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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비밀

백자 달항아리

“내가 달항아리라 부르자 꽃이 되었다”

  • 이광표 서원대 교양대학 교수 kpleedonga@hanmail.net

백자 달항아리

  • ●멋 내지 않으면서도 은근한 멋 창조
    ●조선 100년간 만든 도자기, 국내외 20여 점
    ●김환기가 이름 붙인 달항아리가 주는 감동
    ●지난해 6월 서울옥션에서 31억 원 낙찰
[문화재청 제공]

[문화재청 제공]

2019년 6월 서울옥션 미술품 경매에서 조선시대 백자 ‘달항아리’ 한 점이 31억 원에 낙찰됐다. 국내 도자기 경매 최고가 신기록이었다. 한 해 전인 2018년에는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또 다른 백자 달항아리가 24억7500만 원에 팔렸다. 최근 10년 넘게 근현대미술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던 고미술 시장이기에 달항아리의 ‘선전’은 놀라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백자 달항아리에 매료된 사람이 은근히 많다. 왜 그렇게 달항아리를 좋아하는 걸까. 누군가는 “뽀얀 유백색과 단순한 형태, 넉넉함과 자연스러움”을 칭송하고 누군가는 “조선시대 유교문화의 검박함”을 높이 꼽는다. 그렇다. 하지만 이것이 매력과 인기 비결의 전부일까.


교토, 나라에서 생긴 일

일본 오사카 시립 동양도자미술관이 복원한 달항아리.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제공]

일본 오사카 시립 동양도자미술관이 복원한 달항아리.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제공]

1955년 어느 날, 30대 재일동포 사업가 정조문은 일본 교토의 산조(三條) 뒷골목 골동품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는 어느 갤러리 진열장 앞에 멈춰 서 유리창 너머 백자 달항아리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뽀얗고 둥그런 백자에 한동안 넋을 잃었다. 잠시 후 갤러리 문을 열고 들어가 주인에게 가격을 물었다. 200만 엔이었다. 당시로서는 집 두 채 값. 정조문은 달 모양의 항아리에서 고향을 발견했다. 일본 땅에서 정신없이 살아온 그에게 그 항아리는 깊은 여백이었다. 정조문은 주저하지 않고 12개월 할부로 백자 달항아리를 손에 넣었다. 그 유명한 ‘정조문 컬렉션’은 이렇게 시작됐다. 

정조문은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 어린 시절 일본 사회의 차별 속에서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정조문은 부두 노동자로 막일을 하면서 지냈다. 성인이 되면서 그는 사업을 시작했고, 조금씩 돈을 모았다. 1955년 백자와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우리 문화재를 알게 되면서 부지런히 우리 문화재를 수집했다. 수집 유물을 한데 모아 1988년 교토 북쪽 지역의 한적한 주택가에 박물관을 세웠다. 고려미술관이다. 고려미술관은 교토 지역의 문화유적을 답사하는 한국인이 꼭 들러야 할 코스로 자리 잡았다. 고려미술관의 간판은 역시 백자 달항아리다. 

1995년 7월 4일 대낮, 일본의 유서 깊은 고도 나라 지역의 관음원(觀音院)에 한 남자가 침입했다. 그는 성큼성큼 객실로 들어섰다. 거기 조선시대 백자 달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주위를 잠시 둘러보더니 달항아리를 두 손으로 번쩍 들어 올리곤 산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현장을 목격한 주지 스님이 큰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왔다. 경비원도 함께 달려와 남자의 앞을 막아섰다. 멈칫하던 남자는 달항아리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려 힘껏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달항아리는 산산조각이 났다.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에 주지 스님이나 경비원은 깜짝 놀라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는 사이 남자는 산문 밖으로 도주했고, 그 범인은 영영 잡지 못했다. 

