되지 않은 투수에게 너무 많은 투자를 했다고 보도했다. 류현진이 활동한 대전구장이 수용할 수 있는 관중이 1만여 명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한국 프로야구의 인프라와 9개 팀의 보잘것없는 저변을 꼬집었다. 메이저리그 구장은 보통 4만 명 이상을 수용한다. 더욱이 미국은 메이저리그를 포함해 프로야구 팀만 수백 개에 달한다. 모든 것을 미국 중심으로 보는 시각이 드러난 기사였다.
하지만 LA타임스의 시각은 곧 바뀌었다. 류현진의 계약은 ‘거저 주운 격’이란 뜻의 ‘Bargain Contract’로 평가됐다. 류현진의 활약으로 다저스는 헐값에 FA 선수를 영입한 셈이 됐다. 오프시즌 다저스는 제2 선발 잭 그렌키를 6년 1억5900만 달러를 퍼부어 영입했다. 그렌키는 올해 15승 4패 평균 자책점 2.63을 기록했고, 제3 선발로 입지를 굳힌 류현진은 14승 8패 평균 자책점 3.00으로 정규 시즌을 마쳤다.
“What′s your name?”
필자는 1994년 LA다저스에서 야구 인생을 꽃피우기 시작한 박찬호와 2013년 센세이션을 일으킨 류현진을 현장에서 취재했다. 두 선수는 여러 면에서 비교된다. 박찬호는 투수의 최대 무기인 빠른 볼을 던질 수 있고, 류현진은 피칭 완급 조절의 열쇠인 체인지업으로 타자를 요리한다. 요즘 야구는 체인지업을 못 던지면 마운드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데뷔 첫해 류현진의 체인지업은 메이저리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의 탁월한 구종(球種)으로 평가받았다.
박찬호는 평균 시속 150km 이상의 강속구로 타자를 압도했다. 류현진은 국내 프로야구 7년 동안의 에이스 경험을 바탕으로 LA다저스 돈 매팅리 감독도 깜짝 놀랄 정도의 위기관리 능력을 과시했다. 구위(球威)는 박찬호였고, 경기 운영은 류현진이다. 박찬호는 미국에 진출해 2년간 마이너리그에서 가다듬은 원석(原石)이고, 류현진은 ‘완성품’으로서 미국에 진출했다.
역시 박찬호와 류현진을 모두 취재한 MLB.com의 제시 산체스 기자는 류현진의 별명 ‘류뚱’을 재미있게 발음하면서 “마운드에서의 경기 운영, 인터뷰 태도 등이 참 좋다”며 호감을 나타냈다. 그는 플레이오프 기간 류현진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며 “3루수 후안 유리베와 류현진은 말도 잘 통하지 않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가깝게 지내느냐”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디비전시리즈 3차전을 앞두고 산체스는 직접 류현진에게 이 질문을 했다. 류현진은 “유리베(34)가 형처럼 대해준다. 마음씨도 참 좋다. 내 장난을 다 받아주기 때문에 자주 장난을 친다”고 했다.
도미니카공화국 출신의 유리베는 2010년 시즌 후 FA로 풀려 다저스와 3년 연봉 2100만 달러의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2011, 2012년 부진을 면치 못하면서 다저스 팬들에게 ‘공공의 적’이 돼버렸다. 2년간 타율이 0.199에 불과했다. 지난해와 올 초까지는 주전 자리도 못 지켰다. 하지만 지난 4월 이후 유리베는 미운 오리새끼에서 백조로 변신했다. 9월 10일 지구 라이벌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전에서 한 경기 3개의 홈런을 때리는 등 클러치 능력을 뽐냈다. 3루 수비는 매팅리 감독이 “골드글러브 수상이 당연하다”고 할 만큼 빼어나다.
유리베는 류현진이 누상에 주자를 두고 위기에 몰리면 마운드로 가 한참 대화를 나눈 뒤 3루로 돌아간다. 류현진도 고개를 끄떡거린다. 그가 류현진에게 하는 말은 “What′s your name?”편하게 던지라는 속뜻이 담긴 농담이다.
류현진이 메이저리그에 성공적으로 착륙한 여러 요인 중 하나가 동료들과 금세 가까워진 친화력이다. 영어 소통이 원활하진 않지만 스프링캠프에서 ‘만국 공통어’ 보디랭귀지로 다저스 문화에 쉽게 동화했다. 지금은 다저스의 마케팅 직원 마틴 김이 통역을 맡고 있어 구장과 로스앤젤레스 생활에 큰 불편이 없다.
