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때 특별한 관계 맞지만 혼외자는 아니다?
- 임 여인의 ‘남자’들과 채동욱의 친분
-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 검사 “할 말 많지만 나중에…”
- 청와대 개입을 주장하는 검사들
9월 6일 조선일보가 처음 보도한 혼외자 의혹은 자매사 TV조선의 후속보도에 힘입어 사실로 굳어지는 양상이다. 채 전 총장과 특별한 관계인 임모 여인 집 가정부를 지냈다는 이모 씨는 TV조선 인터뷰를 통해 채 전 총장이 임 여인 집에 수시로 들렀으며 혼외아들과 여행까지 했다고 폭로했다. 채 전 총장에게 직접 밥상을 차려줬다는 이 씨의 증언은 매우 구체적이어서 누구나 믿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진실의 추는 여전히 사실과 추론의 경계에서 기우뚱거린다. 당사자들이 강력하게 부인하기 때문이다. TV조선 보도 내용에 대해 채 전 총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면서 법적 대응을 천명했다.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에 편지를 보내 자신의 아이는 채 전 총장과 관계없다고 밝혔던 임 여인도 다시 나섰다. 임 여인은 한겨레신문과의 통화에서 “편지 내용은 다 사실”이라며 다시 한 번 혼외자 의혹을 강하게 부인했다.
불륜이든 아니든 남녀관계는 어느 한쪽이 부인하면 확인하기 어렵다. 더욱이 이번 사건처럼 양측이 다 인정하지 않으면 설사 사실이라도 입증하기가 힘들다. 나아가 두 사람 사이에 자식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것은 더욱 그렇다.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으로 보면 채 전 총장의 혼외자 의혹은 사실일 개연성이 있다. 그럼에도 사실이 아닐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것은 당사자들이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과 사실이 다를 수 있다는 얘기다. 유전자 검사를 하지 않는 한 말이다.
“총장 될 때 그런 얘기 나돌아”
채 전 총장은 조선일보를 상대로 정정보도 소송을 제기하면서 “조선일보가 추론의 함정에 빠져 사실 확인을 소홀히 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가 내세운 ‘사실’은 이런 것들이다. ‘채 전 총장의 지인들이 채 전 총장과 임 씨가 잘 아는 관계였다고 말했다’ ‘해당 아동이 다녔던 학교 교직원이 어떤 기록에서 아동의 아버지 이름이 ‘채동욱’으로 기재된 것을 봤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친구들이 해당 아동으로부터 아빠가 검찰총장이 됐다는 말을 들었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언론보도 관행에 비춰 조선일보가 이런 정황을 근거로 ‘밝혀졌다’라거나 ‘확인됐다’ 따위의 단정적 표현을 쓴 것은 지나친 것이었다. 하지만 의혹을 제기하기에 충분한 정황증거를 확보한 것은 틀림없다. 임 여인의 편지 내용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편지에서 채 전 총장과의 인연을 밝히면서 학적부에 아이 아빠 이름을 ‘채동욱’으로 기재한 사실을 인정했다.
조선일보의 첫 보도 직후 채 전 총장의 측근인 검찰 고위간부는 기자에게 “두 사람이 알고 지낸 건 맞는데 여자 쪽에서 일방적으로 그런 얘기를 흘리고 다닌 것 같다”고 귀띔했다. 임 여인의 자식이 채 전 총장의 혼외자가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한 얘기였다. 반면 채 전 총장의 선배로 검찰 고위직을 지낸 모 변호사는 “총장 될 무렵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 얘기가 나왔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차마 당사자에게 못 물어보겠더라”고 했다.
“당사자가 사실이 아니라고 하지 않나. 나로선 채 총장을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설령 사실이라도 그게 신문 1면 머리기사가 될 정도로 중대한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 혼외자를 둔 것이 문제라는 건지 그걸 밝히지 않은 것이 문제라는 건지. 관련자 누구도 문제 삼지 않는 상황에서 그것이 검찰총장의 직무와 어떤 관련성이 있다는 건가.”
