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호

성격·자질·통치 스타일 유사 金, 실각한 소련 지도자 전철 밟나

닮은꼴 두 남자, 김정은 vs 흐루시초프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13-10-22 18: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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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도자 소양 부족, 과시적ㆍ호전적 태도
    • 원로, 老간부에게 안하무인 행동
    • 黨 위상 강화 통해 권력기반 구축 시도
    • 인사 전횡으로 간부 반발 초래
    • 비현실적 정책 추진, WMDㆍ대외강경책 집착
    성격·자질·통치 스타일 유사 金, 실각한 소련 지도자 전철 밟나
    올 12월 권력 세습 2년을 맞이하는 북한 3대(代) 권력자 김정은이 성격, 성향, 통치 스타일, 인사, 대내외 정책 등 다방면에서 옛 소련 독재자 니키타 흐루시초프(1894~1971)와 유사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흐루시초프는 이오시프 스탈린 사망 6개월 뒤인 1953년 3월 소련 공산당 제1서기에 취임했다. 1958년부터 총리와 국가평의회 의장을 겸임했으나 △독특한 성정(性情) △현실을 무시한 정책 추진 △무모한 측근 제거 등으로 인해 기득권층 반발에 직면하면서 1964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에 의해 실각당했다. 실각 후 7년간 가택연금됐다가 사망했다.

    경험, 자질 부족

    일부 전문가는 △아마추어적 통치 행태 △비현실적 인식에 따른 정책 난맥 △전횡적 인사 등으로 권력층 내에서 체제 장래에 대한 불안감, 리더십에 대한 불신이 심화하는 등 북한에서 균열 요인이 확산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질과 경험이 부족한 김정은이 흐루시초프의 전철을 밟을 소지가 있다는 것.

    흐루시초프는 집권하는 동안 지도자로서의 인성,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는 평가를 들었다. 학력 콤플렉스도 갖고 있었다. 흐루시초프가 받은 정규교육은 초등학교 2년 과정이 전부다. 20대 후반 도네츠크공업전문대학에 개설된 노동자학부 속성 과정을 수료했다.



    김정은은 10대 때 스위스에서 공부했다. 학창 시절부터 술, 담배를 즐긴 것으로 전해진다. 스위스 일간지 ‘르마탱’에 따르면 김정은은 스위스 베른국제학교 재학 첫해 75일, 두 번째 해 105일을 결석했다. 오후에만 학교에 나올 때도 많았다. 성적도 나빴다. 수학, 문화, 사회, 독일어 등에서 간신히 과락을 면했다. 음악에서는 5등급(최고등급 6등급)을 받았다.

    김정은은 중학교 과정을 마치지 못하고 평양으로 되돌아갔다. 2001~2007년 김정은만을 위해 급조한 ‘김일성군사종합대학 특설반’에서 군사 분야에 방점을 찍은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고 한국 정보당국은 파악한다.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은 군 엘리트를 양성하는 곳이다.

    흐루시초프는 통치 기간 자기과시적, 독선적, 공격적 언행을 일삼았다. 다변(多辯)이면서 대중연설을 즐겼다. 스탈린 사망 3년 후인 1956년 2월 제20차 소련 공산당 당대회에서 4시간에 걸쳐 스탈린의 비인도적 행태와 잔인함을 비판했다. 1960년 9월 유엔 총회 연설 분량은 300여 쪽에 달했다.

    성격·자질·통치 스타일 유사 金, 실각한 소련 지도자 전철 밟나
    多辯, 공개연설 선호

    흐루시초프는 전용기가 아닌 군함을 타고 미국, 영국을 방문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배우자를 정상회담에 대동하지 않는 게 일종의 관례였는데, 흐루시초프는 정상회담 때 아내를 대동했다. 미국 언론은 이를 두고 ‘흐루시초프는 과시적이면서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논평했다.

    흐루시초프는 1960년 9월 유엔 총회 때 필리핀 대표가 “소련이 동유럽에서 자유를 빼앗아가고 있다”는 내용이 담긴 연설을 하자 주먹으로 탁자를 때렸다. 이윽고 구두를 벗어 탁자를 내려쳤다. 공식석상에서 무례하고 과격한 행태를 거리낌 없이 드러낸 것.

