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호

동아일보 창간 100년, 역사에 새긴 순간들

일제강점기 민족혼 고취 독재에 맞선 ‘언론자유’ 수호

  •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presskr@empas.com

    입력2020-04-01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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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최초 순직 기자, 동아일보 장덕준

    • 충무공 이순신 유적 보존

    • 문맹퇴치, 농촌계몽 운동 선봉

    • 3·15 부정선거 고발, 정치깡패 퇴출

    • 잡지 창간, 방송 진출로 보도·비판 기능 강화

    1920년 4월 1일 창간한 동아일보가 100주년을 맞았다. 지난 100년은 민족과 함께한 고난과 영광의 역사였다. 3·1운동의 결실로 태어난 신문이 100년을 이어오면서 현대사의 적나라한 실록(實錄)이 된 것도 의미 있다. 실록에는 자랑스러운 내용도, 부끄러운 모습도 남았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 역사가 연대기 순으로 담겨 있다. 높은 곳에서 최하층까지 다양한 사람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시대의 거울이다. 그렇기에 어떤 시기, 어느 지면이 더 중요한지는 보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일제강점기 20년 동안 발행된 지면도 한마디로 평가할 수 없다. 논조와 주장이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가 민족지 면모에 손색없는 제작 태도와 항일적인 논조를 보인 때가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 일본 군국주의 시기에 발행된 지면에서는 다른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민족 전체가 식민치하의 굴욕을 겪던 시기에 유독 신문만 선명한 항일 논조를 지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광복 후에도 6·25전쟁 기간과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 발행된 신문을 오늘 관점에서 평가하면 수긍하기 어려운 면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있었다 하더라도 동아일보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바른 길을 가고자 하는 초심만큼은 잃지 않았다고 본다. 발행 중단이라는 탄압을 받기도 하고 내부 갈등이 표출되는 때도 있었지만 100년을 버티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동아일보 100년 역사에서 주요 사건을 골라내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여러 각도에서 얼마든지 다른 평가를 내릴 수도 있다. 따라서 아래 열거하는 사례는 ‘주관적인 관점’에서 거칠게 선정한 동아일보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점을 미리 밝혀두고자 한다. 언론 역사에 기록될 주요 사건임은 틀림없다고 본다.

    1 최초의 순직 기자 장덕준

    한국 최초의 순직 기자 장덕준 선생 추도회를 보도한 동아일보 1930년 4월 3일자 기사. [동아DB]

    한국 최초의 순직 기자 장덕준 선생 추도회를 보도한 동아일보 1930년 4월 3일자 기사. [동아DB]

    추송(秋松) 장덕준(張德俊·1892~1920)은 우리나라 최초의 순직기자다. 그는 동아일보 창간 발기인이었고, 고향 황해도에서 동아일보 창간을 위한 주금(株金) 모집에 나서기도 했다. 창간 뒤에는 논설반원과 통신부장, 조사부장을 겸했다.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은 이상협, 논설주간은 장덕준의 동생 장덕수였다. 



    장덕준은 동아일보 창간 다음 날인 1920년 4월 2일자부터 13일자까지 10회에 걸쳐 ‘조선 소요(騷擾)에 대한 일본 여론을 비평함’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실었다. 여기서 소요란 3·1운동을 일컫는 말이다. 장덕준은 이 칼럼을 통해 3·1운동을 왜곡하는 일본 각계 주장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일본 교토제국대학 법학교수 오가와 고타로(小川鄕太郞)는 1919년 11월 ‘오사카아사히(大阪朝日) 신문’에 ‘조선통치론’이라는 글을 게재했다. 이 글에는 “조선에는 다수의 무식자가 있으며, 다수한 무식자는 독립의 이상이 없다”는 내용이 있다. 장덕준은 이에 반박하며 “조선인의 독립사상과 애국정신은 혈액과 뇌수에 의해 발생한다. 결코 소수 야심가와 선동가에 의한 것이 아니므로 선각자와 유식자를 단속, 압박하더라도 조선혼과 독립사상은 추호도 타격받을 리 없다”고 강조했다. 

