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적 절차로 권력 쥔 후 권위주의 체제 회귀
포퓰리스트, 서민 대변 투사 자처·전문가 견해는 기득권 치부
반대파는 적폐로, 언론은 가짜뉴스로 매도하는 오만함
선악 논리로 상대편 ‘거악’ ‘수구’ 몰아세워 민주적 규범 파괴
적폐청산 명목으로 법원 정치화, 삼권분립 훼손
“친구에게는 무엇이든지, 적에게는 법으로”식 권력 남용
‘문빠’, 무솔리니의 ‘검은 셔츠단(Black Shirts)’ 연상
지식인, 정치 양극화 및 극단 지지층 유·무형 압박에 자기검열
여야 떠나 총선에서 민주주의 후퇴 세력에 경종 울려야
지난해 10월 5일 서울 서초구 서초대로에서 조국 당시 법무부 장관을 옹호하는 촛불문화제가 열린 가운데, 보수단체 회원들이 경찰 저지선을 사이에 두고 맞불집회 형식의 ‘조국 구속 태극기 집회’를 개최하고 있다. [박해윤 기자]
샌더스 의원은 정치·이념 성향이 급진적이어서 표의 확장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럼에도 그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반작용에 힘입어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미국 우선주의를 표방하며 이민자, 소수자를 폄하하는 ‘백인 대통령’ 트럼프에 대한 반감이 샌더스 지지로 표출하는 것이다. 백인들의 분노가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면 이젠 그 반대편의 분노가 샌더스를 뒷받침하고 있다. 샌더스 의원이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될지는 미지수지만, 트럼프-샌더스 현상은 미국 사회의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민주화 투사도 집권 후 권위주의 유혹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월 29일(현지시간) 미국 메릴랜드주 옥슨힐에서 열린 보수단체 집회에 참석해 성조기를 껴안고 있다(왼쪽). 버니 샌더스 미국 상원의원이 2월 22일(현지시간) 미국 텍사스주 엘패소 집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AP=뉴시스, AP=뉴시스]
한국 또한 세계적 흐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문빠(문재인 대통령의 열성 지지그룹)’와 태극기 부대, 서초동 대 광화문 집회로 상징되는 극렬한 대립은 정치적 양극화가 한국의 ‘뉴 노멀(New Normal)’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개인 간, 집단 간 상호불신이 커지고 흑백논리와 진영논리가 득세하며 곳곳에서 민주주의 후퇴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민주주의의 후퇴는 오늘날 미국과 유럽의 지식인 사회에서 큰 화두와 고민거리다. 국제 인권감시단체인 프리덤하우스에 따르면 민주주의 국가의 비중은 1980년에는 전 세계 30%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 비중은 ‘제3의 민주화 물결’에 힘입어 1990년대 중반 절반을 넘었다. 하지만 2006년 62%로 정점을 찍은 후 매년 감소하다가 지난해에 이르러서는 48%로 쪼그라들었다.
과거와 비교해 지금의 민주주의 후퇴 현상은 몇 가지 새로운 특징을 보이고 있다. 첫째, 민주적 절차를 거쳐 선출된 지도자들이 민주주의를 점진적으로 훼손하고 있다. 군사독재나 공산주의 혁명과 같은 급진적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합법적 절차로 당선된 지도자들에 의해 민주주의가 뒷걸음질 치고 있다는 뜻이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Chavez), 터키의 에르도안(Erdogan), 필리핀의 두테르테(Duterte) 정권은 민주적 절차에 따라 권력을 잡은 후 권위주의 체제로 회귀했다.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소련의 철군을 주장했던 헝가리의 민주화 투사 오반(Orban)도 집권 후 권위주의의 유혹을 떨쳐내지 못했다. 이들은 정치적 라이벌을 적으로 삼고, 기득권을 악(惡)으로 규정하며, 언론을 가짜뉴스라고 조롱했다. 민주주의의 성지로 불린 영국, 200년 민주주의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아시아에서 가장 긴 민주주의 역사를 갖고 있는 인도에서조차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둘째, 이 과정에서 법치주의(rule of law)라는 절차적 정당성은 확보되고 있을지 몰라도, 민주주의 정신과 규범(democratic norm)은 파괴되고 있다. 하버드대의 정치학자인 스티븐 레비츠키(Steven Levitsky)와 대니얼 지블랏(Daniel Ziblatt)은 저서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에서 날카로운 지적을 내놓는다. 민주적 규범의 핵심인 상호인정/존중(mutual tolerance)과 권력의 절제(forbearance)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형식적 법치주의만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관용과 타협보다 증오와 대립의 정치가 앞서고, 권력 행사가 균형이 아닌 남용으로 미끄러지면 정치적 양극화는 필연적 결과가 된다. 미국에서는 1990년대 뉴트 깅리치 하원의장의 등장에서부터 2000년대 티파티운동(Tea Party movement)에 이르기까지 증오와 대립의 정치가 서서히 무르익었다. 이는 2010년대 들어 ‘트럼프 시대’로 귀결됐다.
