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호

‘제2 청일전쟁’은 한중분쟁?

“中의 센카쿠 다음 목표는 北”

  • 김영림 | 재일 군사평론가 c45acp@naver.com

    입력2013-10-21 15: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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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센카쿠 위기를 계기로 중국은 동북아 해양 패권을 겨냥한 우회 침투로, 확보를 위해 급변사태를 당한 북한 장악을 시도할 수 있다. 중일분쟁이 순식간에 북한을 무대로 한 한중분쟁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한국은 이런 상황에 대비하고 있는가.
    ‘제2 청일전쟁’은 한중분쟁?

    9월 10일, 중국 경비함(아래)이 센카쿠 열도에 접근하자 일본 순시선들이 밀어내기 위해 추격하고 있다.

    동북아의 해상 패권을 놓고 소리 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중국은 19세기말 우세한 해군력을 동원해 중국을 핍박한 서구와 그에 동참한 일본에 설욕하려는 듯 해군력 증강에 몰두하고 있다. 일본은 중국의 용틀임에 대한 불안감을 이유로 재무장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 여름 일본이 중국과 영유권 분쟁 중인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 제도 국유화를 단행하자 중국은 이 해역에서 무력시위를 벌였고, 그해 9월엔 항공모함 ‘랴오닝’을 진수했다. 일본은 지난 8월 6일 준(準)항공모함 ‘이즈모’를 이 해역에 띄웠다.

    중일분쟁은 우리에게 ‘강 건너 불 구경’거리가 아니다. 중국은 센카쿠 해역 무력시위 와중에 우리의 이어도 해양과학기지 주변에도 군함을 보냈다. 중국은 지난해 3월부터 이어도 수역을 중국 EEZ(배타적 경제수역) 관할이라고 선포한 바 있다. 중국이 일본으로부터 센카쿠 제도 영유권을 탈취한다면 이어도 수역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주목할 것은 중국의 해상패권주의가 센카쿠와 이어도 쯤에서 멈출 것이냐 하는 점이다. 지난 역사와 동북아의 지정학적 상황을 돌아보면 필자는 이 질문에 “아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중국의 행보는 결국 한반도까지 엄습하리라고 본다. 그것은 ‘현재진행형’인 북한의 체제 불안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중국이 근대 이후 사활을 걸고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려 했던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日本의 대만 출병에 놀란 淸



    임진왜란 이후 중국과 일본이 처음 충돌한 것은 1874년이고, 장소는 대만과 오키나와 섬이 있는 동지나해(동중국해) 일대였다. 먼저 공세를 편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국가로서 팽창하던 일본이었다. 일본은 1873년 국민개병제를 실시해 무사(사무라이) 계급을 일거에 무너뜨렸다. 그로 인해 무사 계급들의 불만이 높아져 소요 조짐이 보이자 이를 외부로 배출시킬 기회를 엿보게 됐다.

    사이고 다카모리(1828~1877)를 비롯한 ‘불만 사족(士族)’들은 쇄국정책을 내세워 일본의 유신 정권을 인정하지 않는 조선의 대원군을 비판하며 정한론(征韓論)을 거론했다. 그러나 내정 개혁과 근대화가 급선무라는 반론에 밀려 실각(1873)했다. 그런 상황에 일본이 조선 대신 시선을 돌린 곳이 동지나해였다. 일본은 청나라와 일본 양쪽에 조공을 바쳐온 류큐(지금의 오키나와) 왕국을 귀속시키기 위해 1872년부터 행정 작업을 진행했다.

    1874년 류큐 어민들이 거센 풍랑을 당해 대만에 표착했다가 대만 원주민들에게 살해당하자 일본은 병력을 파견해 대만을 공격했다. 일본의 대만 출병은 청나라에 큰 충격을 줬다. 아편전쟁을 필두로 한 서구 열강의 침략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후발 근대화국 일본에까지 청조의 권위를 부정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조(淸朝)는 군비(軍備)가 불충분했기에 수동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의 배상금까지 지불하며 겨우 사건을 수습했다.