류현진은 미국에 도착한 지 얼마 안돼 스프링캠프에서 돈 매팅리 감독과 탁구를 쳤다. 미국은 모든 종목의 단체훈련 시간이 하루 4시간을 넘지 못하기 때문에 스프링캠프는 오전 9시에 시작해 오후 1시면 끝난다. 이후에는 개인훈련이다. 탁구를 곧잘 치는 류현진은 매팅리 감독에게 졌다. 미국 기자가 “진짜 실력으로 진 것이냐”고 묻자 “한국에서는 선수가 감독을 이기면 안 된다”고 말해 폭소를 자아냈다. 눈치도 빠르다.
좌타에 약한 좌완
3루수 후안 유리베(오른쪽)와 류현진은 돈독한 친분을 과시한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MLB.com의 켄 거닉 기자가 달리기 꼴찌 후에 담배를 피우는 류현진을 목격하고는 “담배를 끊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지적했다. 이 기사가 나간 후 한국 언론은 ‘류현진 죽이기 아니냐’는 식으로 들끓었다. 한국에선 운동선수들의 흡연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지만, 미국인들은 어릴 때부터 담배를 거의 마약처럼 취급하는 교육을 받는다. 한국 언론의 과민반응이었다. 아무튼 이 보도를 통해 야구팬들이 류현진의 흡연 사실을 알게 됐다. 류현진은 지금도 담배를 피운다.
‘흡연 파동’이후 류현진은 시범경기에 출장했다. 미국은 훈련이 짧은 대신 경기를 통해 시즌에 대비한다. 메이저리그는 35경기 안팎의 시범경기를 치른다. 류현진과 같은 루키 투수의 시범경기 패턴은 ‘구원 등판→선발→선발에서 이닝 늘리기’로 시즌에 대비한다. 3월 2일 애리조나에서 시범경기 선발로 데뷔한 LA에인절스 전에서 2이닝 동안 4안타(1홈런) 2실점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에인절스 강타자 조시 해밀턴에게 시범경기에서 처음 구사한 슬라이더가 홈런으로 이어져 문제로 떠올랐다. 체인지업은 명품인데 다른 변화구는 전혀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좌완투수는 좌타자에게 예리한 슬라이더를 구사하지 못하면 공략하기 어렵다.
류현진이 올 시즌 압도적인 우세를 보여야 할 좌타자에게 약점을 보인 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지만, 무엇보다 슬라이더가 예리하지 못한 게 가장 큰 원인이다. 올해 192이닝을 던지면서 우타자 상대 타율이 0.245인 데 비해 좌타자에겐 0.270이었다. 야구에서 좌완은 좌타자에게 강한 법이다. 내년 스프링캠프에서 집중적으로 보완해야 할 대목이다.
고비마다 병살 플레이
류현진은 4가지 구종을 구사한다. 직구(포심패스트볼), 체인지업, 슬라이더, 커브다. 최대 무기는 직구의 제구력이고, 이를 받쳐주는 게 체인지업이다. 체인지업은 볼 그립을 도너츠 형태로 잡은 뒤 직구와 똑같은 팔 스피드로 던진다. 직구처럼 보였다가 구속이 떨어져 들어오기 때문에 타자는 헛스윙을 하게 된다. 체인지업이 좋으면 직구 스피드가 빨라 보인다. 류현진의 직구 평균 속도는 146km(91마일). 커브와 슬라이더는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평균보다 다소 떨어지는 편이다.
류현진의 시범경기 투구 내용은 썩 인상적이지 않았다. 스프링캠프 당시 다저스는 8명의 선발투수가 다섯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였던 터라 류현진의 시범경기는 매우 중요했다. 모두들 한때 내로라하는 메이저리그 투수였다. 신인 경쟁은 없었다. 하지만 다른 투수들도 시범경기에서 눈에 띄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시범경기 내용만으로는 선발 5인 로테이션 합류에 전혀 지장이 없었다. 결국 이웃사촌 LA에인절스와의 마지막 시범경기인 프리웨이 시리즈(다저스와 에인절스는 5번 프리웨이로 이어진다고 해서 붙은 명칭)에서 4이닝 퍼펙트 피칭으로 선발 자리를 확실하게 굳혔다.