‘거악’ 맞선 투사 자처하며 대중 감성 자극
셋째, 최근의 정치적 양극화는 국수주의적 포퓰리즘과 결합해 대중적 폭발력을 확보하고 있다. 미국 우선주의를 부르짖는 트럼프, 브렉시트(Brexit)를 이끌고 있는 영국의 존슨, 종교적 근본주의자인 인도의 모디(힌두교)와 터키의 에르도안(회교), 극우 민족주의자인 브라질의 보르소나우 등 민주적 규범을 파괴하고 있는 지도자들은 국수주의 감성을 자극하며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다. 트럼프는 막말 정치와 법치주의의 훼손으로 탄핵 위기에까지 몰렸지만 40%대의 견고한 지지층을 유지하고 있다. 공포정치를 마다하지 않는 두테르테의 지지율은 80%를 넘나들며 고공 행진하고 있다.이들은 자신들을 ‘거악’과 싸우며 서민을 대변하는 투사로 포장한다. 그뿐만 아니라 인종적, 종교적 소수자나 이민자들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또 정치 논리나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는 데 익숙하고 전문가의 견해는 기득권을 대변하는 것으로 치부하고 무시한다.
넷째, 푸틴의 러시아와 시진핑의 중국이 국제사회로 영향력을 넓히면서 민주주의의 침체를 가속화하고 있다. 러시아는 2016년 미국 대선 개입 의혹에 휩싸여 있는 데서 볼 수 있듯 타국의 국내 정치에까지 관여하고 있다. 중국은 일대일로(一帶一路), 공자학원(孔子學院) 등을 통해 경제·문화적 영향력을 키우며 중국식 거버넌스가 서구보다 우월하다는 담론을 전파하고 있다.
푸틴과 시진핑은 권위주의 지도자에게 유용한 장기집권 모델을 제공할 뿐 아니라, 직·간접적으로 그들을 돕고 있다. 대표적 친미 국가였던 필리핀은 두테르테 집권 후 미국, 유럽연합(EU)과는 거리를 두는 반면 중국, 러시아에 한층 더 가까워졌다. 미국 민주주의기금(National Endowment for Democracy)의 한 보고서는 글로벌 민주주의의 침체를 조장하는 러시아와 중국을 ‘샤프파워(Sharp Power·음성적 수단을 동원해 상대국을 압박하고 자국의 이익을 챙기는 것)’로 규정했다.
다섯째, ‘샤프파워’가 증대하는 데 비해 자유민주주의의 보호막은 얇아지고 있다. 작금의 세계정세는 파시즘과 나치즘의 위력에 민주주의가 힘없이 무너졌던 1930년대와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 그때도 무솔리니나 히틀러처럼 민주적 절차에 의해 권력을 잡은 지도자들에 의해 민주주의가 파괴됐다. 그 대가는 전쟁과 참혹한 인명피해였다. 그래도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였던 미국과 영국 등이 힘을 합쳐 전례 없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지금은 미국·영국마저 민주주의의 침체에서 자유롭지 못한 형국이다. 오랫동안 민주주의를 연구해 온 스탠퍼드대 동료 교수인 래리 다이아몬드는 ‘불길한 바람(Ill Winds)’이라는 최근 저서에서 중국과 러시아에서 불어오는 전체주의의 바람을 막기 위해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미국 우선주의’를 외치는 트럼프가 건재한 상황에서 미국이 과연 그럴 힘과 의지가 있는지 의문이다. 오히려 브라질, 영국, 필리핀 등 세계 곳곳에서 ‘리틀 트럼프’의 출현을 부채질하는 실정이다.
