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6~1991년 서독 국방부의 심리전 총책임자로 활약하며 독일 통일 과정을 목격한 오트뷘 K 부크벤더 (Ortwin K. Buchbender, 오른쪽 사진) 박사가 10월 7일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최종건 교수가 주관하는 ‘International Security(국제안보)’ 수업에서 특강을 했다. 서독군이 어떠한 심리전과 정보전을 펼쳐 통일의 실마리를 마련했는지 들어볼 수 있었다. 강연의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동방정책은 ‘접근에 의한 변화(Change by Approach)’를 추진하는 화해정책이었다. 그러나 1974년 브란트 총리의 최측근 권터 기욤이 동독 간첩인 것이 드러나 브란트 총리가 사임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동방정책 때문에 블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심리전인 전단 살포는 중단됐지만 보다 교묘한 심리전은 계속됐다. 정보나 영향력을 가진 특정인을 겨냥해 은밀하고 수준 높은 심리전이 추진된 것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1963년부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사이 서독으로 탈출해온 동독군은 장교 63명, 부사관 532명, 병사 1469명 등 모두 2064명이었다.
지금 베를린 장벽은 거의 뜯겨나가고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라는 이름으로 극히 일부만 남아 있다. 독일 통일은 이제 역사가 되었다.
나는 동독에 주둔한 소련군과 바르샤바조약기구군을 상대로 한 심리전에도 중점을 뒀다. 이를 통해 동독의 극비정보를 수집하게 됐다. 방법은 최고위층을 매수하는 것이었다. 돈은 유용한 심리전 수단이었다. 그들이 우리 정보원 노릇을 하게 된 동기는 80%가 돈. 매수한 고급 정보원 중에는 장군도 있었다. 그들은 통일 후에도 신분이 보호돼 편안히 살고 있다.
그 시기 서독에서 동독을 위해 활동한 간첩은 4만 명 정도였다. 그 숫자를 파악하게 된 것은 통일 후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 자료를 입수한 덕분이다. 공산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 정권이 들어선 1989년, 동독에서는 많은 자료가 파기됐다. 그해 말 동독의 비밀 문서가 대거 소련으로 보내졌지만, 서독은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여 적잖은 양의 자료를 확보했다.
나는 국방부 차관에게 매달 정세보고를 했고, 장관에게는 연 4~5차례 보고를 했다. 그러나 그때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은 독일이 통일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빌리 브란트 전 총리는 1990년 발간된 회고록에서 “독일 통일은 제2공화국(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들어선 서독을 가리킴)의 특별한 거짓말”이라고 주장했다. 통일에 대한 그때의 여론은 그러했다.
그런데 1989년 10월 동독 주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공산당에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을 향해서는 “동독에 간섭하지 말라”고 외쳤다. 그래서 동독에 주둔하던 소련군 전차부대는 부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1953년의 동독 시위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그리고 정치적인 기적이 일어났다. 1년 만인 1990년 10월 3일, 어떤 전문가도 믿지 않던 독일 통일이 이뤄진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통일 독일이 나토 회원국으로 남는 안을 수용했는데, 이것은 1990년의 최대 사건이었다. 1991년 12월 25일엔 모스크바 크렘린 궁전에서 붉은 깃발이 내려지고 새로운 깃발이 올라갔다. 그것으로 냉전은 공식적으로 종식됐다. 거대한 소련 제국이 총 한 방 안 쏘고 무너진 것이다.
1990년 7월의 일도 잊지 못한다. 민주화된 동독 국방장관 라이너 에펠만이 본을 방문해 강연했기 때문이다. 에펠만은 “통일은 전적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7~10년 이상이 소요될 것”이라고 했다.
한 달 뒤인 8월 나는 동독의 초청을 받아 그곳 국방부 영빈관에서 ‘전체주의는 고도로 산업화한 세계에서는 생존할 수 없다’는 주제로 연설했다. 동독군 장군과 고위 공무원들이 내 연설을 들었다.