시범경기 막판에는 주전 타자들이 모두 기용되는 터라 정규시즌과 큰 차이가 없다. 류현진의 구위는 제3, 4 선발급으로 손색이 없었다. 다저스 선발진 로테이션은 클레이튼 커쇼→잭 그렌키→채드 빌링슬리→류현진→조시 베켓으로 이어지는 순서였다. 그러나 그렌키와 빌링슬리가 부상으로 로테이션에서 뒤로 처져 류현진은 4월 3일 홈에서 라이벌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개막전 시리즈 두 번째 선발투수로 데뷔했다. 6.1이닝 동안 10안타 5삼진 3실점(1자책점)으로 0-3 패전을 맛봤다. 평범한 데뷔전이었지만, 매팅리 감독은 “아주 좋았다. 고비마다 병살 플레이를 엮어내는 경기 운영이 탁월했다”고 높은 점수를 줬다.
선발투수가 10안타를 허용한 것은 많이 맞은 것이다. 다만 실책이 포함된 3실점은 적은 점수였다. 볼넷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메이저리그에서는 안타보다 볼넷 허용을 더 좋지 않게 본다. 야수들이 오랫동안 수비를 해야 하는 터라 집중력이 떨어지고 실책이 자주 나오게 된다. 류현진과 박찬호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더구나 10안타가 모두 단타였기에 최소 실점으로 막을 수 있었다.
류현진은 데뷔 첫해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 15승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14승 8패를 올렸다. 인터리그 LA에인절스 전 3-0 완봉승은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팀이 어려울 때마다 호투로 데뷔 첫해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밑거름이 됐다. 한국인 최초로 포스트시즌에서 선발투수로 나서는 영광도 맛봤다.
투구 내용을 보면 홈런은 15개, 삼진 154개, 볼넷 49개를 허용햇다. 메이저리그에서는 삼진과 볼넷 비율을 투수의 중요한 자료로 참고한다. 보통 2:1이면 괜찮다. 류현진은 3.14:1이다. 박찬호는 풀타임 첫해 같은 192이닝을 던져 삼진 166개에 볼넷 70개였다. 2.37:1이었다. 통산 비율은 2:1이 채 안된다. 삼진 1715개, 볼넷 965개다.
‘류뚱’ 덕에 한인은 즐거워
류현진은 투구 이닝도 팀내에서 에이스 클레이튼 커쇼(236이닝) 다음인 192이닝으로 메이저리그 루키 투수 최다 이닝을 소화했다. 192이닝을 던져 인센티브도 75만 달러를 챙겼다. 당초 보라스는 계약조건에 투구 이닝을 인센티브로 강조해놓았다. 올해는 160이닝을 기준으로 10이닝이 늘 때마다 25만 달러를 추가로 받는 조건을 달았다. 루키 투수의 160이닝은 괜찮은 편이다. 그보다 32이닝을 더 던져 8억700만 원을 보너스로 받은 것.
류현진은 지명타자가 없는 내셔널리그의 다저스 유니폼을 입어 타격에서도 숨은 재주를 발휘했다. LA로 온 것도 행운이었다. LA에는 100만 명에 가까운 한인동포가 거주한다. 다저스타디움 등판 때마다 4000~5000명의 한인 팬이 몰려와 열렬한 응원을 펼친다. 음식도 불편하지 않다. 그는 시즌 중엔 아버지 류재천 씨, 어머니 박승순 씨와 LA 다운타운의 고급 콘도미니엄에서 함께 생활한다. 장소만 대전에서 LA로 옮겼을 뿐이다.
그러나 땅덩어리가 큰 미국 서부와 동부의 3시간 시차는 류현진에게 다소 고통스러웠다. “경기가 끝나면 집에 와서 대개 새벽 한두 시쯤에 자게 된다. 동부로 가면 새벽 4, 5시다. 동부로 이동해 첫날 마운드에 오르면 정신이 몽롱하다”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그것 말고는 별 불편함이 없다. LA의 나이트라이프도 즐기고 있다. 어디에서 류현진을 봤다는 제보가 방송국에 수시로 접수된다. 그러나 류현진이 있기에 LA 한인동포들은 그저 즐겁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