    원로를 공개적으로 질책하는 일도 잦았다. 1956년 스탈린 격하연설 중 제2차 세계대전 때 국방장관을 지낸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를 향해 “이 늙어빠진 노인네야! 본 것도 제대로 말을 못하는가”라고 질책했다. 모스크바 주재 서방 국가 대사·언론인의 언동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본주의 첩자” “매장해버리겠다” 등 직선적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1961년 모스크바 주재 UPI 특파원과 인터뷰를 하면서 “당신의 무기가 만년필이라면 내 무기는 언어다. 당신은 중상모략가이자 자본주의 첩자”라고 비방한 일화도 유명하다.

    김정은도 흐루시초프처럼 대내외에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행태를 보여왔다. 지난해 8월 낡은 목선을 타고 연평도와 마주하고 있는 무도에 나타났다. 조선중앙통신은 “최고사령관이 27마력의 작은 목선을 타고 풍랑을 헤치며 기별도 없이 방어대에 도착했다”면서 “담력과 배짱의 지도자”라고 선전했다. 용기 있다고도 할 수 있고 무모하다고도 할 수 있는 행동이다. 또한 김정일이 1992년 딱 한차례 한 공개연설을 14회(2013년 10월 현재)나 했다. 호전적이거나 과격한 언행도 자주 했다.

    김정은은 정상회담 때 아내를 대동한 흐루시초프처럼 아내 이설주를 대중에 공개했다. 현지지도 때 수시로 아내를 데리고 간다. 이설주는 평양이 ‘조선의 어머니’로 상징조작한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의 ‘정숙한 여성’ 이미지와는 딴판이다. 김정은의 팔짱을 끼고 걷는가 하면 곱등어(돌고래)쇼를 보면서 키득키득 웃는다. 이탈리아제 드레스를 입는다.

    老간부 앞에서 안하무인

    정보당국은 김정은이 노(老)간부들에게 안하무인 격의 태도를 수시로 보인다고 밝힌다. 당 간부들 앞에서 “나와 발걸음을 못 맞추는 인간은 살 자격도 없다”고 발언한 것이 노동당 교육자료에 언급될 정도다. 실내에서 공연을 관람할 때는 물론이고 공식석상에서도 원로들의 면전에서 담배를 피운다. 나이 어린 사람이 윗사람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예절에 어긋난다. 북한에선 더욱 그렇다. 대북 소식통은 “어린 지도자가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주려는 듯 나이 많은 간부에게 굴욕을 주고 있다”고 전했다. 일례로 지난해 3월 8월 ‘세계 여성의 날’(북한식 표현은 ‘국제부녀절’) 음악회에서는 오극렬(84), 김원홍(69), 이용하(67)가 가족과 함께 충성맹세 노래를 합창했다. 김기남(84)은 춤을 췄다. 김정은은 이 모습을 보면서 파안대소(破顔大笑)했다.

    흐루시초프는 소련 공산당 최고위직을 차지한 후 스탈린 집권기 13년 동안(1939~1952년) 개최되지 않던 당대회와 당정치국의 역할을 강화했다. 유명무실화한 당 기능 회복을 추진한 것. 당의 역할을 강화하면서 스탈린 시절 2인자이던 게오르기 말렌코프를 제거할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당 최고직이던 ‘서기장’이 아닌 ‘제1서기’에 올랐다.

    김정은도 흐루시초프와 비슷한 형태로 권력기반을 강화하고 있다. 당정치국과 당중앙군사위원회 구성원을 증원했다. 김정일 시대에 거의 열리지 않던 당대표자회(2회),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2회), 당정치국 회의(4회), 당중앙군사위원회 회의(3회) 등 정책 결정 모임을 진행했다. 김정은도 ‘총비서’가 아닌 ‘제1비서’를 신설해 맡았다.

    흐루시초프는 ‘반대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는다’는 인사 원칙을 세우고 정적(政敵)을 차례로 숙청했다. 최대의 정적이면서 스탈린 격하를 반대한 말렌코프를 지방의 한 수력발전소 소장으로 좌천시켰다. 당 서기이던 아리스토프가 자신이 내놓은 의견에 “좀 더 생각해보자”고 답하자 폴란드 대사로 임명해 추방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면서 최측근이던 게오르기 주코프 국방장관이 자신이 내놓은 ‘병력 감축 및 전략 핵무기 부대 증강’이라는 군 개혁안에 반발하자 ‘군에 대한 당의 우위’를 내세우며 해임해버렸다. 주코프는 스탈린 격하운동이 벌어진 후 스탈린을 옹호하는 편에 선, 이른바 반당(反黨)그룹과의 권력투쟁 때 흐루시초프가 승리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성격·자질·통치 스타일 유사 金, 실각한 소련 지도자 전철 밟나