검찰 안팎의 기류는 묘한 변화를 보인다. 사건 초기만 해도 검찰 내부에선 채 전 총장에 우호적이거나 동정적인 기류가 강했다. 혼외자 의혹의 사실 여부보다 정권 차원의 ‘총장 찍어내기’ 의혹에 대한 관심이 더 컸다. 채 전 총장이 관련 의혹을 부인하며 조선일보 보도를 ‘검찰 흔들기’로 규정한 것도 검사들의 의구심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의 감찰 지시는 울고 싶은데 뺨 때린 격이었다. 자신들의 수장을 사생활 파헤치기로 공격하는 것에 대해 자존심이 상했던 검사들은 황 장관에게 분노를 표출했다.
서울서부지방검찰청 평검사들이 집단성명을 발표한 직후 김윤상 대검찰청 감찰1과장과 박은재 대검 미래기획단장이 검찰 내부 게시판 이프로스(e-Pros)에 장관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특히 채 전 총장의 ‘호위무사’를 자처한 김 검사는 항의 차원에서 사의를 표했는데 그의 사표는 9월 말 채 전 총장의 사표와 함께 수리됐다. 서울서부지검 외 몇 군데 검찰청에서도 검사들의 반발 기류가 있었으나 윗선의 만류로 실제 행동으로 표출되지는 않았다.
“여자 문제 없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검사들은 신중해졌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반발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진상 규명이 먼저’라는 청와대와 법무부 논리가 먹힌 것이다. 여기엔 더 버텨주기를 기대했던 채 전 총장이 사의를 거둬들이지 않은 점도 영향을 끼쳤다. 법무부 고위관계자는 채 전 총장에 대해 안타까워 하면서도 “장관의 감찰 지시도 이해는 된다. 대통령을 보좌해야 하는 처지에서 검찰만 생각할 순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채 전 총장 편에 섰던 검사들은 두 부류였다. 혼외자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고 믿는 검사들과, 사실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도 청와대와 법무부의 총장 사퇴 압박에 항의하는 검사들이었다. 이들은 채 전 총장이 결국 물러나는 걸 지켜보면서 회의와 체념에 빠졌다. 정치권력의 거대한 힘 앞에 무력감을 느낀 것이다. 채 전 총장이 퇴임하면서 조선일보에 대한 정정보도 청구소송을 취소한 것도 영향을 끼쳤다. ‘게임 끝났다’는 자조적인 분위기가 형성됐다. 임 여인의 가정부였다는 이씨의 폭로는 쐐기를 박은 셈이었다.
채 전 총장의 혼외자 의혹은 지금으로선 추론만 가능하다. 양 당사자가 부인하고 유전자 검사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누구도 혼외자 의혹이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채 전 총장은 유전자 검사로 진실을 가리겠다며 결백을 주장하지만 임 여인은 ‘자식 보호’를 내세우며 협조할 뜻을 보이지 않는다.
검찰 간부 출신으로 채 전 총장의 오랜 지인인 모 변호사는 사건 초기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자가 (다른 사람 아이를) 몰래 키웠을 가능성이 있다. 내가 동욱이와 친한 사이인데 혼외자 얘기는 처음 들었다. 한편으로 걱정도 되지만 난 동욱이를 믿는다. 조선일보 보도 직후 걱정이 돼서 물어봤더니 ‘난 그렇게 안 살았다’고 하더라. 나도 그 여자가 하는 술집에 몇 번 가봤는데 두 사람 사이에 특별한 게 없었다. 총장 될 무렵 몇몇 기자가 여자문제 없느냐고 물어오기에 동욱이한테 확인해보니 ‘(여자문제) 없다’고 하더라.”
지인들에 따르면, 채 전 총장은 술을 좋아했고 마음 맞는 사람과는 밤새 마시는 스타일이었다. 접대부가 나오는 룸살롱 등 고급 술집은 안 가고 조용한 카페를 즐겨 찾았으며 스폰서를 두지도 않았다고 한다. 의사인 부인이 술값을 대신 내주는 등 스폰서 노릇을 했다는 것이다. 고검장이 된 후에는 부쩍 술 조심을 했다고 한다.
“채 총장 아이 맞다”
임 여인은 2001년 서울로 올라온 후 청담동에서 레스토랑을, 서초동에서 술집을 운영했다. 서초동 술집은 기자도 가본 적이 있다. 채 전 총장이 2006년 대검 중수부 수사기획관을 할 때였다. 당시 그는 현대차 비자금 사건과 론스타의 외환은행 헐값 매각 의혹사건 수사를 이끌면서 명성을 날렸다. 중수부 수사 내용을 언론에 설명하는 공보관 노릇을 겸했기에 TV에도 자주 나왔다.