주지 스님은 부서진 도자기 조각을 수습했다. 작은 가루까지 솔로 쓸어 봉투에 담았다. 커다란 도자기 조각은 신문지로 쌌다. 셀 수 있는 파편만 해도 300조각이 넘었다고 한다. 얼마 후 이 소식이 알려지자 오사카의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은 관음원 주지 스님에게 “달항아리 파편을 기증해 줄 수 있느냐”고 문의했다. 주지 스님은 거절했다. 그러나 미술관은 거듭 기증을 부탁했고, 결국 관음원은 부서진 도자기 파편들을 미술관에 기증했다.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은 부서진 달항아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했다. 조각들을 그대로 보관 전시할 것인지, 수리 복원할 것인지. 2년에 걸친 논의 결과, 항아리를 최대한 수리 복원하기로 했다. 산산조각 난 도자기를 수리 복원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지만 미술관은 그래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일본 내 최고 수준의 도자기 수리복원 전문가를 불러 상담을 시작했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가 손사래를 쳤다. 어려운 섭외 과정이었지만 결국 한 곳이 의기투합했고, 7개월 동안의 작업 끝에 복원에 성공했다. 

영국 런던의 영국박물관(브리티시뮤지엄) 한국실에 가면 백자 달항아리가 있다. 이 달항아리는 영국의 도예가 버나드 리치가 1935년 한국에서 구입한 것이다. 조선 도자기에 심취했던 그는 달항아리와 함께 영국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행복을 안고 갑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영국박물관이 이 달항아리를 소장하게 된 것은 1997년. 영국박물관이 한국실을 만들기로 했을 때였다. 그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컬렉터 가운데 한 사람인 한광호 한빛문화재단 명예이사장(서울 평창동 화정박물관 설립자)은 당시 영국박물관에 100만 파운드를 기부했다. 그 돈으로 영국박물관은 이 달항아리를 구입했고, 이후 한국실에 전시하고 있다.


런던에서 만나는 달항아리

영국 런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한국실에 전시돼 있는 백자 달항아리.

영국 런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한국실에 전시돼 있는 백자 달항아리.

런던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 1층 전시실 중간 통로엔 한국실이 있다. 이곳 한복판에 전시된 작품은 백자 달항아리다. 현대 도예가 박영숙이 제작한 것이다. 20세기 작품이지만, 그 분위기가 18세기 조선시대 달항아리 못지않다. 이 달항아리는 2012년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 ‘최고 컬렉션’으로 뽑힌 바 있다. 이 박물관은 영국 저명인사 다섯 명을 선정해 그들로부터 박물관 최고 컬렉션을 추천받는 이벤트를 진행한다. 그 일환으로 2012년 영국 배우 주디 덴치가 달항아리를 최고 컬렉션으로 꼽은 것이다. 박영숙의 달항아리는 조선시대 것보다 더 크다. 조선시대 백자 달항아리는 높이가 보통 40~50cm인데, 박영숙은 그 높이를 더 키워 60~70㎝에 이르는 대형 달항아리를 많이 제작한다. 그렇다보니 그의 달항아리는 더 호방하고 더 당당하다. 

18세기 전후는 조선시대 백자의 전성기였다. 깨끗함과 세련됨을 두루 갖춘 백자들이 만들어져 조선의 도자 문화와 음식 문화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달항아리다. 달항아리는 가로 세로의 비율이 1대 1 정도인데 그 모습이 둥근 달덩어리 같다고 해서 달항아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달항아리를 눈여겨보면 몸통 한가운데 가장 불룩한 부분이 어긋나 있다. 그 부분이 약간 비뚤어져 있어 어깨 부위의 좌우 높이가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다. 달덩어리처럼 완벽하게 동그란 모양이 아니라 약간 불균형하고 뒤뚱거리는 모양이다. 

왜 그럴까. 커다란 항아리의 경우,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따로 만든 다음 이 둘을 서로 붙여 완성하는 일이 많았다. 그렇다 보니 그 접합 부위가 이처럼 약간 뒤틀린 것이다. 조선시대 도공들은 이 접합 부위를 깔끔하게 다듬지 않고 서로 어긋나게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 부분을 칼로 깎아내 매끈하게 다듬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냥 두었다는 것은 조선백자가 완벽하고 인위적 아름다움보다는 약간 불완전하지만 인간적인 자연스러움을 추구했음을 의미한다.