동독군 합참의장 호프만 제독은 나와 커피를 마시면서 “부크벤더 씨, 우리가 여기에서 함께 커피를 마실 것이라고 상상이나 해봤습니까”라고 했다. 나는 “우리는 이미 미쳐버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게 현실입니다”라고 답했다.
1년 전만 해도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던 동·서독군 관계자가 상대를 방문해 연설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서독 TV광고가 강력한 심리전 수행
에릭 호네커 총리 집권 초기, 동독 경제는 제법 발전했지만 날이 갈수록 서독에 밀려났다. 왜 그렇게 됐을까. 1949년부터 베를린 장벽이 설치된 1961년 8월까지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한 사람은 385만4600명이다. 그중 48%가 25세 이하의 젊은이였다. 젊은이의 손실은 무엇으로도 보전할 수 없다. 수십 년 동안 일해야 할 사람들이 줄어든 것이 동독 경제에 치명적인 손실을 안겼다.
이데올로기적 문제가 있긴 하지만 빌리 브란트의 긴장완화 정책도 큰 영향을 끼쳤다. 동방정책 덕분에 동독 주민들은 서독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됐는데, 그 결과 그들은 서독 체제가 우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 서독 TV의 광고가 강력한 심리전을 수행했다. 서독 주민의 생활수준을 TV 광고보다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는 매체는 없었다. 이 때문에 “진실이 가장 강력한 무기다. 진실이 생각을 바꾸게 한다”라는 말이 나왔다.
서독이 돈을 주고 동독의 정치범들을 구출(서독으로의 정치적 망명)해온 것도 큰 힘이 됐다. 동독은 1964~1989년 교도소에 갇혀 있던 3만3755명의 정치범을 서독으로 추방하면서 정치적 골칫거리를 제거하고 외화도 버는 일거양득으로 여겼을 것이다. 서독은 그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34억3680만 마르크를 지출했다. 이런 지출은 오늘날 옳은 정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연세대에서 독일 통일과 심리전에 대해 특강한 부크벤더(75) 박사. 군인 출신인 그는 역사학, 철학 교육학, 영문학을 공부해 학자의 길을 걸었다. 200여 권의 저서가 있다.
심리전은 적의 여론과 감정, 태도, 행동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적을 아군에 중립적으로 만들고, 종국에는 국가의 목표와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적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약점을 이용해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도 목표로 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반부인 1944년 미군의 심리전은 정말 탁월했다. 미군은 ‘네가 탈출한다면 살 수 있는 기회가 더 많다’라고 쓴 삐라를 뿌렸다. 궁지에 몰린 독일군은 이것을 보고 다른 나라가 아닌 미군의 포로가 되기를 원했다.
심리전은 기술적 측면에서 3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 통합된 전장(戰場)에서 실시하는 전략적 차원의 심리전인데, 한국에서 실시하는 심리전이 좋은 예다. 둘째, 전투에서 적 부대를 직접 겨냥해서 하는 전술적 차원의 심리전이다.
셋째는 통합 목적의 심리전이다. 후방에 있는 우리 국민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 혹은 아군이 점령한 적 지역에서 그 지역 주민을 선무(宣撫)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우리 지역에서의 심리전은 우리 국민으로 하여금 아군 작전을 지원하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심리전은 출처에 따라 3가지로 구분할 수도 있다. 백색선전은 공개된 기관에서 하는 작전이다. 회색선전은 심리전 기관이 아닌 다른 기관을 드러내놓고 하는 작전이다. 흑색선전은 심리전을 수행하는 기관을 드러내지 않고 하는 작전이다.
동독 주민을 대상으로 심리전을 할 때 우리는 흑색선전을 하지 않고 회색선전을 했다.
심리전의 성공 방정식은 S=C²이다. S는 Success(성공), 2개의 C는 Com-munication(전파)과 Credibility(신뢰)다(Success=Communication×Credibility).
