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탁월한 이야기꾼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SF 소설 ‘차원 이동자(The Mover)’를 연재한다. 과거와 현재, 지구와 우주를 넘나드는 ‘차원 이동자’ 이야기로, 상상력의 새로운 지평을 선보이는 이 소설 지난 회는 신동아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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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은 성북동의 개인 박물관 전시실에서 열리고 있었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 원형으로 둘러앉아 번갈아가며 자기 체험을 소개했고 엔지니어이자 시인인 회장은 외국 지부로부터 받은 새 정보를 제공했다. ‘닥터 Q’라는 애칭으로 불린 회장은 멋진 백발을 한 오십대 중반의 남성이었다. 신입 회원으로서 인사를 마친 예림이 회장에게 질문했다.“민서 씨로부터 많은 지식을 얻게 됐어요. 덕분에 이 질문도 가능할 것 같군요. 만약 우리 운명이 이미 정해져있다면 이런 모임이나 토론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요?”
미묘한 웃음을 머금은 회장이 예림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흔한 질문이로군요. 공 기자님께서 아직 설명해드리지 않으셨나 보군요?”
회장과 눈이 마주친 민서가 어깨를 움찔하며 말없이 웃었다. 낮은 웃음소리가 회원들 사이로 미풍처럼 번져나가다 서로 약속이나 한 양 뚝 멈췄다. 회장이 중앙으로 이동하며 천천히 말했다.
“제 별명이 닥터 Q입니다. 질문하는 사람인 것이죠. 대신 확실한 대답은 못해 드립니다. 어쩌면 답은 없을 수 있으니까. 그걸 명심하십시다. 정해진 답도, 결말도 없다! 미래는 열려 있다!”
청바지에 긴 셔츠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 올리고 팔짱을 낀 회장의 옆모습은 칼 세이건을 닮아 있었다. 그가 예림 쪽으로 빙그르르 턴하며 말했다.
“맞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번 차원 세계엔 희망 같은 건 없습니다. 아마 먼 미래에 멸망당했을 겁니다. 그래도 우리 노력 여하에 따라선 임계점을 넘는 사건을 대폭 줄일 순 있지 않을까요? 불필요한 곁가지 차원이 더 열리지 않도록!”
예림 코앞까지 다가온 회장이 두 팔을 펼치며 간절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 불량 이동자들은…, 선 교수님께선 두더지라 부르셨습니다만…, 아무튼 그들은 지구의 시공 차원을 증식시키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임계점을 벗어난 사건을 일으켜 또 다른 차원계를 만들어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구성한 멸망의 각본대로 역사를 드리블해 나가겠죠. 말하자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차원계에서처럼! 그것만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 세대에서만큼은 차원이 더 열리지 않도록! 그리고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도 그렇게 노력한다면 지구의 현 차원 질서는 보존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 같은 사람들이 세대를 이어가며 저항하다보면 누가 압니까? 우리 차원의 역사가 해피엔딩으로 변경돼 적어도 한 차례의 비극만은 막을 수 있을지?”
예림이 급히 물었다.
“그럼 이미 벌어진 미래의 사건을 우리 힘으로 수정할 수 있단 말씀이신가요?”
회장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 시인입니다. 상상력을 사용해 보십시다. 물론 이론적인 가설이지만…, 전 예스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차원이 증가할 수 있다면 감소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추격자가 왜 파견됐겠습니까? 시간이 유동적인 차원 요소라고 한다면 우리가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으면 되는 겁니다!”
멍한 표정으로 숨을 멈춘 예림이 뭐라 말 하려다 멈췄다. 회장이 다시 말했다.
“비록 미미할지라도 각 시간대의 인류가 저들의 음모에 맞선다면 불필요한 차원 증식은 줄어들 것이고 어느 지점에선 멸망을 회피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겁니다. 적어도 이번 차원계의 우리 조상은 그렇게 해왔던 게 분명합니다.”
예림이 기어들어갈 듯한 목소리로 간신히 질문에 성공했다.
“그럼 과거에도 우리 같은 목격자가 존재했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습니다! 이동자가 우리 시간대만 방문했겠습니까? 인류 역사 곳곳마다 우리처럼 이동자나 추격자와 조우한 사람은 늘 있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지금 우리가 하듯 차원의 증식을 막거나 지구 멸망 시나리오를 수정하고자 분투했던 것이고.”
“예컨대 어떤 사례가 있나요?”
“그걸 탐색하고 그로부터 교훈을 얻어 우리 세대에서 실천하는 게 이 모임의 목적입니다. 우린 전사인 겁니다! 사례라…, 다른 회원들께선 다 아시는 바지만 히틀러 최후의 순간에 대해 말씀드려 볼까 합니다.”
2
1945년 베를린 지하 벙커에선 조촐한 결혼식이 열렸다. 에바 브라운과 패전한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가 그 주인공이었다. 죽기 직전에서야 히틀러란 성을 획득한 에바는 곧바로 음독자살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평생 동지였던 사내와 막 혼인한 그녀가 그렇게 죽을 이유는 없었다.결혼식 직후 지하 벙커에선 어지러운 총격전이 벌어졌다. 에바가 발사한 총알은 히틀러를 비껴 러시아 출신 여성 경호원 머리에 명중했다. 히틀러 내부를 장악하고 있던 요괴 두더지는 곧바로 이동하려다 멈췄다. 에바가 추격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평범한 지구인이었다. 경호대에 의해 결박당한 에바를 향해 히틀러가 외쳤다.
“미친 건가? 감히 신의 몸을 건드려?”
남편의 얼굴에 침을 뱉은 에바가 말했다.
“너 때문에 수없이 고뇌했어. 분명 넌 내 애인 아돌프가 아니야. 처음엔 미친 줄 알았지만 아니었지. 너는…, 그냥 악마야.”
독약 캡슐을 움켜쥔 히틀러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비웃었다.
“에바, 에바 브라운, 가엾은 것, 뭘 자각한 거지?”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부르짖었다.
“봐라! 저건 사람이 아니다. 당장 제거해야 한다.”
에바의 입에 독극물을 틀어박은 히틀러는 죽어가는 애인 모습을 느긋하게 즐겼다. 곧이어 비밀통로를 통해 지하격납고에 도착한 그는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 ‘몰살 작전’을 시행하라고 명령했다. 베를린에 매장해둔 핵폭탄을 터뜨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인류사를 바꿀 수도 있었을 이 명령은 완수되지 않았다. 명령 체계 중간에 있던 군 간부가 에바 브라운과 같은 저항 조직 요원이었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전용기는 본래 동유럽 비밀기지로 향하도록 돼 있었다. 하지만 항로가 급히 변경됐다. 미국과 거의 같은 속도로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던 독일 히틀러에겐 여전히 승산이 남아있었지만 베를린 몰살 작전이 실패한 이상 유럽 그 어느 곳도 안전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비행기 안에서 그는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소심하고 우울한 인격으로 쪼그라든 그는 숨겨둔 재산을 긁어모아 아르헨티나로 도주해버렸다.
베를린을 점령한 미군은 자신들이 핵전쟁 직전에 처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광범위한 조사가 개시돼 지하 벙커 사건을 역추적하던 미군 정보당국은 핵전쟁을 저지한 비밀스런 독일 저항 조직을 포착했으나 사건 내막은 조용히 덮었다. 한편 저항 조직을 지휘했던 러시아계 독일인 토마스 하이체크는 에바 브라운을 포섭할 정도로 민활한 자였지만 자신의 경비행기로 히틀러를 추격하다 이유 없이 폴란드에 비상착륙했다.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