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월 10일, 중국 경비함(아래)이 센카쿠 열도에 접근하자 일본 순시선들이 밀어내기 위해 추격하고 있다.
지난해 여름 일본이 중국과 영유권 분쟁 중인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 제도 국유화를 단행하자 중국은 이 해역에서 무력시위를 벌였고, 그해 9월엔 항공모함 ‘랴오닝’을 진수했다. 일본은 지난 8월 6일 준(準)항공모함 ‘이즈모’를 이 해역에 띄웠다.
중일분쟁은 우리에게 ‘강 건너 불 구경’거리가 아니다. 중국은 센카쿠 해역 무력시위 와중에 우리의 이어도 해양과학기지 주변에도 군함을 보냈다. 중국은 지난해 3월부터 이어도 수역을 중국 EEZ(배타적 경제수역) 관할이라고 선포한 바 있다. 중국이 일본으로부터 센카쿠 제도 영유권을 탈취한다면 이어도 수역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주목할 것은 중국의 해상패권주의가 센카쿠와 이어도 쯤에서 멈출 것이냐 하는 점이다. 지난 역사와 동북아의 지정학적 상황을 돌아보면 필자는 이 질문에 “아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중국의 행보는 결국 한반도까지 엄습하리라고 본다. 그것은 ‘현재진행형’인 북한의 체제 불안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중국이 근대 이후 사활을 걸고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려 했던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日本의 대만 출병에 놀란 淸
임진왜란 이후 중국과 일본이 처음 충돌한 것은 1874년이고, 장소는 대만과 오키나와 섬이 있는 동지나해(동중국해) 일대였다. 먼저 공세를 편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국가로서 팽창하던 일본이었다. 일본은 1873년 국민개병제를 실시해 무사(사무라이) 계급을 일거에 무너뜨렸다. 그로 인해 무사 계급들의 불만이 높아져 소요 조짐이 보이자 이를 외부로 배출시킬 기회를 엿보게 됐다.
사이고 다카모리(1828~1877)를 비롯한 ‘불만 사족(士族)’들은 쇄국정책을 내세워 일본의 유신 정권을 인정하지 않는 조선의 대원군을 비판하며 정한론(征韓論)을 거론했다. 그러나 내정 개혁과 근대화가 급선무라는 반론에 밀려 실각(1873)했다. 그런 상황에 일본이 조선 대신 시선을 돌린 곳이 동지나해였다. 일본은 청나라와 일본 양쪽에 조공을 바쳐온 류큐(지금의 오키나와) 왕국을 귀속시키기 위해 1872년부터 행정 작업을 진행했다.
1874년 류큐 어민들이 거센 풍랑을 당해 대만에 표착했다가 대만 원주민들에게 살해당하자 일본은 병력을 파견해 대만을 공격했다. 일본의 대만 출병은 청나라에 큰 충격을 줬다. 아편전쟁을 필두로 한 서구 열강의 침략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후발 근대화국 일본에까지 청조의 권위를 부정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조(淸朝)는 군비(軍備)가 불충분했기에 수동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의 배상금까지 지불하며 겨우 사건을 수습했다.
청조의 외무 전반을 대행했던 리훙장(1823~1901)은 일본에 우호적이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을 가상의 적으로 설정해 해군력 증강에 매진했다. 일본이 서구 열강과 마찬가지로 근대화한 해군력을 앞세웠던 만큼 청으로서도 국가 위신을 위해 일본을 능가하는 해군력 확보가 시급했다. 일본은 1879년 류큐를 오키나와 현으로 명명해 자국에 편입시켰다.
리훙장은 특단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최신예 전투함을 도입해 일본 해군력을 압도할 대함대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1880년 청조는 현대 전함(battleship·대형 포를 탑재한 함정)의 시조 격인 8000t급 갑철함(甲鐵艦)인 ‘정원(定遠)’과 ‘진원(鎭遠)’, 그리고 어뢰정 10척을 독일에 발주했다. 이어 먼저 영국에 발주한 순양함들과 묶어 ‘북양(北洋)함대’를 편성했다.
청조의 해군력은 북양함대만으로도 세계 10위권 내에 진입했다. 전투력은 영국의 동양함대와 동등한 것으로 평가됐다. ‘정원’과 ‘진원’은 300mm 두께의 철판으로 장갑했고, 구경 30cm의 거포 4문을 탑재했으니 가히 ‘불침(不沈)전함’이라 불릴 만했다. 자신감을 얻은 청조는 일본을 역습하기 시작했는데, 그 첫 무대가 바로 한반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