당시 기자는 아는 검사와 함께 다른 곳에서 술을 먹다가 채 전 총장 일행이 있는 술집으로 가서 합석했다. 채 전 총장 일행은 홀 안쪽에 있는 방에 자리 잡고 있었다. 룸이긴 했지만 룸살롱이나 단란주점과는 다른 분위기였고 접대부도 없었다. 채 전 총장이 좌장으로 가운데 앉고 양옆으로 중수부 검사들이 있었다. 검사들끼리의 술자리라 기자는 잠깐 앉아 있다가 빠져나왔다. 임 여인은 보지 못했고 그 존재도 알지 못했다. 당시 재벌 비자금 수사를 지휘하면서 법원의 잇따른 영장 기각에 정연한 논리로 맞서던 채 전 총장은 검찰 안팎에서 신망이 두터웠고 출입기자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았다. 주변에서 ‘총장감’이라는 말도 나왔다.
‘총장감’은 그로부터 7년이 지나 실제로 총장이 됐다. 정권과 불화를 겪으며 임기 6개월 만에 사생활 문제로 낙마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만. 채 전 총장에 우호적인 것으로 알려진 검찰 고위간부는 TV조선 보도가 나오기 전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냉정하게 말했다.
“수사를 해본 검사라면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정황이다. 난 채 총장 아이가 맞다고 본다. 채 총장으로선 일단 부인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의 분석에 따르면 채 전 총장의 혼외자 의혹을 부인한 임 여인의 편지가 오히려 결정적 정황증거라는 것이다.
“임 여인의 편지는 두 사람이 보통 관계가 아니었음을 암시한다. 채 총장이 동의했든 안 했든 여자가 아이를 낳았고 이후 채 총장은 그 사실을 최소한 묵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임 여인은 편지에서 미혼모가 아이를 키우는 것을 언급하며 사람들의 동정심에 호소했다. 편지에는 채 총장을 옹호하는 표현이 필요 이상으로 많다. 사전에 누군가의 조언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아이 아버지가 채 총장이 아니라면서도 굳이 성을 ‘채 씨’라고 밝힌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이의 장래를 생각해 임 여인이 안전장치 하나를 걸어놓은 셈이다. 자신이 채 총장을 구하기 위해 사실과 다른 주장을 하긴 하지만 그 부분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뜻을 명확히 나타낸 것이다. 즉, 최소한의 자존심을 내세운 것이고, 채 총장도 그 부분은 어쩔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 여인의 ‘남자’들
채 전 총장이 임 여인과 한때 특별한 관계였던 건 맞지만 혼외자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얘기도 들린다. 사정기관 주변에서는 2010년 임 여인이 당시 대전고검장이던 채 전 총장을 찾아갔다가 문전박대당한 것도 아이 문제 때문이었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아이를 호적에 올려달라는 임 여인의 요청을 채 전 총장이 묵살하는 바람에 그런 해프닝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사실 혼외자를 낳아서 학적부에 아버지 이름을 그대로 올리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 점은 임 여인의 편지 내용 중 가장 의심스러운 대목이기도 하다. 혼외자라면 친부 이름을 감추는 게 상식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시점은 채 전 총장이 고검장으로 승진해 주변관리를 할 때였다. 이런저런 정황에 비춰보면 채 전 총장의 태도에 화가 난 임 여인이 그의 동의 없이 학적부에 이름을 올렸고 채 전 총장은 그 사실을 몰랐거나 나중에 알고도 무시하다가 이런 사태를 맞았을 개연성이 있다.
1993년부터 부산에서 주점을 한 임 여인은 2001년 서울에 올라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듬해 7월 혼외자를 낳았다. 당시 채 전 총장은 대검 마약과장이었다. 임 여인은 아들을 낳은 후 청담동에 레스토랑을 차렸고 채 전 총장은 부산에서와 마찬가지로 단골로 출입했다.