    후견인, 최측근 숙청 닮은꼴

    김정은 역시 유일영도체계를 내세우며 권력 장악에 걸림돌이 되는 인물을 숙청하는 행태를 보여왔다. 김정일의 핵심 측근이자 군 실세였으며, 자신의 후견인이던 이영호(전 총참모장)를 ‘반당(反黨)·반(反)혁명분자’로 몰아 숙청한 것은 김정은의 면모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군 최고 실세의 숙청은 당정치국 회의에서 결정됐다. 정보당국은 이영호가 ‘당의 군 통제’ 기조에 비협조적 태도를 보였다고 밝힌다. 권력세습 이후 중용이 예상되던 김정일 운구차 호송 군부 4인방(이영호·김정각·김영춘·우동측)이 모두 숙청되거나 일선에서 퇴진했다. 군단장급 이상 군 지휘부 대부분이 교체되는 등 세대교체가 가속화하고 있다.

    북한 언론이 전하는 김정은 수행자 명단에는 그동안 공개된 적이 없거나 급부상한 인물이 많다. 상장(한국의 중장) 계급인 손철주 인민군 총정치국 부국장, 박정천 상장, 중장(한국의 소장) 계급인 윤동현 인민무력부 부부장, 주도현·렴철성·서홍찬·김수길·안지용 중장, 림광일 소장(한국의 준장) 등이 최근 부상한 군부 핵심인사다.

    올해 7월 정전(停戰) 60주년 기념일(북한식 표현은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일’) 행사 참석차 평양을 방문한 한 해외교포는 “방북 기간 중 만난 북한 간부들이 김정은의 인사가 너무 잦고 예측하기 힘들다며 불만을 표시했다”고 전했다.

    흐루시초프는 소련의 기후·토양, 집단농장식 경제구조, 현대화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한 농업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기술, 전문 인력을 확보하지 않은 채 시베리아 미(未)개척지에서 농지 개발에 나섰으며 농업 기계화를 추진했다.

    현실 인식 얕은 정책 남발

    성격·자질·통치 스타일 유사 金, 실각한 소련 지도자 전철 밟나

    7월 27일 김정은이 평양 전쟁승리관 참관을 마치고 서방 취재진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북한 최고지도자가 서방 기자들에게 이처럼 가깝게 접근한 것은 이례적이다.

    흐루시초프는 1959년 방미 때 오하이오 주에 있는 ‘황금의 옥수수밭 지대’를 보고 감명을 받았다. 소련으로 돌아온 그는 소련에 오하이오 주보다 위도가 낮은 농지가 없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대대적인 옥수수 증산 캠페인을 진행했다. 결국 이 정책은 대실패로 끝났으며, 소련이 곡물 수입국으로 전락하고 만성적 식량난을 겪게 된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1962년을 예로 들면 3700만ha(한국 농지 면적은 2012년 기준 170만ha)에 달하는 옥수수 재배 면적 중 7만ha에서만 제대로 익은 옥수수를 수확했다.

    김정은도 현실 인식이 얕아 보이는 정책, 지시를 내놓고 있다. 승마장(평양)·스키장(원산)·놀이시설(평양) 건설이 대표적 사례다. 곡물도 모자라는데 “생땅 안 보이게 잔디 심으라”고 하거나 “고기 생산 늘려라” “스키장 지어라”와 같은 비현실적 지시를 남발하고 있다. “사무원병을 예방할 수 있다”면서 청소년, 근로자에게 승마를 장려하기도 했다.

    정보당국 관계자는 “주민들의 생활고 해결보다는 김정은 개인의 관심사인 잔디 심기 등에 집착하면서 인적·물적 착취를 강행하고 있어 주민들은 물론 간부들도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고 말했다. 한 대북 소식통은 “경제 상황이 좋아졌다는 소식은 평양 얘기일 뿐 지방의 사정은 오히려 악화하고 있다”고 전했다.

