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자 수익 의존 심해 은행 수익성 날로 악화
- 철마다 바뀌는 CEO, ‘안정성 제일주의’가 개혁 걸림돌
- 해외에선 ‘Sales 2.0’ 등 고객 맞춤 서비스 진화 거듭
- 지점 줄이기, 직원 재교육, 빅데이터 활용…혁신 시급
금융감독원 집계에 따르면 올 2분기 국내 은행의 당기순이익은 1조1000억 원으로 전년 동기 2조1000억 원 대비 48%나 급감했다. 1년 사이 1조 원이 허공으로 사라졌다. 이는 금리 하락에 따른 이자 이익 감소 때문으로, 그만큼 국내 은행이 ‘돈놀이’에 의존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은행의 성장성을 보여주는 총자산순이익률(ROA)이나 자기자본순이익률(ROE)도 계속 나빠지는 추세다. 특히 ROE가 7%는 나와야 ‘장사해볼 만하다’고 할 텐데, 올 2분기 국내 은행의 ROE는 3.09%에 그쳤다.
반면 글로벌 컨설팅 기업 맥킨지(McKinsey · Company)가 지난 6월 내놓은 아시아 소매금융 보고서는 아시아를 향후 성장세가 두드러질 소매금융시장으로 평가한다. 맥킨지에 따르면 아시아는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자산관리시장을 보유할 것이고, 2015년에는 유럽보다 아시아에 더 많은 개인 금융자산이 집중될 것으로 예측된다. 세계를 무대로 뛰는 은행들에 아시아는 기회의 땅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 은행업의 현실은 아시아 지역의 전반적 상황과 동떨어지게 됐을까. 세계의 다른 은행들은 저금리 속에서 어떻게 지속적인 성장을 꾀하고 있을까. 한국의 스마트폰이 세계시장을 제패했듯, 국내 은행이 세계시장에서 두각을 드러낼 수는 없을까.
앞의 보고서 작성에 참여한 맥킨지 서울사무소의 금융전문가 김용아 파트너와 전은조 부파트너로부터 국내 은행의 위기 진단과 타개책에 대해 들었다. 김 파트너는 맥킨지 서울사무소 금융 총괄리더 및 아시아 금융 부문 핵심리더, 전 부파트너는 맥킨지 서울사무소 금융 부문 공동 리더다.
이래저래 밑지는 장사
김용아
“성장성과 수익성을 나눠봐야 합니다. 국내 은행업은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1~2% 상회하는 수준의 성장에 그칠 것이기에, 성장성 면에서 한국은 아시아에서 매력이 떨어져요. 근데 이보다 더 염려스러운 것은 수익성에서도 매력적이지 않다는 점입니다. 투입된 자본만큼도 이익을 내지 못하고 있어요. 심지어 일본보다도 수익성이 나쁩니다. 구조적인 개선이 없으면 앞으로도 계속 힘들 겁니다.”(김용아)
“이제는 규모의 성장을 꾀할 여지가 없습니다. 가계 부채가 너무 많아서 돈 빌릴 사람이 드뭅니다. 지방 은행들이 돈 빌려갈 고객을 찾으러 서울로 진출하자는 얘기를 하는데, 서울 은행들도 사정이 어렵기는 매한가지죠. 새로운 사업 모델이 나오지 않는다면 성장이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전은조)
1990년대 말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국내 은행은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벌이고 선진 시스템을 대거 도입해 해외 은행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 특히 신용평가 모델과 리스크 모델 구축, 포괄적인 IT 시스템 도입, 지점의 성과 관리와 영업 활성화 프로그램 도입 등이 부러움을 샀다. 김 파트너는 “오늘날의 은행 경영진도 위기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고, 혁신이 시급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면서 “그러나 3년마다 CEO가 바뀌는 현실에선 강력한 리더십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혁신을 실행에 옮기기엔 한계가 있어 보인다”고 지적했다.
정치권의 풍향에 따라 CEO가 자주 교체되는 국내 은행이 참고할 만한 사례가 스페인 산탄데르 은행(Banco Santan-der)의 에밀리오 보틴 회장이다. 1986년 행장으로 취임한 그는 당시 세계 135위에 그쳤던 산탄데르 은행을 세계 톱 10으로 도약시켰다. 이처럼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보틴 회장의 강력한 추진력과 일관된 전략에 기반을 둔 대규모 인수합병(M·A)이 주효했다고 평가된다. 이 은행은 금융전문지 ‘유로머니(Euromoney)’가 선정하는 ‘세계 최고의 은행(Best Bank of the World)’에 지난 7년간 3차례나 진입했다.
