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 확산 맞닥뜨린 공포와 혼란
“늑장 대응으로 국민이 죽는 것보단 과잉 대응이 낫다”
한국의 치버 박사, 미어스 조사관은 어디에…
다시 시작할 힘을 주는 영웅들의 활약
[네이버 영화 제공]
요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2weeks’ ‘#2주간’, ‘#2주간자발적격리’ 같은 해시태그를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해시태그와 함께 집에서 할 수 있는 운동, 독서, 그림 그리기, 수예 등 취미를 소개하는 시민이 많다. 상황이 이러니 극장 대신 가정에서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와 인터넷TV(IPTV), 온라인 공연 실황 중계 등을 통해 영화나 공연 영상을 감상하며 문화예술을 향수(享受)하는 이가 적잖다. 당분간 이 같은 현상이 유지될 듯하다.
깜깜한 공간에서 커다란 스크린을 마주하거나 강렬한 조명 아래서 배우들의 움직임을 생생하게 관람해야만 영화와 공연의 참맛을 누릴 수 있는 걸까. 많은 마니아는 이런 생각으로 극장 및 공연장을 고집한다. 하지만 집에서 영화 또는 공연 영상을 감상하는 것에도 색다른 매력이 있다.
아무것도 만지지 마라! 누구도 만나지 마라!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요즘, ‘방콕족’ 눈길을 사로잡는 건 최근 대한민국 현실을 소름 돋을 정도로 정확하게 예측한 영화 ‘컨테이젼’이다. 지금 시급한 것은 국가 시스템에 대한 절망감, 외딴섬에 갇힌 듯한 무기력감을 떨치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는 희망과 용기를 갖는 것이다. 혐오와 편견을 조장하는 왜곡된 정보를 믿지 않으려 해도 뾰족한 방책이 없으니 신뢰가 무너지고 우후죽순 개인 돌출행동이 일어난다. 영화 ‘컨테이젼’을 통해 우리는 전염병 확산이라는 한계 상황에 처한 인간의 공포와 불신, 혼란을 보며 인간 본연의 모습을 성찰한다. 이를 통해 각자 자신을 돌아보고 내일 다시 떠오를 태양을 기다리고 기대한다(*이 칼럼에는 ‘컨테이젼’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맷 데이먼, 주드 로, 로렌스 피시번, 마리옹 코티아르, 귀네스 펠트로, 케이트 윈즐릿 등 역대급 초호화 캐스팅으로 화제를 모은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2011년 작 ‘컨테이젼’은 개봉 당시 관객 수 20만 명이라는 초라한 흥행 성적을 냈다. 이내 팬들 기억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9년이 지난 지금, 신종 바이러스가 예견된 재앙이었음을 암시하는 스토리로 인해 안방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공장 기공식에 참가하고자 홍콩으로 출장 간 베스(귀네스 펠트로 분)는 귀국 비행기에서부터 마른기침을 하며 이상 증세를 보인다. 인구 330만 명이 사는 미국 미네소타의 집으로 돌아온 베스가 고열에 시달리는 사이, 그의 남편 토마스(맷 데이먼 분)가 발작을 일으키며 시달린다. 홍콩 카지노에서 베스와 스친 사람들 또한 홍콩(인구 210만), 런던(860만), 도쿄(3660만), 시카고(920만) 등 세계 여러 대도시에 흩어져 급사한다. 한 등장 인물이 홍콩에서 사망한 가족 유골함을 중국 본토 광둥성(9610만)으로 들고 가는 사이, 바이러스가 소리 없이 전파되는 대목도 나온다. 각지에서 사망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자 사태의 심각성을 안 미국 질병통제센터장 엘리스 치버 박사(로렌스 피시번 분)는 베스가 사는 미네소타로 역학조사관 에린 미어스(케이트 윈즐릿 분)를 파견한다. 최근 사태가 접촉에 의한 바이러스 전파로 인해 일어났음을 알아차린 에린은 지역사회에 “아무것도 만지지 말고 누구도 만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공무원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모른다. 언론 보도를 명절연휴 이후로 늦추자고 제안할 뿐이다. 이들의 안이한 태도를 보며 아연실색하는 에린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안타까운 요즘 한국 상황이 떠오른다.
치버 박사의 침착한 대응, 가짜뉴스는 판치고…
돈을 벌기 위해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블로그 저널리스트 앨런. [Warner Bros 배급]
치버 박사는 이 신종 바이러스가 세계 인구의 1%를 앗아간 1918년 스페인독감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양산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에 대통령이 지하벙커로 몸을 피하고 국회는 온라인으로 운영되며 시카고 전체가 봉쇄된다. 빠른 속도로 퍼지는 신종 바이러스 때문에 한낮에도 인적 드문 거리를 보며 사람들은 음모론에 빠지고 불안에 떤다. 기능을 상실한 도시에선 약탈, 폭동이 난무한다. 인터넷에 떠도는 가짜뉴스를 맹신하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은 점점 더 혼란해진다.
