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호

‘녹슨 전차’를 경제대국으로 ‘무티(엄마) 리더십’의 3選 질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 하정민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dew@donga.com

    입력2013-10-18 10:4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2000년 4월 동독 출신의 수수한 중년 여성이 통일 독일의 보수 우파 정당 기독교민주당의 첫 여성 당수가 됐다. 그가 정치인으로 장수하리라고 내다본 이는 드물었으나 13년 후 그는 3선 총리에다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거물이 됐다. 실업난에 시달리던 독일 경제를 부활시키고 유럽 재정위기 와중에도 탄탄한 성장세를 이끌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경제 정책에 대한 성과를 인정받는 유일한 지도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다.
    이탈리아 사람, 포르투갈 사람, 그리스 사람이 술집에 갔다. 과연 누가 술값을 냈을까. 정답은 ‘독일 사람’이다. 유럽 재정위기 이후 유행한 이 씁쓸한 농담은 두 가지 시사점을 준다. 첫째, 유럽의 경제 상황이 그만큼 나쁘다는 것. 둘째, 세계경제에서 독일이 미국에 버금갈 정도로 중요한 나라라는 것. 독일 총리가 주요국 중앙은행장이나 거대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 못지않게 세계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큰 이유다.

    2004년, 인구가 5억 명에 달하는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유럽 주요국들이 유럽연합(EU)의 닻을 올렸다.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25%가 넘는 거대 경제권이 출범한 이때만 해도 EU의 앞날은 더없이 밝아 보였다. EU가 조만간 미국을 제치고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되리라는 낙관적 전망도 나왔다.

    메르키아벨리

    하지만 출범 9년을 맞은 2013년 유럽은 세계의 골칫덩이로 전락했다. 잦아들 줄 모르는 재정위기 후폭풍 때문이다. 2008년 터진 세계 금융위기의 여진이 가시기도 전인 2010년 4월 그리스의 구제금융 신청에서 비롯된 유로존(EU 가입 28개국 중 유로화를 자국 통화로 사용하는 17개국)의 재정위기, 즉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아일랜드 등의 막대한 국가 부채와 높은 실업률에 따른 경제난은 세계경제 전체의 성장동력을 끌어내리고 있다. 당초 남유럽 일부 국가의 일시적 위기일 것이라는 초기 전망과 달리 최근에는 그 여파가 프랑스, 영국 등 EU 내 우등 국가로도 서서히 번질 조짐을 보여 불안감이 더 커졌다.

    그런 유럽에서 유일하게 다른 행보를 보이는 국가가 있으니, 바로 독일이다. 독일의 최근 경제지표는 눈부시다. 지난해 독일의 실업률은 1990년 통일 이후 최저 수준인 6.8%로 떨어졌다. 무역수지 흑자는 1881억 유로로 사상 최대. 올해 상반기(1~6월)에도 독일 연방정부는 85억 유로 흑자를 기록했다. 2분기(4~6월) GDP도 0.7% 증가해 마이너스 성장으로 신음하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대조를 보였다. 앙겔라 메르켈(59)이 처음 총리로 집권할 때인 2005년만 해도 두 자릿수 실업률, 빠른 고령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재정적자 등으로 ‘낡은 전차’라고 놀림받던 것을 떠올리면 상전벽해다.



    잘 먹고 잘살게 해주는 지도자를 싫어하는 국민은 없다. 독일 국민은 9월 22일 총선에서 메르켈이 이끄는 기독교민주당(기민당)-기독교사회당(기사당) 보수연합에 몰표를 줬다. 보수연합은 하원 630석 중 311석(득표율 41.5%)을 차지해 메르켈 총리가 치른 3차례 총선 중 가장 많은 의석을 확보했다(2005년과 2009년 총선의 보수연합 득표율은 각각 35.2%, 33.8%). 이로써 2005년 11월부터 집권한 메르켈은 2017년까지 총리 자리를 보장받게 됐다. 12년은 1979~1990년 11년간 집권한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를 뛰어넘는, 유럽 여성 지도자 중 최장 집권 기간이다.

    2005년 첫 취임 때 독일 최초 여성 총리, 동독 출신 최초 총리, 제2차 세계대전 후 최연소 총리라는 ‘3관왕’ 타이틀을 거머쥔 메르켈은 이번 승리로 ‘유럽 최장수 여성 총리’라는 타이틀도 추가했다. 그에게 독일의 전설적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대처 전 총리의 이름을 붙인 ‘새로운 비스마르크’ ‘게르만 철의 여인’‘메르켈+마키아벨리’를 합친 ‘메르키아벨리(Merkiavelli)’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붙는 이유다.