    청조의 외무 전반을 대행했던 리훙장(1823~1901)은 일본에 우호적이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을 가상의 적으로 설정해 해군력 증강에 매진했다. 일본이 서구 열강과 마찬가지로 근대화한 해군력을 앞세웠던 만큼 청으로서도 국가 위신을 위해 일본을 능가하는 해군력 확보가 시급했다. 일본은 1879년 류큐를 오키나와 현으로 명명해 자국에 편입시켰다.

    리훙장은 특단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최신예 전투함을 도입해 일본 해군력을 압도할 대함대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1880년 청조는 현대 전함(battleship·대형 포를 탑재한 함정)의 시조 격인 8000t급 갑철함(甲鐵艦)인 ‘정원(定遠)’과 ‘진원(鎭遠)’, 그리고 어뢰정 10척을 독일에 발주했다. 이어 먼저 영국에 발주한 순양함들과 묶어 ‘북양(北洋)함대’를 편성했다.

    청조의 해군력은 북양함대만으로도 세계 10위권 내에 진입했다. 전투력은 영국의 동양함대와 동등한 것으로 평가됐다. ‘정원’과 ‘진원’은 300mm 두께의 철판으로 장갑했고, 구경 30cm의 거포 4문을 탑재했으니 가히 ‘불침(不沈)전함’이라 불릴 만했다. 자신감을 얻은 청조는 일본을 역습하기 시작했는데, 그 첫 무대가 바로 한반도였다.

    북양함대에 자극받은 日

    1882년 대원군을 실각시키고 권력을 잡은 민씨 척족이 일본식 훈련을 받은 신식 군대 ‘별기군’을 편성해 구식 군대를 차별하자 반발한 병사들이 일본인 교관과 한양 거류 일본인들을 살해하고 대원군을 복위시키려는 반란을 일으켰다(임오군란). 민비 세력이 구원을 요청하자 청조는 갓 도입한 영국제 순양함 3척이 호위하는 수송선단으로 지상군을 신속히 조선에 전개해 반란을 진압했다.

    청조는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하는 데 직접적인 발판이 될 수 있는 한반도에서만은 일본에 밀리지 않겠다는 각오로 개입했다. 한반도에 대한 주도권 장악을 낙관하던 일본에 선수를 치는 데 성공했다. 청조는 1884년의 갑신정변 때도 조선에 병력을 신속하게 투입해 영향력을 공고히 했다. 그리고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영국이 조선의 거문도를 불법 점거한(거문도 사건) 1886년에도 북양함대를 파견해 위세를 떨쳤다.

    당시 일본은 예산의 제약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청의 갑철함과 동급인 전함을 구입해 대항하는 ‘대칭전략’ 대신 저렴한 순양함과 당대의 최신 병기인 어뢰정을 구입해 대항하는 ‘비대칭전략’으로 나가기로 했다. 그러던 1891년 북양함대가 일본을 친선 방문하자 일본인은 자국의 해군력이 크게 열세라는 것을 깨닫고 충격에 빠졌다.

    1893년 일본은 왕의 칙어를 통해 전 공무원 급료의 10%를 헌납하고 왕실 내탕금까지 투입해 ‘정원’과 ‘진원’을 능가하는 1만2000t급 영국제 최신 전함 ‘후지(富士)’와 ‘야시마(八島)’를 도입하기로 했다. 2척을 도입하는 데 들어간 예산이 GDP의 1.2%에 달했다. 현재 일본의 국방예산이 GDP의 1%에 묶여 있는 것을 생각하면 당시 일본이 최신 전함 확보에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후지’와 ‘야시마’가 진수된 것은 청일전쟁 종전 이듬해였다.

    그런데도 청나라 해군은 청일전쟁에서 패하고 말았다. 그 원인으로는 청조의 전술적 불운과 인프라 미비를 꼽을 수 있다. 청일전쟁 초기 청의 북양함대와 일본 연합함대가 황해에서 벌인 결전에서 ‘정원’과 ‘진원’은 수백 발이 넘는 포탄을 맞았지만 치명탄은 단 한 발도 허용하지 않는 방어력을 과시했다. 거꾸로 ‘진원’이 발사한 30cm 거포탄 한 발이 일본 해군 지휘함에 치명적인 피해를 가했다.

    그럼에도 일본 함대가 승리한 요인은 수병들의 우수한 숙련도에 있었다. 청조는 대함대를 확보한 순간부터 자만에 빠져 해군 예산을 삭감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수병의 훈련도와 사기가 크게 저하됐다. 교육과 훈련이라는 기초적 인프라가 워낙 불비(不備)했기에 북양함대는 수많은 포탄을 수면으로 떨궈야 했다.

