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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 라면을 배격하라” 北매운닭면 얼벌벌한 맛

  • 진상명 동아일보 인턴 wlstkdaud@naver.com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외세 라면을 배격하라” 北매운닭면 얼벌벌한 맛

  • ● 한국 라면 모방해 즉석국수 잇따라 개발
    ● 2019년부터 컵라면 생산 공정도 확보
    ● 불닭볶음면 베낀 매운닭고기맛 볶음국수
    ● 평양 잘 사는 이들은 ‘신라면’에 매료돼


“외세 라면을 배격하라” 北매운닭면 얼벌벌한 맛
고등학교 다닐 적 학교 매점 라면은 꿀맛이었다. 한창 식욕이 왕성한 학생들에게 컵라면 1개는 부족했다. 너도나도 다른 종류의 라면을 섞어 꿀 조합을 탄생시켰다. 누군가 탄성을 자아내는 조합을 발견하면 입소문을 타고 조리법이 퍼져나갔다. 당시 최고로 성행한 라면이 너구리와 짜파게티를 섞은 ‘짜파구리’였다.


라면의 민족

한국인만큼 라면을 사랑하는 이들이 또 있을까. 한국인 1명이 1년에 끓여 먹는 라면이 80개에 달한다. 출시된 라면 종류는 200여 개. 유튜브를 달구는 라면 조리법만 해도 100가지가 넘는다. 

한국 라면은 세계인 입맛도 사로잡고 있다. ‘신라면’은 100여 개국으로 수출되는 ‘민간 외교관’이다. 영화 ‘기생충’ 열풍을 타고 ‘짜파구리’가 지구촌에서 인기를 얻는가 하면 유튜브에서는 ‘불닭볶음면’이 핫한 아이템이 됐다. 

북한에도 라면이 있을까. 있다면 맛이 어떨까. 분단된 지 75년이 흘렀는데도 남북의 입맛은 비슷한 모양이다. 북한에서도 라면 열풍이 분다. 



북한 사람들에게 라면 맛을 알려준 것은 한국 기업들이 개성공단 근로자들에게 나눠준 ‘신라면’이다. ‘신라면’은 평양에서 최고의 명절 선물로 꼽혔다. 북한 주민들은 ‘신라면’을 맛보고 ‘신세계’를 느꼈다. 개성공단뿐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에서 일한 북한 노동자들이 한국 라면을 북한에 알렸다. 

북한은 2015년부터 한국 라면과 유사한 형태의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평양은 “외국 라면을 배격하자”면서 생산을 독려했다. 경흥은하수식료공장, 묘향무역총회사식품공장이 ‘즉석국수’를 생산한다. 

소고기맛·검은후추맛·불고기맛·김치맛·해물맛 즉석국수가 출시됐다. 각각의 봉지라면과 자매품인 컵라면도 있다. 컵라면이 생산된 것은 지난해부터다. ‘매운닭고기맛 볶음국수’는 한국의 ‘불닭볶음면’을 봉지는 물론 맛까지 베꼈다.


“한국 라면이 최고 인기”

북한에서는 라면을 즉석국수라고 한다. 신라면의 영향으로 라면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한국 라면보다 봉지당 양은 적다. 한국 라면은 120g이 보통인데 북한 라면은 100g이 보통이다. 평양 마트에서 봉지라면 2달러, 컵라면 3달러 안팎에 팔린다. 밀수입한 한국 라면은 1봉지 5, 6달러는 줘야 사 먹을 수 있다. 

라면은 북한에서 누구나 먹는 식품이 아니라 잘사는 사람이 주로 먹는 특별한 음식이다. 서민들은 장마당에서 옥수수국수를 구입해 배부르게 먹는 것을 선호한다. 한국 라면, 중국 라면, 북한 라면 순서로 어떤 라면을 먹느냐에 따라 계층을 나눌 수도 있다. 노동당 간부 출신 탈북민의 부인인 L씨는 이렇게 말했다. 

“북한에서 한국 라면이 최고 인기예요. 그다음이 중국산이고요. 요즘에는 가격 경쟁력이 좋아 북한 라면도 잘 팔린다고 들었어요. 평양의 잘사는 집에선 한국 라면을 먹어요. 한국 라면이 비싸니 중국산이 주로 유통되다가 5년 전부터 북한산이 나왔습니다.” 

어렵게 구한 북한 라면 중 ‘소고기맛 즉석국수’부터 끓여봤다. 국물 맛은 한국 라면에 못 미친다. 밍밍하다고나 할까. 면이 풀어지는 속도도 빠르다. 국물 맛이 면에 배지 않고 따로따로인 느낌이다. 

컵라면은 선입견과 달리 맛이 꽤 괜찮다. 컵 안에 1회용 포크가 들어 있는 것도 색다르다. 한국의 ‘불닭볶음면’을 노골적으로 모방한 ‘매운닭고기맛 볶음국수’는 ‘얼벌벌한’ 맛이 통각을 자극한다.


경흥 ‘소고기맛 즉석국수’ ★★★ “맵고 짜게 만들라”
“외세 라면을 배격하라” 北매운닭면 얼벌벌한 맛
경흥은하수식료공장이 생산한 ‘소고기맛 즉석국수’의 첫인상은 ‘조악하다’는 표현이 더없이 적합했다. 사다리꼴 형태에 가까운 면을 꺼내니 부스러기가 떨어져 힘없이 바닥을 튕겼고, 건조된 면의 배열은 불균질했다. 크기 또한 한눈에 봐도 한국 라면보다 왜소했다. 