    물리학을 택한 까닭

    메르켈 총리는 1954년 7월 서독의 항구도시 함부르크에서 폴란드계 혈통으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폴란드 서부의 포즈나 출신이다. 출생 당시 이름은 앙겔라 카스너. ‘메르켈’은 대학 졸업 후 5년간 함께 산 첫 남편의 성이다. 그는 재혼 후에도 첫 남편의 성을 유지하고 있다.

    메르켈은 생후 몇 주 만에 루터교 목사였던 아버지 호르스트 카스너를 따라 동독으로 이주했다. 동독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피해 서독으로 물밀 듯 이주하던 시절, 그의 아버지가 역(逆)주행을 선택한 것은 종교 때문이다. 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막 끝내고 결혼한 호르스트 카스너는 어린 딸 앙겔라가 태어나자마자 ‘신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들을 교화하라’는 교회의 명령에 복종해 동독으로 향한다.

    동독에 아무 연고도 없던 그의 가족이 정착한 곳은 인구가 300여 명에 불과했던 브란덴부르크 주의 시골마을 크비트초프. 사회 분위기는 극도로 어두웠다. 벽촌인데도 악명 높은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가 늘 모든 주민을 감시했고 전화 한 통도 자유롭게 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교회라는 특수한 공간은 어린 메르켈에게 삶과 죽음, 빈부격차, 속죄와 구원 등 인간사의 고뇌와 일찍 대면하게 만들었다. 척박한 환경이 그를 일찍 철들게 하고 인격을 수양시킨 셈이다.

    메르켈은 공부를 잘했다. 특히 수학과 과학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 그는 1973년 동독의 명문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한다. 전공은 물리학. 메르켈은 훗날 인터뷰에서 “물리학을 선택하면 공산주의니 자유주의니 하는 정치 이데올로기에 얽매이지 않고 쉽게 대학 추천서를 받을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다행히 라이프치히대학 교수들은 공산주의 이념보다 전공 지식을 가르치는 일에 더 큰 비중을 뒀다. 메르켈은 물 만난 고기처럼 열심히 공부하며 실험실에서 청춘을 보냈다. 졸업시험에서 최고점을 받았고, 학부 졸업논문은 미국 전문학회지에 실렸을 정도다. 대학을 졸업하던 1977년 메르켈은 동급생 울리히 메르켈과 결혼했다. 하지만 성격 차이로 5년 만인 1982년 이혼했다.

    메르켈은 1978년 베를린의 동독 학술아카데미 산하 물리화학연구소에 취직했다. 좁고 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연구실에 틀어박혀 청춘을 보냈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원자핵의 붕괴반응에 관한 논문을 준비한 그는 1986년 1월 이에 관한 박사논문을 완성한다. 당시 이 논문을 화학자 요아힘 자우어 박사가 감수했는데 이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싹텄다. 고향(동독)과 직업(과학자)이 같은 두 사람은 몇 년간 동거한 뒤 1998년 12월 결혼했다. 둘 다 재혼이었다.

    메르켈에겐 자녀가 없다. 정치에 투신했을 때가 서른다섯이었고 이후 아이 문제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는 게 이유다. 남편과의 금실은 매우 좋다. 아무리 바빠도 남편의 아침식사를 직접 챙긴다. 자우어 박사 또한 아내의 정치활동을 묵묵히 지원했다. 메르켈은 총리 당선 이후에도 관저에 들어가지 않고 남편과 살던 사저에서 살고 있다. 사저의 문패에는 다른 표시 없이 남편의 이름(Dr. Sauer)만 달려 있다. 3선 총리의 여전히 소박한 면모다.

    콜과의 만남과 결별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내렸다. 통일 독일 출범이 눈앞에 다가오자 메르켈은 신생 야당 ‘민주변혁’의 문을 두드린다. 학자로 조용한 삶을 살았지만, 그는 학창 시절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시를 낭송하다 퇴학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새로운 사회를 직접 건설하고 싶은 열망에 불탔던 메르켈은 박사학위 소지자였음에도 전단지 배포, 사무실 청소 같은 허드렛일을 자처했다.

    민주변혁당 당원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볼프강 슈누어 당수가 비밀경찰 슈타지 출신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당이 와해 위기에 몰렸기 때문이다. 다시 연구소로 돌아갈 채비를 하던 그는 신선한 인물을 찾고 있던 독일 정계의 거물 헬무트 콜 총리 겸 기민당 당수에게 발탁됐다.

    1982년부터 1998년까지 16년간 집권하며 통일을 이뤄낸 콜 총리는 단지 독일뿐 아니라 자유세계의 리더로 추앙받으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동독’과 ‘여성’이라는 메르켈의 두 가지 제약이 오히려 통일 독일의 정치인으로는 큰 장점이라는 점을 간파했다.