전파보다 중요한 것이 신뢰다. 정확한 정보를 줘야 심리전에서 이길 수 있다. 우리가 정확한 정보를 줬기에 동독 주민들은 우리를 믿어줬고, 우리의 우군이 됐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에서는 이러한 결과가 아직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동독 주민 대부분은 서독 TV를 볼 수 있었다. 동방정책 덕분에 서독에 있는 친척을 방문할 수도 있었다. 이를 통해 동독 주민은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서독 주민은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가지려면 서독 마르크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1979년에야 동독은 동독 주민의 서독 TV 시청과 서독 친지 방문이 체제를 위협한다는 것을 알고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동독이 당황해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샴페인 10병을 주문해 자축했다.
히틀러의 선전부 장관 괴벨스는 흥미로운 일기를 남겼다. “모든 수단 가운데 진실이 최고의 선전 수단이다. 사람을 속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대중은 진실을 알게 되므로 신뢰를 잃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신뢰를 잃으면 망하는 것이다.”
신뢰를 확보하라
북한 정권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 나오는 빅브러더와 같다. ‘1984년’은 냉전 시기 공산당을 겨냥한 최고의 책이었다. 빅브라더를 실각시키려면 북한 주민에게 한국 TV를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한국의 삼성전자는 매우 작은 TV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중국 북부지역을 통해 북한에 유입시켜 북한 주민이 한국 TV를 시청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신뢰가 왕이고, 진실이 여왕이다’라는 경구를 한국은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 아침 나는 한국 신문을 통해 한 민간단체가 풍선을 이용해 대북 전단을 살포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 전단에는 김정은의 아내 리설주 주변에서 벌어진 일이 적혀 있다고 한다.
그러나 민간단체가 벌이는 전단 살포는 효과가 작다고 한다. 기초적인 원칙과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민간단체의 심리전은 국가나 군에서 하는 심리전과 맥이 통해야 한다.
민간단체들은 울분과 비난을 전달해선 안 된다. 검은 것을 흰 것으로 만들지 말고, 흰색을 검은색이라고도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심리전은 적의 상황을 이용하는 것이므로 신뢰성이 있어야 한다.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심리전이 아니다. 사람들이 진실을 항상 믿어주진 않기 때문이다. 진실인 줄 알아도 신뢰가 없으면 믿어주지 않는 게 사람이다. 따라서 ‘믿어달라’며 진실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바른 정보를 계속 줘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 BBC에서 선전가로 활약한 인물을 인터뷰해 책을 낸 적이 있는데, 그는 BBC의 전시(戰時) 심리전이 실패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수많은 사람이 가스실로 끌려가 죽었다는 사실을 독일인들에게 알리려 했으나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조차 믿어주지 않았다. 이유를 알아보니 제1차 세계대전 때 BBC가 독일인에게 거짓 선전을 한 사례가 많았던 것이 드러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적된 신뢰를 믿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동독 지도부는 진실을 정말 너무 많이 왜곡했다. 에릭 호네커 총리와 슈타지의 수장 에릭 밀케가 대표적이다. 에릭 밀케는 마음에도 없이 “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이 때문에 베를린 장벽이 개방된 후 이 말은 동독 의회에서 조롱거리로 회자됐다. 신뢰가 없으면 진실이라도 조롱거리가 되고 만다.
신뢰를 토대로 한 진실은 장벽으로도 못 막는다. 동독은 주민 탈출을 막기 위해 베를린 장벽을 설치했지만, 1962년부터 무려 111만4100명의 노동자와 농부가 ‘지상낙원’을 탈출했다. 이렇게 많은 주민이 탈출했기에 동독은 체제 위기에 직면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11월 9일을 생생히 기억한다. 나는 국방부에서 밤늦게까지 근무하다가 이 소식을 들었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 충격이 오랫동안 내게 영향을 미쳤다.