    日 꺾고 美와 태평양 半分?

    일본 연합함대는 기본 전력은 열세였지만 수병들의 숙련도, 보급, 정비 등 인프라가 탄탄했다. 그 결과 ‘정원’ ‘진원’을 격침하진 못했지만 주변의 호위함을 다수 침몰시켜 판정승을 이끌어냈다. 싸움에 임하는 진지함이 승부를 가른 것이다.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패권 확보가 향후 자국의 명운을 결정하리라는 비상한 각오로 싸웠다.

    1885년부터 3년간 일본 육군사관학교 교수를 지낸 독일인 메켈은 “한반도는 일본의 심장을 겨누는 비수와 같다”고 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실력자 야마가타 아리토모(1838~1922·일본 최초 총리 역임)는 1890년 ‘외교정략론’을 통해 일본 영토를 절대적으로 방어해야 할 ‘주권선’으로, 한반도를 주권선의 방어를 위해 반드시 장악해야 할 ‘이익선’으로 설정했다.

    청도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간과하진 않았다. 리훙장의 심복 마젠충(1845~1899)은 북양함대 구축이 한창이던 1880년대 초 ‘정원’급 갑철함 9척과 순양함 36척을 확보하고 조선의 거문도에 해군기지를 건설한다면 일본과 러시아를 견제하며 동아시아의 해양 패권을 장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청조는 일본을 능가하는 전력을 확보한 것에 자만해 더 이상의 증강을 중단함으로써 국가의 명운을 건 전쟁에서 패했다. 그 결과 청은 한반도에 대한 이권을 완전히 포기하고 대만을 일본에 할양했는데, 그때 센카쿠 제도도 함께 일본에 넘어갔다.

    그 후 중국은 기나긴 내리막길을 걷다가 오늘날에 이르러 설욕을 꾀하고 있다. 청일 간 해상 패권 경쟁의 종착점이던 센카쿠 제도를 새로운 동북아 해상 패권 경쟁의 출발점으로 삼은 중국의 다음 목표는 어디가 될 것인가.

    중국은 국력 신장에 따른 자신감과 함께 축적된 내부 모순에서 비롯된 사회 불만을 외부로 표출하려는 의도에서 해양 팽창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1차적으로는 동북아 패권의 경쟁자가 될 개연성이 높은 구적(仇敵) 일본을 꺾고, 2차적으로는 태평양의 절반을 미국과 양분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미 의회 조사국 보고에 의하면 중국은 2020년대까지 6척의 항공모함을 확보하려 한다. 반면 미 해군은 예산 축소 때문에 11척인 항모를 8척으로 줄여야 할지도 모른다. 미 해군은 항모를 대서양과 태평양 등 전 세계 바다에 분산 배치하고 있으니 서태평양에서는 오히려 중국에 비해 열세에 놓일 수도 있다.

    ‘제2 청일전쟁’은 한중분쟁?

    1884년 중국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북양함대를 공격하는 일본 연합함대 함정. 일본은 객관적인 전력이 열세였으나 치밀한 준비로 승리해 동북아 해상패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중국의 목표는 청사진에 불과하고, 그 앞에는 여러 가지 장애물도 놓여 있다. 강력한 산아제한정책을 펴온 중국은 2020년을 기점으로 급속한 노령화에 봉착할 것이다. 따라서 동북아 해상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면 그전에 ‘거사’를 해야 한다.

    그러나 대만과 센카쿠 일대에서 직접적인 군사행위를 할 경우 국제사회에서 침략전쟁을 한다는 맹비난을 받을 수 있다. 미국과 일본이 그런 시도를 묵과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이 국제적인 비난을 걱정하지 않고 패권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지정학적 돌파구가 바로 북한이다.

    한반도 ‘비수론’과 ‘방아쇠론’

    지금의 한반도는 청일전쟁기의 조·청·일 구도와 비교하면 분단 상태라는 큰 차이가 있지만, 간과해선 안 되는 사실이 있다. 현재 한반도의 북쪽은 국제적 고립을 자초하며 소수가 권력을 전횡하는 조선 말기적 상황을 답습하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이 조선과 다른 것은 군사력만이 국가를 유지하는 생명줄이라는 인식에서 핵무장까지 감행해 주변을 협박하고 있다는 정도다.