    장덕준은 당시 지병인 폐결핵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논설을 동아일보에 지속적으로 발표하고, 전방위적인 취재 활동도 펼쳤다. 1920년 여름에는 동아시아를 방문한 미국 의원단을 취재하고자 중국 베이징에 다녀오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그해 9월 26일 일제로부터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다. 9월 24일과 25일자에 연속으로 실은 사설 ‘제사(祭祀)문제를 재론하노라’가 직접적 이유였다. 총독부는 이 사설이 일본인이 신념의 중추로 삼는 거울, 구슬, 칼 등 이른바 신기(神器) 3종을 모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황실의 존엄을 모독했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가 8월 30일부터 14회에 걸쳐 연재한 ‘대영(大英)과 인도’ 기사도 문제 삼았다. 영국이 인도에서 저지른 악정을 논하면서 암암리에 이를 조선과 대비했다는 것이다. 

    이 무렵 만주 훈춘(琿春)에서는 일본군이 조선 동포를 무차별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이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한 데 대한 보복으로 그 지역에 사는 조선인 5000여 명을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학살한 것이다. 장덕준은 이 소식을 듣고 10월 중순 현지로 달려갔다. 당시 신문이 정간 중이라 취재를 한다 해도 보도할 지면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혈담(血痰)을 토할 만큼 건강도 좋지 않았다. 그러나 “동포가 대량학살 됐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며 기차에 몸을 실었다. 

    이후 장덕준은 간도의 중심 도시 쥐쯔제(局子街)에서 좀 더 들어간 곳에 숙소를 잡고 일본군 만행을 취재했다. 당시 그가 쓴 글에는 “살풍경이 일어나 공포의 기운이 가득한 간도 일대에는 죄가 있고 없고 간에 남녀노소가 살육의 난을 당하고 있다”는 대목이 있다. 그렇게 취재에 매진하던 12월 어느 날 아침, 장덕준은 일본인 두세 명에게 불려 나간 후 영원히 소식이 끊어졌다. 이리하여 우리 언론사상 첫 순직 기자가 됐다. 나이 29세의 일이다.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1964년 4월 30일 언론 발전에 공이 많은 언론인 다섯 명을 선정해 신문회관에 초상화를 봉안했다. 이때 김인승 화백이 그린 장덕준의 초상화가 현재는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클럽에 걸려 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이 변색됐지만 불굴의 기자 정신만은 결코 퇴색하지 않고 날이 갈수록 빛을 발하고 있다.

    2 충남 아산 현충사 중수

    동아일보는 1931년 5월 13일 충무공 이순신 묘가 있는 충남 아산 땅이 후손의 부채 탓에 경매 직전에 놓인 상황을 보도했다. 이튿날인 5월 14일에는 1면에 ‘민족적 수치, 채무에 시달린 충무공 묘소’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우리들의 역사의 기록 면에서 그 인격으로나 그 사적(事績)으로나 충무공 이순신의 위를 갈 사람이 얼마 없으리라. 그의 위토(位土)와 묘소가 경매를 당하게 된다니 이런 변이 또 잇으랴 이런 민족적 욕이 더 잇으랴”로 시작되는 사설에는 필자가 적혀 있지 않다. 하지만 필치로 봐서 당시 편집국장 이광수가 쓴 것이 확실하다. 이광수는 역사적 인물 가운데 이순신, 생존 인물 중에는 안창호를 존경했다.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해 “백성과 국토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출한 민족적 은인 충무공의 위토와 묘소가 채권자 손에 넘어가는 것”을 민족적 범죄로 규정하면서 “우리는 일층 민족문화에 대한 숭앙심과 애착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광수는 그 직후인 5월 19일 직접 충무공 유적 순례길에 올랐다. 충남 온양, 전남 목포, 광주 등을 거쳐 전남 여수, 경남 통영 및 한산도까지 누비는 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충무공의 옛집과 묘소를 찾고, 후손과 지역 유지 등도 만났다. 막중한 편집국장 직책을 내려놓고 5월 29일까지 현장 취재를 마친 뒤 6월 26일부터 소설가 이광수로 돌아와 동아일보에 역사소설 ‘이순신’ 연재를 시작했다. 