블로그 저널리스트 앨런(주드 로 분)은 돈에 눈이 멀어 가짜뉴스를 방방곡곡 퍼뜨리는 인물이다. 개나리꽃이 바이러스 치료제라는 그의 거짓말이 대중을 현혹해 시중에서는 개나리꽃 응축액을 줄 서도 구할 수 없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정부가 백신 임상실험에 성공하지만 모든 시민에게 공급하려면 1년 가까이 걸린다. 이제 “누가 먼저 수혜를 보느냐”가 뜨거운 감자가 된다. 백신을 손에 넣으려는 사람들의 아비규환 속에 백신 대량생산이 시작되고, 추첨을 통해 순서대로 공급하면서 사회는 서서히 안정을 찾아간다.
대혼란을 틈타 며칠 만에 450만 달러(약 53억 원)를 벌어들이며 돈방석에 앉은 앨런은 진짜 백신이 개발되자 부작용 등에 대한 가짜뉴스를 또다시 퍼트린다. 결국 수사 당국에 체포되지만 그 순간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가짜뉴스 유포를 통해 번 돈으로 보석금을 치르고 유유히 구치소를 나오는 앨런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일부 SNS 지식인을 떠올리게 한다.
난세를 구한 영웅들의 희생
임상실험을 하지 않은 백신을 자신의 몸에 투여하는 엘리 연구원. [Warner Bros 배급]
서스만 박사(엘리어트 굴드 분)도 빼놓을 수 없다. 미국 질병통제센터는 세계적 감염을 유발한 원인 물질이 치료제와 백신이 없고 전염성은 강한 신종 바이러스임을 인지하고는 위험을 줄이려고 자체 보유한 모든 바이러스를 폐기하도록 부설 연구소에 명한다. 서스만 박사는 이에 강력히 항의하며 위험을 무릅쓰고 항바이러스 백신 개발에 성공한다. 제약회사의 거액 제안을 거절하고 정부에 아무 대가 없이 백신을 넘긴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영웅으로는 질병통제센터 엘리 연구원(제니퍼 엘 분)이다. 임상실험을 제대로 하려면 몇 달이 소요되는 상황. 하지만 800만 명의 감염자가 쓰러진 상황에서 한순간도 더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한 엘리는 목숨 걸고 자기 몸에 백신을 투여한다.
사람은 평소 어려운 상황일수록 서로 도와야 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본인이 손해 본다고 생각하는 순간 현실은 극단으로 치닫는다. 인심은커녕 염치도 찾기 어려운 최일선에서 밤낮으로 헌신하는 영웅들은 눈물 젖은 땀방울을 흘린다. 2020년 대한민국에서 누가 사심 없는 영웅인지, 또 누가 앨런 같은 철면피 선동가인지 언젠가 가늠할 날이 올 것이다.
결국 모든 문제의 근원은 인간?
인간은 하루 평균 3000번 정도 얼굴을 만진다고 한다. 손잡이, 수도꼭지, 엘리베이터 버튼, 물컵 등을 통해 다른 사람과 셀 수 없이 자주 접촉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생활 도처에 바이러스 매개체가 깔렸다. 코로나19는 야생박쥐에서 시작된 바이러스가 중간 숙주를 거쳐 인간에게 옮겨온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 속 바이러스도 박쥐에서 중간 숙주 돼지를 거쳐 사람에게 온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영화는 이 원인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인간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베스가 일하는 다국적기업은 토지 개발을 위해 박쥐 서식지를 파괴한다. 갈 곳을 잃은 야생박쥐는 인간 거주지 근처까지 쫓겨 온다. 돼지우리 근처를 날아가던 박쥐가 흘린 바나나를 돼지가 먹고, 그 돼지를 요리하던 카지노 요리사가 베스와 손을 잡은 채 기념사진을 찍는다. 이후 카지노에서 베스와 접촉하고 자기 얼굴을 만진 이들은 모두 이 바이러스에 감염됐다. 이후 전파 과정을 거치며 일파만파 바이러스가 확산한다.
소더버그 감독은 영화 ‘컨테이젼’을 통해 이기적인 인간의 탐욕이 야기할 제2·제3의 바이러스 출몰을 경고한다. 이 영화에는 당대 최고 배우가 총집결했지만, 눈물을 자아내는 감정적인 장면이 없다. 빠른 전파속도와 높은 치사율을 가진 바이러스가 세상에 퍼져나가면서 드러나는 인간 군상의 속살을 심층적으로 다룬다. 세기말 도시 풍경을 담담하고 건조하게 그린다. 영화에서 사람 간 만남이 단절된 주인공들은 고립감을 느끼고 불안·공포·충격과 우울함을 느낀다. 이것이 격한 분노와 울분으로 분출된다. 현 상황과 딱 들어맞는 영화 ‘컨테이젼’을 통해 마비된 이성을 깨우고 숨어버린 감성을 끌어내면 어떨까. ‘코로나 블루(우울증)’라는 말이 나오는 요즘 세상에서 격리된 스스로를 다독이고 ‘힐링’해야 할 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