    핵무장에 기반을 둔 ‘선군정책’은 생명줄일 수도 있으나 반대로 북한을 국제사회의 문제아로 인식시켜 스스로를 옥죄게 하는 올가미가 될 수도 있다. 중국은 그러한 북한에 대해 청조가 조선을 속방으로 유지하려 했던 것처럼 적절하게 지원하며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중국 입장에서 북한이 6·25전쟁에서 명운을 같이한 우방이라는 인식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전략적 가치가 북한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북한의 지하자원이 아니라 한반도가 지닌 지정학적 가치다.

    대륙세력 중국 처지에서 보면 한반도는 해양세력이 중국을 향해 겨누는 방아쇠와 같다. 따라서 일본이라는 해양세력이 한반도를 장악하면 그들은 곧바로 대륙으로 쇄도할 것이다. 지난 세기 일본은 이를 실증해 보였다. 중국이 북한을 순망치한(脣亡齒寒)의 논리로 감싸 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해상 패권을 장악하려면 지정학적 돌파구인 한반도를 반드시 차지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중국의 해양전략은 ‘도련선(島鍊線·Island Chain)’ 확보와 돌파로 요약된다. 1980년대 중반 중국 해군사령원 류화칭은 ‘근해 적극방위전략’으로 제1, 제2 도련선 전략을 제창했다. 그에 따르면 쿠릴 열도에서 시작해 일본, 대만, 필리핀, 말라카 해협에 이르는 중국 근해가 ‘제1 도련선’이고, 그 바깥의 오가사와라, 괌, 사이판, 파푸아뉴기니를 연결하는 선이 ‘제2 도련선’이다. 중국은 1차적으로 잠수함 전력을 증강하고 원거리에서 적국 항공모함을 타격할 수 있는 대함탄도탄(ASBM)을 확보해 ‘접근거부전략(A2/AD·Anti-Access/Area-Denial)’을 펼치고 있다.

    제1 도련선 안에서 타국 해군세력을 배제하면 제2 도련선까지 활동영역을 확대한다. 항모세력이 완비되는 2020년경에는 제2도련선 안의 절대 우세를 확보하고 그 외연을 확장한다. 최근 공언한 대로 미국과 태평양을 반분하는 것이다.

    센카쿠 분쟁은 이를 위한 준비단계다. 제1 도련선을 확보하고 돌파하려면 대만과 센카쿠, 오키나와를 차지해야 하는데, 여기엔 필연적으로 미국, 일본 등 해양세력과의 충돌을 유발한다는 위험이 따른다. 이러한 리스크를 피해가는 우회로가 북한이다.

    북한은 핵무장에 성공했으나 국제사회로부터 뭔가 조치를 당해야 한다는 명분도 제공했다. 그래서 2011년 김정일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을 때 ‘북한 급변사태’라는 말이 회자됐다. 북한 체제 붕괴 가능성을 염두에 둔 말로 이는 3대 세습 후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중국이 북한 급변사태를 이유로 북한을 장악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중국은 북한 체제에 위기가 올 경우 자동적으로 군사 개입할 수 있는 발판인 중조(中朝)우호조약을 1960년대 북한과 맺어놓았다. 이 조약이 없어도 중국은 북한에 개입할 수 있다. 북한은 악명을 떨치는 ‘불량국가’이니 ‘치안 유지와 대량살상무기 통제’를 이유로 군대를 북한에 진입시켜도 국제사회가 크게 비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방치하고 있다면 우리는 통일의 기회를 영구히 잃게 된다. 반대로 통일비용을 걱정하던 쪽은 근심을 덜었다며 도리어 환영할 수도 있다.

    중국의 북한 장악은 중국이 동해를 향한 출구를 얻었다는 의미가 된다. 도련선 전략을 대신할 새로운 우회로를 확보한 것이 된다. 센카쿠와 오키나와를 거치지 않고도 일본을 압박하고 러시아까지 위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냉전 이래 유지돼온 동북아 균형이 근본부터 흔들리는 것을 뜻한다.