    이후 동아일보가 주도한 충무공 유적보존 운동은 전국적인 호응을 얻어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사원들도 앞장서 성금을 냈고, 전국적으로 1만6021원30전이 모였다. 사당을 짓고 영정을 모시기에 충분한 액수였다. 이때 남은 돈 386원 65전은 현충사 기금으로 적립했다. 

    이광수 소설 ‘이순신’은 유적보존 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계속 연재돼 1932년 4월 3일 178회로 마무리됐다. 민족의 영웅 충무공을 조명한 이 소설의 감동이 유적보존 사업 성공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3 ‘글장님’ 없애기 브나로드운동

    동아일보 1931년 
7월 24일자에 실린 
브나로드운동 참가자 
모집 사고. [동아DB]

    동아일보 1931년 7월 24일자에 실린 브나로드운동 참가자 모집 사고. [동아DB]

    개화기 이래 우리 언론이 벌인 실천 운동 가운데 가시적인 성과를 낸 두 가지 대표적인 캠페인이 있다. 1907년 시작된 국채보상운동과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진행된 문자보급, 문맹퇴치 운동이다. 

    이 중 후자는 일제강점기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동시에 진행한 전국 규모의 민중 계몽운동이었다. 두 신문사가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던 무렵, 국내외에는 여러 위기가 중첩돼 있었다. 1927년 신간회가 창립돼 민족운동의 단일전선을 지향했으나 눈에 띄는 활동을 벌이지 못했다. 유럽에서는 독일 나치 세력이 약진해 세계전쟁 발발의 긴장이 높아갔다. 미국은 대공황(1929)을 겪고 있었고, 일본 또한 1927년 3월부터 몰아친 공황에 힘겨워했다. 일본 정부가 그해 4월 25일 지불유예(모라토리엄)를 선언해 조선 또한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여기에 제 1, 2차 조선공산당 사건(1925·1926), 광주학생운동(1929), 만주사변(1931) 등이 이어지며 조선총독부의 강압정책이 도를 더해갔다. 

    일제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한국어 말살을 포함한 민족 말살 정책을 추진했다. 일본어를 ‘국어’라 하고, 학교 현장에서도 일어를 쓰도록 강요했다. 한국어 사용은 금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글을 보급하는 건 실천적인 항일운동이었다. 

    문자보급 운동이 본격화한 1930년 무렵 조선 인구는 2000만 명이 약간 넘었는데 이 중 1700만 명가량이 문맹이었다. 인구의 90%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문맹퇴치가 시급하고 중요한 당면 과제였음을 보여준다. 

    동아일보는 1928년 3월 17일자 사설 ‘문맹퇴치의 운동’에서 모음 10자, 자음 14자를 합쳐 24자가 전부인 과학적 문자를 물려받고도 민족의 9할이 문맹으로 있는 건 민족적 치욕이라고 설파했다. 이에 “거족적으로 문맹퇴치 운동에 앞장서게 됐다”고 취지를 밝혔다. 또 3월 25일부터 29일까지 연일 사회면 머리에 ‘글장님 없애기 운동’ 계획을 소개한 뒤 창간 기념일인 4월 1일을 기해 이 운동의 본격 시작을 선언하기로 계획했다. 