한 가지 흥미를 끄는 것은 과거 임 여인이 부산에서 술집을 할 때 단골로 가깝게 지냈다는 남자들의 명단이다. 기자가 모종의 경로로 확인한 명단에는 L, P, C, S 4명의 남자가 있다. 모두 사업가들이다. 그중 한 사람은 채 전 총장과도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검찰 주변에서는 법무부 감찰팀이 채 전 총장이 혼외자와 선산에서 함께 찍은 사진을 확보했다는 얘기가 들린다. 감찰팀이 선산을 찾아간 것도 현장 확인을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이 얘기는 검찰 고위 간부한테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법무부 감찰팀에도 검사들이 있는데 허투루 조사했겠느냐”고 말했다. 안장근 법무부 감찰관은 이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다음은 안 감찰관과의 통화내용.
▼ 채 총장이 혼외자와 선산에서 함께 찍은 사진을 확보한 감찰팀이 현장 확인차 선산을 방문했다는 게 사실인가.
“전화로 말하기 곤란하다는 걸 이해해 달라.”
▼ 확인만 해달라. 아니면 아니라고.
“(답변 못하는 것을) 이해해달라.”
▼ 만나면 애기할 수 있나.
“만나도 똑같은 답변을 할 수밖에 없다.”
▼ 감찰 결과를 발표할 때 구체적으로 밝히기 곤란한 점이 있다고 했는데 이 부분도 거기에 포함됐나.
“발표한 그대로다.”
▼ 확인도 부인도 않는 것인가.
“법무부 대변인 통해 발표한 내용을 액면 그대로 이해해달라.”
▼ 제가 물어본 내용이 맞나.
“더 얘기하면 오해만 받는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은 10월 1일 국회 긴급현안 질의에 출석해 감찰팀이 채 전 총장의 선산을 방문한 이유에 대해 “유력한 참고인 진술의 신빙성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며 “신빙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했다”고 밝힌 바 있다.
채 전 총장은 기자의 거듭된 인터뷰 요청에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았다. 가까운 지인들의 전화도 받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TV조선 보도 이후 검찰 출입기자들 사이에서는 ‘대세가 기울었다’는 얘기가 나왔다. 그러나 한 중앙일간지 출입기자는 최근 기자에게 “혼외자 의혹은 사실이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조선일보를 제외한 대부분의 언론은 채 전 총장의 혼외자 의혹에 대해 매우 신중한 태도를 견지했다. 또 의혹 자체보다 의혹이 제기된 과정에 더 관심을 가졌다. 기자도 마찬가지다.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국가정보원 댓글사건 수사 등으로 여권과 불편한 관계였던 검찰총장의 사생활 문제가 갑자기 불거진 배경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러잖아도 당시 검찰 주변에서는 ‘청와대가 채 총장을 가만두지 않으려 한다’ ‘추석을 전후해 채 총장의 수족을 자르는 인사가 단행된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돌았다. 인사 대상자 명단까지 나돌 정도였다.
둘째는 조선일보 보도가 일반적인 사생활 관련 보도와는 성격이 달랐기 때문이다. 불륜이나 혼외자 등 사생활 문제는 흔히 어느 한쪽의 폭로로 촉발된다. 과거 사례를 보면 대체로 여자나 혼외자 쪽에서 문제를 제기한다. 호적 등재나 양육비, 유산 문제 등이 주된 동기다. 가까운 예로 2009년 이만의 환경부 장관이 혼외자로부터 친자확인소송을 당한 일이 있다. 이 장관은 패소했는데 끝내 유전자 검사는 거부했다. 이처럼 사생활 문제는 어느 한쪽이 제기하지 않으면 언론에 보도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런 점에서 조선일보 보도는 이례적이었다.
정보기관의 개입 사례
황교안 법무장관이 9월 30일 국회 사법제도개혁특위에 출석해 채동욱 사건에 대한 여야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강골 검사의 상징으로 통했던 원로 법조인은 채 전 총장의 혼외자 의혹에 대해 “드러난 정황으로만 봐도 100% 사실”이라고 단정하면서 “당사자가 강력히 부인하는 데도 조선일보가 자신 있게 치고 나오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미 정보기관에서 혈액형은 물론 어쩌면 유전자 검사까지 해서 청와대나 조선일보에 넘겨줬을 것이다. 모 기관 정도의 실력이면 얼마든지 채 총장이나 아이에게 접근해 유전자 검사에 필요한 재료를 채취할 수 있다.”
