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호

유럽역사기행

페스탈로치가 꿈꾼 ‘교육 혁명’의 도시, 취리히

  •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명예교수 chonmyongdo@naver.com

    입력2020-04-14 09:5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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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해력과 인권의식 키운 츠빙글리 개혁교회

    • 인구 35만에 박물관 50여 곳, 200여 미술관·화랑

    • 페스탈로치가 만든 근대교육의 요람

    • 직물→수력→중화학→금융도시 ‘빠른 변신’

    취리히 전경.

    취리히 전경.

    스위스는 잘사는 나라다. 국가경쟁력도 세계 4위(2019년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 IMD 조사 결과)고, 1인당 국민소득도 세계 1위이다(2017년 기준 8만1209달러). 이 나라의 사회적 여건을 고려할 때 믿기 어려운 일이다. 전체 인구는 860만 명(2019년 현재)에 불과한 데다 26개의 칸톤(州)으로 잘게 분할돼 있다. 연방 수도는 베른이지만 여러모로 취리히와 제네바의 영향력이 더욱 크다. 지역주의에 휘말리기 쉬운 구조로 국가정체성을 세우기 곤란한 조건이다. 

    그러나 스위스는 결속력이 강한 연방국가를 만들어냈다. 그들은 칸톤 중심으로 생활한다. 약 10만 명 이상의 시민이 공동으로 청원하면 칸톤에서는 주민투표를 통해 가부를 결정한다. 1874년의 헌법에 명시된 사항이다. 그들은 각자가 부담할 조세율까지 직접 개정한다. 스위스의 칸톤은 해마다 20번 이상 주민투표를 실시한다. 스위스처럼 직접민주주의를 과감하게 도입한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그들은 대의정치와 직접민주정치를 적절히 혼합해 많은 성과를 내고 있다. 부러운 일이다.

    교통요지에 자리한 문화예술도시

    취리히의 경관은 수려하다. 시내에 큰 호수가 있고, 그 곁으로 리마트강이 흐른다. 여름철에는 호수에서 수영도 할 수 있고, 배를 타고 출근하는 사람들도 볼 수 있다. 호수가 드넓어 유람선을 타고 일주하는 것도 멋진 일이다. 

    까마득한 옛날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곳에 세관이 있었다.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이다. 이곳은 북이탈리아와 프랑스 및 독일을 하나로 연결하는 길목이었다. 취리히라는 도시의 이름이 세관을 뜻하는 라틴어(Turicum)에서 유래했다니 신기하다. 

    그런데 취리히 사람들은 정치보다는 문화예술을 훨씬 중시한다. 스위스 전체가 그러하다. 그래서 스위스 화폐인 프랑에는 정치가의 초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건축가, 화가, 조각가, 음악가, 작가 및 역사가의 초상만이 등장한다. 



    부자 도시답게 도심에는 유서 깊은 명소가 즐비하다. 우선 취리히 호수와 리마트 강변을 따라 늘어선 고풍스러운 건물이 시선을 잡아끈다. 린덴호프, 그로스뮌스터 대성당, 프라우엔 뮌스터, 거기에 성 페터 교회의 시계탑도 빠뜨릴 수 없다. 또, 400년 된 시청과 길드 관(館), 명문 취리히대와 연방공과대도 둘러볼 가치가 충분하다. 

    이 가운데서도 린덴호프는 꼭 가봐야 한다. 리마트강 왼쪽 기슭의 언덕 위에 있는데 옛 로마 시대 세관이 있던 곳이다. 그때 쌓은 성터가 아직 남아 있다. 마침 언덕배기라서 시가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 좋다.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은 반호프스트라세(역전거리)이다. 취리히 중앙역에서 호수로 이어지는 1km도 넘는 거리인데, 백화점과 명품 상점들, 그리고 화려한 은행 건물이 많아서 천천히 걸어도 지루한 느낌이 없다. 유럽 최고의 귀금속 상점과 고급 시계점도 연달아 있다. 이곳은 취리히는 물론이고 유럽의 부자들을 단골로 거느린 호화로운 쇼핑센터다. 

    리마트강 서편의 신시가지도 인파가 넘친다. 도보로 20분가량이면 둘러볼 수 있는 아담한 구역이다. 절반쯤은 차 없는 거리지만, 트램(전차)은 자유롭게 통행한다. 이곳의 명소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프라이탁 매장이 있다. 본래 트럭의 화물 덮개와 안전벨트 같은 폐품을 이용해 가방을 만들었다고 한다. 신시가지는 컨테이너 박스를 이용한 가게도 많고, 다양한 식당 등 흥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공간이 적지 않다. 젊은이들은 이 지역을 매우 좋아한다. 