촛불을 소유물로 착각해 반대파 적폐로 규정
문재인 정부는 대통령 탄핵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 이후 등장했다. 덕분에 성숙한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국민 염원에 힘입어 민주화를 공고히 할 절호의 기회를 맞았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 투사들이 주축인 현 집권 세력에 대한 기대감도 적지 않았다. 정권은 이에 부응하듯 촛불정신에 담긴 참여민주주의와 숙의민주주의 구현을 위해 국민청원게시판 설치와 공론화위원회 구성 등 나름 고무적인 시도를 했다.하지만 국민청원게시판은 정파적 청원으로 얼룩졌고, 공론화위원회는 대의 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역할에 그쳤다. 오히려 정치적 양극화, 민주적 규범의 훼손, 국수주의적 포퓰리즘 행보를 보이며 민주주의 침체의 늪으로 빠지고 있다. 몇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① 선악의 정치와 양극화: 민주주의 훼손의 첫 징후는 권력을 가진 자가 정치적 반대편을 악마화하고 제거하려 할 때 나타난다. 현 정부가 ‘상호존중과 권력의 절제’라는 민주적 규범을 훼손하며 정치적 양극화를 가속화한 대표적 사례가 소위 ‘적폐청산’이다. ‘촛불혁명’으로 집권했다고 자부하는 현 집권세력은 철지난 도덕적 우월감에 취해 수구세력을 청산하고 한국 사회의 주류를 바꾸겠다고 공언했다.
국민들은 경제, 사회, 이념적 양극화를 좁히고 상생과 통합의 사회가 열리길 간절히 염원했다. 집권세력은 이에 부응하기보다 촛불을 자신들만의 소유물로 착각해 반대세력은 모두 청산해야 할 적폐로 규정하고, 보수 언론은 가짜뉴스로 매도하는 오만함을 보였다. 전임 정부와 차별화하고 과거의 부패를 척결하는 행위는 새로울 것이 없다. 하지만 선과 악의 이분법 논리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상대편을 ‘거악’ ‘수구 기득권’으로 몰아세우는 행위는 민주적 규범을 파괴하는 전형적 패턴이다.
집권세력은 사회적 약자 편에서 개혁을 주도할 적임자를 자처했다. 하지만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광범위한 가족 비리 의혹에서 보듯이 결국 그들도 또 다른 기득권일 뿐이었다. 정당한 비판을 두고도 겸허하게 수용하지 않고 수구세력의 반동 행위라며 비난했다. 조 전 장관 임명에 비판적이었던 여당 국회의원조차 전직 검사란 이유로 반(反)개혁 세력으로 몰았다.
주말마다 대규모로 열린 서초동 대 광화문 집회, 즉 조국 수호 대 조국 반대 집회는 사회·정치적 양극화로 치닫고 있는 한국사회의 서글픈 자화상이다. 관용과 타협보다는 개인 간, 집단 간, 세대 간 불신 풍조와 갈등이 커지며 한국 사회는 점점 분열하고 있다. 폭력이 폭력을 낳듯이 보수 야당이 집권하면 ‘신(新)적폐청산’을 시도할 가능성이 커졌다. 반대 세력의 대통령 탄핵 요구는 일상화될지도 모른다.