    이를 위해 동아일보 본사와 지·분국이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췄다. 전국에 선전 포스터를 걸고 소년단 시가행진, 비행기를 동원한 전단 살포, 인력거와 자전거에 꽂고 다닐 선전 깃발 제작, 독자에게 배부할 한글 원본 등을 준비했다. 4월 2일에는 각계 명사 30여 명을 초빙해 강연회를 열 계획도 세웠다. 연사로는 조병옥(趙炳玉), 민태원(閔泰瑗), 이종린(李鍾麟), 윤치호(尹致昊), 최두선(崔斗善), 안재홍(安在鴻), 홍명희(洪命憙), 최현배(崔鉉培), 최남선(崔南善), 김기전(金起田), 방정환(方定煥), 유각경(兪珏卿), 권덕규(權悳奎) 등 당대 국어학계 권위자와 언론인 등 교육, 종교, 사상, 언론계 명망가를 두루 섭외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그해 3월 29일 돌연 금지 명령을 내렸다. ‘문맹퇴치’라는 표어가 러시아에서 번져온 것이며, 포스터에 그려진 붉은 근육의 노동자 모습이 공산주의 색채를 풍긴다는 이유였다. 소년 집회나 가두행렬이 청소년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고도 주장했다. 이런 이유로 관련 행사 전체를 금지하며 ‘우리글 원본’도 압수했다. 조선총독부는 나아가 운동 금지 사실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까지 압수했다. 

    1928년 추진한 문자보급운동은 총독부 방해로 좌절됐지만 동아일보는 굴하지 않았다. 1931년 문맹타파를 비롯해 농촌계몽 운동으로까지 범위를 넓힌 ‘브나로드’운동을 시작했다. 브나로드는 러시아어로는 ‘민중 속으로’라는 뜻으로, 1873년부터 1895년까지 러시아 지식인이 농민층에 파고들어 벌인 계몽운동 이름이다. 동아일보는 그해 7월 16일 ‘제1회 학생 하기(夏期) 브나로드 운동-남녀학생 총동원, 휴가는 봉사적으로’라는 기사를 내며 브나로드운동의 출발을 알렸다. 당시 구호는 “배우자! 가리키자! 다함께!”였다. 이후 1934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된 이 운동은 큰 성과를 거뒀다. 

    편집국장 이광수는 연재소설 ‘이순신’을 끝낸 지 9일 뒤 바로 새 소설 ‘흙’ 연재를 시작했다. 1932년 4월 12일부터 이듬해 7월 10일까지 271회에 걸쳐 이어진 이 작품은 농촌계몽 운동을 그린 캠페인 소설이다. 소설가 심훈(沈熏·1901~1936) 또한 이와 같은 주제의 소설 ‘상록수’를 써서 브나로드운동이 대중적 지지를 얻는 데 기여했다.

    4 일장기 말소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한 동아일보 지면. [동아DB]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한 동아일보 지면. [동아DB]

    1936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 2면에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 사진이 실렸다. 그의 가슴에 달려 있던 일장기가 지워진 상태였다. 

    1930년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이 벌어진 뒤 국내 언론 논조는 크게 위축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항일 정신이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다.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 사건이 이를 입증한다. 

    손기정이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 우승한 날은 1936년 8월 9일이다. 신문은 모두 이 소식을 대서특필하고 ‘축승란’까지 마련했다. 각계의 축하 전화와 전보가 신문사에 쇄도했고, 도처에서 축하금이 답지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등 조선 3대 신문은 20여 일 동안 이 소식에 지면을 아끼지 않았다. 이처럼 손기정의 마라톤 제패를 찬양한 것은 민족적 자존심을 고취하려는 의도였다. 조선총독부는 이런 상황과 신문 논조를 예의 주시했다. 

    각 사에 “손기정 기사 취급을 주의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각계에서 계획한 축하회, 손기정 기념체육회관 설립 발기회, 연설회 등 각종 행사를 금지했다. 그럼에도 언론과 사회 각계의 열의는 식지 않았다. 손기정을 국민 영웅으로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가 조성된 이때, 동아일보가 그의 가슴에 붙은 일장기를 말소한 사진을 실었다. 

    사실 그보다 12일 앞선 8월 13일자 2면에도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이미 실었다. 이때는 검열 당국이 눈치채지 못했는데 8월 25일자 신문에 더욱 분명히 삭제한 사진이 실리면서 문제가 커진 것이다. 총독부는 이 사건이 단순한 과실로 일어난 게 아니라고 봤다. 기자들이 마음 깊이 민족의식을 지니고 있어 발생한 것으로 규정하고 동아일보에 정간처분이라는 강경 조치를 취했다. 