    메르켈은 1990년 대표적 보수 우파 정당인 기민당에 입당한다. 통일 당시 신용카드 사용법을 배워야 했을 정도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법을 낯설어했지만, 오랜 동독 생활은 그에게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심어줬다. 메르켈은 같은 해 통일 후 처음으로 구성된 연방의회 선거에서 하원의원에 뽑혔다.

    콜 총리는 뚝심이 있으면서도 진중한 메르켈을 아꼈다. 메르켈의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나의 소녀(mein Madchen)’라는 애칭으로 그를 불렀을 정도다. 콜은 1991년 37세의 메르켈을 여성청소년부 장관에 기용했고 1994년에는 환경부 장관으로 발탁했다. 젊은 나이에 주요 장관직을 역임한 메르켈은 1998년 기민당 최초의 여성 사무총장이 됐다.

    메르켈의 정치 역정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90년대 후반 기민당과 콜 총리는 고난을 겪고 있었다. 콜이 총리 재직 당시 약 200만 마르크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여론의 십자포화에도 콜은 끝내 기부금 제공자를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기민당 내부에서는 콜을 압박하지 못했다. 콜 때문에 당이 존폐 위기에 몰렸지만 ‘누가 호랑이 목에 줄을 걸겠느냐’며 쉬쉬했다.

    이때 메르켈이 나섰다. 그는 1999년 12월 22일 유력 일간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자이퉁’에 실명 기고라는 ‘대형 폭탄’을 터뜨렸다. “콜의 시대는 영원히 갔다. 기민당은 이제 콜 없이 혼자 걷는 법을 배워야 한다. ‘기부금 제공자를 밝힐 수 없다’는 콜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기민당은 발칵 뒤집혔지만 독일 국민은 환호했다. 결국 기민당의 보수적 중진들도 난관을 타개할 사람은 메르켈밖에 없다는 데 공감했다. 비자금 스캔들에서 당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정치적 아버지인 콜의 사퇴를 주장할 정도로 담대한 리더십은 2000년 메르켈을 기민당 최초의 여성 당수로 만들었다.

    하지만 여성에다 동독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당내 반대 세력의 견제도 엄청났다. 2004, 2005년에는 사무총장 등 일부 중진들이 연이어 반기를 들고 그의 대표직 사퇴를 종용했다. 그래서 메르켈이 기민당 당수로 뽑혔을 때만 해도 그가 5년 후 독일 총리가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비자금 스캔들로 궁지에 몰린 기민당 지도부가 이미지 개선을 위해 내놓은 ‘얼굴 마담’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메르켈은 2005년 5월 좌파 계열의 사회민주당(사민당)이 무려 39년간 집권해온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선거에서 기민당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는 독일의 16개 주 중 인구밀도와 GDP가 가장 높은 곳이라 독일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이 막강하다. 산업과 교통이 발달했고 통일 이전 수도 본을 비롯해 쾰른, 뒤셀도르프, 도르트문트 등 주요 도시가 모두 이곳에 있다.

    여성 지도자 시대 열다

    텃밭을 내준 사민당 당수이자 3선을 노리던 당시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정치적 도박을 감행했다. 슈뢰더 총리는 2006년 9월로 예정된 총선을 1년 앞당기는 조기 총선 카드를 꺼냈다. 하지만 결과는 나빴다. 메르켈은 실업률 상승 등 사민당 슈뢰더 정권의 경제 정책 실패를 집요하게 부각하고 기민당의 경제회생 정책을 집중 홍보하면서 정열적으로 선거운동을 벌였다. 막판 TV토론에서 메르켈이 노련한 슈뢰더에 밀리는 듯한 모양새를 보이며 사민당이 재집권하는 것 아니냐는 전망도 나왔으나, 일자리를 강조한 기민당-기사당 연합이 결국 제1당이 됐다.

    다만 기민당-기사당 연합은 과반 획득에는 실패해 사민당과 대연정 협상에 돌입했다. 협상 과정에서 누가 총리가 될지를 놓고 팽팽하게 대립했지만, 선거에서 진 슈뢰더가 총리를 맡아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우세해졌다. 결국 메르켈은 2005년 11월 독일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됐다.

    이는 놀라운 사건이었다. 인디라 간디 전 인도 총리, 베나지르 부토 전 파키스탄 총리 등 제3세계나 군소 국가에서 대통령이나 총리 출신 아버지의 후광을 입은 여성들이 대통령이나 총리로 선출된 적은 있지만, 독일 같은 강대국에서 여성이 자력으로 국가 지도자에 오른 사례는 드물었다. 더구나 궁핍한 집안에서 자란 동독 출신의 개신교 여성이 서독 출신의 부유한 가톨릭계 남성이 대부분이던 보수 정당의 대표에 이어 총리에까지 오른 것은 독일의 기존 정치 관행을 일거에 무너뜨린 대변혁이었다.