법원, 정치권력 통제 따르고 눈치 보게 돼
문희상 국회의장(의장석 왼쪽에서 두 번째)이 지난해 12월 23일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처리 절차에 따라 본회의에 부의된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전격 상정하고 있다. 그 주위로 자유한국당(현 미래통합당) 의원들이 문 의장을 둘러싸고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양회성 동아일보 기자]
검찰청법은 검사의 청와대 파견을 금지하고 있다. 또 ‘퇴직 후 복귀’라는 편법을 막기 위해 현 정부는 검사 퇴직 후 1년이 지나지 않으면 청와대 비서실에 임용될 수 없도록 관련 규정을 강화했다(2017년 3월). 법관은 검사보다 더 높은 정치적 독립성을 요구받는다. 정작 청와대는 관련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비서관 임명을 강행했다. 위법은 아닐지라도 사법권 독립을 훼손하는 일이다(법관 파견을 금지하는 법원조직법 개정은 2020년 2월에서야 이뤄졌다).
이들이 전직 대법원장 구속 등 사법부 적폐청산을 주도했다. 법조계에서는 법원이 정치권력의 통제를 따르고 눈치를 보게 됐다는 한탄이 나오고 있다. 판사 출신의 한 로스쿨 교수는 필자에게 “한때 법원에 몸을 담았던 사람으로서 그 일련의 과정은 쉽게 보고 있기 힘든, 부끄러운 일의 연속이었다”고 토로했다.
법원에서 적폐청산의 목소리를 드높이던 판사들이 법복을 벗자마자 (여당) 국회의원 후보로 나선 것도 삼권분립의 원칙을 훼손하는 일이다. 그들이 내세우는 출마의 변은 한결같이 자신이 사법개혁의 적임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사법부를 정치권력의 통제하에 둘 위험성을 증대시키는 것 아닐까. 더구나 특정 판결(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 등) 내지 특정 사안(법원의 블랙리스트 사건, 전국법관대표회의 등)을 통해 대중적 인지도를 얻은 판사가 곧바로 정치권에 가면, 그들이 행한 판결 역시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의심받게 된다. 그 의심은 판결의 공정성, 사법부의 독립성에 대한 시비까지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런 선례는 정치적 야심이 있는 일부 판사들로 하여금 법리가 아닌 정치 논리에 기반한 판결을 내리도록 부추길 위험성이 크다. 입법부 수장인 국회의장을 지낸 인사를 국무총리에 임명한 것도 법적으로는 아무 하자가 없다 하더라도 삼권분립을 규정한 헌법 정신에 부합한다고 할 수 없다.
게임의 룰(rule) 변경과 내로남불
③ 게임의 룰(rule) 변경과 꼼수: 민주주의의 근간은 국민주권을 실현하는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에 있다. 선거법을 민주주의를 담보하는 게임의 룰이라고 하는 이유다. 힘의 우위에 있다고 해서 상대를 무시한 채 게임의 룰을 자기편에 유리하도록 바꾼다면 그 결과를 인정하고 승복하기 어렵다. 2012년 도입된 국회선진화법도 이런 취지에서 국회의장 직권 상정과 다수당의 날치기를 통한 법안 처리를 금지토록 한 법안이다. 그런데 여당은 제1야당을 무시한 채, 소수 야당들과 손잡고 ‘4+1’ 협의체를 만들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통과시켰다. 제1야당은 무제한 필리버스터로 맞서며 폭력도 불사했고, 결국 다수의 여야 의원이 검찰에 고발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설사 소수정당의 원내 진입을 용이하게 해 민의의 대표성을 강화한다는 취지가 타당하더라도, 덧붙여 법안 통과가 절차적 정당성을 갖는다 하더라도, 상대가 동의하지 않는 룰로 게임을 한다는 것은 민주주의 정신에 위배된다. 법안 통과를 무력하게 바라봐야 했던 제1야당은 위성비례정당이라는 사상 초유의 기형 정당을 만들었다. 이를 꼼수라고 공격하던 여당은 ‘민병대’ ‘의병’ 운운하며 유사한 위성비례정당을 만들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꼼수는 꼼수를 낳고 연동형 비례제를 도입한 원래의 취지는 무색해지고 말 것이다. 일련의 사건이 모두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졌는데 무엇이 문제냐고 항변할 수 있다. 하지만 여야 공히 민주적 규범을 무시하고 민주주의 정신을 훼손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④ 권력남용과 내로남불: 시대와 체제를 막론하고 권력을 가진 자는 힘을 행사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권력을 쥔 자가 인내하고 힘을 절제할 때 공고해진다. 탄핵 후 집권한 문재인 정부는 반대편 제거를 위해 ‘권력의 칼’을 마구 휘둘렀다. 지난 정부에서 불이익을 받았던 윤석열 검사를 파격적으로 서울중앙지검장에 임명해 적폐청산을 주도하게 했다. 각 행정부처에 적폐청산위원회를 만들어 이전 정권에서 요직을 맡았던 이들을 솎아내고 국가의 주요 정책들을 적폐의 대상으로 규정해 폐기했다. 전·현직 정책 실무자들에 대한 과도한 책임 추궁과 처벌은 공무원들의 사기를 위축시켰다. 실력보다는 이념적 충성도가 더욱 중요해지면서 공직 사회에서 프로페셔널리즘이 무너졌다.