    경찰은 당시 사건 관련자 여러 명을 구속했다가 40일 만에 풀어주면서 이들에게 신문사를 떠나도록 강요했다. 이 일로 운동부 이길용, 조사부 소속 화가 이상범, 사진부 신낙균(과장)·서영호·백운선, 편집부 임병철, 사회부 장용서가 퇴사했다. 이길용 등 5명은 앞으로 언론기관에 일절 관여하지 않으며, 만일 다른 사건에 연루되면 이 사건의 책임까지 가중해 엄벌을 받을 것을 각오한다는 내용의 각서까지 썼다.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 등 간부들도 당시 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신문사를 떠났다.

    5 송진우, 장덕수 피살

    광복 후 많은 언론인이 정계에 진출했다.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1890~1945)도 그중 한명이었다. 고하는 언론인, 교육자, 독립운동가, 정치가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 지도자 48명에 포함돼 옥고를 치렀다. 동아일보 창간 당시에도 옥중에 있던 그는 1921년 9월 출옥 후 사장에 취임했다. 31세의 혈기 넘치는 청년 시절이다. 이후 25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동아일보 사장 또는 주필을 맡은 그는 민족 언론을 이끄는 실질적인 견인차였고, 민중의 지도자였다. 하지만 1945년 12월 30일 새벽 서울 원서동 자택에서 여섯 명의 암살범이 쏜 총에 맞아 눈을 감고 말았다.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1894~1947)는 2년 뒤인 1947년 12월 2일 자택에서 암살당했다. 동아일보 창간 당시 26세 청년으로 초대 주간을 맡은 그는 창간호 1면에 실린 ‘주지(主旨)를 선명(宣明)하노라’를 집필했다. 동아일보 창간의 역사적 의미와 사명을 압축적으로 서술한 글이다. 당시 그가 선언한 ‘①조선민중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하노라 ②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③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라는 정신은 오늘날까지 동아일보 사시(社是)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동아일보가 창간 후 곧 주간제를 폐지하면서 부사장 겸 주필(1921.9~1923.4)을 맡게 된 장덕수는 신임 사장 송진우와 함께 초기 동아일보를 이끌었다. 1945년 12월 동아일보 복간 때 다시 취체역(取締役·과거 이사를 이르던 말)을 맡았으나 주 활동무대는 정계였다. 한국민주당 외무부장, 정치부장 등을 맡아 수석총무(당수) 김성수와 함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 총격을 당했다. 

    장덕수의 형 장덕준이 한국 최초의 순직 기자가 된 것은 앞서 살펴봤다. 동생 장덕진(張德震·1898~1924)은 상하이임시정부 의경단원(義警團員)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려다 중국인 총에 맞아 숨졌다. 3형제가 모두 비명(非命)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6 4·19 부정선거 규탄

    1960년 4·19 학생 혁명 분위기를 언론이 앞장서 조성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동아일보는 집권당의 비리와 이에 맞서는 각계 투쟁을 끈질기고 용감하게 보도했다. 국민 편에 서서 집권당 횡포를 고발하고 부정선거를 감시한 언론이 있었기에, 국민 또한 힘을 얻어 거리에 나설 수 있었다. 

    특히 위험을 무릅쓰고 취재에 앞장섰던 사람들로 사진기자의 공로를 잊을 수 없다. 사진기자는 언제나 사건 현장에 있어야 하고, 위험한 일이 벌어지면 가장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해 생생한 장면을 포착해야 한다. 따라서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기 십상이다. 1960년 당시 동아일보 사진기자들은 만연했던 정치깡패 난동을 정면에서 촬영하고 부정투표 현장을 목숨 걸고 폭로해 국민적 분노를 일으켰다. 이것이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4·19 직후 발간된 타블로이드판 사진화보집 ‘민주혁명의 기록’에는 당시 동아일보 사진부장 최경덕, 차장 이명동, 기자 박용운·홍성혁 등 네 명이 촬영한 현장 사진 283장이 담겨 있다. 3·15 부정선거부터 이승만 대통령 하야까지 역사의 순간순간이 담겨 있는 이 책은 6월 1일 초판 2만 부를 인쇄한 지 10여 일 만에 전량 매진됐다. 다음 달 나온 재판 1만 부도 다 팔렸다. 

