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견주와 함께 찾아오는 봄
하늘이 맑아진다는 절기 ‘청명’이 코앞이다. 4월 4일 청명 즈음에는 맑은 하늘을 배경 삼아 온갖 꽃이 흐드러진다. 모든 것이 피고 움트는 아름다운 이 시절을 우리 선조들은 한 잔 술에 담아 마셨다. 진달래 넣은 두견주, 복숭아꽂 넣은 도화주 등이 음력 3월 청명을 대표하는 술이다.청명을 선두로 계절 흐름에 맞게 술을 빚고 나누어 마시기가 이어진다. 선조들의 시간은 농사 흐름과 맞물리며, 태양의 24절기와 달의 달력(음력)을 중심으로 계획돼 있다. 우리 삶과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식탁 위에 올라오는 섭생 흐름을 보면 우리는 여전히 선조들 시간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이제부터 말하는 절기는 모두 음력 기준이다.
옛 사람들은 5월 단오에 창포 뿌리즙과 찹쌀로 빚은 창포주를 마셨다. 창포주는 다가올 무더위를 견디도록 몸에 기운을 북돋고, 정신을 맑게 하는 효과를 지닌 술이라 여겨졌다. 한창 농사가 바쁜 5월에는 품앗이 때 먹을 술도 따로 빚었다. 이를 품앗이 술이라 하여 서로서로 나누어 먹었다.
6월 보름인 유두절에는 더위를 잠시 피해 물가에 나앉아 달착지근한 동동주를 마셨다.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다는 뜻의 유두(流頭)에서 알 수 있듯 이 시기는 양력으로 치면 7월 말, 8월 초 경이다.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는 때다.
7월 백중이 되면 농사일이 한풀 꺾이며 한숨 쉬어간다. 이때는 막걸리를 농주로 빚어 걸게 나눠 마셨다. 8월 한가위에는 햅쌀로 신도주(新稻酒)를 빚어 차례상에 올리고 귀하게 마셨다. 쌀알이 동동 뜨도록 짧게 익힌 동동주로 달게 빚어 즐겼다. 9월 중양절에는 만발한 국화로 술을 빚어 마셨다. 바람이 차가워지면 빚은 술을 끓이거나, 증류해 마시기도 했다. 막걸리나 술지게미에 한약재를 넣고 끓인 모주가 흔했다.
핫하고 힙한 전통주의 세계
새해 첫날에는 액운을 물리치는 술인 도소주(屠蘇酒)를 가족이 나눠 마셨다. 정월 대보름이 되면 오곡밥 먹기 전에 꼭 귀밝이술(이명주·耳明酒)을 마셨다. 아이들도 살짝 입을 대도록 했는데 한 해 동안 좋은 소리만 들으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소주이렇게 사시사철 마신 술은 당연히 집집마다 빚는 ‘가양주(家釀酒)’였다. 빚는 사람마다 맛이 다르고, 지역마다 재료나 비율, 양조법도 달랐다. 조선시대 실학자 서유구가 생을 바쳐 정리한 ‘임원경제지’에는 200여 가지의 양조법이 기록돼 있다. 하지만 이 책에 소개되지 않은 것, 기록되지 않아 전해지지 못한 양조법을 짐작해보면 1000여 가지는 될 것으로 예측된다고 한다. 이토록 다양했던 가양주는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밥 지을 쌀도 부족했던 1960년대를 지나며 자취를 감춰버렸다.
1960년대에 생산된 막걸리는 쌀 대신 밀가루와 옥수수가루 등으로 빚으니 영 맛이 없어 사람들 눈길에서 멀어졌다. 대신 소주, 맥주, 양주가 막걸리 자리를 하나둘 차지했다. 다행히도 어려운 와중에 양조법을 이어온 양조가들이 현재는 무형문화재, 지방문화재로 등재돼 옛 맛을 되살리고 있다. 또한 신흥 양조장들이 생겨나며 잃어버린 가양주의 맥을 찾을 뿐 아니라 전에 없던 가양주 새싹 틔우기도 해내고 있다. 신흥 양조장의 공통점이라면 개성과 실력으로 단단히 무장해, 마치 패션 소품처럼 ‘핫’하고 ‘힙’하며 ‘쿨내’가 진동하는 전통주를 선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 견학 가능한 양조장이 여럿 있다. ‘더술’ 홈페이지를 참조하자. 개성 있는 신상 전통주 소식이 궁금한 사람에겐 네이버 카페 ‘대동여주도’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