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호

채동욱 전 총장 의혹 보도 1면 톱감 되지만 제목은…

  • 정해윤 │시사평론가 kinstinct1@naver.com

    입력2013-10-18 14: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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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자 의혹은 세간의 관심을 끈 뉴스였다. 채 전 총장이 대처한 행태가 ‘총체적 부실’ 그 자체여서 이슈를 더 키웠다. 호기롭게 동반사퇴를 선언한 ‘호위무사’와 달리 정작 채 전 총장 본인은 모호한 처신으로 일관했다.

    조선일보의 첫 보도가 나갔을 때 그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그가 법적 대응을 선언한 것은 나흘이 지나서였다. 하지만 조선일보에 대해 정정보도 청구소송을 했을 뿐이었다. 자기 이름을 혼외자의 아버지로 도용해 사달을 일으킨 임모 여인에 대해선 명예훼손 소송 등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런 대응은 상식을 가진 사람들로선 이해하기 힘든 처신이었다.

    법무부 조사에 따르면 임모 여인은 채 전 총장의 검사장 집무실에서 자신을 채 전 총장의 부인이라 칭하며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표현은 인구(人口)에 회자됐다. 임모 여인 집의 가정부라는 여인은 TV조선에 나와 ‘채 전 총장의 두 집 살림 행각’을 증언했다. 이런 가운데 채 전 총장은 사표가 수리된 뒤 정정보도 청구소송마저 취하했다. 그가 여전히 유전자 검사를 받겠다고는 하지만, 혼외자 진위와 관련한 여론은 이미 한쪽으로 크게 기운 것 같다.

    낯 뜨거운 채동욱 기사 매도

    이 사건은 무엇보다 언론의 기능을 되짚어보게 한다. 공직자의 축첩(蓄妾) 문제는 언론에서 충분히 다룰 만한 사안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과 관련한 언론의 태도에는 많은 문제가 발견된다.



    최초의 조선일보 기사는 채 전 총장 또는 임모 여인의 자백이나 유전자 검사 같은 객관적 증거를 확보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황 증거들만으로 기사를 작성해 1면 톱으로 올렸다. 물론 언론은 정황 증거들만으로도 고위 공직자에 대해 충분히 의혹을 제기할 수 있다.

    이러한 조선일보 보도에 대해 일부 진보 매체들은 진영 논리에 매몰된 태도를 보였다. 이들 매체는 “1면 톱감이 안 된다”고 보도했는데, 이건 그들의 일방적 주장일 뿐이다. 설득력도 별로 없는, 낯 뜨거운 ‘남의 기사 매도’에 불과하다. 검찰총장의 혼외자 의혹은 1면 톱감이 되고도 남는다고 본다.

    SBS는 수년 전 김대중 전 대통령의 혼외자 의혹을 텔레비전 메인뉴스에 보도한 바 있다. 더구나 한국기자협회는 이 기사에 ‘이달의 기자상’을 주기도 했다.

    임모 여인과 혼외자로 의심되는 아동이 주변 사람들에게 채동욱을 아버지로 말하고 다녔다는 조선일보 첫 기사의 정황 증거는 임모 여인의 편지에 의해 사실로 확인됐다. 따라서 단지 소문이나 전언에 불과한 수준이 아니라 상당히 믿을 만한 정황 증거라고 봐도 무방하다.

    방송 뉴스와 달리 신문 지면의 편집에 대해선 누구도 소송 이외엔 제재를 가하지 못한다. 1면 톱기사 결정과 같은 신문사의 고유한 뉴스 가치 판단에 다른 매체에서 이러저러한 말을 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다.

    필자가 보기에 조선일보 최초 보도의 진짜 문제는 “채동욱 검찰총장, 혼외아들 숨겼다”라고 단정적인 제목을 달았다는 점에 있다. 당시 이 기사에 담긴 정황 증거들로 보건대 이 기사엔 “채동욱 검찰총장, 혼외아들 의혹” 정도의 제목이 적당했을 것이다. 언론계 종사자라면 거의 100%가 이러한 의견에 동의할 것이다. 조선일보 기사의 제목은 딱 떨어지는 자백이나 물증을 입수했을 때나 할 수 있는 표현이었다.

    조선일보 ‘선수들’이 왜?

    그렇다면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조선일보의 취재기자들과 데스크, 편집국장은 기사 제작에선 ‘선수들’인 터인데 왜 뻔히 무리한 제목인 줄 알고도 그대로 달았느냐”는 점이다. 이 사건이 처음부터 청와대, 국가정보원, 조선일보가 연결된 ‘채동욱 찍어내기’ 음모론으로 번진 데엔 조선일보의 이러한 무리한 편집 내지 의도적인 편집이 톡톡히 한몫을 했다고 본다.

    다만 조선일보의 처지에서 상상해보면, 기사로는 공개하지 못할 결정적 물증을 쥐고 있었을 수 있다. 또한 ‘단정적인 제목으로 힘 있게 치고 나감으로써 신문사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이, 감수해야 하는 위험보다 훨씬 크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점이 배경이었다고 해도 ‘저널리즘의 정도(正道)’는 아니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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