    정보당국이 확보한 북한 주민 생활총화 교육자료를 보면 김정은이 꽃과 나무 심기를 얼마나 강조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화초를 많이 심고 가꾸어 온 나라를 꽃 속의 도시, 꽃 속의 마을, 꽃 속의 직장, 꽃 속의 가정으로 꾸려나가며 꽃을 많이 이용하면서 보다 문명하고 행복한 생활을 향유해야 한다.(중략) 좋은 품종의 잔디를 많이 심어 이 땅 그 어디 가나 생땅이 보이지 않게 하자는 게 현 시기 당의 의도다. 우리는 사회주의 강성국가 건설의 요구에 맞게 국토관리 사업에서 혁명적 전환을 가져올 데 대한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의 원대한 구상을 높이 받들고 좋은 품종의 잔디를 비롯한 지피식물을 많이 심으며 당면하게는 새 품종의 잔디를 널리 퍼치기 위한 사업에 한 사람 같이 떨쳐나서야 한다.”

    “미국 숨통 조일 수 있다”

    성격·자질·통치 스타일 유사 金, 실각한 소련 지도자 전철 밟나

    1961년 6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존 F 케네디 당시 미국 대통령(왼쪽)과 정상회담을 가진 흐루시초프(오른쪽).

    김정은이 핵과 미사일에 집착하면서 대외적으로 도발을 일삼는 것도 흐루시초프와 닮았다. 흐루시초프는 “대륙간 로켓을 가지고 있으면 미국의 숨통을 조일 수 있다”면서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1957년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쏘아 올리는 데 성공했다. 과학기술에서 이룬 성취는 인민의 애국심을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흐루시초프는 1959년 전략로케트군을 창설해 핵무기 및 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소련은 1961년 10월 인류 사상 최대의 핵실험에 성공했다. 수소폭탄 ‘차르 봄바’(Tsar Bomba·폭탄의 제왕)는 지금껏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강력한 무기다. 흐루시초프는 핵실험 직후 “모스크바에 있는 모든 창문을 깨뜨리게 될까봐 폭발 규모를 일부러 줄였다”면서 환호작약(歡呼雀躍)했다.

    흐루시초프는 1958년 서방 측을 향해 서베를린은 동독의 일부라고 선언했다. 1962년엔 쿠바에 워싱턴을 겨냥한 미사일 배치를 시도하면서 미국에 대한 도발에 나섰다.

    김정은은 권력세습 이후 장거리미사일을 두 차례 발사했다. 또한 3차 핵실험을 통해 ‘핵 보유 영구화’ 정책에 나서면서 한국, 미국을 상대로 도발 위협을 지속했다. “명령만 내리면 적들을 모조리 불도가니에 쓸어넣으라”고 겁박했다. 3월 31일엔 ‘경제·핵 무력 건설 병진노선’을 공식 채택했다. 또한 “정밀화·소형화된 핵무기들과 그 운반수단들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3월 31일 당 전원회의), “국방공업부문에서 정밀화·경량화·무인화·지능화된 무기들을 더 많이 만들라”(8월 25일 선군절 담화)는 등 대량살상무기(WMD) 개발을 독려했다.

    김정은은 지난해 3월 미사일지도국을 육·해·공군과 별도로 분리한 후 전략로케트사령부로 개칭했다. 흐루시초프의 전략로케트군 창설과 오버랩된다.

    제임스 에이머스 미군 해병대 사령관은 5월 29일 미국 워싱턴 브루킹스연구소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김정은이 흐루시초프를 닮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 달여 전 북한의 30세 소년 지도자(boy leader)를 떠올려보라. 날마다, 아니 매시간 위협을 계속하는 것을 보고 한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스스로 최고지도자라고 칭하면서 핵전쟁을 통해 미국을 파괴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1960년대 이후 이런 도발 위협을 들어본 적이 없다.”

    정보당국은 “김정은이 ‘평화공세’를 통해 대외 이미지 개선을 모색하면서 내부적으로는 핵 능력 증강에 주력하고 있다”면서 “흐루시초프 집권 시기 소련의 군사정책과 유사하다”고 분석했다.

    국제사회가 ‘경제·핵 무력 건설 병진노선’을 비난한 후 김정은은 핵 관련 언급을 자제하고 있으나 영변 원자로를 재가동하고 장거리미사일 엔진실험을 진행하는 등 WMD 개발을 지속하고 있다는 게 정보당국의 분석이다.

    흐루시초프는 1956년 2월 “사회주의, 자본주의가 공존할 수 있다”면서 평화공존론을 제기한 후 핵무기, ICBM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흐루시초프는 자서전에서 “핵의 시대가 오는 것이야말로 전쟁을 피하고 평화공존을 이루는 유일한 선택”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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