이 변호사의 경험에 따르면 정보기관은 과거에도 종종 정권을 불편하게 하는 인사를 내칠 때 사생활 폭로 공작을 펼쳤다고 한다. 한 예로 김대중 정부 시절 대선후보를 꿈꾸던 모 정당 실력자 Q씨가 하루아침에 주저앉은 것도 정보기관의 공작 때문이었다고 한다. 정보기관으로부터 Q씨가 여자와 만나는 시간, 장소를 통보받은 수사기관이 현장을 급습해 확실한 물증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한번은 방송사가 정보기관으로부터 정보를 받아 검찰 간부의 비리를 보도한 적이 있다. 수사에 착수한 우리가 자료 협조 요청을 하자 자료를 넘겨줬는데 거기에 도청기록까지 있었다. 실수로 해당 검사에 대한 도청자료까지 넘긴 것이다.”
청와대가 채 전 총장 사건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처음 불거져 나온 곳은 검찰 내부다. 이를 바탕으로 민주당과 언론은 청와대 개입 의혹을 구체적으로 제기했다.
사건 초기 언론 보도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9월 13일 채널A 보도다. ‘혼외아들 발언지는 청와대 민정수석실’이라는 제목의 뉴스로, 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일보 보도가 나오기 이틀 전인) 9월 4일 서울 강남 음식점에서 청와대 인수위원회에서 활동했던 인사들이 모였다. △참석자 중 한 명이 “청와대가 채동욱 총장과 관련한 비위자료를 다 수집했다고 한다. 조만간 사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얘기를 들은 다른 참석자가 검찰 내부에 이 말을 전했고 검찰 지휘부도 이상기류를 감지했다. △지난달(8월) 중순에는 강남 호프집에서 검찰 중간간부 A씨와 조선일보 관계자가 만났다. 이 자리에서 조선일보 관계자가 “청와대에서 채 총장의 여자문제 조사를 다 끝냈다. 9월 초 문제가 불거질 것이다”고 말했다.
9월 16일 동아일보는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임 여인과 아들의 혈액형 등 관련자 개인정보를 파악했다고 보도했다. 9월 8일 홍경식 민정수석비서관이 채 전 총장을 만나 임 여인의 전화번호를 건네며 “전화해보라”고 권유했다는 것이다.
또 민정수석실 관계자는 8일부터 가까운 검사들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하며 채 전 총장의 혼외자 의혹을 기정사실화했다고 한다. “채 총장의 혈액형은 A형, 임 씨는 B형, 임 씨 아들은 AB형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것은 채 총장에게 혼외아들이 있다는 유력한 근거다. 채 총장은 이제 끝났다. 임 씨 아들 학적부에 아버지 이름이 ‘채동욱’으로 기재된 사실도 확인했다.”
“제보자 신분 못 밝히지만 다 팩트”
임 여인의 전화번호나 혈액형, 학적부 기록은 하나같이 관계기관의 협조 없이는 알아낼 수 없다.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은 “청와대가 관여하거나 개입한 일은 전혀 없다”고 부인했다.
민주당에서 청와대 개입 의혹을 처음 제기한 사람은 박지원 의원이다. 박 의원은 9월 16일 오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이중희 청와대 민정비서관과 김광수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장이 8월 한 달간 채 총장을 사찰했고 관련 자료를 공유했다”고 주장했다. 박 의원에 따르면 곽상도 전 민정수석이 이 비서관에게 채 총장 사찰 파일을 넘겼고 이후 청와대에서 채 총장을 사찰했다는 것이다. 박 의원은 이 같은 정보를 “검찰 내부의 확실한 사람한테 취득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김 부장은 “이 비서관과 친분이 있어 통화한 사실은 있지만 총장 사찰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고 강하게 부인했다. 이 비서관도 주변에 “억울하다”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10월 1일엔 신경민 의원이 국회 긴급 현안질문에서 또 다른 의혹을 제기했다. 신 의원 발언 요지는 이렇다. △6월 검찰이 국정원 댓글사건 관련자들을 기소한 후 곽상도 민정수석이 경찰 출신 서천호 국정원 2차장에게 채 총장 사생활 자료를 요청했다. △서 차장은 “국정원이 재판과 수사를 받는 만큼 직접 하는 것은 곤란하니 경찰 정보라인을 통해 수집하겠다”고 말했다. △8월 하순 이중희 민정비서관이 김광수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장에게 전화해 “총장 곧 날아간다. 곧 보도가 나올 것이다. 줄 똑바로 서라. 국가기록원(NLL 대화록 실종사건) 수사는 검찰총장에게 보고하지 말고 청와대에 직보하라”고 얘기했다.