국내 은행의 혁신을 어렵게 하는 또 다른 요인으로 김 파트너는 “금융업을 전기나 수도 같은 공공재로 보는 사회 인식”을 꼽았다. 지난해 맥킨지는 일반인 1000명을 대상으로 국내 16개 산업군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는데, 은행업은 ‘세계시장에서도 1, 2위를 다툴 수 있는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산업군’ 항목에서 15위로 처졌다(14위는 농림·축산업 및 어업, 16위는 보험업). ‘시급하게 발전시켜야 할 산업’ 항목에서 은행업은 6위에 꼽혔지만, 이와 다소 모순되는 결과로 45.5%의 응답자가 ‘다양한 금융상품과 서비스에 제약이 있더라도 국가의 적극적인 보호 아래 은행의 안정성이 보장돼야 한다’고 답했다. 88.4%는 ‘은행의 수익이 희생되더라도 사회적 책임이 우선돼야 한다’고도 했다.
“이런 결과는 은행의 공익적 측면에 무게를 둔 사회 분위기를 잘 보여줍니다. 하지만 은행의 안정성과 공익성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해외 진출이나 M·A, 상품 및 서비스 혁신이 위험 요인으로만 평가되는 한, 은행 내부에서 혁신이나 변화가 시도되긴 어렵습니다. 우리 은행들이 처한 딜레마죠.”(김용아)
금융위기 잘 넘긴 게 毒?
전은조
최근 뉴욕라이프, ING생명, HSBC 소매금융 등 외국계 금융사들이 국내 시장에서 잇달아 철수했다. 이 역시 금융위기 이후 강조된 ‘전략적 선택’의 일환이다. 김 파트너는 “국내 소매금융을 철수한 HSBC는 인도네시아, 러시아 등에 대한 투자를 확대했다”며 “한국보다 수익성이 높은 신흥 시장 위주로 사업을 확장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시아에서 은행업과 보험업이 가파르게 성장하는 시장으로는 이른바 ‘MIT’, 즉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이 꼽힌다. 전 세계 금융회사들이 이들 국가를 주목하며 진출을 서두르고 있다. 국내 은행들도 마찬가지지만, 아직 두각을 나타내는 은행은 없다.
“보통 현지 은행을 인수하거나 지점을 세울 생각을 하는데, 인수하기에는 너무 비싸고 지점을 내세우기엔 우리 은행들의 브랜드 파워가 약합니다. 그보다는 현지와 파트너십을 맺고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내야 해요. 유럽과 미국 은행들은 이런 전략을 펴고 있습니다.”(전은조)
맥킨지가 유럽 10개국에서 벌인 조사에 따르면, 은행 지점을 애용하는 고객이 현재 45%에서 2020년엔 20% 밑으로 떨어질 것으로 예측됐다. 반면 인터넷이나 모바일 뱅킹을 이용하는 고객은 80%에 달할 것으로 전망됐다. 이런 경향은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지점 줄이기에 적극 나선 미국, 유럽 은행들과 달리 한국은 은행 지점 숫자가 계속 늘고 있다. 2012년 말 현재 국내 은행 지점 숫자는 7800여 개로 일본의 3배가 넘는다. 전은조 부파트너는 “서구 은행들은 물론 싱가포르, 대만 등 아시아 은행들도 지점 줄이기에 나서고 있다”며 “무조건 지점을 폐쇄하는 것이 아니라, 지점 형태를 4~8개 유형으로 나눠 각 지역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탈바꿈시키고 있다”고 전했다. 인구밀집지역엔 입출금과 계좌이체, 고지서 납부만 가능한 자동화 점포를 설치한다든지, 부분적으로 자동화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상담 전문가가 돌아가면서 근무하는 미니(mini) 지점을 두는 식이다.
“은행 경영진 처지에선 5~10년 후의 청사진을 그릴 수 없으니 지점 혁신에 대한 계획도 못 세우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국도 어떻게든 지점 수를 줄여야 하는데, 이는 지점 직원들에 대한 직무 재교육과 병행돼야 해요. 대출 업무를 보는 직원들을 새로운 업무로 전환시키는 거죠. 은퇴 세대를 위한 자산관리 자문, 중소기업 금융 전문가, 고객 분석 전문가 등이 앞으로 유망할 분야라고 보고 있습니다.”(김용아)
Next Product to Buy
국내 은행들의 이자 이익 편중도는 90%를 상회해 금융상품 판매 수수료 등 비이자 이익 확대가 절실하다.
비이자 부문에서의 수익이란 결국 수수료다. 예를 들어 자산관리에 대한 자문과 상품을 제공하고 수수료를 받는 것이다. 김 파트너는 “큰 기업일수록 은행 대출보다는 자본시장에서의 자본 조달을 원하는데 이런 분야에서의 자문과 상품 제공이 가능할 것이고, 또 해외로 진출하는 기업에는 글로벌 캐시(cash) 매니지먼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수수료 지급에 인색한 편이다. ‘은행이 무료로 해주는 서비스’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에 대해 전 부파트너는 “은행은 고객이 기꺼이 수수료를 낼 만큼의 서비스를 제공했느냐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고객 개개인에게 필요한 상품을 제공했다기보다는, 그때그때 유행하는 상품을 권하는 수준에 그쳤다는 지적이다.