    취리히는 문화예술의 도시답다. 인구 35만의 도시인데도 박물관이 50여 개다. 그 가운데 취리히 국립박물관 인기가 높다.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스위스의 풍부한 문화유산을 한눈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 축구의 모든 것을 전시한 ‘피파(FIFA) 박물관’, 시계 역사를 소개하는 시계박물관도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다. 

    놀랍게도 취리히에는 미술관과 화랑도 200개가 넘게 있다. 취리히 미술관(Kunsthaus Zu··rich)이 그중 압권이다. 1910년 개관한 곳인데, 스위스 최고 미술관이라고 해도 좋겠다. 미술관 입구에는 청동으로 만든 조각품 ‘지옥의 문’이 있다. 로댕의 작품이다. 이곳에는 중세부터 현대까지 스위스를 대표하는 회화와 조각, 드로잉, 사진 등이 가득하다. 아울러 세계적인 거장들의 작품도 많다. 들라크루아, 렘브란트, 르누아르, 세잔, 모네, 마네, 고흐, 뭉크, 마티스, 르네 마그리트, 달리, 피카소, 칸딘스키 등의 작품을 감상하노라면 서양미술사의 흐름이 손에 잡힐 듯하다. 

    인구로만 보면 취리히는 우리나라 중소도시 수준이다. 그러나 이 도시를 깊게 들여다보면 볼수록 완벽한 명품 도시라는 확신이 생긴다.

    개혁의 도시, 출발점은 츠빙글리

    츠빙글리 동상.

    츠빙글리 동상.

    취리히 또는 스위스의 성공 요인은 ‘교육의 힘’에 있다. 이 조그만 나라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25명이나 나왔다. 그 가운데 20명은 자연과학 분야에서 나왔다. 흥미롭게도 취리히가 키운 노벨상 수상자 수는 더욱 많다. 취리히 연방공대 출신만 해도 28명이 노벨상을 받았다. 그중에는 국적이 스위스가 아니라서 스위스 통계에는 포함되지 않은 경우가 상당수다.

    알고 보면, 취리히는 근대 교육의 요람이었다. 18세기 유럽의 교육을 근본적으로 혁신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가 바로 이 도시의 아들이었다. 그는 교육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고 했다. 개혁 지향은 취리히의 전통이었다. 그 출발점에 울리히 츠빙글리가 있었다. 1519년 그는 취리히에서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인문주의자였던 그는 그리스어로 기록된 신약성서를 연구해 가톨릭교회와 불화를 겪었다.

    취리히 출신의 친구 슈테판과 함께 아인슈타인이 자주 들렀다는 카페 오데온을 찾았다. 우리는 취리히의 이름난 맥주회사 초팝(CHOPFAB)이 생산하는 필스너도 한 잔씩 주문했다. 슈테판은 츠빙글리에 관해 설명했다. 그의 취리히 생활은 그로스뮌스터 대성당을 무대로 한 것이었다. 이 성당은 12~13세기에 건립되었는데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본래 카를 대제가 창건한 교회당이 그 자리에 있었다. 참고로 대성당의 고딕식 쌍탑은 이 도시의 랜드마크에 해당한다. 츠빙글리 덕분에 이 성당이 스위스의 종교개혁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스테판은 취리히의 또 다른 큰 교회들에 대해 들려줬다. 우선 원래 수녀원이었던 프라우엔 뮌스터 교회. 그곳은 853년 독일의 루드비히왕이 귀족 수녀들을 위해 창립했다. 하지만 종교개혁 이후 도시가 신교 지역으로 바뀌자 수녀원의 관할권도 시청으로 넘어갔다. 또 성 페터 교회는 취리히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로 유럽에서 가장 큰 시계가 있다.

    츠빙글리가 성경을 깊이 연구하게 된 데는 루터의 영향이 컸다. 그는 성화(聖畵)와 성상(聖像)의 폐지를 주장했고, 십자가와 제단, 오르간도 폐지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스위스와 독일 서남부의 종교개혁운동에도 큰 영향을 줘 사람들은 그를 ‘스위스의 루터’라고 한다.

    하지만 츠빙글리는 루터와 달랐다. 1529년 그들은 성찬론(聖餐論)으로 대립했다. 루터는 성경에 나오는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피와 몸이라고 이해했다. 츠빙글리는 반대였다. 그는 이것이 하나의 상징이라고 보았다. 두 사람의 이러한 견해 차 때문일까. 결국 독일과 스위스의 종교개혁 세력은 분열됐다.