신 의원은 기자의 확인 요청에 “검찰 내부에서 나온 얘기로, 제보자 신분은 밝힐 수 없지만 거의 다 팩트”라고 대답했다.
한편 9월 15일 밤 검찰 내부 게시판에선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국정원 댓글사건 수사에 참여했던 한 검사가 ‘검찰 수사 및 검찰총장 음해 의혹’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는데 얼마 후 삭제된 것이다.
이 검사의 글은 다음과 같다. 먼저 국정원 댓글사건 수사와 관련한 글이다. △민정은 공직선거법위반이 어렵다고 검토의견 △특별수사팀의 선거법 위반 기소·영장 청구 의견을 채 총장이 수용한 뒤 법무부에 보고 △법무부는 구속영장 청구 및 공직선거법 기소 의견 모두를 불수용 △민정수석은 수사지휘 라인에 있는 간부에게 전화해 공직선거법위반 혐의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을 피력 △특별수사팀의 ‘기소 후 수사’ 과정에서 추가 압수수색에 대해 민정과 법무부는 ‘부적절’ 입장을 피력.
이어 그는 채 전 총장 사건에 대한 청와대 개입을 주장했다. △민정수석은 검찰총장의 사생활에 문제점이 없는지 확인하도록 지시 △민정비서관은 일부 검사에게 조선일보 보도 예정 사실을 알렸고 그 무렵 일부 검사에게는 총장이 곧 그만둘 것이니 동요치 말라는 입장을 전달 △검찰총장 감찰은 발표 당일까지 법무부 내부에서는 검토되지 않았음.
검찰 게시판 글 삭제사건
민주당 이춘석 의원은 “이 검사는 글을 올린 지 6분 만인 밤 10시 50분 청와대 파견 검찰 출신 이모 행정관으로부터 협박성 전화를 받고 글을 내렸다”고 주장했다. 문제의 글을 게재했던 검사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국정원 사건 재판에 전념해야 한다. 아무런 얘기를 할 수 없는 처지임을 양해해달라”고 말했다. 국정원 댓글사건 수사를 이끈 검찰 간부는 “할 말은 많지만 나중에 하겠다. 지금은 재판에 집중할 때”라고 말해 여운을 남겼다. 그는 채 전 총장의 신임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채 전 총장의 절친한 지인은 “곽 전 수석이 (조선일보 보도 전) 여기저기 그런 얘기를 하고 다녔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검찰 고위간부는 “곽 전 수석이 주변에 ‘채 총장에게 여자 문제가 있다’는 정도만 얘기한 것으로 안다”며 “이중희 비서관 개입 의혹도 근거가 약하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곽상도-이중희 라인으로 대표되는 청와대 개입 의혹은 검찰 내부에서 더는 거론되지 않으며, TV조선 보도 이후엔 채 전 총장의 혼외자 의혹이 가정부였다는 이씨 또는 임 여인 주변 인물의 제보에서 비롯됐다는 얘기가 나온다고 한다.
또 다른 고위간부는 “이제 다 끝난 일”이라며 “검사들도 다 진정됐다”고 내부 분위기를 전했다.
곽 전 수석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용건을 남겼으나 응답하지 않았다. 이중희 민정비서관과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민정비서관실 여직원이 두 차례 전화를 받았는데 “자리에 없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신분을 밝히고 전화번호를 남겼으나 연락해오지 않았다. 세 번째 전화할 때는 아예 받지 않았다.
채 전 총장과 청와대의 갈등에 대해 그의 오랜 지인은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채 총장은 불만을 속으로 삭이는 스타일이다. 술자리에서 한 번도 청와대나 법무부에 대해 불평한 적이 없다. 공안통은 상부의 판단을 중시한다. 반면 특수통은 수사검사의 의견을 중시한다. 유무죄 판단은 일선 검사가 해야 한다는 것이 특수통 채 총장의 지론이었다. 공안을 안 해본 채 총장이기에 위에서 보기엔 불안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실 국정원 댓글사건 수사는 공안사건인데 특수수사처럼 진행된 면이 있다. 언젠가 채 총장이 ‘친구야, 나를 지켜봐달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