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구 30% 여성 공천? 열어보니 10% 안팎
원내 여성 비율 18대 13.7% → 19대 15.7% → 20대 17.0%
서로 경쟁하는 여성 후보, 다수 등원 난망
[뉴스1]
이해찬 더불어민주당(민주당) 대표가 지난해 7월 ‘전국 여성당원 여름 정치학교’에 참석해 한 말이다. 김형오 전 미래통합당(통합당) 공천관리위원장도 이번 총선에서 여성과 청년 공천에 “핵심 방점을 찍겠다”고 선언했다. 1월 17일 21대 총선 공천의 기본 방침을 밝히는 자리에서다.
양당이 공천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는 3월 중순, 이 약속들은 과연 지켜졌을까. 답부터 말하자면 ‘천만의 말씀’이다. 민주당은 3월 14일 현재 전체 253개 지역구 가운데 239곳 공천을 확정했다. 이 중 여성 후보는 32명에 불과하다. 여성 비율 30%는커녕 13%를 간신히 넘긴 수준이다.
통합당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같은 날 기준 158개 지역구 후보를 발표한 상황에 여성 비율은 10%를 다소 넘는다. 김미균 시지온 대표를 강남병에 전략 공천했다 하루 만에 취소하고, 여성 후보를 단수 공천했던 인천 연수을(민현주)과 대구 달서갑(이두아)을 경선 대상으로 변경하는 등 여러 혼선이 빚어졌다. 불과 한 달여 전, 공천 책임자가 나서서 여성 공천 확대를 공언한 것에 비춰보면 초라한 성적표다.
공직선거법 제47조는 정당의 후보자 추천에 대해 규정한다. 제3항의 골자는 “비례대표국회의원선거에 후보자를 추천할 때 100분의 50 이상을 여성으로 추천해야 한다”이다. 반면 제4항은 “지역구국회의원선거에 후보자를 추천할 때 전국지역구총수의 100분의 30 이상을 여성으로 추천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로 돼 있다. 3항 ‘추천해야 한다’와 4항 ‘추천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가 갖는 법률적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정당들은 이 조항을 악용해 지역구 후보를 추천할 때 ‘30%’ 권고 규정을 지키지 않고 있다.
유권자 절반은 여성인데?!
미래통합당 여성당원 및 중앙여성위원회 위원들이 2월 1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여성 지역구 공천 30% 이행을 촉구하고 있다(왼쪽).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2019년 7월 22일 경기 양평군에서 열린 전국 여성당원 여름 정치학교에 참석해 “21대 총선 여성 30% 공천”을 약속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뉴스1]
그러나 18, 19, 20대 국회에서 여성의원 증가율은 미미한 수준에 그쳤다. 18대 41명(13.7%), 19대 47명(15.7%), 20대 51명(17.0%)으로 수가 조금씩 늘었을 뿐이다. 이 기간 총선 출마자 가운데 여성 비율은 18대 11.86%에서 19대 6.98%, 20대 10.49%로 오락가락했다.
해외 상황은 다르다. 1월 23일 국회입법조사처가 발간한 ‘여성 정치대표성 강화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여성의원 비율은 2017년 현재 평균 28.8%다. 우리나라보다 10%포인트 이상 높다. 조사 대상 36개 회원국 가운데 여성의원 비율이 우리보다 낮은 나라는 5개국에 불과했다. 전문가들은 여성 유권자의 뜻이 정치에 반영되게 하려면 우리나라도 여성의원 비율을 대폭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20대 국회에서 김상희·남인순·박영선·유승희 의원 등이 ‘지역구 30% 여성 공천’ 의무화를 골자로 하는 선거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박영선 의원은 모든 선출직 선거에 여성 후보를 50% 이상 공천해야 한다는 내용의 ‘남녀동수법’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입법은 이뤄지지 않았고, 지역구 공천 비율을 여전히 ‘권고’ 사항으로 남겨둔 채 21대 총선을 치르게 됐다.