이 과정에서 ‘내로남불’의 정치가 가시화했다. 무소불위의 검찰 권력을 제한하고 견제하는 조치는 시대정신이며, 피의사실 공표·포토라인 세우기·언론플레이 등 인권을 침해하는 잘못된 수사 관행을 없애는 일은 만시지탄이다. 하지만 반대파를 처벌하는 데는 이런 관행을 맘껏 활용한 후에 자기편에게 적용을 금지한다면 누가 수긍하겠는가. 법무부 장관을 앞세워 집권세력의 비리의혹을 조사하고 있는 검찰총장의 수족을 자르거나 검찰조직을 개편하는 것 또한 법적 권한이라 하더라도 ‘검찰 독립성’의 취지에 어긋나는 일이다.
브라질의 독재자 바르가스(Vargas)처럼 “친구에게는 무엇이든지, 적에게는 법으로(For my friends, anything; for my enemies, the law)”라는 이중 잣대를 들이댄다면 법치주의의 근간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문 정부가 촛불정신을 존중한다면 검찰이 기소한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 등을 철저히 조사하고 그 결과에 책임져야 한다. 정권 초 검찰개혁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윤 총장이 이제는 정권 최대의 고민거리가 됐다. 권력의 절제라는 민주적 규범을 무시한 현 집권세력이 자초한 결과다.
‘문빠’의 사이버 테러
문재인 대통령이 2월 23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범정부대책회의에 참석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정부 고위관계자가 ‘의병, 죽창’을 호소하며 대중 동원에 나서는 것도 21세기 민주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국수주의적 대중 동원의 배경에는 극단적 지지층인 소위 ‘문빠’가 있다. 이들은 문자폭탄이나 댓글 등을 통해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이나 그룹에 대한 사이버 테러도 서슴지 않는다. 원하는 판결이 나오지 않았다고 해당 판사를 ‘신상털기’ 하고, 대통령에게 경제가 ‘거지 같아요’라고 솔직한 심정을 피력한 상인에 대해 인신공격을 하고, 견해가 다른 국회의원에 문자폭탄을 퍼붓는 행위는 폭력 행사를 서슴지 않았던 무솔리니의 ‘검은 셔츠단(Black Shirts·극단적 국가주의를 앞세워 반대파를 공산주의자, 적으로 간주해 무차별 공격한 활동대)’을 연상케 한다. 조 전 장관 임명 과정에서 나타났듯이 이들 열혈 지지자에게 사실관계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흑백논리와 편 가르기 속에서 오직 아군과 적군만이 존재할 뿐이다.
포퓰리즘이 득세하는 상황에선 전문가의 견해는 무시되고 정치 논리와 감성의 정치가 힘을 얻는다. 현 정권은 최저임금제를 두고 전문가들이 낸 “양극화를 줄이겠다는 당위성이 있다 하더라도 자영업자 비율 등을 감안할 때 점진적으로 인상해야 한다”는 의견을 ‘가진 자의 논리’로 폄하했다. 보호받아야 할 비정규직이 직장을 잃고 자영업자가 어려움을 겪는 아이러니가 생겨도 마땅한 대책은 없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국면에서는 의사들이 초기부터 중국인 입국 금지를 주장했지만 정권은 “중국의 어려움이 바로 우리의 어려움”이라는 생뚱맞은 논리로 묵살했다. 한국 사회가 감염병의 공포 속에 엄청난 사회·경제·심리적 비용을 지불하고 있지만 사과는커녕 중국 옹호에 급급하다.