달항아리의 미학과 명칭 미스터리

아무런 무늬를 넣지 않고 이렇게 단순한 모양으로 백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대단한 용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치장을 하는 것보다 치장을 자제하는 것이 더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멋을 내지 않으면서 은근한 멋을 창조하는 것, 이것이 백자의 미학이고 달항아리의 미학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가장 조선적이라고 한다. 이러한 형태의 백자는 중국과 일본에선 발견할 수 없는 것이기에, 사람들은 달항아리를 두고 한국적 미감이라고 말한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는 달항아리를 두고 “넉넉한 맏며느리 같다”고 했다. 미술사학자 겸 고고학자였던 김원룡은 “이론을 초월한 백의(白衣)의 미”라고 노래했다.화가 김환기는 “단순한 원형이, 단순한 순백이, 그렇게 복잡하고 그렇게 미묘하고 그렇게 불가사의한 미를 발산할 수가 없다. 실로 조형미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고 했다. 뽀얗고 둥근 달항아리를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무심(無心)의 사유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궁금증이 있다. 백자 달항아리에 관한 연구 논문이 의외로 적다는 사실이다. 조선 후기 백자 연구나 백자 항아리 연구는 많이 이뤄졌으나 백자 달항아리만을 독립적으로 다룬 학술논문은 드물다. 조선시대 백자의 역사 속에서 제작 기간이 그리 길지 않은 데다 현재까지 전해오는 조선시대 달항아리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백자 달항아리는 17세기 후반부터 약 100년 동안에만 만들어졌다. 조선시대 백자의 역사에서 보면 달항아리는 그리 긴 역사를 점유하지 못한 셈이다. 현재까지 전하는 백자 달항아리는 국내외 합쳐 20~30점에 불과하다. 

또 다른 궁금증은 달항아리라는 명칭에 관한 것이다. 10여 년 전 한 도예가와 이런 말을 나눈 적이 있다. 

“달항아리라는 이름을 누가 붙였을까요? 혹시….” 

백자 달항아리의 원래 이름은 달항아리가 아니었다. 우리는 흔히 항아리를 한자어로 호(壺)라고 한다. 그래서 백자 달항아리를 백자대호(白磁大壺)로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보는 달항아리 모양의 그릇을 조선시대엔 항(缸)이라 했다.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는 건 아니지만, 달 모양의 커다란 항아리는 백항(白缸) 백대항(白大缸)으로 불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것이 19세기말~20세기초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백자대호, 백자원호(白磁圓壺)로 불리게 됐다.


백자에 미친 김환기와 홍기대의 증언

1954년 김환기 아틀리에(왼쪽)와 김환기 작 백자와 꽃. [환기미술관 제공, 서울옥션 제공]

1954년 김환기 아틀리에(왼쪽)와 김환기 작 백자와 꽃. [환기미술관 제공, 서울옥션 제공]

최근 국내에서 가장 잘나가는 화가는 김환기다. 그의 추상화 ‘우주’가 2019년 11월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132억 원에 낙찰됐다. 2018년 5월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또 다른 추상화가 85억 원에 낙찰됐다. 국내 미술품 경매 상위권 작품은 모두 김환기의 추상화다. 박수근, 이중섭을 완벽하게 밀어냈다. 

그런데 김환기는 원래 백자 컬렉터였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1937년 귀국한 김환기는 1940년대 중반 조선백자에 빠져들었다. 그는 1944년 서울에서 잠시 종로화랑을 경영하면서 골동상과 백자를 만났고 이후 열심히 백자를 사들였다. 그는 훗날 “한때는 항아리 속에서 산 적이 있다… 시중에 나가면 자연히 골동품 가게로 발길이 향했다. 들르면 으레 한두 개 점을 찍고 나오게 됐으니 흡사 내 항아리 취미는 아편중독에 지지 않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6·25전쟁으로 인해 그의 백자 컬렉션이 많이 부서지고 없어졌지만, 그래도 1954년에 촬영한 김환기의 화실 사진을 보면 책장에 조선백자가 가득하다. 둥글고 큼지막한 달항아리도 보인다. 

2014년 흥미로운 책이 한 권 출간됐다. 1950년대 서울에서 구하산방(九霞山房)이라고 하는 골동 가게를 운영했던 홍기대가 쓴 ‘우당 홍기대, 조선백자와 80년’이란 책이다. 거기 6·25전쟁이 끝난 1953년 무렵의 얘기가 나온다. 당시 골동상회에서 백자를 즐겨 찾았던 사람으로는 화가 도상봉과 김환기가 대표적이었다. 홍기대는 이렇게 기록했다. 