    이 책은 단일 사건을 주제로 신문사에서 발간한 최초의 보도사진집이다. 보도사진의 위력과 사진이 갖는 진실성, 정확성, 역사성 등을 유감없이 발휘한 역사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 책을 통해 사진기자들이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의 서장을 여는 데 큰 구실을 한 것이 널리 알려졌고. 보도사진 및 사진기자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높아졌다. 이후 국내 보도사진의 일대 전환기가 펼쳐지게 된다.

    7 신동아 필화 사건

    1968년 동아일보가 발행하는 월간지 ‘신동아’ 12월호에 김진배·박창래 두 기자가 공동 집필한 ‘차관(借款)’ 기사가 실렸다. 원고지 250매 분량의 심층 취재 기사였다. 정부의 외자도입 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인 이 기사에는 정권이 특정 차관업체에 특혜를 베풀고 반대급부로 정권 유지를 위한 자금을 제공받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신동아가 발간되자 즉시 중앙정보부가 움직였다. 필자인 두 기자를 비롯해 신동아 부장 손세일, 기자 심재호·이정윤 등을 차례로 연행 또는 자진출두 형식으로 소환해 심문했다. 그 가운데 몇 사람에게는 반공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이에 야당이 국회 대정부 질의를 통해 정부의 언론탄압을 규탄했고, 편집인협회와 기자협회가 당국 처사에 항의하는 공동성명을 냈다. 

    하지만 살아 있는 권력의 힘은 강했다. 이 필화(筆禍)로 동아일보 발행인이 바뀌고 중진 언론인 다수가 신문사를 떠나야 했다. 동아일보가 권력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 천관우(동아일보 주필), 홍승면(신동아 주간 겸 논설위원), 손세일(신동아 부장) 등을 해임한 데 따른 것이다. 이는 권력의 노골적인 언론 탄압이 만천하에 드러난 상징적인 사건이자, 언론이 권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불행한 사례로 언론계에 긴 파장을 남겼다. 이를 계기로 국내 언론 현실에 대한 자기반성과 비판이 기자협회 등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됐다.

    8 광고 탄압

    1974년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을 앞세워 언론을 강력히 통제했다. 이에 동아일보 기자들은 그해 10월 ‘자유언론수호대회’를 열고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했다. 

    “(전략)우리는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유민주사회 존립의 기본요건인 자유언론 실천에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선언하며 우리의 뜨거운 심장을 모아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1. 신문, 방송, 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우리의 일치된 단결로 강력히 배제한다. 

    1. 기관원의 출입을 엄격히 거부한다. 

    1. 언론인의 불법 연행을 일절 거부한다. 만약 어떠한 명목으로라도 불법 연행이 자행되는 경우 그가 귀사할 때까지 퇴근하지 않기로 한다.” 


    이후 동아일보는 인권운동가나 야당 인사 등을 조명하는 기사를 잇달아 게재했다. 정권은 이를 통제하고자 기업들이 동아일보에 광고를 내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일선 기자들의 언론자유 수호운동을 차단하기 위해 권력이 꾸민 음모였고, 유신 정권의 언론 목조르기였다. 그해 12월부터 광고 계약을 해지하겠다는 회사가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고 동아일보는 경영에 큰 위기를 맞았다. 1974년 12월 26일자 동아일보 4, 5면 하단은 광고를 내겠다는 회사를 찾지 못해 백지 상태로 세상에 나갔다. 