    츠빙글리는 교회를 교육공동체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려면 남녀노소가 함께 예배를 드리고, 모두 함께 교리와 성경을 배워야 했다. 시민들은 누구라도 성경을 직접 읽고 해석할 줄 알아야 했다. 츠빙글리의 개혁교회는 시민의 문해력도 향상시켰고 인권의식도 높였다.

    바로 이러한 전통을 바탕으로 훗날 페스탈로치가 등장했다. 페스탈로치는 교육과 사회가 불가분의 관계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교육을 통해서 사회를 개조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강과 호수 이용한 직물산업

    취리히의 트램.

    취리히의 트램.

    취리히를 부자도시로 만든 것은 직물업이었다. 처음에는 멀리 중국에서 들어온 비단을 독일과 프랑스로 수출하는 정도였다. 비단 장사로 돈을 번 상인들이 이 도시의 주역이었다. 그들은 왕과 봉건제후로부터 정치적 간섭을 받지 않을 권리를 산 후 자유도시(Reichsstadt)를 만들었다. 1262년 그들의 권리가 명기된 문서가 작성됐다. 이때부터 이 도시는 직물업과의 끈질긴 인연을 더욱 강화했다.

    1336년 취리히 시장 루돌프 브룬은 수공업자를 대표해 ‘길드혁명(Zunft revolution)’을 일으켰다. 이로써 도시귀족과 길드가 이 도시를 공유했다. 그러자 주변의 농촌 지역을 무대로 활동하는 귀족들이 공격해 왔다. 1351년 취리히는 그들로부터 독립을 유지하려고 스위스 연방에 가입했다.

    취리히의 진정한 주인은 수공업과 상업으로 성공한 부르주아였다. 그들은 견직물 산업 곧 비단 생산에 몰두했다. 16세기 이 도시는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견직물의 산지가 됐다. 그런데 17세기가 되자 견직물 산업이 기울기 시작했다.

    인도에서 저가의 품질 좋은 면직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의류 시장이 면직물 중심으로 재편되자 취리히는 시대 흐름을 읽고 발 빠르게 적응했다. 그들은 면직물 공업과 염색공업을 주축으로 새 출발을 서둘렀다. 취리히는 호수와 강이라는 천혜의 수자원을 적극 활용해 근대적인 공업도시가 됐다. 

    나는 슈테판과 함께 특별한 트램을 타고 시내를 여행했다. 향토요리를 제공하는 트램이었다. 하루 1~2회 운영하는데, 매번 40명의 승객이 요리를 즐긴다. 식탁에는 스위스 전통요리 ‘퐁뒤’가 나왔다. 우리는 식사를 즐기며 직물도시 취리히의 역사를 뒤돌아보았다.

    치즈에 약간의 포도주를 부은 다음 열을 가해 수프처럼 만들고, 거기에 빵 조각을 찍어 먹는 것이 퐁뒤다. “녹아서 섞이다”라는 프랑스어에서 짐작하듯, 퐁뒤는 서민적인 음식이다. 이것은 험한 알프스산맥을 넘어가던 행인들이 딱딱하게 굳은 치즈를 불에 녹여 먹던 풍습에서 시작됐다. 19세기에는 프랑스어를 쓰는 지역에서 퐁뒤가 인기였다. 이를 목격한 와인업자들과 치즈 제조업자들이 이 요리를 스위스 전역에 퍼뜨렸다고 한다. 20세기 후반에는 미국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취리히가 면직물 산업의 중심지로 발돋움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정밀 기계를 만드는 데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들도 공장의 기계를 영국에서 몽땅 수입했다. 그러나 부품 조달이 어렵게 되자 그들 특유의 기질을 발휘해 가장 정밀하고 완벽한 직물 기계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19세기 후반부터는 풍부한 수자원을 이용해 수력발전이 나날이 발전했다. 그리하여 취리히는 중화학공업의 거점 도시로 떠올랐다. 역시 유럽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 취리히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치·사회적인 변화도 일어났다. 1830년 7월 프랑스에서 이른바 7월 혁명이 일어났다. 파리를 시작으로 노르망디, 알자스, 로렌 등 선진 공업지역에서는 부르주아들이 서로 앞다퉈 귀족 제도를 비판했다. 이를 계기로 귀족들은 공적 영역을 지배하지 못하게 됐다. 19세기 중반 취리히에서도 시민의 자유를 신장하려는 ‘재생운동(Regeneration)’이 일어났다. 오랜 투쟁을 통해 이곳의 부르주아는 명실상부한 지배층이 됐다.