‘양념감’이라고 불리는 스프에선 흡사 어린 시절 문방구에서 팔던 ‘라면땅’ 스프 향이 났다. 끓는 물에 ‘양념감’을 넣자 후끈한 김을 타고 낯선 향이 피어올랐다. 매콤하게 코를 찌르는 한국 라면 향과 달리 중국 향신료 영향을 받은 듯한 느끼한 향이 났다. 면은 마치 컵라면을 냄비에 끓인 것처럼 힘없이 풀어졌다. 국물은 익숙한 주황빛보단 갈색에 가까웠다. 맛은 밍밍하고 느끼했다. 

한국 최초 인스턴트 라면인 ‘삼양라면’은 1963년 출시됐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맛을 본 후 “고춧가루와 양념을 더 넣어 맵고 짜게 만들라”고 조언한 것으로 전해진다. 초기 한국 라면 맛이 경흥은하수식료공장이 내놓은 ‘소고기맛 즉석국수’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소고기맛 즉석국수’가 한 단계 더 올라서려면 ‘맵고 짠’ 자극적인 맛을 탑재해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북한 사람들이 왜 ‘신라면’에 그토록 크게 열광하는지 이해할 찰나, 북녘의 진정한 ‘맵고 짠’ 맛을 보여주겠다는 듯 불을 내뿜는 닭 캐릭터가 눈에 띄었다. 북한표 ‘불닭볶음면’이다.


경흥 ‘매운닭고기맛 볶음국수’ ★★★★ “북한표 빨간 맛!”
“외세 라면을 배격하라” 北매운닭면 얼벌벌한 맛
‘불닭볶음면’을 빼닮은 겉봉지, ‘불닭’을 연상케 하는 제품명, 별첨한 참깨와 김 가루…. 과하다 싶을 정도의 모방이 다소 괘씸하면서도 ‘북한표 빨간 맛’에 대한 호기심이 샘솟았다. 

‘북한표 불닭볶음면’의 면발 굵기와 조리법은 원조와 달랐다. 북한 제품은 오동통한 면발의 ‘불닭볶음면’보다는 ‘팔도 비빔면’의 그것과 유사했다. 4큰술 정도의 물을 남기고 볶는 ‘불닭볶음면’과 달리 물을 말끔히 버리라는 ‘매운닭고기맛 볶음국수’. 이러한 차이점 때문인지 완성된 음식 모습이 더 자극적이고 거칠게 느껴졌다. 

북한에선 맵고 얼큰한 맛을 ‘얼벌벌하다’라고 표현한다. ‘매운닭고기맛 볶음국수’는 ‘얼벌벌함’ 그 자체였다. 도대체 어떤 재료를 썼는지 궁금할 만큼 맛은 미각의 영역보다는 통각의 영역에 가까웠다. ‘얼벌벌한 맛’이 혀를 자극할 때 코끝으로 묘하고 낯선 고추 향이 감돌았다. 매운맛이 온몸의 땀구멍을 열었다. 국물이 다시 먹고 싶어졌다.


묘향 ‘김치맛 즉석국수’ / 경흥 ‘검은후추맛 즉석국수’ ★★★★☆ “북한의 신상, 컵라면”
“외세 라면을 배격하라” 北매운닭면 얼벌벌한 맛
북한 컵라면의 역사는 매우 짧다. 지금과 같은 생산 공정이 확보되고 안정된 지 고작해야 1년 정도다. 이른바 ‘북한판 신상’이다. 북한 컵라면은 봉지라면보다 가격도 비싸고 용량도 20g 더 많다. 구성품에도 세심한 신경을 쓴 듯하다. 한국에서 최근 출시된 신제품 컵라면 추세를 의식한 탓인지 분말스프와 건더기스프 외 별첨스프가 추가돼 있다. 컵 안에 포크가 들어 있는 것도 눈에 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묘향무역총회사식품공장의 ‘김치맛 즉석국수’와 경흥은하수식료공장의 ‘검은후추맛 즉석국수’는 북한 라면의 발전 가능성이 담긴 집약체라고 할 수 있겠다. 수출 상품으로서도 큰 결함이 없었다. 

한국의 ‘김치사발면’을 연상케 한 ‘김치맛 즉석국수’는 쫄깃하고 통통한 식감의 면발과 매콤하고 깊은 국물로 입맛을 매료했다. 흰 국물의 ‘검은후추맛 즉석국수’는 한국 라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중독성이 있는 맛이었다. 면발의 식감이 비교적 떨어지는 컵라면에서 봉지라면에 비견할 만한 식감을 구현한 게 특히 인상적이었다. 한국 고등학교 매점에서 판매해도 잘 팔릴 것 같다.


라면의 역설

“외세 라면을 배격하라” 北매운닭면 얼벌벌한 맛
북한 라면 봉지를 보면서 ‘뉴트로(New+Retro)’라는 낱말이 떠올랐다. 봉지의 익숙한 한글을 보면서 가까운 곳에서 왔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맛과 향은 먼 곳에서 온 것처럼 낯설었다. 난생처음 접한 음식이면서 언제 다시 맛볼 수 있을지조차 불확실한 음식이었다. 이 같은 역설은 북한과의 거리감을 은유하는 듯했다. 후끈한 김을 내며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다가도 찰나의 찬 기운에 툭 끊어져 버리는 면발처럼 북한은 가까이 있으면서도 좁혀지긴 어려운 먼 사이로 남아 있다. 언젠가 북한 라면이 더욱 발전해 세계로 수출된다면 ‘짜파구리’ ‘불닭볶음면’ 같은 열풍을 일으킬 수도 있지 않을까. 언제 어디서든 북한 라면과 반갑게 재회할 준비를 하고 그날을 기다리기로 했다.




신동아 2020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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