한국의 은행 고객들은 집이나 회사에서 가까운 지점을 방문하고, 인터넷 및 모바일 뱅킹을 즐겨 활용한다. 궁금한 게 있으면 콜센터에 전화도 걸고, 종종 은행으로부터 판촉 전화도 받는다. 하지만 이런 다양한 채널을 통해 제공된 ‘내 정보’는 한데 모여 있지 않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콜센터 직원에게 설명한 용건을 지점을 방문해 다시 설명해야 한다.
전 부파트너는 “세계 선진 은행들은 ‘세일즈 2.0’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일즈 2.0이란 전통적인 판매 방식을 벗어나, 개별 고객의 필요에 맞춰 상품을 제안하는 판매 방식을 가리킨다. 이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IT 기술과 함께 빅데이터 수집·분석 기술이 발전한 덕분이다.
세일즈 2.0의 일례가 상품 예측 모델(Next Product to Buy)이다. 지점, 인터넷, 모바일 등을 통해 들어오는 고객 정보를 바탕으로 개별 고객이 ‘다음에 원할 것’으로 기대되는 상품을 예측하고, 고객이 콜센터에 전화하거나 지점에 방문했을 때 해당 상품을 제안하는 것이다. 전 부파트너는 “미국 체이스은행, 웰스파고은행 등은 이런 고객 분석을 통한 교차판매를 성공적으로 하는 사례로 꼽힌다”고 말했다.
“유럽의 유니크레딧 은행은 CRM(고객관계관리·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을 ‘고객관계전략의 척추(backbone of customer relationship strategy)’라고 부르며 CRM 기능을 대폭 강화해 CRM의 강자로 통합니다. 국내 은행들도 CRM 부서를 두고 있지만 주로 고객 리스크와 관련한 데이터만 분석하고 있어요. 또 이런 개별 고객 정보를 지점이나 콜센터 등과 공유하지도 않고요. 이런 탓인지 설문조사를 해보면 ‘○○은행과 아주 오랫동안 거래했지만, 나에 대해 잘 모른다’는 고객 반응이 많이 나와요.”(전은조)
디지털을 쿼터백으로
또한 선진 은행들은 고객 데이터를 각 지점에서 활용하기 매우 쉽게 만들어 제공한다. 프랑스 BNP파리바 은행은 아이패드에 장착한 프로그램을 활용해 고객에게 5가지 질문을 하게 한다. 이 프로그램은 고객의 답변 내용에 따라 해당 고객이 원할 가능성이 높은 상품이 제안되도록 설계돼 있다.
“대만은 한국만큼 은행업 환경이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대만의 선도업체인 차이나 트러스트는 디지털을 활용해 고객 니즈를 충족시키기 위한 다양한 툴을 개발하고 있어요. 이밖에도 인도의 코탁(Kotak)이나 안드라(Andhra), 베트남의 테크컴(Techcom)이나 VP, 태국의 CIMB 등 신흥 시장의 은행들도 새로운 기술을 활용해 공격적으로 영업하고 있다는 점을 놓쳐선 안 됩니다.”(전은조)
인터넷 뱅킹에 접속하는 고객마다 각기 다른 메뉴를 보여주는 은행도 있다. 미국의 캐피털원 은행은 홈페이지 방문자의 신용정보를 0.5초 내에 파악해 8~10개 종류로 세분화한 웹사이트 중 해당 방문자에게 가장 적합한 웹사이트를 제공한다. 착실한 예금자에겐 금리가 높은 예금상품에 대한 정보를, 신용도가 낮은 대출자에겐 신용카드 상품에 대한 정보를 전면에 내세우는 식이다. 전 부파트너는 “국내 은행들은 디지털 뱅킹이 돈이 안 된다고 여기는데, 선진 은행들은 디지털로 모은 정보를 영업에 적극 활용하는 등 디지털이 쿼터백(quarterback·미식축구에서 중간 위치에서 뛰면서 공격을 지휘하는 선수) 역할을 하게 한다”고 조언했다.
최근에는 미국 등에서 양적완화가 축소되면 대출 금리가 높아져 향후 국내 은행의 수익성이 개선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이에 대해 전 부파트너는 “매우 단기적인 모르핀이 될 뿐”이라고 충고했다. 이자 부문에서 얼마 더 번다고 국내 은행의 수익성 구조가 개선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김 파트너는 “국내 은행의 혁신은 은행의 내부적인 노력과 은행 역시 비즈니스라는 사회적 인식 개선이 동반돼야 가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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