대북정책 등 외교 안보 사안도 마찬가지다. 문 정부는 북한이 비핵화라는 전략적 결단을 했다고 공언해 왔다. 오판이었음이 분명해졌건만, 정권은 지금도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를 제기하는 전문가들을 ‘반(反)평화세력’으로 매도하는 실정이다. 남북 정상 간 ‘도보다리 산책’ ‘남북미 3국 대통령의 판문점 깜짝 만남’ 등의 연출은 국민의 감성을 자극하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그 결과는 참담하다. 외교·안보 분야에서 역대 최악의 정부라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마이웨이를 고집할 뿐이다.
‘민주당만 빼고’라는 칼럼을 쓴 대학교수를 집권당이 고발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오죽하면 문 정부 지지자에서 비판자로 돌아선 ‘친노, 반문’ 진보 지식인들이 나왔겠는가. 지식인들은 정치 양극화가 심화하고 극단 지지층이 자행하는 유·무형의 압박이 거세짐에 따라 침묵하거나 자기검열하고 있다. 민주 사회에 필요한 합리적·양심적 목소리도 점점 약해지고 있다.
갈가리 찢긴 사회, 누군가 경종 울려야
바야흐로 한국 사회 곳곳에서 민주주의 후퇴의 징후가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를 단순히 민주화의 ‘성장통’ 정도로 여기고 지나쳐서는 결코 안 된다. 각각의 징후는 법적으로 최소한의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 그 변화의 강도나 속도도 매우 점진적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위험할 수 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이런 징후에 대한 체감도가 약해 방치하다가는 후일 감당할 수 없는 큰 비용을 치러야 할지 모른다. 분야별로 민주적 규범이 조금씩 훼손돼 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 모든 것이 결합해 한국 민주주의를 통째로 침체의 늪에 빠뜨릴 수 있다.전문가들조차 민주적 절차에 따라 권력을 쥔 지도자들이 설마 권위주의로 회귀하겠느냐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이와 같은 우려는 부정할 수 없는 세계적 흐름이 됐다. 자유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로 여겨지던 미국과 영국이 침체의 늪에 빠져들고 있는 반면, 새로운 권위주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 중국, 러시아 등은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다. 외부 환경이 녹록지 않은 셈이다. 최근 국내에서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차이나 게이트’ 의혹도 이러한 맥락에서 철저한 규명이 필요하다.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민주주의 침체의 파고를 한국은 과연 넘어설 수 있을까. 권위주의의 억압과 싸우며 피땀으로 일군 민주주의를 지키려면 더 늦기 전에 흑백·진영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민주주의 정신과 규범에 대한 깊은 성찰과 강한 실천의지를 보여야 한다.
특히 현 집권세력은 자칫 민주주의 후퇴의 주범으로 역사에 남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 절차적 정당성만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민주적 규범의 내재화와 실천이다. 그래야 이념, 계급, 세대로 갈가리 찢긴 갈등과 극단의 정치를 극복할 수 있고, 분노의 정치를 상생의 정치로 되살릴 수 있다. 한국이 민주주의의 침체에서 벗어나려면 다가오는 총선에서 여·야, 진보·보수를 떠나 민주주의 후퇴 세력에 대한 경종을 울려야 한다. 최종 심판은 유권자의 몫이다.
신기욱
● 1961년 출생
●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미국 워싱턴대 사회학 석·박사
● 미국 아이오와대, UCLA 교수
● 現 미국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교수 및 아시아 태평양 연구소장
● 저서 : ‘슈퍼피셜 코리아: 화려한 한국의 빈곤한 풍경’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 ‘하나의 동맹, 두 개의 렌즈’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