    20세기 전반기에 취리히는 중화학공업으로 명성을 얻었으나 그로 인해 강과 호수가 심하게 오염됐다. 1850년경의 통계를 보면, 취리히에는 총연장 160㎞의 크고 작은 하천이 있었다. 그런데 1세기 뒤에는 겨우 절반이 남았다. 콘크리트 복개공사로 가려진 절반의 하천은 본래의 모습을 잃고 망가졌다. 맑은 강물과 개울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20세기 후반이 되자 또 다른 변화 바람이 불었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신흥 공업국가들이 급성장하면서 취리히 직물공업은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명품을 생산하던 공장들도 문을 닫았다. 취리히 시민들은 이러한 변화를 역으로 이용해 생태복원사업에 착수했다. 1985년부터 도심 개울이 되살아났다. 드디어는 호수까지 완벽하게 복원됐다.

    작아도 위대한 금융도시

    취리히는 변신의 귀재였다. 면직물 공업과 중화학공업이 시들기도 전에 그들은 새로운 대체산업을 발견했다. 오늘날 이곳은 금융산업의 메카로 각광받는다. 최고의 외환시장으로서도 명성이 높다. 2017년 현재 취리히는 세계 11위의 금융 중심지로 유럽에서는 런던에 버금간다. 이 도시에는 많은 다국적 기업이 진출해 있다. 서비스산업이 경제활동의 중추라고 해도 좋다. 시민의 80%가 서비스업에 종사하니 말이다.

    취리히에서 금융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세기 중엽이었다. 바젤 출신의 은행가 알프레드 에셔가 변화를 주도했다. 1846년경부터 이곳에는 여러 은행이 등장했다. 보험회사와 같은 서비스산업도 발전했다. 20세기 후반 취리히 전통 산업이 위축되자 금융 분야는 더더욱 큰 폭으로 성장했다.

    취리히는 스위스 경제의 중심이기도 한데 세율이 낮기로 정평이 나 있다. 세계 굴지의 기업들이 정착한 배경이다. 결과적으로 시민들은 질적으로 높은 생활을 누리게 됐다. 2018년 현재 취리히 시민 5.4%가 백만장자(달러 기준)다. 모나코와 제네바에 이어 세상에서 3번째 부자 도시다.

    취리히에서 가장 큰 은행은 두 곳, 스위스연방은행(UBS)과 크레딧 스위스(Credit Suisse)다. 이 밖에도 취리히 칸톤 은행도 있고, 세계 최고의 자산관리 전문은행 율리우스 베어도 이 도시에 본점을 뒀다. 그 밖에도 100개가 넘는 외국은행이 진을 치고 있다. 취리히에는 은행에 종사하는 시민이 4만5000명이 넘는다. 스위스 전체를 통틀어 은행 종사자 절반 이상이 취리히에서 일한다.

    부자를 상대로 한 개인 고객 서비스도 활발하다. 그들이 세계 금융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나다. 전 세계 개인투자자의 총투자 금액 중 25%를 취리히의 은행에서 관리한다. 조세 수입에서 금융 분야가 차지하는 비중은 50%정도라니, 실로 엄청난 규모다.


    스위스 은행의 저력

    스위스의 통화 ‘프랑’은 달러보다 강하고 안정적이다. 국제시장에서 신뢰도가 높다. 스위스 은행 가운데 ‘프라이빗 뱅크(개인은행)’는 이 나라 금융업 특색을 가장 잘 대변한다. 그들은 고객 정보를 결코 타인에게 양도하지 않는다. 범죄 조직이나 독재자들이 스위스 은행을 선호하는 이유다. 계좌 정보 누설은 국가 기밀 누설과 똑같이 처벌되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소문의 실체를 확인할 수 없다. 

    스위스 은행은 독특하다. 그들은 은행 내부에서도 고객 이름 대신에 번호를 사용한다. 검은돈을 숨기기에 여기보다 좋은 곳은 없을 것이다. 독일 나치 간부들도 막대한 비자금을 스위스 은행에 맡겼다. 홀로코스트로 죽어간 숱한 유대인도 스위스 은행에 숨겨둔 재산을 예치했다. 그들은 모두 예금을 찾지 못한 채 죽어갔다. 천문학적인 이 돈이 몽땅 스위스에 귀속됐다는 후문이다.

    인구 35만 명의 도시 취리히에서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최고의 명품 도시 취리히는 더할 수 없이 완벽하다. 오래전 츠빙글리와 페스탈로치가 일으킨 교육 혁명 덕택에 오늘의 영광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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