    ‘대륙의 거스름돈’

    중국이 북한의 지정학적 가치에 주목해 사전 공작을 벌이는 징후가 감지되고 있다. 중국, 러시아와 가까운 동해의 요충지 나진·선봉지구에 대한 항만 조차권(租借權) 확보가 그것이다. 나진·선봉지구는 러시아 극동전략의 요체인 블라디보스토크와도 인접해 있다. 따라서 중국이 나진·선봉에 해군기지를 설치한다면 러일전쟁 때 일본이 해군과 육군으로 러시아의 뤼순 요새를 동시 포위한 것과 같은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

    북한도 나진·선봉의 지정학적 가치를 인식해 항만 사용권을 놓고 러시아와 중국을 저울질해오다 최근 중국으로 기울었다. 계기는 2010년 연평도 포격전. 포격전 후 미 해군 항모전단이 북한에 경고하기 위해, 중국이 그들의 내해(內海)라고 주장해온 서해에 진출했다. 중국은 체면을 구기게 된 것. 그 반작용으로 중국은 위기의 북한과 나진항 4·5·6호 부두 건설에 합의했다. 북한은 중국에 50년 부두 사용권을 주고 중국 해군 생도실습함의 나진항 입항을 허가했다.

    이러한 이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중국은 북한 급변사태 때 군을 파병해 북한을 위성국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필요성이 생겨난다. 중국이 그렇게 행동할 경우 재무장을 시도하는 일본은 ‘집단적 자위권’을 북한지역에서 행사하려고 할 수도 있다. 이는 사실상 ‘청일전쟁의 재래(再來)’가 된다. 중일 간에 무력충돌이 발생하지 않는다 해도 한국은 한반도에 대한 주도권을 상실한다. 대한민국은 대륙의 말단에 붙은 지정학적 ‘거스름돈’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거스름돈’은 중국에 서서히 흡수되고 있는 홍콩처럼 점진적으로 중국에 빨려 들어갈 수 있다.

    중국의 해상 패권주의와 재무장한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이 한반도 북부에서 충돌하는 것을 막고 대한민국이 생존하는 묘수는 없을까. 있다. 아주 간단하지만 각오와 결단을 요구하는 묘수가 있다. ‘대한민국 주도의 통일’이 그것이다. 북한 급변사태 시 중국보다 먼저 북한을 장악해 한반도의 지정학적 주도권을 잡는 것이다.

    현재의 한중일 구도는 청일전쟁기의 조청일 구도와는 다르다. 청일전쟁기 조선에 해당하는 나라는 북한이다. 핵전력을 제외한 재래식 전력만 놓고 보면 한중 간의 전력 격차는 청일전쟁기 청조와 일본의 전력 격차보다 작다. 북한을 놓고 한중 간에 제2의 청일전쟁과 같은 분쟁이 벌어지면 일본이 했던 결단을 우리가 해야 한다는 의미다.

    통일은 ‘필수사항’

    “강대국 패권 싸움에 왜 우리가 끼어드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과 인접한 데다 한반도를 수천 년 영유해온 역사적 연고성, 휴전 이래 북한과의 전면전에 대비해 60여 년 동안 군비를 갈고닦은 대한민국이 북한 급변 때 수수방관한다면 모순이다. ‘대한민국 주도의 통일’은 중국의 해상 패권주의 확대에 쐐기를 박고, ‘중국의 동진(東進)에 대한 방어’라는 이유로 추진되는 일본의 재무장 명분도 희석시킬 수 있다.

    ‘제2 청일전쟁’은 한중분쟁?
    김영림

    1977년 경주 출생

    동국대 사학과 석사

    일본 와세다대 문학수사(修士)

    KONAS 기자, 멘사 회원

    현재 군사저널리스트로 활동

    논문 ‘청조의 근대식 함선 도입과 동아시아의 충격’ 등


    그동안 통일은 ‘하나의 민족’이라는 감성적 민족주의 차원에서 논의된 ‘옵션 사항’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동북아의 주도권 확보와 대한민국의 항구적 존속을 위해 전략적 차원에서 행동에 옮겨야 하는 ‘필수 사항’으로 봐야 한다. 이를 실천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한반도 주도권 장악을 위한 독트린 정립이 시급하다. 지금 우리의 ‘주권선’과 ‘이익선’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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