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조실록에는 깊은 밤 나타나 뭇사람을 놀라게 한 ‘검은 기운’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전염병이 창궐하자 사람들은 ‘검은 기운’을 원인으로 지목했고, 그 풍설이 지역 관리의 보고서를 통해 임금 귀에까지 들어갔다. 정치적 혼란기에 나타나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한 검은 기운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일러스트레이션·이강훈/ 워크룸프레스 제공
조선왕조실록에는 단군에 대한 제사 얘기가 여러 번 등장한다. 실록 1472년 음력 2월 6일 기록을 보자. 황해도관찰사 이예가 성종에게 보낸 보고서가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당시 황해도 구월산 일대에 사는 이들은 단군이 신령으로 변해 구월산에 들어갔다고 믿었다. 이예가 조사해 보니 구월산 봉우리 가운데 하나인 소증산에 단군을 기리는 사당도 있었다.
그 안에 놓인 세 개의 위패에는 각각 ‘환인천왕(桓因天王)’ ‘환웅천왕(桓雄天王)’ ‘단군천왕(檀君天王)’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단군뿐 아니라 아버지 환웅, 그리고 단군의 할아버지뻘 되는 환인에게까지 제사를 지냈다는 얘기다. 지역 사람들은 그곳을 ‘삼성당(三聖堂)’이라고 불렀다.
구월산 일대에서 시작된 소문
황해도 구월산 삼성당. [미한사 홈페이지]
그러나 조선 정부는 이를 달갑지 않게 여긴 듯하다. 이예가 조정에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지역 주민들은 과거 삼성당에 환인·환웅·단군의 위패뿐 아니라 나무 조각상도 있었다고 전했다. 그런데 태종조 문신 하륜이 “잡다한 신의 조각상을 숭배하는 풍습을 폐하라”고 하면서 사라졌다고 한다. 언제부턴가는 삼성당에서 공식적으로 지내던 제사도 사라진 모양이다. 이예는 보고서 마지막 부분에 그 결정이 가져온 괴상한 결과에 대해 기록했다. “삼성당 제사를 멈춘 뒤 근처 마을에 악병(惡病)이 돌았다. 원래 사람이 많이 살던 곳인데 이후 인가가 텅 비었다.”
정부 고관들은 이 보고서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실록에는 예조(禮曹)가 “제사를 지내지 않아 악병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는 괴탄무계(怪誕無稽)하다”고 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그렇지만 이예가 이 보고서를 올리기 전 구월산 근처에서 이상한 병이 돌고 그로 인해 지역 사람들이 큰 피해를 당한 건 사실로 보인다. 1452년 음력 6월 28일자 실록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당시 문신 이선제가 임금 단종에게 올린 글에 따르면 황해도에서 전염병이 시작돼 북으로 평안도, 남으로는 경기도 지역까지 퍼졌다. 어떤 지역에서는 “민가를 싹쓸이했다”는 말이 나올 만큼 사람이 많이 죽었다.
이 내용을 조정에 알리며 이선제는 자신이 오래전 들은 이상한 소문 한 가지를 덧붙인다. 1438~1439년 즈음 황해도 지역 하급관리 오성우가 이선제에게 했다는 얘기다. 당시에도 황해도엔 전염병이 돌고 있었다. 그때 오성우는 “구월산 단군사당을 평양으로 옮긴 뒤 병이 시작됐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선제가 전하는 오성우 이야기는 매우 구체적이다. “단군사당을 옮긴 뒤 밤이 되면 괴이한 기운이 뭉쳐 마치 귀신 모양같이 된 것이 돌아다녔다. 검은 기운이 진(陣)을 이뤘고, 움직일 때 소리도 났다.” 이것을 목격한 사람이 소문을 내면서 ‘구월산 산간 마을에서 시작된 여기(氣·못된 돌림병을 생기게 하는 나쁜 기운)’에 대한 이야기가 지역에 널리 퍼졌다고 한다.
구월산 삼성당에서 환인·환웅·단군에 대한 제사를 멈춘 시점이 언제인지, 실록에는 정확히 기록돼 있지 않다. 그러나 조선 전기 언제쯤 그런 결정이 내려진 후 지역에 병마가 돌자 사람들은 그것을 ‘여기’의 소행으로 여긴 모양이다.
이선제는 단종에게 이런 풍설을 전하며 “단군을 평양으로 옮길 때 이성(二聖, 환인과 환웅)은 어느 땅에 두었겠습니까. 단군이 토인(土人)에게 원망을 일으킬 뿐 아니라 이성(二聖)도 반드시 괴이한 것을 마음대로 하고 여역을 지어 백성에게 해를 끼칠 것입니다”라고 고언했다.
깊은 밤 돌아다니는 검은 기운
대체 그 무렵 밤이면 나타나 지역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렸다는 그 검은 기운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실록에는 풍설에 떠도는 ‘무서운 검은 기운’에 대한 이야기가 더 실려 있다. 눈에 띄는 것은 인종이 세상을 떠난 1545년 음력 7월 2일의 기록이다. 내용은 이렇다.“상께서 승하하시던 날 서울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뭇사람이 요사한 말을 퍼뜨리기를 ‘괴물이 밤에 다니는데 지나는 곳에 검은 기운이 캄캄하고 뭇수레가 가는 듯한 소리가 난다’ 했다. 사람들이 이 소문에 현혹돼 떼를 지어 떠들고 궐하(闕下)에서 네거리까지 징을 치며 쫓으니 소리가 도성 안에 진동했다. 순졸(巡卒)도 막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3∼4일 계속된 후에 그쳤다.”
구월산 삼성당의 ‘전염병 신령’ 이야기와 똑같지는 않지만, 밤중에 돌아다니는 검은 기운과 큰 소리 등의 대목은 분명히 닮았다.
나는 실록에 실린 이 두 가지 ‘검은 기운’ 이야기의 배경에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선제가 삼성당 괴물 이야기를 꺼낸 때는 단종 즉위 무렵이다. 김종서와 수양대군의 대립이 심화하면서 계유정난이 다가오던 시절이다. 한편 인종이 세상을 떠나던 무렵엔 대윤과 소윤 두 정치 세력이 강하게 대립했다. 문정왕후가 자기 친아들을 임금으로 만들고자 인종을 죽음으로 몰았다는 풍문이 세간에 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괴물 이야기는 정치 혼란이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면서 탄생한 것으로 봐야 할지도 모른다. 전염병 같은 위기가 닥쳤을 때 정치가 사람을 위로하지 못할망정, 정략적 목적으로 혼란을 부추겨서는 안 된다. 그런 교훈을 조선 밤을 거닐던 검은 괴물이 알려주고 싶었던 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