통독 비용보다 더 들 것
독일 통일의 초기 단계에서 통일비용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한참 후에는 정치적인 문제가 됐다. 이와 유사한 일이 한국에서도 나타날 것으로 본다.
고 김대중 대통령이 햇볕정책을 발표한 2000년 나는 한국에 있었다. 그해 김 대통령이 베를린의 훔볼트대학에서 햇볕정책을 발표할 때도 학생들과 함께 연설을 들었다. 우리는 김 대통령의 햇볕정책이 어떻게 전개됐는지 잘 안다. 당시 한국에서는 통일비용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독일의 통일비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계산이 있다. 1990~2003년의 비용은 9500억 유로였다는 주장이 있다. 2009년 이후 다시 1조4000억 유로가 들어갔다는 주장도 있다. 여기에 더해 구 동독지역의 재건비용으로 1990~2003년 2500억 유로가 소요됐다는 주장도 있다. 통독 비용은 정확히 산출할 수가 없다.
1991~2012년의 독일 통일비용을 기준으로 한국이 부담해야 할 통일비용을 추산해보면 최소 5000억 달러에서 최대 3조200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것은 예측일 뿐이다. 확실한 것은 한국의 통일비용이 독일의 통일비용을 크게 상회할 것이라는 점이다.
북한이 민주화돼 남북한의 긴장이 완화된다면 군사적 대치는 상호협력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세계는 한국에 대한 특별지원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통일과정에서 소요되는 막대한 통일비용과 자원을 한국 혼자서 감당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마셜계획 같은 것을 마련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통일기 한국 경제는 부흥할 수도 있다.
비용 때문에 통일을 주저하면…
한국 정부와 국민이 부담해야 할 통일비용은 매우 많겠지만, 분단된 상황에서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항시적인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보다는 저렴할 것이다. 통일 독일의 초대 총리 헬무트 콜은 ‘베를린 장벽의 붕괴에서 통일까지의 회고록’(뮌헨, 2009)에서 “비용 때문에 통일을 주저하는 나라가 있다면 역사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적시한 바 있다. 한국은 이 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통일기 한국이 직면할 또 다른 과제는 남·북한군 통합이다. 독일은 ‘동·서독군 통합’이라고 표현했지만, 1990년 10월 3일에 일어난 것은 서독군의 동독군 흡수였다. 흡수된 동독군인들은 서독군이 전우라고 배우게 됐다. 동독군이 사용해온 산더미 같은 무기와 많은 기지가 폐기됐다. 냉전기 동·서독군이 전선에 구축한 수많은 군사시설도 철거 대상이 됐다.
49만5000여 명의 서독군과 17만3000여 명의 동독군을 합쳤기에 대대적인 감군(減軍) 조치가 불가피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4대 강국(미·영·불·소)은 통일 독일군의 상한을 37만 명으로 정했으니, 근 30만 명을 감군해야 했다.
17만3000명의 동독군은 1990년 절반가량인 8만9000명으로 축소됐다. 그리고 장교 3050명, 부사관 7550명, 병사 2000명, 도합 1만2600여 명만 통일독일군에 들어갔다. 그러나 550명의 장교와 1012명의 부사관이 거짓말을 한 것이 탄로나 퇴출됐다. 그들은 슈타지와 연관돼 있었다. 결국 1만800여 명만 통일 독일군에 남게 됐다. 고르바초프는 독일 통일에 크게 기여했는데 그는 회고록에 이런 말을 남겼다. ‘독일 통일은 정당한 것이었고 궁극적으로는 불가피한 과정이었다. 많은 변화를 겪고 과거의 상처를 극복한 독일 앞에 때가 올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한국 통일은 정당한 것이었고 궁극적으로는 불가피한 과정이었다. 많은 변화를 겪고 과거의 상처를 극복한 한국 앞에 때가 올 것이다.’
*부크벤더 박사 후기 : 이 기사를 번역, 작성하는 데는 육군 교육사령부 김태식 대령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김 대령께 감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