    ‘아니오 부인’의 소신

    메르켈은 지구촌 여성 지도자 시대를 활짝 열었다. 그의 총리 취임 후 미첼 바첼레트 칠레 대통령(2006~2010),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2007~ ), 줄리아 길라드 호주 총리(2010~2013),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2011~ ), 박근혜 한국 대통령(2013~ ) 등 세계 각국에서 속속 여성 지도자가 탄생했다. 그의 당선은 독일어 사전에 없던 신조어 ‘칸츨러린(kanzlerin·총리를 뜻하는 kanzler의 여성 형태)’도 탄생시켰다.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총리가 됐지만 그의 앞길은 험난했다. 무엇보다 경제 상황이 너무 나빴다. 당시 독일은 12%에 달하는 높은 실업률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상 최대인 520만 명이 직장을 잃은 채 신음하고 있었다. 핵심 산업이던 자동차, 중공업 등도 일본 등 아시아 국가의 추격으로 경쟁력이 떨어졌고, 경제성장률은 사실상 제로 상태였다.

    정치인 메르켈의 진정한 능력은 총리 집권 후 본격적으로 빛을 발했다. 우선 그는 당내 반발에도 불구하고 슈뢰더 총리의 개혁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2003년 슈뢰더 총리는 노동시장 유연성 확대, 과도한 복지제도 축소 등을 골자로 한 독일 경제의 개혁 청사진인 ‘어젠다 2010’을 발표했다. 고용·연금·의료·세제·교육 등 사회 전 분야를 망라하는 이 개혁 법안은 슈뢰더의 재집권 실패로 사장될 위기에 처했으나 메르켈은 ‘낡은 독일’을 살리려면 이 법안이 꼭 필요하다고 밀어붙였다.

    실험실에서 청춘을 보낸 학자 출신답게 메르켈은 정책 입안과 수행에 체계적이고 분석적인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그는 깜짝쇼나 화려한 정치 이벤트를 벌인 적이 없다. 좀 답답하다는 소리를 듣지만 ‘근면성실’로 대표되는 독일의 국민성과 부합하는 면모다.

    집권 초기에도 그랬지만, 메르켈은 야당의 정책도 필요하다면 과감하게 수용하는 유연성과 과감성도 갖췄다. 2011년 3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에는 사민당과 녹색당 등 좌파 정당의 핵심 공약이던 원자력발전소 폐기 등을 먼저 들고 나와 유권자들의 호평을 이끌어냈다. 이 밖에도 징병제 폐지, 가정복지 강화, 양성 평등정책 등 야당의 주장을 수용하는 실용주의적 태도는 그가 3선에 성공한 주요인이다.

    독일 내에서 메르켈은 독일어로 엄마를 뜻하는 ‘무티(Mutti)’로 불린다. 문제가 생기면 알아서 척척 해결해주는 엄마처럼 국민이 믿고 의지할 만한 지도자라는 극찬이다. 요즘은 많이 나아졌지만, 정치 초년병 시절 수수하고 촌스러운 의상과 화장법, 머리 모양 탓에 단골 ‘워스트 드레서’로 꼽혔던 소박한 패션 감각도 ‘엄마’ 이미지를 강화하는 요소다.

    하지만 남유럽 구제금융 국가 국민은 메르켈을 ‘프라우 나인(Frau Nein, 즉 ‘Mrs. No’[아니오 부인])’이라고 부른다. 유럽 재정위기가 심화하자 그리스, 스페인 등은 “독일의 긴축 요구가 경제위기를 더 악화시킨다”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메르켈은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으면 지원은 없다”며 ‘아니오’를 고수했다. 2008년 강성으로 유명한 독일 기관사 노조를 상대로 “머리로 벽을 들이받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그래봤자 언제나 벽이 이긴다”고 일갈했던 그의 단호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메르켈의 3선 성공은 독일뿐 아니라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칠 사안이다. 메르켈이 그리스, 포르투갈 등 재정난에 허덕이는 유로존 국가를 상대로 강력한 구조개혁 및 긴축 정책을 주문할 것이 확실시되기 때문이다. 메르켈은 그간 총선 승리를 위해 독일의 추가 재정 부담이 필요한 유로존 위기 탈출 정책에 미온적인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이제 선거에서 승리한 만큼 비틀대는 유럽 경제의 구원투수 역할에 매진할 가능성이 크다. 메르켈이 유로존 재정위기 극복을 주도한다면 미국 대통령 못지않게 강력한 발언권을 지닌, 국적을 초월한 지도자로 세계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녹슨 전차’를 경제대국으로 ‘무티(엄마) 리더십’의 3選 질주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