선거전 뛰어든 여성 후보들
원혜영 민주당 공천관리위원장은 2월 말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여성·청년 공천이 너무 적다”는 비판을 듣고 “책임을 느끼는데 기본 여건이 받쳐주지 않으니 답답하다”고 답했다. 반면 지역구 출마를 준비하다 포기한 한 여성은 “평소 여성 정치인을 키우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다가 선거철 닥쳐서 ‘역량’과 ‘지명도’ ‘본선 경쟁력’을 모두 갖춘 후보를 찾으니 눈에 잘 안 띄는 것 아니겠나”라고 반박했다. “일단 기회를 줘야 경쟁력이 생길 텐데 알아서 커오라고 하니 답답할 뿐”이라는 게 그의 의견이다.특히 이번 선거는 문재인 정부 집권 하반기를 앞두고 여야가 ‘강 대 강’ 진용을 구축하려 할 때라 여성 정치인이 공천문을 통과하기가 더 어려웠다는 후문이다. 결국 민주당과 통합당은 양쪽 모두 법이 권고하는 비율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으로 여성 후보를 공천했다. 민주당의 경우 추미애(5선·법무부 장관), 박영선(4선·중소벤처기업부 장관), 김현미(3선·국토교통부 장관), 유은혜(재선·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등 다선 의원 상당수가 장관직 수행을 위해 행정부에 남으면서 지명도 있는 여성 후보가 크게 줄었다.
추미애 장관 지역구인 서울 광진을엔 청와대 대변인 출신 고민정 후보, 유은혜 장관이 재선을 한 경기 고양병에는 여성 변호사 홍정민 씨가 각각 전략 공천됐다. 반면 박영선 장관 지역구인 서울 구로을(윤건영 전 청와대 국정상황실장)과 김현미 장관이 의정생활을 한 경기 고양정(이용우 전 카카오뱅크 대표)에는 남성 후보가 새로 터를 잡게 됐다.
이외에 김상희(경기 부천병), 김영주(서울 영등포갑), 남인순(서울 송파병), 서영교(서울 중랑갑), 인재근(서울 도봉갑), 전혜숙(서울 광진갑), 진선미(서울 강동갑), 전현희(서울 강남을), 한정애(서울 강서병) 등 20대 의원들이 다시 지역구 선거에 도전한다. 비례대표 중에는 박경미(서울 서초을), 이재정(경기 안양동안을) 의원이 지역구에 공천됐다. ‘사법농단을 고발한 법관’으로 민주당 영입 당시 화제를 모은 이수진 전 판사는 서울 동작을에서 나경원 의원과 승부를 겨루게 됐다.
여성 공천 확대 위한 제도 개선 요구
통합당에서는 판사 후배와 지역구에서 격돌하는 나경원(서울 동작을) 의원을 비롯해 이언주(부산 남을), 전희경(인천 동·미추홀갑), 김현아(경기 고양정), 신보라(경기 파주갑), 김수민(충북 청주청원) 등 다수 현역 의원이 출마 지역을 확정했다. 18대 의원을 지낸 정미경(경기 수원을), 이명박 정부 청와대 대변인 출신 김은혜(경기 분당갑) 등도 공천을 받았다.이 중 몇 명이 원내에 진출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서울 동작을 선거구뿐 아니라 서울 강동갑(진선미 vs 이수희), 서울 중랑갑(서영교 vs 김삼화), 경기 수원을(백혜련 vs 정미경) 등 여러 선거구에서 여성 후보가 서로 맞선다. 이에 따라 원내 여성 비율은 이번에도 크게 높아지기 어려울 전망이다. 여성계 등을 중심으로 22대 국회부터는 더 많은 여성이 선거에 참여할 수 있도록 공천 할당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단 이 과정에서 일각의 반발이 생길 수도 있다. 이정진 정치행정조사실 정치의회팀 입법조사관은 “공천 시 남녀동수제를 도입할 경우 이를 의무 조항으로 하되 위반 시 제재하기보다 정당국고보조금 확대 등의 인센티브와 연계해 여성 후보 추천을 유도하는 방향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