“수화(김환기)가 도자기를 사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로…백자 항아리 중 일제 때 둥글다고 해서 마루쓰보(圓壺)라고 불렀던 한 항아리를 특히 좋아해 그가 달항아리라고 이름 붙였다. 키가 크고 점잖은 사람으로 명동에서 항아리를 사면 그걸 가슴에 안고 성북동까지 걸어갔다.” 

홍기대의 증언을 정리하면, 김환기가 커다랗고 둥근 백자대호를 1950년대 처음 백자 달항아리로 이름 붙인 것이다. 김환기와 교분이 두텁던 최순우는 그 후 달항아리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했다. 최순우는 1963년 4월 17일자 동아일보에 ‘잘생긴 며느리’라는 제목의 기고를 통해 달항아리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했다. 

“나는 신변(身邊)에 놓여있는 이조백자(李朝白磁) 항아리들을 늘 다정한 애인 같거니 하고 생각해 왔더니 오늘 백발이 성성한 노 감상가 한 분이 찾아와서 시원하고 부드럽게 생긴 큰 유백색 달항아리를 어루만져보고는 혼자말처럼 ‘잘생긴 며느리 같구나’ 하고 자못 즐거운 눈치였다.” 

김환기는 1940년대 말~1950년대 초 백자를 열심히 화폭으로 옮겼다. 그의 백자 항아리 그림에는 달이 등장한다. 김환기는 ‘청백자 항아리’(1955)라는 글에 이렇게 적었다. 

“내 뜰에는 한아름 되는 백자 항아리가 놓여 있다…칠야삼경(漆夜三更)에도 뜰에 나서면 허연 항아리가 엄연하여 마음이 든든하고 더욱이 달밤일 때면 항아리가 흡수하는 월광(月光)으로 인해 온통 내 뜰에 달이 꽉 차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에게 달은 백자 항아리였고 백자 항아리 또한 달이었다. 추상화로 들어서기 전 1950년대 김환기는 백자와 달을 하나로 받아들였다. 그는 그렇게 백자대호에 처음으로 달항아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김춘수와 김환기, 꽃과 달항아리

김환기가 백자대호, 백자원호에 달항아리라 이름 붙인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건 시인 김춘수의 시 ‘꽃’의 미학과 흡사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처럼 달항아리라는 새로운 이름은 백자대호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백자대호와 백자 달항아리라는 명칭을 비교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동일한 대상을 부르는 말이지만 다가오는 의미와 정감은 사뭇 다르다. 백자대항, 백자대호라는 명칭은 백자의 크기만을 감안한 것이다. 백자원호라고 하면 백자의 형태만을 보여줄 뿐이다. 그렇기에 백자대호나 백자원호는 지극히 형식적일 뿐 감동이 없다. 

그러나 달항아리라는 명칭은 다르다. 둥근 형태뿐 아니라 달이 지니고 있는 문학적, 예술적, 철학적, 역사적 이미지를 함께 연결해 준다. 우리가 달항아리라고 부르는 순간, 달에 얽힌 다양한 이미지가 연상돼 떠오르게 된다. 그것은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고, 사회적 역사적인 것일 수도 잇다. 때로는 탐미적일 수도 있다. 달항아리라고 부르는 순간, 사람들은 저마다의 풍요로운 기억을 자신도 모르게 이끌어낸다. 백자대호나 백자원호라고 부르는 것보다 훨씬 더 감동적이고 깊이와 여운이 있다. 그 이름이 그냥 백자대호였다면 지금과 같은 감동을 주지 못할 것이다. 지금도 백자대호, 백자원호로 부른다면 사람들은 이 항아리를 지금처럼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 문화재 가운데 이보다 더 아름답고 문학적인 명칭이 어디 있을까. 백자대호는 달항아리라는 이름에 의해 다시 태어났다. 전문 연구자와 전문 컬렉터들의 영역을 넘어 대중에게까지 다가간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가 저 커다란 조선백자를 백자대호라고 불렀다면 그것은 오래된 도자기, 오래된 그릇에 멈췄을 것이다. 하지만 달항아리로 부르는 순간, 그것은 아름다움의 대상이 됐고 새로운 감동이 됐다.


백자 달항아리

이광표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박물관’ ‘한국의 국보’ 등




신동아 2020년 4월호

이광표 서원대 교양대학 교수 kpleedong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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