    이러한 언론탄압은 국민의 거센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격분한 시민들이 동아일보에 격려 광고를 게재하며 ‘보이지 않는 손’의 횡포에 맞서 싸웠다. 저명한 지식인과 문인, 종교인, 야당 정치인뿐 아니라 시민과 학생 등 수많은 사람이 기명 또는 무기명으로 동아일보에 광고를 게재해 탄압받는 언론사를 격려했다. 이들의 응원이 광고 없는 광고란을 가득 채웠다. 언론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국민의 노력이었다. 

    광고 해약 사태는 만 7개월 후인 1975년 7월 16일 무렵부터 풀리기 시작해 며칠 사이에 순식간에 마무리됐다. 이후 광고면이 제 모습을 찾았지만, 동아일보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광고탄압 기간에 신문 구독이 약 12만 부 증가했지만 경영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동아가 입은 가장 큰 피해는 이 사태가 원인이 돼 일어난 기자 해직과 그로 인한 인적 손실이었고, 그들과의 메울 수 없는 깊은 갈등이 이후 오래 이어졌다. 이른바 ‘동아일보 사태’는 1970년대 언론계를 뒤흔든 시련이었고, 우리 언론이 일찍이 경험한 적 없는 진통이었다.

    9 잡지 ‘신동아’ 창간

    1931년 11월 발간된 ‘신동아’ 창간호 표지. [동아DB]

    1931년 11월 발간된 ‘신동아’ 창간호 표지. [동아DB]

    1931년 창간된 ‘신동아’는 우리나라 잡지 근대화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매체로 평가된다. 1930년대는 일제가 만주사변, 중일전쟁 등의 침략전쟁을 확대해 나가던 때였다. 한반도가 일제의 병참기지화한 시기에 동아일보가 발행한 이 잡지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동아일보라는 안정적인 모회사가 발행해 충실한 편집이 가능했고, 개인의 주장을 담기보다 민족의 공기(公器) 구실을 수행하려고 노력한 것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에 따라 전국 보급망을 가진 다른 신문사의 잡지 발행을 자극해 이른바 ‘신문잡지 시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신동아는 통권 59호까지 발간한 뒤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의 영향으로 1936년 폐간됐고, 28년 후인 1964년 복간했다. 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으로 정부와 언론이 팽팽히 대립하던 시절, 신동아는 ‘정신에 있어 동아일보의 연장’이라는 대원칙 아래 ‘읽히는 잡지’를 표방했다. 1960년대 신동아는 193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다른 일간지가 잡지 발간에 눈을 돌리게 만들었고, 이때부터 다시 한번 우리나라에 ‘신문잡지 시대’가 열렸다.

    10 방송 진출

    동아일보는 1963년 4월 25일 동아방송(DBS)을 개국했다. 신문사가 경영하는 최초의 라디오 방송이었다. 동아일보 사시(社是)에 따라 ‘귀로 듣는 동아일보’를 목표로 보도 및 비판 기능을 강화했다. 하지만 동아방송은 1964년 6·3사태 때에는 ‘앵무새’라는 고발 성격 방송칼럼을 발생해 설화(舌禍)를 입었다. 프로그램 관련 기자와 PD 등 6명이 계엄보통군법회의 공판정에 섰고, 계엄이 해제된 후 5년 1개월 만에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적잖이 고초를 겪었다. 1980년에는 신군부의 강압적인 언론통폐합에 따라 11월 30일 고별방송을 끝으로 DBS가 폐방되는 비운을 맞기도 했다. 이후 2011년 개국한 채널A가 디지털 뉴미디어 시대의 종합편성채널로 자리매김했다. 

    앞에서 밝힌 대로 동아일보 100년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사건 몇 개를 고르는 일은 무모하고 불가능하다. 지면도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나 일단 기억될 사건을 주관적으로 선정했음을 밝혀둔다.


    정진석
    ● 중앙대 영문과, 서울대 석사(신문학), 영국 런던정경대 박사(언론학)
    ● 前한국기자협회 편집실장, 관훈클럽 사무국장, 언론중재위원회 위원, 방송위원회 위원
    ● 前한국외국어대 사회과학대학장 겸 정책과학대학원장
    ● 現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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